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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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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치
마카오 위치

코타이(중국어: 路氹城 lù dàng chéng)는 중국 마카오 타이파섬콜로아느섬 사이에 있는 위치해 있는 매립지다. [1][2][3]

개요

코타이의 면적은 6.0km²이다. 코타이는 마카오의 콜로안(Coloane)과 타이파(Taipa)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두 섬의 이니셜로 형성되어 있다. 포르투갈 이름 Cotai는 "코타이"는 '콜로아느'(Coloane)와 '타이파'(Taipa)의 합성어이다. 코타이는 원래 독립된 두 섬인 타이파와 콜로안을 하나로 연결해 새로운 해양 도시를 형성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이 400년 넘게 마카오를 강점하면서, 방대한 규모의 토착 포르투갈인 집단이 형성되었고, 이는 폭넓은 중포 문화 융합의 장을 만들어냈다. 마카오 토착 포르투갈인들은 중국인 사회의 생활 방식, 감각 방식, 사고방식을 매우 수용적으로 받아들인다.

일반적으로 마카오 토착 포르투갈인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중서양식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며, 이를 통해 그들만의 독특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음식이나 여가 생활에서도 마카오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차를 마시러 가거나 마작을 즐기는 활동들에 익숙하다.

종교적으로는 전통적으로 가톨릭을 신앙하지만, 중국인의 신앙 습관과도 별다른 충돌 없이 공존한다. 이들은 중국인의 풍습이나 미신적 금기까지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설날에 재물을 맞이하거나, 단오절에 용선 경기를 하고, 중추절에 월병을 먹고, 설날에 세뱃돈을 나눠주는 것 같은 행사는 빠짐없이 참여하며, 가장 전형적인 예는 관우를 모시는 것이다.

언어적으로는 이들이 사용하는 포르투갈어에 마카오 광동어와 지역적 속어의 영향을 받은 어휘와 문법 구조가 많다. 그 결과 독특하고 다소 어색한 억양과 발음을 갖게 된다.

한편, 중국어는 마카오 토착 포르투갈인들에게서 실질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은 가정에서 포르투갈어와 중국어를 모두 사용하며, 사용하는 중국어는 주로 구어체의 마카오식 광동어다. 중국인들과 대화할 때는 능숙한 광동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자를 읽고 쓰는 능력을 가진 토착 포르투갈인은 극히 드물다.

마카오 토착 포르투갈인들은 대대로 마카오에서 생활하며 이 땅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마카오의 저명한 변호사이자 소설가인 실리키(Silici)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의 가문은 마카오에서 200년 넘게 거주해왔으며, 포르투갈에 막대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자신들을 길러낸 이 땅을 떠나기를 원치 않았다.[4][5]

자연환경

코타이 지역은 본래 바다였으며, 외십자문(外十字門)의 동쪽 해역에 해당한다.

마카오는 덥고 습한 아열대 기후로 평균 습도는 75% ~ 90% 정도이다. 계절별 날씨는 몬순에 크게 좌우되며, 겨울과 여름의 기온차가 급격하다. 연간 평균 기온은 22.3 °C로, 7월은 가장 더운 달이고, 평균 28.6 °C를 기록한다. 가장 추운 달은 1월이며, 평균 14.5 °C이다. 중국 남부의 해안부에 위치하여, 연간 2,030mm의 많은 강수량을 가진다. 그러나 1월에서 3월까지의 겨울은 대부분 대륙성 몬순의 영향으로 건조하며, 10월에서 12월까지의 가을은 화창하며 따뜻하고 습도가 낮다. 겨울은 비교적 춥지만 화창하고, 4월에서 6월까지 봄에는 무덥고 습한 기운이 여름까지 이어진다. 여름은 가장 덥고 습하며, 때로는 비와 태풍을 동반한다.

역사

포르투갈 상인이 마카오를 발견하기 전에는 푸젠성의 어민과 광둥성의 농민이 이곳에 첫 번째로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포르투갈인인 조르쥬 알바레스(Jorge Alvares)가 1513년 마카오에 와서 무역을 시작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포르투갈 상인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마카오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접목된 지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1557년이다. 당시 중국의 명나라는 세수를 확보할 수 있는 무역 활성화와 해적이나 지역 적대세력으로부터의 해안방어를 위해서 포르투갈인의 정착을 허용했다. 명나라는 포르투갈로부터 일정 금액의 임대료를 받고 마카오를 임대의 형태로 내어주게 된다.

1557년부터 1640년 사이에는 마카오가 아시아 해상무역의 주요 상업적 연결망이 되면서 포르투갈인, 일본인, 인도인, 유라시아인 등 다양한 집단이 유입되었다.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유럽식 건축물과 문화의 특징이 이 시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중국으로 향하는 관문으로서 중요한 위상을 확보하였다. 1640년부터 1750년까지는 네덜란드의 믈라카 점령, 청나라로의 세대교체, 포르투갈의 스페인에 대한 봉기 등으로 인해 마카오의 경기가 침체되었고 인구가 감소했다. 이후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인, 네덜란드인, 미국인 등 광동지역을 통해 유럽과의 무역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항구도시로서 마카오의 중요성은 홍콩에 비해서 줄어들었다.

따라서, 1887년 중국-포르투갈 우호통상조약에 따라 청나라로부터 마카오의 통치권을 확보한 포르투갈이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역이 아닌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주변 국가에서 금지되었던 도박을 마카오에서 합법화하여 경제부흥을 위한 새로운 전략으로 활용하였다. 도박을 합법화하자 외국의 관련 자본이 마카오의 도박산업에 집중되면서 경제가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도박은 마카오 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1951년 포르투갈은 헌법을 개정하면서 마카오를 본국에 편입하여 해외 주라는 위상을 부여하고 포르투갈 정부가 임명하는 총독이 마카오를 통치하도록 했다. 이 시기에는 도박뿐만 아니라 관광을 진흥하였으며, 난민의 유입에 따른 저렴한 노동력으로 인해 제조업도 조금씩 성장하였다. 현대적인 아파트, 사무공간, 호텔, 카지노 등 새로운 건물이 건립되면서 오래된 식민지의 경관을 조금씩 변화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농업토지가 점점 줄어들었고, 홍콩의 경제성장에 보다 의존하게 되는 시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독재정권에 저항한 카네이션 혁명이 발생한 이후 1975년 포르투갈은 해외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모두 포기하였다. 1985년 포르투갈과 중국이 마카오의 주권을 둘러싼 논의를 시작하였고, 1987년 3월 마카오를 1999년 12월 중국으로 반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급격하게 발전하는 중국 남부의 해안지역에서 홍콩 옆에 위치한 관문으로서 경제적, 사회적, 건축적,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 타이파섬과 콜로아느섬 사이에 있는 지협을 매립하고 코타이 연결 도로가 건설되면서 서쪽의 물 흐름이 느려져 맹그로브 생태 경관이 형성되었고, 동쪽에는 한때 굴 양식장이 운영되기도 했다. 이 굴 양식장은 1980년대에야 종료되었다. 매립 사업은 1990년대까지 진행되었으며 매립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토지가 오늘날의 쿠타이, 처음에는 인근 연생산업촌(聯生工业村)을 지원하는 새로운 도시로 계획되었다. 또한, 광저우-주하이 철도의 마카오 구간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을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경제 불황으로 루감성의 개발이 지연되었고, 이후 카지노 산업의 개방으로 인한 토지 수요로 인해 원래의 신도시 계획은 중단되었다.[6]

산업

코타이에는 카지노호텔이 밀집되어 있다. 신흥 개발 지역으로, 주요 프로젝트에는 마카오 과학기술대학, 마카오돔(2005년 동아시아 경기대회의 주요 경기장 중 하나), 그리고 루감 스트립(路氹金光大道) 등이 포함된다. 이 중 루감 스트립은 가장 규모가 큰 프로젝트로, 전 세계적으로 독특한 특징을 가진 20개의 호텔을 건설할 계획이며, 총 투자액은 약 1,000억 마카오 파타카로 추산된다.

지도

동영상

각주

  1. 상라자루 당구〉, 《위키백과》
  2. 마카오〉, 《위키백과》
  3. 마카오〉, 《나무위키》
  4. 두산백과: 마카오〉, 《네이버 지식백과》
  5. 路氹城〉, 《百度百科》
  6. 두산백과: 마카오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동아시아 같이 보기

동아시아 국가
동아시아 도시
동아시아 지리
동아시아 바다
동아시아 섬
동아시아 강
동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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