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나톨리아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아나톨리아(튀르키예어: Doğu Anadolu)는 튀르키예 동부에 위치한 지역이다.[1]
개요
동아나톨리아의 면적은 146,330㎢이며 인구는 5,775,225명(2010년 기준)이다. 튀르키예 전체 면적의 21%를 차지한다. 북쪽으로는 흑해지역, 서쪽으로는 중앙아나톨리아와 지중해지역, 남쪽으로는 남아나톨리아와 이라크, 동쪽으로는 이란과 아제르바이잔(나히체반 공화국), 아르메니아와 접한다. 동아나톨리아는 튀르키예에서 평균 고도가 가장 높고 면적이 가장 넓은 지역이지만 튀르키예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지역이기도 하다.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돌출한 대반도. 아시아 대륙의 남부에서 발칸반도에 이르는 광활한 산악성 지대인 아나톨리아반도를 고대에는 소아시아라고 하였다. 비잔틴인들이 처음 지리용어로 사용한 아나톨리아는 튀르키예어로는 아나돌루라고 하는데, 어원은 그리스어 아나톨레(anatole)이며, 동쪽 또는 해 뜨는 곳이란 뜻이다. 로마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와 콘스탄티누스(재위 306~337) 두 황제 시대에 제국의 행정제도가 개편되면서 제국을 형성하는 4개 주(州) 가운데서 중동(中東) · 튀르키예 · 이집트 · 리비아 지역을 망라하는 주의 명칭이 되었다.
11세기 셀주크의 정복을 계기로 아나톨리아란 명칭은 일시적으로 사라졌다가,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 이르러 아나톨레라는 튀르키예어로 와전되어 서부 아나톨리아 에이레트주에 대한 명칭으로 부활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행정개혁으로 인해 반도 전체를 가리키는 지리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튀르키예 공화국에서는 아나톨리아라고 하면 상(上)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 일부까지 포함한 아시아쪽 전역을 가리킨다.
아나톨리아는 광활한 고원 대지(臺地)로서 북에는 폰투스 산맥, 남에는 토로스 산맥이 자리를 잡아 반도를 에워싸고 있는 형태이며, 동과 서는 고원 상의 구릉지대이다. 두 산맥의 바깥쪽으로는 흑해 · 에게해 · 지중해와 접한 해안지대가 펼쳐져 있다.[2]
역사
오늘날의 튀르키예 영토 거의 대부분을 이루는 아나톨리아반도는 아시아와 유럽이 상호작용하는 장소로서 지구상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인류가 거주하던 땅이었다. 차탈회윅(신석기 3기), 차외뉘(신석기 1기에서 신석기 3기), 네발리 코리(신석기 2기), 하클리아르(신석기 3기), 괴베클리 테페(신석기 2기), 메르신 등 초기 신석기 시대 거주지는 지구상 최초의 인류들이 살던 거주지로 여겨진다. 트로이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로, 철기 시대까지 취락이 지속되었다. 역사 시대로 접어들면 아나톨리아 사람들은 인도-유럽어, 셈어, 카르트벨리어를 비롯하여 기원이 불확실한 여러 언어를 썼다. 사실 고대 인도-유럽어인 히타이트어와 루위아어를 놓고 서구 학자들은 아나톨리아가 인도-유럽어를 확산시킨 중심지라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쿠르간 가설에 밀려 인정받고 있지는 않다. 튀르키예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장소인데 아시리아 제국이 존재하였다.
이 땅에 들어선 최초의 제국은 히타이트로 기원전 18세기에서 13세기까지 존속하였다. 그 다음은 인도-유럽 계통의 프뤼기아인들이 패권을 잡았으나, 기원전 7세기에 킴메르인의 침략으로 멸망한다. 프뤼기아의 가장 강력했던 후계국가는 뤼디아, 카리아, 뤼키아였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아나톨리아 해안에는 아이올리스와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였다. 이 지역은 기원전 6~5세기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되었으며, 이후 기원전 334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진출한다. 셀주크 튀르크인들이 11세기부터 이 지역에 나타났다. 1243년 룸 술탄국 나타났으며 13세기 후반, 오스만 투르크인들이 점차 베이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330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스탄불 지역에 로마의 수도로 비잔티움을 지었으나 동로마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되었고 오스만 제국에는 이스탄불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연합군이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를 점령하면서 튀르키예의 민족 운동이 촉발되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의 주도로 세브르 조약 규정을 철회시키기 위한 튀르키예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1922년 9월 18일, 이스탄불과 이즈미르에 있던 연합군은 퇴각하였으며, 새로운 튀르키예의 나라가 건국되었다. 11월 1일에 새로이 열린 의회는 공식적으로 술탄국을 폐지하여, 623년간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종식되었다.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에서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로서 그 주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1923년 10월 29일에 새 수도 앙카라에서 튀르키예 공화국이 정식으로 건국을 선포하였다.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구 오스만의 잔재를 털어내고 새로운 세속 공화국의 건설을 목적으로 여러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1924년에 그는 632년 이래 1300년 동안 이어져 오던 칼리프제를 폐지하였고, 튀르키예 공화국의 기본 정신인 세속주의를 법으로 제정했다.
1925년에는 복장 개혁을 시행하여 여성들의 복장을 해방시키고, 과거에 금지되었던 여성의 교육권을 보장해 남녀평등교육을 시행하였으며, 이슬람력을 폐지하여 유럽식 그레고리력으로 대체했다. 1926년에는 민법을 개정해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였으며, 1928년에 튀르키예어의 아랍 문자 표기법을 폐기하고 로마자 표기법으로 변경하였다. 1930년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했다. '가족명에 관한 법'에 따라, 1934년에 튀르키예 의회는 무스타파 케말에게 '아타튀르크'(아버지 튀르키예인, 즉 '국부')라는 명예 성명을 부여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팽창은 셀림 1세의 재위기에도 계속되었고, 슐레이만 대제의 시대에는 오스만 제국이 남동부 유럽 대부분,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방까지 장악하며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떠올랐다. 다만 18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도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쇠퇴를 막기 위하여 마흐무트 2세가 19세기 초에 근대화 개혁을 실시하며 군대, 봉건제, 사회 등 모든 전반적인 부분을 대개혁하였다.
1913년에 젊은 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들의 지휘 아래 오스만 제국은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이 때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 오스만 제국과 그 동맹국들이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자 각 지역과 민족들의 독립 요구가 강해졌고 유럽 국가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오스만 제국의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유럽 국가들로 인해 여러 국가들로 나누어 졌다. 튀르키예 지방에서는 튀르키예의 국가 영웅 케말 아타튀르크가 외국 군대에 대항하여 튀르키예 독립전쟁을 전개하였고, 1922년 11월 1일에 마침내 술탄제를 폐지하며 1923년 10월 29일에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웠다. 아타튀르크는 수없이 많은 개혁안들을 내놓았으며, 서구 사상을 들여왔고 새로운 신생 튀르키예 정부에 민주주의와 자유와 같은 가치들을 주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거의 대부분 튀르키예는 중립을 취하였으나, 1945년 2월 23일에 의례적인 의미로 연합군 측에 참전하였으며, 1945년 유엔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튀르키예 해협에 군사 기지를 요구하는 가운데 옆 나라 그리스에서는 공산주의자와 내전을 벌이면서 위기 상황이 조성되자, 1947년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게 된다. 이 독트린에서 미국은 튀르키예와 그리스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음을 밝혔으며, 그 결과 미국이 대규모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제공하게 되었다.
튀르키예는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으로 참전하였으며 튀르키예는 한국의 형제의 나라임을 자처하고 있으나, 키프로스 그리스계 탄압 문제와 쿠르드족 탄압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1952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소련의 팽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이후 키프로스에서 십여 년간 내전이 벌어졌고, 1974년 7월에 그리스인들의 군사 정변으로 마카리오스 3세 대통령이 실각하고 니코스 삼프손이 독재 정권을 세우자, 튀르키예는 1974년에 키프로스 공화국을 침공하였다. 9년 뒤에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 나라는 오직 튀르키예의 승인만 받은 나라이다.
1945년에 일당제 시대가 종식된 이후, 다당제 시대에는 수십여 년간 긴장을 초래하였으며, 1960년대에 1980년대 사이에 정치적 불안 상태가 계속되면서 1960년, 1971년, 1980년에 군사 정변이 일어났으며, 1997년에는 1997년 튀르키예 군부 협정 시기이기도 하였다.[35] 한편 1980년대 튀르키예 경제의 자유화 이후 튀르키예는 더 강력한 경제 성장과 더 큰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3]
교육
아타튀르크 대학교
아타튀르크 대학교는 튀르키예 동(東)아나톨리아지방 에르주름주 에르주름시에 위치한 공립 종합대학교이다. 1957년에 설립되었다. 22개 학부와 5개 대학, 15개 직업대학, 6개 연구소, 16개 리서치 · 응용센터로 구성되어 있다. 특유한 전공이나 연구기관으로 튀르키예 음악국가교육원과 아타튀르크 주의 · 개혁사 연구소, 튀르키예학 연구소, 동아나톨리아 첨단기술 응용 · 연구센터, 튀르키예 아르메니아 관계 연구센터, 카펫훈련센터(Carpet Training Center) 등이 있다.
이 대학교는 2023년 타임스고등교육의 세계대학평가에서 세계 1201-1500위권, 아시아 대학 중 401-500위권에 포함됐다. 2023년 QS 세계대학순위에서는 세계 1401위 밖, 신흥유럽 · 중앙아시아지역(EECA) 대학 가운데 190위로 평가됐다. 2023년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의 글로벌대학순위에서 세계 1261위, 아시아 대학 중 385위, 튀르키예 대학 가운데 26위를 각각 기록했다.
동아나톨리아 지방에 대학을 설립할 필요성은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계속 논의되었다. 이는 튀르키예 근대국가 건설에 기여하고 초대 대통령을 지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도 관심을 기울인 사안이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본명이 무스타파 케말이었는데, 1934년 의회루부터 '튀르키예인의 아버지'라는 뜻인 '아타튀르크'의 칭호를 받았다.
아타튀르크는 1937년 튀르키예 의회에서 한 시정연설에서 동아나톨리아에 대학을 설립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학 설립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아타튀르크 연설 후 20년 뒤인 1957년 캠퍼스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1970년 아타튀르크대학교가 개교했고 농학부와 과학 · 문학부가 첫 학기 신입생 135명을 교육했다.[4]
행정구역
- 아르주 - 아르주(튀르키예어: Ağrı ili)는 튀르키예 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주 이름은 튀르키예에서 가장 높은 산인 아라라트산(해발 5,137m)의 튀르키예어 표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동쪽으로는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카르스주, 북서쪽으로는 에르주룸주, 남서쪽으로는 무슈주와 비틀리스주, 남쪽으로는 반 주, 북동쪽으로는 이디르주와 접하며 8개 군을 관할한다.
- 빙괼주 - 빙괼주(튀르키예어: Bingöl ili)는 튀르키예 중서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툰젤리주와 에르주룸주, 무슈주, 디야르바키르주, 에르진잔주, 엘라지주와 접하며 8개 군을 관할한다. 1946년 엘라지주와 에르진잔주의 일부가 분리되면서 신설되었으며 1950년까지는 차파크추르주(Çapakçur)라고 부르기도 했다. 튀르키예어와 쿠르드어, 자자키어가 사용된다.
- 비틀리스주 - 비틀리스주(튀르키예어: Bitlis ili)는 튀르키예 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반호 서쪽에 위치하며 7개 군을 관할한다.
- 엘라지주 - 엘라즈으주(튀르키예어: Elâzığ ili)는 튀르키예 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 에르진잔주 - 에르진잔주(튀르키예어: Erzincan ili)는 튀르키예 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1939년 12월 27일에 일어난 진도 규모 7.9의 지진으로 인해 파괴되었지만 재건되었다.
- 에르주룸주 - 에르주룸주(튀르키예어: Erzurum ili)는 튀르키예 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동쪽으로는 카르스주와 아르주, 남쪽으로는 무슈주와 빙괼주, 서쪽으로는 에르진잔주와 바이부르트주, 북쪽으로는 리제주와 아르트빈주, 북동쪽으로는 아르다한주와 접하며 19개 군을 관할한다.
- 하카리주 - 하카리주(튀르키예어: Hakkâri ili) 또는 하카리주는 튀르키예 남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1936년 반주에서 분리되어 신설되었으며 이란, 이라크와 국경을 접한다. 4개 군을 관할한다.
- 카르스주 - 카르스주(튀르키예어: Kars ili)는 튀르키예 북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접하며 8개 군을 관할한다. 아르다한주와 이디르주는 1990년대까지 카르스주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 말라티아주 - 말라티아주(튀르키예어: Malatya ili)는 튀르키예 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산이 많은 지대에 둘러싸여 있으며 14개 군을 관할한다.
- 무슈주 - 무슈주(튀르키예어: Muş ili)는 튀르키예 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6개 군을 관할한다.
- 툰젤리주 - 툰젤리주(튀르키예어: Tunceli ili)는 튀르키예 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1936년 이전까지는 데르심주(Dersim, 자자키어와 쿠르드어로 "은색 문"이라는 뜻)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주 이름은 튀르키예어로 "구리의 땅"을 뜻한다.
- 반주 - 반주(튀르키예어: Van ili)는 튀르키예 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서쪽으로는 비틀리스주, 남서쪽으로는 시이르트주, 남쪽으로는 시르나크주와 하카리주, 북쪽으로는 아리주, 동쪽으로는 이란과 접하며 12개 군을 관할한다. 반호와 접하며 반 고양이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 아르다한주 - 아르다한주(튀르키예어: Ardahan ili)는 튀르키예 북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1993년까지는 카르스주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남쪽으로는 카르스주, 남서쪽으로는 에르주룸주, 서쪽으로는 아르트빈주와 접하고 있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조지아와 국경을 접한다. 6개 군을 관할한다.
- 이디르주 - 이디르주(튀르키예어: Iğdır ili)는 튀르키예 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속한다. 북서쪽으로는 카르스주, 서쪽과 남쪽으로는 아르주와 접하고 있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나히체반 공화국), 이란과 국경을 접한다. 4개 군을 관할한다.[5]
지도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
각주
- ↑ 〈동아나톨리아 지역〉, 《위키백과》
- ↑ 〈실크로드 사전: 아나톨리아〉, 《네이버 지식백과》
- ↑ 〈튀르키예〉, 《위키백과》
- ↑ 〈세계의 대학: 타튀르크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 ↑ 〈튀르키예의 주〉, 《위키백과》
참고자료
- 〈동아나톨리아 지역〉, 《위키백과》
- 〈실크로드 사전: 아나톨리아〉, 《네이버 지식백과》
- 〈튀르키예〉, 《위키백과》
- 〈세계의 대학: 타튀르크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 〈튀르키예의 주〉, 《위키백과》
같이 보기
서아시아 같이 보기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