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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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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충지

요충지(要衝地)란 교통이나 상업, 군사적인 면에서 아주 중요지역을 말한다.[1]

개요

한반도대륙세력해양세력이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먼저, 반도라는 지정학적 정체성이 우리의 자기 의식을 제한한다. 반도에 국한함으로써우리 스스로 대륙세력으로 보지 않으며 한반도를 넘어선 지역에서 흥기한 우리의 역사적 세력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한반도 전체를 동북아시아 지중해의 한가운데 위치한 대륙의 연해(沿海) 지역으로 봄으로써 반도 의식에 내포된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한반도가 중국과 일본이 상대 진영을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가 될 위험이 있는 것은사실이지만, 그것을 과도하게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 대한 한반도로부터의 위협은 여러 안보 위협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한반도 중심 통념은 중국이나 일본에 대한 침략의 교두보로서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과장하는 위험이 있다.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을 잇는 가교라는 생각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한반도가 동북아시아 대륙과 해양을 잇는 가교가 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며, 한반도를 우회하는길이 많이 있다.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가교라는 반도성보다는, 동북아시아지중해를 관통하는 연해지대라는 연해성에서 더 많이 찾아야 한다.[2]

역사

사군은  조선 세종 때 서북 방면의 여진족을 막기 위해 압록강 상류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충지다. 사군은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의 네 군을 말한다. 압록강 방면의 개척은 고려 말에 상당히 진척을 보였다. 그 결과 강 하류인 서북 방면은 거의 다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으며, 강 상류인 동북 방면으로도 공민왕 때에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 1391년(공양왕 3)에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가 각각 설치되었다. 그러나 강계만호부의 동쪽과 갑주만호부 서쪽의 압록강 상류 남쪽 지역은 여전히 여진족의 활동 무대가 되어 있었다.조선시대에 이 지역의 개척은 크게 진척되어 1401년(태종 3)에 강계만호부를 강계부(江界府)로 승격시켰다. 갑주는 1393년(태조 2)에 동북면안무사(東北面安撫使) 이지란(李之蘭)의 축성(築城) 이후 1413년에 갑산군(甲山郡)으로 개칭되었다. 1416년에는 갑산 관하의 일부를 분리해 현 중강진(中江鎭) 부근에 여연군을 설치하였다. 다음 해에는 이를 함길도(咸吉道)로부터 평안도에 이관(移管)하는 동시에 거리가 가까운 강계도호부에 소속시켰다. 이로써 갑산 서쪽의 압록강 남안(南岸)이 모두 조선의 영역으로 되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 여진족의 침입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1432년(세종 14) 건주위(建州衛) 추장 이만주(李滿住)의 침입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이를 계기로 1433년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김효성(金孝誠)을 도진무(都鎭撫)로 임명해 황해·평안도의 병사 1만5000여명으로써 이를 정벌하였던 것이다.이 때의 경험으로 “이 지방은 여연·강계와도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해 위급할 때는 대비하기 어렵다.”고 하여 그 해에 양쪽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자작리(慈作里)에 성(城)을 쌓아 이에 자성군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에 여연의 남촌(南村), 강계 북촌의 민호(民戶)를 떼어붙이고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자성군의 설치로 여연·강계 사이의 연락은 확실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압록강 연안의 방비는 충분하지가 못했고, 이 방면에 대한 여진족의 침입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조명간(趙明干)은 위치상 적의 습격을 받기 쉽고 우예보(虞芮堡)·하무로보(下無路堡)와도 멀리 떨어져 있어 지키기가 곤란하였다. 그래서 이곳의 군사를 우예·하무로보로 철수시키자는 논의가 일어났다.그러나 국토 경영에 적극적이었던 세종은 1437년 평안도도절제사 이천(李蕆)에게 병사 8,000명으로 재차 여진족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로써 압록강 너머의 오라산성(兀刺山城)·오미부(吾彌部) 등 그들의 근거지를 소탕했으며, 1440년에 여연군 동쪽 압록강 남안에 무창현을 설치하였다가, 1442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1443년에는 여연·자성의 중간 지점인 우예보에 우예군을 설치해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이 결과 여연·자성·무창·우예의 사군 설치를 보게 되어 동북의 육진(六鎭)과 더불어 우리 나라 북방 경계는 두만강·압록강 상류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한편, 갑산군 소속의 산수보(山水堡)는 적로(賊路)의 요충이었다. 그러나 갑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1446년에 이곳에 삼수군을 설치, 무창군과 갑산군과의 연락을 확실하게 하였다.그러나 북계(北界) 개척 사업은 그 유지가 용이하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점차 사군을 철폐하자는 논의가 제기되더니 문종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이 문제가 크게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1455년(단종 3)에 이르러 네 군 중 여연·무창·우예의 세 군을 폐하고 주민을 강계부(江界府)와 구성부(龜城府)로 각각 옮겼다. 1459년(세조 5)에는 자성군마저 폐하고 주민을 강계로 옮기니 사군은 철폐되었다. 그 뒤 이 지방은 오랫동안 ‘폐사군(廢四郡)’이라 불리며 주민의 거주가 금지되었다.그러나 사군의 철폐는 영토의 포기가 아니라 군사상 국경방어선의 임시적인 후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홍양호(洪良浩)○정약용(丁若鏞) 등은 군사 방어의 거점으로 이 지역을 주목해 재개발을 건의한 바 있다. 그 결과로 19세기 후반에 이 일대에 진보(鎭堡)가 다시 설치될 수 있었다. [3]

유적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위치한 명월진성(제주도기념물 제29호)은 비양도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지어졌다. 왜선이 비양도 주변에 정박해 민가에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해 1510년(중종 5년) 목사 장림이 이곳에 목성을 쌓아 진을 구축했다. 명월진에는 만호 1명, 치총 4명, 수솔군 82명, 성정군 330명, 유직군 99명, 진리 22명, 서기 30명 등 총 568명이 있었고 2봉수(도내봉수, 만조봉수)와 7연대(귀덕연대, 우지연대, 죽도연대, 마두연대, 배령연대, 대포연대, 두모연대)를 관할했다. 명월진의 책임자인 만호는 조선 후기 무관직(종4품) 벼슬로, 명월진성 남문 앞에는 112명 만호들의 재직기관 등을 적은 만호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진성 북쪽 만호기념비 옆에는 오래된 만호공덕비 5기가 있다. 성내에는 수군만호(현 제주방어사령관에 해당되는 직위)가 주둔했고 활터가 네 곳 있었다.

절해고도 제주섬에는 조선시대 286명의 목사가 부임했다. 제주는 군사상 요충지이기에 주로 무신이 파견됐으나 더러 문신이 파견되기도 했다. 이경록(1543-1599) 목사는 성웅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두 사람 모두 서른 살을 넘긴 나이인 1576년(선조 9년) 나란히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이경록은 40대 중반인 1587년(선조 20년) 종3품인 경흥부사가 됐다. 경흥은 함경도 두만강 하류 지역으로 여진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종이 김종서를 시켜 설치한 6진 중 한곳이다. 그의 이전 직책이 종6품 현감인 것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경록은 이순신보다 1년가량 앞서 만호로 부임했다. 만호란 요충지의 방비를 전담하는 무장으로 종4품 무관직이었다. 이경록은 여진족과 맞선 국경지대 고을의 수령으로, 이순신은 그 일대의 방비를 맡은 무장으로 함께 근무했다. 나라를 운영하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평을 듣는 선조이지만, 곧 일어날 임진왜란 때 두 사람이 쌓은 공적을 생각하면 이 인사만은 최선의 선택으로 평가된다. 이경록은 나주부사 재직시 임진왜란이 벌어져 왕이 피난하는 상황에서 의병장 김천일과 함께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선조는 이경록을 1592년 7월 제주목사로 임명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관리들은 제주를 이매(魑魅) 즉 사람을 해치는 도깨비와 괴물이 사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592년 7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경록은 제주의 방어시설들을 정비하는 한편, 제주에 있는 군사들을 훈련시켜 바다를 건너가 왜적과 싸울 계획을 세웠다.

이경록은 전쟁이 끝난 후인 1599년 초 제주에서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7년 여를 재임함으로써 최장기간 제주목사 직을 수행하는 기록을 남겼다. 선조는 절해고도에서 장기간 근무토록 한 점이 미안했던지 1596년 다음과 같이 하명했다. ‘제주목사 이경록은 이러한 격변을 당한 때에 해외고도(海外孤島)를 수년 동안 홀로 지켰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듣건대 늙은 아비가 있다고 하니, 승진 제수해 그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이후 이경록은 제주성 바깥에 도랑을 파고 성 위에 제승정(制勝亭)을 짓는 등 방어시설을 정비했고, 나무로 만든 성인 명월진성을 돌로 쌓아 개축했다. 제주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성산포에 산성을 쌓던 중 임진왜란이 끝나는 1599년 초 병으로 사망했다. 이처럼 이경록 목사는 여느 목사들의 재임기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오랫동안 제주목사 직을 수행했고, 마지막까지 제주의 방어시설을 돌보다 병사했다.[4]

세계 물류의 전략적 요충지 부산

앞으로 2030년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름길인 북극항로가 개척되면 부산에서 유럽까지의 거리는 기존 거리보다 40%, 북미까지는 30%가 단축될 전망이다. 또한 부산은 우리나라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철도인 실크로드익스프레스(SRX)가 실현될 핵심 출발지로, 동북아 물류중심도시에서 세계 물류의 중심지로 거듭날 것이다. 세계 5위의 컨테이너 항만이자 한국 출입 컨테이너 물동량의 75%를 처리하는 국내 최대 항만인 부산항은, 연간 물동량 처리량이 1,700만TEU 이상인 슈퍼항만이자 전 세계 100여개국 500개 항만과 교류하는 동북아 물류 중심기지다. 2020년까지 부산신항에 45선석을 개장하고 배후부지에 최첨단 시스템을 구축한 물류센터등을 조성하여 리드타임을 최소화함으로써 부산은 세계적인 항구, 동북아시아의 물류 허브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게 될 것이다.[5]

동영상

각주

  1. 요충지〉, 《네이버 국어사전》
  2. 전략적 요충지 통념 비판〉, 《한국학술지인용색인》
  3. 사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지형 특성〉, 《제주일보》, 2020-10-14
  5. 세계 물류의 전략적 요충지〉, 《부산 투자환경》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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