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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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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정

최석정(崔錫鼎)은 조선후기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이다.

개요[편집]

  • 최석정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이며 최명길의 손자이다. 1697년 우의정에, 1699년 좌의정과 홍문관 대제학을 겸했다. 《국조보감》의 속편과 《여지승람》증보 편찬을 지도했다. 본관 전주(全州). 자 여시(汝時) ·여화(汝和). 호 존와(存窩) ·명곡(明谷). 시호 문정(文貞). 초명 석만(錫萬). 최명길(崔鳴吉)의 손자.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의 문인. 1671년(현종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친 뒤에 이조참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이조판서를 지냈다. 1697년(숙종 23) 우의정에, 1699년 좌의정과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을 겸직,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속편과 《여지승람(輿地勝覽)》 증보 ·편찬을 지도했다. 1701년(숙종 27) 영의정으로 장희빈(張禧嬪)의 처형을 반대하다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소론(少論)의 영수로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도 8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시 배척받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켰다.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 《명곡집 (明谷集)》이 있다.[1]
  • 최석정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 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시인인 최수철(崔守哲)은 그의 종손(從孫: 형이나 아우의 손자)이다. 서인의 일원이었으나 김익훈, 김석주의 역모 날조 사건에 반대하여 서인의 분당 시 소론이 되었다. 또한 1694년부터 제한적이지만 남인을 등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1680년(숙종 6년) 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산학원본(算學原本)》은 양휘산법과 산학계몽(算學啓蒙)의 계산법을 설명한 책으로 조선 시대 박율(朴繘)이 편찬하였으며 그의 아들 박두세(朴斗世)가 1700년에 간행하였다. 최고위 관료였던 최석정이 산학원본의 서문을 써준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데, 최석정이 젊은 시절부터 수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2]
  • 최석정은 조선 숙종 시기 소론의 영수였던 정치가, 유학자, 문장가, 음운학자, 수학자.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조부 최명길처럼 명분에만 집착하지 않는 현실 정치가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토지, 세금, 군역 등 백성의 삶을 신경 쓰는 것 외에도 인재 등용을 위해 문벌, 지역, 서얼 차별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노론과도 함께 가고자 하였다. 33세이던 1678년 홍문관 교리 시절 경세정운(經世正韻)을 저술하였고, 이후에도 양명학의 거장 정제두와 토론하며 60세인 1705년까지도 지속적인 보완 노력을 하였다. 주역, 특히 소옹의 상수학을 응용하여 훈민정음을 설명하였다. 세종훈민정음을 극찬하였으며, 조선 문명을 중화 문명을 하나의 시야에서 포착하려 했다. 조선 후기 정음학(正音學)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를 받는다. 1700년 박율이 편찬한 산학원본(算學原本)의 서문을 작성했다. 말년에 정치에서 물러나 은거할 때 구수략을 저술했다. 갑을병정 4편으로 구성되었고, 갑을병 3편은 청나라를 통해 입수된 서양 수학을 정리하였고, 정은 본인이 찾아낸 마방진과 라틴 방진을 기술하였다. 명곡집(明谷集)에 실려 있는 이세구(李世龜)와 교환한 24편의 서신 기록이 남아있다. 최석정 초상은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중이며 우리나라 보물 1936호이다. 수학자로서의 업적으로 과기부와 대한수학회가 '올해의 최석정상'을 2021년부터 수여하고 있다.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최명길, 최석정, 최창대의 묘가 함께 있다. 최석정의 묘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 169호이다.[3]
  • 최석정은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시(汝時) · 여화(汝和), 호는 존와(存窩) · 명곡(明谷). 최기남(崔起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고, 아버지는 한성좌윤 완릉군(完陵君) 최후량(崔後亮)이다. 어머니는 안헌징(安獻徵)의 딸이다. 응교 최후상(崔後尙)에게 입양되었다. 9세에 이미 『시경』과 『서경』을 암송했고, 12세에 『주역』을 도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신동으로 인정받았다. 남구만(南九萬) · 이경억(李慶億)의 문인이고, 박세채(朴世采)와 종유(從遊)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7세에 감시(監試) 초시에 장원을 했고,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장원했으며 동시에 생원시도 합격하였다. 167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림회천(翰林會薦)에 뽑혀 사관으로서 활동하다가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원이 되었고, 응제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1715년 기사(耆社: 기로소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고, 이해 사망하였다. 청주 대율리(大栗里)에 장례 지냈으며, 뒤에 숙종묘에 배향되었다. 성격이 겉으로는 화평하나 안으로는 굳건했으며 염려나 불만의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직업 관료의 성격이 강해 의리 ·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또한 당쟁의 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힘썼던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야승(野乘)』을 집대성하려고 노력하여 찬수청을 설치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편저에 『전록통고(典錄通考)』가 있고, 저서로 『예기유편』과 『명곡집(明谷集)』 36권이 현재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4]

최석정 초상 및 함[편집]

  • 최석정 초상 및 함(崔錫鼎 肖像 및 函)은 조선 후기 문신이었던 최석정의 초상화와 그것을 보관한 함이다. 2017년 5월 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초상화는 비단 위에 채색을 가했으며 크기는 가로 90㎝, 세로 173㎝이다. 초상화의 함 크기는 가로 111㎝, 세로 18㎝, 높이 17.5㎝이다. 최석정은 윤증(尹拯), 남구만(南九萬) 등과 함께 소론(少論)의 영수로 활약하였으며 홍문관 대제학,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까지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다. 특히 영의정 자리는 수차례 반복해서 지냈으며 수학(數學)에도 조예가 깊어 정계 및 학계에 두루 기여한 바가 크다.
  • 본 유물은 최석정이 조선 문신의 관복인 녹색 단령(團領)을 입고 오사모(烏紗帽)를 쓴 차림으로 교의(交椅)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이다. 최석정은 자세를 오른쪽으로 틀어 왼쪽 얼굴을 보이고 있으며 두 손은 소매 속에 넣고 가운데에 모았다. 교의 위에는 표범 가죽이 걸쳐져 있으며 의자 아래로 화문석이 깔려 있다. 가슴에는 쌍학 모양이 있는 흉배(胸背)가 있으며 허리에는 정1품 관료에게만 허락된 허리띠인 서대(犀帶)를 착용하였다. 의자 앞에 놓인 족좌대(足座臺) 위에는 흑피혜(黑皮鞋)를 신은 두 발을 올렸다. 최석정의 얼굴은 선으로 이목구비의 윤곽을 그린 후에 선묘에 붙여가며 미세한 색감을 가미하여 완성하였다. 얼굴의 묘사에서는 미묘한 음영법을 잘 활용하여 입체감을 확보하였다. 18세기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최석정 초상화이다. 초상화 주인공의 활동이 확인될 뿐 아니라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2017년 5월 8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최석정의 생애[편집]

  • 최석정은 영의정을 지냈던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의 손자이다. 최명길은 조선시대 병자호란 당시 주화론을 주장한 주화파의 대표로서 후금과 화친 정책을 펼치려 했으나 실패한 인물이다. 여러 요직을 거쳤고, 부제학, 대사성, 도승지를 하고 홍문관제학, 이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 대제학을 하다가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서 1701년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1694년 이후 남인에 대한 제한적인 서용 정책을 펼쳤다. 1701년 10월 희빈 장씨가 사사된 직후, 불안감과 신분의 위협을 느낀 세자 균(훗날의 경종)이 눈물을 흘리며 도와줄 것을 청하자, 최석정, 남구만 등은 어찌 신들이 군부의 은혜를 잊겠느냐며 세자의 손을 잡아주었다. 반면 노론 신하들은 세자 균을 싸늘하게 외면했다 한다.
  • 1710년 영의정을 그만둔 이후 1710년~1715년에 《구수략》을 지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여기에는 기존에 전해진 수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내용과 전혀 새로운 독창적 내용이 함께 수록 되어있다. 특히 《구수략》의 마지막 권에는 마방진, 직교 라틴 방진, 그리고 지수귀문도등 사각형이나 육각형 모양의 수의 구성도가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최석정의 탁월한 수학적 직관력과 수학 이론의 독창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최석정은 국립과천과학관의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명곡집[편집]

  • 명곡집(明谷集)은 조선 후기 숙종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최석정(崔錫鼎)의 시문집이다. 목판본. 34권 17책. 제자인 조태억(趙泰億) 등이 1721년(경종 1)에 편집, 간행하였다. 권6까지의 시는 형태에 따라 분류하던 다른 문집과는 달리 저자의 생애를 31시기로 나누어 명칭을 붙이고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들끼리 모아놓았다. 약간의 부(賦)는 권7에 따로 분류되었다. 이하 권13까지는 유교 경전이나 선배 학자들의 저술에 대한 서문으로부터 제문 ·편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글들을 수록하였다. 이 중 잡저에는 유교 이념 및 철학을 주제로 한 것과 다른 사람의 자(字)의 의미를 서술한 것들이 있고, 편지는 서인(西人), 특히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 등 소론(少論)의 주요 인사들과 주고받은 것들이 많다. 권20까지는 상소와 차자(箚子),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을 밝힌 수의(收議) 등이 있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의 비명 ·행장 ·시장(諡狀) 등이다. 저자는 서인 및 그 뒤 소론의 중심인물인 동시에 영의정을 역임한 고위 관인이었으므로 당시 정치와 사상의 깊은 내용들이 담겨 있다. 또한 최명길(崔鳴吉)의 손자로서 구체적인 현실에 더욱 관심을 두는 사상을 이어받았으며,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소수의견이었던 주화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도 하였다.

서계유사[편집]

  • 서계유사(西溪遺事)는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박세당(朴世堂)·최석정(崔錫鼎)의 유사(遺事) 등을 수록한 책. 필사본, 1책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세당·최석정의 유사 외에 이문흥(李文興)의 《서곽잡록(西郭雜錄)》, 김명시(金命時)의 《무송소설(撫松小說)》 등이 수록되어 있다. 편자(編者)는 김응남(金應南)으로, 위의 네 사람에 대하여 보고 들은 언행(言行)·일화(逸話) 등을 기록한 것이다. 이 사본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수택본이다.

경세정운[편집]

  • 경세정운(經世正韻)은 최석정(崔錫鼎)의 훈민정음 연구서이다.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 도서관 소장. 《경세훈민정음도설(經世訓民正音圖說)》이라고도 한다. 일종의 운도(韻圖)로서, 1678년(숙종 4) 건곤(乾坤) 2권으로 완성되었으나 간행되지 못하였다. 훈민정음 체계를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성음창화도(皇極經世聲音唱和圖)》에 비추어 해석하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경세정운도를 작성한 것이다. 구성은 경세정운 서설, 운섭도(韻攝圖), 경세정운 오찬(五贊), 성음편, 군서절충(群書折衷)으로 되어 있으며, 서설 부분은 훈민정음의 원리와 체계를 기술한 것이긴 하나, 이것은 제2부에서 《황극경세성음창화도》를 모방하여 작성한 운섭도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 이론에 따라 운섭도에서 한자음을 도표로 보여주었다. 경세정운 오찬 이하의 기술은 중국 음운학에 관한 것으로서 중국의 여러 운서 및 운도에 관하여 언급하고 저자의 비판적인 의견도 제시하였다. 이 책은 서설 부분에서 '어제언문이십팔자 즉열숙지상(御製諺文二十八字 卽列宿之象)'이라 해서 열숙상형설을 제시하고, 초성 17자는 5행의 순서, 중성 11자는 태극 ·음양 ·8괘(八卦)를 바탕으로 하였다고 한 점과, 음의 상관적 대립과 상관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음운을 기술한 점 등이 특징이다. 1968년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간행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최석정(崔錫鼎,1646~1715)〉, 《두산백과》
  2. 최석정〉, 《위키백과》
  3. 최석정〉, 《나무위키》
  4. 최석정 (崔錫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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