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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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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1994년 7월 8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최고지도자이다.

개요

  •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때 반일인민유격대에 가입했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북조선공산당, 북조선로동당의 소비에트 연방 대리자로 활동하였고, 남북조선의 로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9월 9일 내각 총리가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04시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의 마오쩌둥을 설득해 승인을 받아 6.25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한국군과 유엔군이 협력하여 반격하자 중국인민지원군 지원군과 소련군의 도움으로 1953년 7월 27일 22시 휴전을 하고 휴전선 북쪽을 지배하게 되었다. 전후 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952년에는 허가이를 숙청, 1953년 박헌영, 리승엽 등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고, 1956년에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을, 1958년에는 중국파 김원봉 계열을,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를 숙청했으며, 1972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공식적인 국가원수가 되어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다. 한편 한국 전쟁, 전쟁 범죄, 한국 전쟁 장본인 의혹과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서 논란을 받고 있다. 개신교 가계 출신인 그는 원래 개신교 신자였으나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무신론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1]
  • 김일성은 북한의 초대 최고지도자이자 독재자이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을 표방한 북한을 실제로는 왕조와 다를 바 없는 3대 세습 독재국가로 만든 장본인으로 생전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등을 지냈다. 김정은의 할아버지이자, 김정일의 아버지로, 6.25 전쟁을 일으킨 전쟁범죄자이다. 그의 목표는 적화통일로, 전쟁을 통해 남한을 침략하여 한반도 전체를 공산주의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외세인 소련에게서 허가를 받아내 6.25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은 후 UN군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리자 중국을 끌어들이는 외환의 죄를 저질렀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김일성은 끊임없이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한 무력 도발을 일삼았다. 또한 김일성은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군사력을 투자하고 비밀리에 핵개발 프로젝트를 가동해 남한을 겨냥했다. 그와 동시에 화전양면전술의 일환으로 자신이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주의자인 것처럼 포장해 남한의 정부와 사회를 기만하려 했다. 그의 지배과정에서 십만 단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거나 숙청되었으며, 숙청된 사람들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는 식으로 장기간의 고통을 느껴가면서 학살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통해 자신에 대한 철저한 개인숭배체제를 수립했으며, 북한 주민들은 강제적으로 김일성과 그와 관련된 상징물에 숭배를 해야 했다. 김일성의 경제정책은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모토로 북한 주민들이 잘 사는 사회를 표방했지만, 서방 국가들로부터 지닌 막대한 부채, 그리고 현실을 무시한 각종 경제정책으로 북한의 국가 경제는 이미 김일성 생전에 파산의 길에 접어 들었다. 결국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북한은 배급제가 붕괴되었고 국민들이 먹을게 없어서 수십만이 굶주려 죽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2]
  • 김일성은 북한의 정치가이다. 1948년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내각수상과 국가주석으로 권력을 독점해 개인숭배체제를 구축했으며, 6·25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공고화하였다.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며, 1912년에 출생하였다. 1930년대 항일운동에 참여하면서 김일성(金日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김형직(金亨稷)과 강반석(康盤石)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동생으로 김철주(金哲柱)와 김영주(金英柱)가 있다. 1930년대에는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코민테른(Comintern)의 '1국 1당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 동만특위(東滿特委)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그리고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항일유격대를 구성해 산악지대에 항일유격구를 세우고 무장활동을 펼쳤다. 김일성도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안투 현(安圖縣)에서 항일유격대를 구성해 무장활동에 참여했으며, 1933년 각지의 항일유격대들이 통합해서 구성된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제3단 정치위원이 되었다. 김일성은 김정일로의 권력 세습을 추진하면서 1980년대 이후에는 국내의 일은 김정일에게 맡기고 자신은 통일과 외교 분야의 일을 주로 관장하였다. 그래서 1991년 9월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고, 1994년에는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4년 7월 8일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정상회담은 실현되지 않았다. 김일성의 시신은 현재 평양의 금수산태양궁전(錦繍山太陽宮殿)에 안치되어 있으며, 북한은 1998년 5월에 헌법을 개정하여 김일성에게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3]

북조선 노동당

  •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을 시작하자 김일성은 최용건(崔庸健)·김책(金策)·안길(安吉) 등과 함께 제88특별여단 소속으로 소련군을 따라서 남하하였다. 그리고 9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소련군의 군함을 타고 원산항에 상륙했다. 국내로 들어온 김일성은 국내 각지를 돌며 공작활동을 전개했고, 10월 10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이북5도 당원 및 열성자대회에 참석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리고 10월 14일에 열린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소련군 사령관의 소개를 받으며 대중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러한 소련군의 지원에 힘입어 1945년 12월 17일에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책임비서의 자리에 올랐다.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46년 8월 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통합하여 북조선노동당이 창설되었을 때는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2월에는 북한 지역의 임시정부로 수립된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는 내각 수상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49년 6월 30일 북조선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통합하여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이 결성되었을 때에는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 조선로동당(朝鮮勞動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일 집권 정당이다. 조선사회민주당 및 조선천도교청우당과 같은 당이 존재하지만 형식적인 야당이자 관제야당(우당)에 불과하다. 실제 정치권력은 조선로동당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는 《사회주의헌법》 제11조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라는 구절에 규정되어 있다. 조선로동당에서 표범하는 공식 이념은 김일성-김정일주의이며, 사상적으로는 반수정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보를 잇고 있다. 현재 조선로동당 총비서 김정은이 집권을 하게 되면서 여당을 유지한다. 극좌 정당으로써 독재를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당제 정당이다. 주체사상을 표방한 정당이다.

김일성광장

  • 김일성광장(金日成廣場)은 1954년에 건설되었으며 면적은 약 7만 5,000㎡이다. 광장은 화강암으로 포장된 직사각형마당과 대주석단 및 기타 공공건물로 구성되며 승리거리·대학습당거리 등의 가로와 직접 이어진다. 광장의 공간은 주석단과 인민대학습당을 축으로 하여 대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광장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보조광장을 두었다. 주변에는 인민대학습당을 비롯하여 조선중앙역사박물관·조선미술박물관·평양제1백화점 등이 있다. 주로 중요한 정치 및 문화행사, 군중집회 등을 치르는 장소로 이용된다. 평양특별시 중구역에 있다.

김일성생가

  • 김일성생가(金日成生家)는 김일성이 태어나 자란 집으로, 북한의 평양직할시 만경대구역에 있다. 김일성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보통 만경대(萬景臺)로 통칭된다. 북한에서는 "만경대 고향집"이라고도 부르며 "혁명의 요람" 또는 "태양의 성지"로 떠받든다. 김일성의 조부가 산당집의 당지기로 자리 잡은 뒤로 4대가 거주하였다. 1947년 김일성의 생가가 있는 일대를 만경대혁명사적지로 지정한 뒤 김일성의 부모와 조부모의 묘를 조성하고 방 3칸과 부엌이 딸린 초가집 등을 복원하였으며, 주변에 만경대 정각과 혁명역사관·씨름터·군함바위·그네터 등을 건설하였다. 대동강 하류에 있는 만경대는 "만 가지 경치가 펼쳐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이 높았다. 김일성 생가 등이 혁명사적지로 조성된 뒤 주체사상탑·개선문과 더불어 외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되었으며, 북한 주민들도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의 태양절을 전후로 집중적으로 이곳을 찾아 참배한다. 조성된 뒤 60여 년 동안 약 1억 1,800만 명이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종합대학

  • 김일성종합대학(金日成綜合大學)은 1946년 7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결정 제40호에 의하여 대학 설치기구가 만들어지면서 설립, 10월 1일 개교하였다. '김일성 주석의 혁명사상과 근대 과학이론을 체득한 민족간부의 양성'을 설립 목적으로 하고 있다. 설립 당시에는 2개 학부(사회과학부 ·자연과학부)로 출발하였으나, 점차 증가하여 역사 ·법률 ·경제 ·조선어문학 ·철학 ·외국어문학 ·수학 및 역학 ·물리 ·화학 ·생물학 ·지리 ·지질 ·원자력 ·자동차공학 등 14개의 학부가 있으며, 17개의 부설 연구소도 있다. 학생들은 김일성 주체사상 ·혁명전통 ·노동정책사 ·당정책 ·조선노동투쟁사 ·세계노동당사 ·김정일문헌 ·정치경제학 등의 교과목을 전공과 무관하게 공통필수로 이수해야만 하는데 이 과목들은 전교과목의 40%에 달한다. 인문사회계는 다른 일반대학과 같이 수업연한이 4년이나, 자연계는 5년이며, 전공학과에 따라 야간제와 통신제가 있다. 입학 시 소속학교장과 조선노동당의 추천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또한 합격자 선발에 있어서도 출신성분, 정치조직생활, 본고사 성적을 각각 1/3씩 반영한다. 따라서 출신성분과 당성 즉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인가와 공산당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우선하고 있다.

주체사상

  • 주체사상(主體思想)은 북한에서 김일성이 1930년에 창시하였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북한의 모든 정책과 활동의 기초가 되는 조선노동당의 유일지도사상으로 되어 있는데, 북한에서의 주체사상은 주체확립이라는 정치적 목적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으므로 철학사상은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북한의 주체사상의 중심명제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을 내세워 '인간 중심의 새로운 철학사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주체확립의 의지와 실천성을 강조하는 하나의 지배적 통치이념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1926년 10월 김일성이 결성하였다고 주장하는 타도제국주의동맹(打倒帝國主義同盟)에서 주창되기 시작하여 1930년 6월 열렸다는 카룬회의에서는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하는 주체형(主體型)의 당조직을 조직했다고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김일성이 14세 때 주장하기 시작하여 18세에 이르러서는 그 원리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1982년에 이르러 김정일이 김일성의 위광(威光)을 높이려는 의도적인 조작에서 나온 주장이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 주체사상에서의 주체란 처음부터 정치적 성격을 띤다. 김일성은 주체에 대하여 '모든 것을 북한의 실정에 맞게 해나가며,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일반원리와 다른 나라의 경험을 북한의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주체사상의 핵심적 내용은, 곧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의 주체확립을 뜻하게 된다. 주체확립에 대하여 북한은 1970년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그 규정을 했는데, 여기서 주체확립의 중심개념은 주인다운 태도인 자주적 입장의 견지와 창조적 활동으로서, 이것은 곧 자기혁명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것, 남으로부터 원조를 받지 않고 자기갱생을 해야 한다는 실정을 반영하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주체사상은 초기에는 북한의 실정에 알맞은 혁명과 건설의 추진을 강조하는 소박하고 통속적인 사고에 불과한 셈이었다.
  • 주체사상은 1970년 이후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동격으로 격상되면서 철학적 성격이 분식(粉飾)되었고, 오늘날에는 이 두 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발전시켰으며, 현시대의 혁명과 건설과정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해답을 주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1978년 4월 9일 북한의 대표적 해외친북단체인 '주체사상국제연구소'를 창설하여 주체사상의 국제적 보급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주체사상이 북한 주민의 사상을 무장시키고, 정치적 총합에 효과적인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여 왔음은 틀림없다. 또 대외적으로 비동맹권 국가에게는 공산주의 세계혁명론으로 부각되고, 서방권 국가에는 민족공산주의(民族共産主義)로 오인되는 등의 효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주체사상은 폐쇄를 전제로 하는 상황에서는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겠으나 1980년대 말 일기 시작한 동유럽 공산권의 민주화 ·개방화와 소연방의 해체, 중국의 개혁정책 앞에서는 더 이상 위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동영상

각주

  1. 김일성〉, 《위키백과》
  2. 김일성〉, 《나무위키》
  3. 김일성(金日成,1912.4.15.~1994.7.8)〉, 《두산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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