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썸네일|300픽셀|'''한강변''' '''한강변'''(漢江邊)은 대한민국 강원도 태백시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중부를 동에...) |
잔글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파일:한강변.png|썸네일|300픽셀|'''한강변''']] | [[파일:한강변.png|썸네일|300픽셀|'''한강변''']] | ||
− | '''한강변'''(漢江邊)은 [[대한민국]] [[강원도]] [[태백시]]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중부를 동에서 서로 통과해 | + | '''한강변'''(漢江邊)은 [[대한민국]] [[강원도]] [[태백시]]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중부를 동에서 서로 통과해 [[황해]]로 유입되는 [[한강]] 주변 [[지역]]을 말한다.<ref name="위키">〈[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 한강]〉, 《위키백과》</ref> |
== 개요 == | == 개요 == |
2023년 2월 7일 (화) 10:44 판
한강변(漢江邊)은 대한민국 강원도 태백시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중부를 동에서 서로 통과해 황해로 유입되는 한강 주변 지역을 말한다.[1]
개요
한강이라는 명칭은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하였다. 옛말에서 '한'은 '큰', '한창인'을 뜻하는 말이며, 가람은 강을 가리킨다. 즉 '큰 강'이라는 뜻. 그래서 한자 표기의 '漢'은 음차일 뿐 중국과는 관계가 없다. 한강은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대수(帶水)'[9]라 불리었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라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서는 '욱리하(郁利河)'라 불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北瀆)'이라 표기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강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시점은 백제가 중국의 동진과 교류하기 시작한 즈음인데, 그때부터 ‘한수(漢水)’ 또는 '한강(漢江)'이라 불렀다 전해진다. 한강(漢江)은 한반도 중부에 위치한 강으로, 대한민국의 국가 1급 하천이다. 대한민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을 이르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이 강에서 나왔다. 길이로 보면 한반도 전체에서 네 번째로 길고, 대한민국 실효 지배 영토 한정으로도 두 번째로 길다. 유량으로 보면, 한반도에서 가장 많고 유역 면적으로 봐도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매우 큰 강이다.[2]
지질 지형
한강변 유역의 대부분은 경기육괴(京畿陸塊)에 속하며, 남한강 유역의 일부만 옥천조산대(沃川造山帶)에 속해 있다. 경기육괴는 주로 시생대와 원생대의 각종 변성퇴적암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생대 쥐라기의 화강암이 이를 관입한 상태로 나타난다. 화강암은 서울과 춘천 지역에서 암주(岩柱)의 형태로 소규모로 노출되어 있지만 횡계에서 원주를 거쳐 이천에 이르는 지역에는 연속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한다.옥천조산대는 주로 조선누층군과 평안누층군의 퇴적암으로 이루어졌다. 정선·영월 지역의 무연탄은 평안누층순에 매장되어 있고, 고씨굴과 고수동굴을 비롯한 카르스트지형은 조선누층군의 대석회암층군에 형성되어 있다. 단양·제천·영월 지역에는 이 석회암을 배경으로 시멘트공업이 발달했다.한강의 하계망은 전체적으로 많은 지류가 주요 본류에서 나뭇가지 모양으로 뻗어나간 수지상(樹枝狀)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구간에 따라서는 곧바르게 뻗은 유로도 나타난다.골짜기와 함께 유로가 반듯하게 뻗어 있는 전형적인 예는 청평과 양수리 간의 북한강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골짜기와 유로는 지질구조선을 따라서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팔당협곡 하류의 한강 본류에서도 마포에서부터 임진강과 만나는 하구 부근까지 유로가 바르게 뻗어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 중상류의 본류 및 지류에서는 물이 심하게 구불구불 흐르는 감입곡류하도(嵌入曲流河道)가 널리 발달되어 있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영월의 청령포(淸冷浦)에서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다. 또한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洪川江)의 하류부도 감입곡류를 심하게 한다.감입곡류하천은 대개 좁은 골짜기를 흐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로 변동을 적지 않게 한다. 청령포에서는 유로가 변동한 뒤에 남겨 놓은 구하도(舊河道)도 볼 수 있다. 골짜기가 곧바로 뻗어 있으면 도로의 건설에 유리하다. 심하게 구불거리면 경치는 좋지만 도로의 건설뿐만 아니라 장마철의 유실로 인해 관리에 어려움이 따른다.팔당 하류에 있는 한강 본류의 연변에는 넓은 범람원과 함께 일련의 하중도(河中島)가 발달되어 있다. 김포평야와 일산평야는 한강을 끼고 발달한 범람원으로 이루어진 평야이며, 농업용수는 한강물을 양수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들 평야는 해발고도가 5∼7m 정도에 불과하여 배수시설이 확충된 오늘날에도 집중호우가 내리면 물에 잠기는 논이 넓게 나타난다.그리고 한강 하류의 범람원에서는 자연제방과 배후습지가 뚜렷이 나타난다. 뚝섬은 전체적으로 한강의 자연제방이고, 지금은 대부분 시가지로 개발되었지만 이에 인접한 중랑천 하류의 장안평은 배후습지였던 곳이다. 장안평은 고도가 뚝섬보다 3m 내외나 낮아 집중호우가 내릴 때는 침수 피해를 면하지 못한다. 한강 하류에는 당정리섬·미사리섬·잠실섬·저자도·중지도·여의도·밤섬·난지도 등 하중도가 많았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시가지의 개발을 위해 육지로 연결시키거나 골재 채굴과 관련하여 침식을 받아 대부분이 없어지거나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큰 하중도로는 여의도만 남게 되었다. 한편 미사리는 샛강에 조정경기장이 건설되면서 육지와 이어졌다.
한강은 조차(潮差)가 큰 경기만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하구에서 약 20㎞ 떨어진 제1한강대교까지 조석의 영향이 미쳤다. 김포에 수중보가 건설된 이후에도 만조 때는 난지도 부근까지 강물이 역류(逆流)한다.과거에 어선이나 조운선이 강을 거슬러 올라올 때는 역류하는 밀물을 이용하였다. 첨두홍수와 만조가 겹칠 때는 홍수의 피해가 증폭된다.한강은 하폭이 좁았고, 곳곳에 모래톱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으며, 여울이 마포 부근까지 나타났었다. 그러나, 특히 1970년대부터 골재가 엄청나게 채굴되고, 1981년부터 한강종합개발계획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지금과 같이 넓어지는 한편 양안에 고수부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1980년대 말까지 서울의 건물은 주로 한강의 모래와 자갈로 지어졌다.[3]
기후
한강변 유역은 한반도의 중부 지방을 차지하고 있어 기후에 있어서는 북부 지방과 남부 지방의 점이적 성격을 띤다. 또한, 태백산맥에 인접한 상류 지역과 황해에 인접한 하류 지역 사이에는 지형적 영향으로 기온과 강수량에서 지역적 차이를 보인다. 연평균기온은 10∼11℃로 남부 지방에 비하면 낮고 북부 지방보다는 따뜻하지만, 같은 위도의 동해안 지방에 비하여 낮은 편이다.상류의 산간지대와 하류의 평야지대 사이에도 차이가 난다. 서울은 11.6℃이고 춘천은 10.5℃로 북한강의 경우 하류에서 상류로 갈수록 낮아진다. 남한강은 북류하고 있어 상류가 하류보다 따뜻하지만 위도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다. 1월 평균기온은 -8∼3.5℃ 내외로 남한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며, 평균 최저기온은 춘천이 -10.2℃, 서울이 -7.4℃이다.저극기온(低極氣溫)은 춘천 -31.6℃(1927.12.29.)의 기록이 있으며, 측후소분실의 측정치로는 김화에서 -33.4℃(1942.1.5.)가 기록되었다. 최근에는 양평에서 -32.6℃ (1981.1.5.)가 기록되었다. 8월 평균기온은 25℃ 내외이고, 일최고기온은 춘천이 39.5℃(1924.8.9.), 서울이 38.2℃(1943.8.24.)였다. 그러나 측후소분실의 관측치로는 양구·단양·제천·홍천·정선 등의 상류 내륙 지방에서 40℃ 이상의 고온이 기록되어,
경상북도·충청북도의 내륙 지방과 함께 우리 나라의 서극(暑極)을 이룬다.연교차는 서울 28.9℃, 춘천 29.1℃, 홍천 33.5℃, 양평 32.2℃, 영월 31.2℃로서 대륙성기후의 특성을 보인다. 중류·상류 지역의 연강수량은 1,200∼1,300㎜ 내외로 우리 나라 제2의 다우지이다.이것은 중·상류 지역이 서풍 내지 남서풍의 바람맞이 사면에 해당하여 산간 지방으로 갈수록 지형성 강우가 되기 때문이다. 지방별로는 산악형인 가평이 1,446.2㎜, 청일이 1,332.4㎜이고, 구릉형인 수원이 1,334.6㎜, 용인이 1,278.9㎜이며, 분지형인 서울이 1,364.8㎜, 청운이 1,503.5㎜ 등이다. 특히, 하계 집중률이 커서 북한강 유역은 60% 이상, 남한강 유역은 50∼60%를 보인다.여름 최대 강수 지역은 가평 일대로 6∼8월의 강수량이 941.0㎜이고, 최소 강수 지역은 영월 일대로 508.3㎜이다.여름에 집중되는 비는 때때로 집중호우로 내린다.1일 최대 강수량은 서울이 354.7㎜ (1920.8.2.), 제천이 355.0㎜(1936.8.10.), 홍천이 351.2㎜(1936.8.27.), 가평이 342.0㎜(1931.8.19.) 등이다. 1시간 최대 강수량은 서울에서 118.6㎜(1942.8.5.)를 기록한 바 있다.
북한강 수계에 많은 댐이 건설된 이후, 넓은 인공호 때문에 수분 및 열수지(熱收支)가 변화되어 한강 연안의 기후가 많이 변화하였다.남한의 한극은 한강 상류 산간 지방의 양구·인제·김화 등지에서 나타났으나, 최근에는 춘천·양평 등에서 빈번히 기록되고 있다.춘천호를 비롯한 많은 호수에 이웃한 춘천의 경우, 춘천댐이 완공된 1965년 이래 의암댐·소양강댐 등이 건설되면서 서리 일수와 안개 일수가 증가하였으며, 겨울 기온이 낮아지고 여름 기온도 서늘해졌다.넓은 인공호의 건설로 풍계(風系)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나, 국지적인 바람에 대한 연구는 아직 없다. 일반적으로 호수 연안에서 나타나는 호풍(湖風)이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호수면에서의 증발량 증가는 안개 일수와 운량의 증가를 초래하였다.서울의 경우 1931∼1960년 사이의 평균 강수량 1,259.2㎜에서 1961∼1990년 사이의 평균치는 1,369.8㎜로, 가평은 1931∼1960년 사이의 1,253.1㎜에서 1961∼1990년 사이에는 1,296.4㎜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평균 강수량의 증가가 호수면의 영향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3]
생태
한강은 육상식물·수중식물·식물성플랑크톤·부착조류(규조·녹조·남조 등) 등을 생산자로 하고, 동물을 소비자, 박테리아·곰팡이류를 분해자로 한 거대한 생태계를 이룬다.한강 생태계는 에너지와 물질의 순환을 행하면서 평형상태를 이루어 수천 만년 존속해오는 동안, 기능면에서 생물이 주동적 구실을 하였다. 한강의 생물들이 주체성을 잃으면 한강 생태계는 붕괴되어 사막화되고 말 것이다. 유사 이전 우리의 조상들이 원시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한강 생태계는 오늘날과는 달리 일부 소택지(沼澤地)를 제외하면 원시림으로 덮여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서식하는 동물도 다양하고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흘러 이러한 환경에 적합한 어류·패류·곤충류·조류 등이 오늘날보다 풍부하였을 것이다.그러나 농업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산림 벌채, 마을의 형성, 농경지 개간, 목축업과 광산 개발, 인구 증가, 도시의 형성, 교통 수단의 발달, 하천 형태의 변화 등이 연쇄 반응하여 생태계에 변화가 유발되었다.하천의 유량은 줄고, 토사의 반입으로 하상이 높아졌으며, 수질은 악화되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동물·식물도 양적·질적으로 크게 변모되었다.1981∼1985년 사이에 한강유역에서 관찰된 조류는 56종 1만 6317마리였다. 수금류(水禽類) 중에서는 청둥오리·쇠오리·고방오리·흰죽지·흰뺨검둥오리·비오리 등이 우세하였고, 육상종으로는 참새가 우세하였다.팔당호에서는 물고기를 잡아먹는 잠수성조류(潛水性鳥類)와 잡식을 하는 수면성조류(水面性鳥類)의 비율이 49 : 51이지만, 팔당호∼김포 사이와 팔당호∼가평 사이의 비율은 13 : 87이다.이는 수질오염이 심한 곳에는 잠수성조류가 적게 찾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편 한강에는 국제보호조류인 따오기·두루미·검은목두루미·재두루미·고니·큰고니·먹황새 등도 찾아온다. 어류는 103종이 보고되었다.1급수에는 버들치·금강치 등이 우세하고, 2급수에는 피라미, 3급수에는 붕어·잉어 등이 우세하다. 유사 이래로 버들치 구역과 갈겨니 구역은 축소되었으며, 피라미와 붕어의 구역은 확대되었다. 1400∼1800년대 중엽에 발간된 고서에 의하면, 한강에서 싱어[細魚]·웅어[葦魚]·열목어[餘項魚]·은어[銀口魚]·붕퉁뱅어[白魚]·누치[訥魚]·잉어[鯉魚]·붕어[鯽魚]·왜매치[菊息魚]·두우쟁이[眉叟甘味魚]·농어[鱸魚]·쏘가리[錦鱗魚] 등이 산출되었다고 한다. 특히, 보호가 요구되는 희귀종은 칼상어·열목어·은어·연준모치·눈불개·모샘치·어름치·가는돌고기·달납줄개·두우쟁이·꾸구리·돌상어·흰수마자·밀자개·종어·황쏘가리 등이다.중류·하류 지역에서 1985년까지 보고된 조개류는 21종이다. 다슬기 무리는 1·2급수에 서식하며, 재첩·쨈물우렁이·왜우렁이·논우렁이 등은 3급수에서 서식한다.
팔당호가 건설되었을 때 피면자유생(被面子幼生)이나 담륜자유생(擔輪子幼生)이 하류로 쓸려가지 않았기 때문에 민물담치가 폭발적으로 발생하여 수도관을 막았던 적도 있다.특히, 토끼조개·두드럭조개·곳체두드럭조개 등은 보호되어야 한다. 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곤충은 133종에 달한다. 하루살이·날도래·강도래 등의 무리가 전체의 71.4%를 차지한다.1급수에는 하루살이 무리, 2급수에는 강도래·날도래 무리, 3급수에는 모기붙이 무리가 각각 우세하다. 수서곤충의 대부분은 유충시기를 물에서 보내며, 부착조류를 섭취하고 어류에게 먹힌다. 한강 유역의 식물은 868종으로 강변의 대표종은 148종인데, 그 중 초본은 88종, 목본은 60종이다.산지의 대부분은 소나무나 참나무속의 목본이 우세하지만 극상(極相)에 이르면 대부분이 참나무속의 나무로 덮일 것이다. 주목되는 산지식물은 오대산 월정사 일대의 전나무숲과 분비나무, 가평군의 잣나무숲, 소백산 고산 지대에 분포하는 주목 군락, 단양군 매포읍 영천리 일대의 측백나무 군락 등이다.[3]
문화 유적
한강 유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조사, 보고된 곳으로는 서울 면목동·암사동·역삼동·가락동, 경기도 여주의 단현리, 가평 청평리, 양주 검터·두촌·마진·마재, 양평 양근리·교평리·송학리·앙덕리·매탄리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구석기 유적은 대부분 채집된 것이기 때문에, 간혹 신석기의 파손품이나 미완성품 또는 자연석을 구석기로 오판한 것이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다.한반도에서 알려진 구석기 유적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1978년에 발견되어 1979년부터 6차에 걸쳐 발굴된 전곡리 유적이다. 이 유적은 철원 방면에서 추가령지구대를 따라 남하하는 한탄강이 V자 모양으로 곡류를 이루어 감싸고 도는 현무암대지 위에 분포하고 있다.여기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나 유럽의 전기 구석기의 특징적인 양면핵석기(兩面核石器)·삭편석기(削片石器)와 더불어 초퍼(chop-per)·초핑툴(chopping tool)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남한강 유역의 구석기 유적은 1980년에 조사된 충청북도 제천의 점말동굴을 비롯하여, 충주댐 건설에 따라 1982년부터는 수몰지구가 된 제천 사거리·명오리, 단양 수양리(수양개)·금굴·상시리 등에서 조사, 보고되었다.
제천의 사거리유적에서는 다량의 타제석기가 출토되었고, 이와 함께 모루돌[臺石]·돌망치·격치[剝片]가 다수 출토되어 이곳은 석기 제작소일 가능성이 높으며, 같은 층에서 흑요석(obsidian)제 격지도 출토되었다.또한, 이 유적에서는 강자갈을 이용하여 집을 지었던 흔적으로 기둥구멍자리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의 넓이는 10㎡ 정도로서 사냥용 집(hunting camp)이라고 보고되었다. 명오리 유적은 해발 92m에 위치하며, 주먹도끼·박편석기·긁개·찌르개[尖頭器] 등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긁개가 가장 많다. 이 유적의 편년은 중기 구석기 후기, 즉 서기 전 5만∼4만년 사이로 추정된다. 단양의 수양리 유적은 해발 132m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층에서는 흑요석 석기, 하층에서는 아슐리안(Ache'ulean) 전통을 받은 무스테리안(Mouste'rian)문화의 특징을 가진 석기가 출토되었다. 이 역시 석기 제작소로 추정된다. 금굴 유적은 해발 135m에 위치하는 석회암동굴 유적으로 전기 구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시기의 층위들이 연속되어 있다.
상시리 유적은 가파른 바위벽 밑에 위치한 석회암 바위그늘유적으로 동물화석·골기(骨器)·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동물화석은 비단털쥐·꽃사슴·들염소·말사슴·멧토끼 등이 발견되었다.그리고 골기로는 긁개·자르개·밀개 등이, 석기로는 초핑툴·찍개·망치 등이 출토되었다. 제천의 점말동굴 유적은 해발 430m에 위치한 석회암동굴로서, 각 층에서 노루·사슴·오소리·족제비·여우·표범·너구리 등 많은 동물화석과 인골 화석이 발견되었다.한편, 4,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석기가 많이 출토되지 않아,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다. 한강 유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대부분 강이나 해안 지역에 밀집되어 있어 신석기인들이 어로와 농경을 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강은 수량이 풍부하고 지류가 잘 발달되어 있어 신석기인들의 거주지로서 아주 적합하였음에 틀림없다.그래서 지금으로부터 약 7,000여년 전부터 이 지역에는 신석기인들이 생활하였고, 그 흔적으로 신석기시대의 토기인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이 많다.그 유적으로는 집자리유지(住居址)·분묘·조개무지 등이 조사, 보고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집자리유지가 가장 많다. 집자리의 형태는 수혈주거지·부석주거지·동굴주거지 등으로 구별되는데, 수혈주거지의 대표적인 곳은 암사동 유적으로 여러 차례의 발굴을 통하여 20여 채에 달하는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석기시대에 상당한 규모의 취락이 이곳에 형성되어 공동생활을 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직립구연부(直立口緣部)에 첨저(尖底) 바닥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가 있는데, 토기의 표면에는 이[齒]가 하나 또는 여러 개로 된 시문구(施文具)로 긋거나 눌러서 새긴 빗살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 토기의 구연부에는 평행밀집사단선문(平行密集斜短線文)·열점문(列點文)·사선문(斜線文)이 주로 새겨져 있고, 기복부(器腹部)에는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또는 옆으로 새긴 이른바 어골문(魚骨文)이 새겨져 있다.
토기의 색깔은 적갈색이 대부분이나, 황갈색·회갈색·회흑색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운 탓으로 불길이 고루 미치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이곳에서는 토기 이외에 연석(碾石)·석촉(石鏃)·타제석부(打製石斧)·마제석부(磨製石斧)·고석(敲石)·괭이·돌낫·보습과 토제(土製) 및 석제 어망추(漁網錘) 등이 출토되었다.부석주거지는 강원도 춘천 내평리 유적에서 조사된 것으로, 황갈색 사질생토 위에 동서 12.3m, 남북 4m 크기로 서쪽에는 큰 돌을 깔고 동쪽에는 25∼30㎝ 정도의 작은 돌을 정연하게 깔아놓았다. 여기에서 발견된 토기는 구연부가 직립하거나 약간 외반(外反)하고, 저부(底部)는 환저(丸底)와 첨저뿐이며, 태토(胎土)는 사질토(砂質土)에 모래를 섞은 것과 점토에 모래를 섞은 것 두 가지가 있다.색깔은 적갈색 또는 황갈색이며, 부서진 파편을 보면 윤적법(輪積法)으로 점토테를 쌓아올려 만들었는데, 안쪽은 테가 잘 붙도록 손가락으로 눌러 붙여놓았다. 무늬는 암사동의 것과 같은 어골문 이외에도 사선문이 보인다. 석기로는 마제석부와 타제석부, 숫돌[砥石]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강화도 삼거리지석묘의 발굴 당시에 부석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는데, 그 전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크고 작은 석괴(石塊)를 깎아 만들었다. 이러한 부석주거지는 한강 유역의 일부 지역에서 그 지방의 특성에 맞게 축조된 주거 양식으로 생각된다.한편, 동굴주거지는 춘천시 교동의 한 예가 알려져 있다. 이 동굴주거지는 토기가 모두 소형이고, 토기에 비하여 석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인골이 나온 점으로 보아 분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강 유역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조개무지로는 경기도의 별망(別望)·시도(矢島)·오이도(烏耳島) 패총 등이 확인되었다.
별망패총은 표토층·조개층(상)·조개층(하)·점토층 등 4개 층이 노출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조개층(하)과 점토층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들 토기는 첨저형으로 표면의 3분의 2 정도에만 평행밀집사단선문·사선문·어골문 등이 새겨져 있다. 그 밖에 석기로는 마연(磨硏)한 합인석부편(蛤刃石斧片)과 숫돌이 출토되었다. 시도패총은 표토층·조개층·흑색 부식토층·생토층 등으로 자연 층위가 나타나 있으며, 이 가운데 조개층과 흑색 부식토층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연부와 기복부의 문양 구성을 알 수 있는 대형의 토기 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다수는 토기 표면의 3분의 2에 어골문을 새겨놓았다. 석기로는 석촉·연석봉(碾石棒)·석도(石刀) 등이 발견되었다. 오이도 패총은 1950년대에 발견된 이래 여러 차례 조사가 실시되어 상당수의 토기 조각이 채집되었다. 그 대부분은 토기 표면의 3분의 2 정도에 어골문을 새긴 것들이며, 구연부와 기복부에 서로 다른 무늬를 새겨넣은 것도 있었다.
한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문화는 한반도 동북방의 무문토기·공렬토기(孔列土器)와 서북방의 홍도(紅陶)·첨저형토기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 이 두 지 문화는 자체적인 발전과 혼합을 통하여 한강 유역에서 독특한 청동기 문화를 이루었으며, 한편으로는 이곳을 거쳐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한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집자리와 고인돌·석관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집자리유적은 동북 지방 계통의 무문토기·공렬토기 문화와 서북 지방의 홍도·첨저형토기문화가 아직 접촉을 가지지 않은 전기와, 두 계통의 문화가 접촉하는 중기, 그리고 한강 유역의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되는 후기의 것으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전기에 해당하는 집자리유적으로는 파주 교하리·옥석리, 서울 역삼동, 여주 흔암리, 제천 양평리, 강화 삼거리 유적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이 구릉에 위치한 장방형움집으로 바닥은 진흙을 깔거나 다졌으며, 바닥의 가운데 혹은 한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화덕자리[爐址]와 기둥구멍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들 집자리유적에서는 무문토기·공렬토기·발형토기(鉢形土器)·고배형홍도(高杯形紅陶)·팽이형토기 등의 토기와 그물추·방추차 등의 토제품, 그리고 마제석촉·석부·숫돌·갈돌·대패날·돌망치 등 석기가 출토되었다.
중기의 집자리유적은 여주 흔암리, 하남 미사리, 서울 가락동, 춘천 신매리 등의 움집[竪穴住居址]으로, 전기의 것보다 규모가 크며 동북 지방 문화의 계통인 갈색마연토기(褐色磨硏土器)가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무문토기·공렬토기·팽이형토기·홍도·고배형홍도 등의 토기와 어망추·방추차 등의 토제품, 그리고 석부·마제석촉·원형석기·숫돌·갈돌·석봉 등 석기, 그 밖에 동물뼈·보리·조·수수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후기의 움집은 남양주 수석리, 서울 가락동 등에서 발견된 것으로, 원형이나 말각방형(末角方形)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또한 무문토기·흑색마연장경호(黑色磨硏長頸壺)·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내외반구연무문토기(內外反口緣無文土器) 등 다양한 토기와 그물추·방추차 등의 토제품, 석부·마제석촉·유구석부(有溝石斧)·공이·숫돌·낫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고인돌무덤은 강화 삼거리·부근리, 파주 옥석리 등의 탁자식과 서울 원지동의 남방식고인돌이 있다.
남한강 유역에는 제천 황석리·계산리·진목리·사기리, 양평 상자포리 등에서 남방식고인돌이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제천 황석리에서는 인골 1개체분이 발견되어 당시의 사람에 대하여 조사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또한, 지석묘에서는 무문토기·공렬토기·홍도 및 마제석검·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석촉·환상석부(環狀石斧)·돌도끼·곡옥(曲玉)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석관묘는 춘성 대곡리와 단양 안동리 등에서 조사되었는데, 여기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지석묘에서와 비슷하나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는 점이 다르다.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한강 유역은 서기 전 18년 백제가 하남위례성에 도읍한 이래 475년 웅진(熊津)주 04)으로 천도할 때까지 약 500년 동안 백제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였다.이곳에 남아 있는 백제 초기의 유적으로는 가평 마장리 야철주거지와 양평 대심리 철기유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철(砂鐵)을 녹여 선철(銑鐵)을 생산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이를 통해 이곳이 자급자족의 경제생활과 방위력을 가진 집단 취락지임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고분으로는 고구려의 기단식적석총(基壇式積石塚)과 축조 방법이 비슷한 2, 3세기경의 서울 석촌동 적석총을 비롯하여, 방이동의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 가락동의 토광묘가 있으며, 이 밖에 춘천 지방의 석실묘 및 제원 양평리·도화리의 대형 적석총 등이 있다.이들 초기 백제의 고분은 처음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다가 점차 백제 고유의 양식을 갖추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한강 유역에 남아 있는 백제 시대의 성곽으로는 풍납동토성·몽촌토성·아차산성(阿且山城)·이성산성(二聖山城)·남한산성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초기 백제의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것은 지형·위치·구조 등으로 보아 몽촌토성이다.몽촌토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밖에 해자시설(垓子施設)을 한 흔적을 보아 도성으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4세기 말부터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공략하기 시작하였고, 475년(장수왕 63)에 이르러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당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경영한 흔적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뒤 고구려는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게 한강 유역을 상실할 때까지 77년간 이 지역을 경영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문화유적은 서울의 아차산성과 단양의 온달산성(溫達山城)이 있는 정도이다.고구려에 뒤이어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으며, 이 시기에 건립된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와 단양 적성비(赤城碑)가 유적으로 남아 있다.고려가 건국된 이후로는 각처에서 사찰이 건립되고 불상이 제작되었다.
몽고의 침입을 당하여서는 한강 유역의 한양산성(漢陽山城)과 처인성(處仁城)이 격전지가 되었는데, 특히 처인성은 김윤후(金允侯)가 몽고장수 살리타(撒禮塔)를 사살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 천도가 이루어짐으로써 한강 유역은 명실공히 한반도의 중심지가 되었다.이때 도성이 새롭게 들어서면서 궁궐이 세워지고 도성의 사방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축조되었으며, 북쪽과 남쪽에는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 정비되었다. 조선은 유교국가였으므로 불교 유적은 적은 편이나, 세조 때 만들어진 원각사탑(圓覺寺塔)과 여주의 신륵사탑(新勒寺塔)이 남아 있다.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는 도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남한산성과 행주산성을 증개축하여 보장지(保障地)로 삼았으며, 특히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45일간 피난하여 있었으므로 행궁지(行宮址) 등 건물지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성곽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어, 북한산성과 함께 산성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3]
관광 자원
한강변은 넓은 유역 면적과 긴 유로 연장, 인구 및 산업 생산면에서의 절대적 위치, 역사상 전략적 요충지인 점 등을 고려할 때, 여러 유형의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북한강-춘천권은 파로호·춘천호·소양호·의암호·청평호 등의 인공호수와, 이들 호반 주변의 남이섬·구곡폭포·등선폭포·팔봉산·공작산·용소 등의 명승·산악, 청평사·상원사·흥국사·혈거유지(穴居遺址) 등의 문화 사적이 즐비하여 하나의 밀집된 관광권을 이룬다. 춘천호·소양호의 내륙 수운은 이 관광권의 중심 도시인 춘천에서 양구·인제를 연결하여 설악 관광권으로 통하게 한다. 서울에서 북한강-춘천권과 설악산 사이의 간선 관광 루트는 경춘선·경춘국도와 소양호의 쾌속정 등이 있어 편리하다. 남한강-충주권은 단양을 중심으로 사방 40리에 펼쳐진 단양팔경이 있다. 충주호의 내수면양식 및 탄금대·소백산·속리산·수안보온천·문경새재·화양동계곡·대청호 등이 있어 내륙 순환 관광권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곳은 삼국시대의 중원문화유산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수몰되어 안타깝다.
남한강-여주권의 중심은 신륵사를 비롯한 강변 유원지이다. 신륵사는 보물 7점이 있는 명찰이고 인근에는 영릉(英陵)이 있다. 여주·이천의 도자기 생산지도 각광받는 명소이다.양수리-팔당권은 서울 근교의 1일 관광권으로서, 용문산·운길산·구곡사·상원사·금곡사·남한산성·광릉·정다산묘 등이 팔당호반 유원지를 둘러싸고 있다. 이 권역은 관광자원의 공급과 수요 측면에서 서울 근교의 야외 오락·스포츠 센터로서 개발이 풍부한 지역이지만, 상수원 보호지구·녹지지구·자연환경 보전권역·군사기지 등에 속하여 제한을 받고 있다. 한강 본류권은 집중적인 개발로 자연적 관광자원이 인공적 관광자원으로 대체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한강종합개발사업에 의한 한강 고수부지 시민공원이다. 과거의 유적지는 현대적 건물의 사이사이에 산재한다.몽촌토성·풍납토성·암사동선사유적지 등과 양화진·염창·절두산천주교성지·광흥창지·노량진·서빙고·동빙고·이태원지·압구정지·광나루터·아차산성 등의 사적지, 국회의사당·63빌딩·서울종합운동장·석촌호수·어린이대공원·올림픽공원 등의 인공적 관광지가 있다. 한강 시민공원양화지구와 잠실지구 사이의 유람선 뱃길은 도시의 겉모양을 전망할 수 있다.[3]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