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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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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계백(階伯)은 삼국시대 때, 황산벌전투에 참전한 백제의 장수이다.

개요[편집]

  • 계백은 백제 말기의 장군이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자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군대와 맞서 네 차례나 격파하였다.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르렀다. 당시 신라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다.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唐)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때 백제의자왕은 사치와 연악(宴樂)에 파묻혀 충신들의 훌륭한 작전계획도 물리치고 있다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奴婢)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였다.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자'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과 충곡서원(忠谷書院)에 배향되었다.[1]
  • 계백은 백제 말기의 충신(忠臣)이다. 흔히 계백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군인이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백제에서 좌평(佐平)에 다음가는 관등인 달솔(達率)까지 지내는 등 문인 관직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에 체계적인 장교 육성 시스템이 완성되고 관료와 군인 계급이 완전히 분리되기 전까지는 어느 문명권에서나 평시에는 문관직을 수행하던 고위 귀족이 전시에는 군 사령관을 맡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급 장교까지는 실전에서 구른 무관들을 등용할 수 있었지만 최고사령관 정도 되는 위치는 병법과 외교적 협상력도 필요하기에 학문에 통달한 문관이 맡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과거 제도가 생긴 이후에는 문관직과 무관직의 구분이 보다 뚜렷해지지만, 과거 제도가 생기기 이전인 고대에는 그 구분이 희미했기 때문에 역량만 있다면 한 사람이 문관직과 무관직을 오가거나, 겸직하는 경우도 흔했다. 조선 시대에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에 따르면 계백은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 출신이며 이름은 승(承)이고 성씨는 백제 왕실과 동성(同姓)인 부여씨였다고 전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기록이 사실이라면 계백의 본명은 '부여승(扶餘承)'이 되며 계백이라는 이름 자체는 별칭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계백이라는 이름을 잘 뜯어보면 품계나 계급을 의미하는 '계(階)'와 으뜸 혹은 존칭 표현으로서의 '백(伯)'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계백'이라는 호칭 자체가 관직을 가진 사람에 대한 존칭이거나 혹은 공후백자남의 작위가 아니었나 하는 가설을 내놓기도 한다. 그리고 자였을 가능성 또한 높은데 고구려의 고자의 아버지 고질이 성문(性文)이란 자를 사용했고 계백과 동시대 백제사람인 흑치상지가 항원(恒元)이라는 자를 사용한 것처럼 삼국시대 말기에도 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분명히 남아있고 백중숙계는 보통 자에 쓰였기 때문이다.[2]
  • 계백은 백제 말기의 군인이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략할 때 가족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충성을 지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군사 5천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5만의 신라군과 네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백제군이 전멸하고 계백도 전사했다. 성충, 흥수와 함께 백제의 충신이라 불린다. 《삼국사기》에 열전을 통해 고려 시대에 유교적 대의명분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조선 시대에도 유학자들로부터 국가를 위해 가족의 목숨을 포기한 충신이라는 평이 나왔다. 신라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가족을 죽였다는 《삼국사기》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무도했고 도의에 어긋난 지나치고 잔인한 처사였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본인도 결국 사망했으니 도의에 어긋나기는 했어도 혹평할 수는 없다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마음만 앞서 가족을 죽임으로써 결국 병사들이 겁먹고 싸우기도 전에 패하게 된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가족을 잊어버리면 전투에 유리하다는 병법의 가르침을 들어 계백을 방어한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백제의 옛 수도였던 부여를 유람한 일부 시인들은 계백의 죽음을 기리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신라와 백제의 전장이었던 신라 황산벌 서북쪽에 해당하는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산기슭에는 오래전부터 계백의 무덤이라 전해오는 고분이 존재했는데, 이 고분이 확실히 계백의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는 미신 외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곳은 '계백장군유적전승지'라는 이름으로 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었다.[3]
  • 계백은 백제 말기 논산 지역에서 신라군을 맞아 싸운 무신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계백이 결사대 5,000명을 뽑으며 말하기를 '한 나라 인력(人力)으로 당(唐)·신라의 대병(大兵)을 막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 죽어서 쾌(快)함만 같지 못하다.' 하고 식솔들을 다 죽이고 황산벌에 나와 세 곳에 진영을 마련하였다. 계백은 장차 신라군과 일전을 앞두고 사람들과 맹세하기를 '옛날 월나라의 임금 구천은 5,000명으로 오나라의 700,000명의 군사를 무찔렀다. 오늘 모두 다 분발하고 온 힘을 다해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이렇게 5,000명의 결사대는 신라군을 상대하여 매우 효과적이고도 강력한 대응을 하여 네 차례나 신라군을 물리쳤으나 결국 수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패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계백 장군 묘는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다. 계백이 전사하자 신라의 김유신은 계백의 시신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 부근의 백제 백성들이 계백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66년 구전되어 오던 무덤을 찾았으나 당시에는 봉분이 반 이상 붕괴되어 내광이 노출되었으며 광벽까지 일부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것을 부적면 사람들이 복묘(覆墓)하고 지석을 안치한 후 내광 회벽을 완봉하였고, 1976년 5월 19일 성분(成墳)하였다. 봉분은 둘레 47.6m, 지름 15.15m, 높이 6.5m이다. 논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과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충곡서원에서는 해마다 봄가을로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곡서원은 1868년에 폐쇄되었다가 1933년 복원되었는데, 충곡서원지는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4]

계백의 황산벌 전투[편집]

  • 660년 당의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수군과 신라의 상장군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 육군이 수륙 협공으로 백제를 침공했을 때, 계백은 충상의 지휘 하에 5천의 결사대로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만났다. 이때 계백은 "작은 나라의 병사로 당의 대군과 신라를 상대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며 자신의 칼로 직접 처자를 죽였다. 황산벌에서 계백은 월나라 왕 구천이 5천의 군사만으로 오나라의 70만 군사를 격파한 일을 언급하며, 무서워하지 말자는 말로 병사를 독려했다. 이때 세 곳에 나뉘어 진을 친 백제군은 신라군과 네 번의 전투에서 모두 이겼다. 이에 신라군은 대장군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이 1인 돌격 전술을 구사하며 전사했고, 다음으로 1인 돌격 선봉에 나선 좌장군 김품일의 아들 관창은 사로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나이가 어린 데도 기품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워서 돌려보냈지만, 다시 진영으로 돌격해오자 결국 관창을 잡아 처형했다. 관창의 죽음으로 용기를 얻은 신라군은 백제군과 맹렬하게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충상, 상영 등 신라에 항복한 20인을 제외한 4980명이 사망하며 패했고 계백도 전사했다.

계백 장군 유적 전승지[편집]

  • 계백 장군 유적 전승지(階伯 將軍 遺蹟 傳承地)는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유허지이다.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백제 말기 성충(成忠)·흥수(興首)와 더불어 백제 3충신으로 꼽히는 계백의 유허지로 최후의 결전장이던 황산벌과 가까운 곳에 있다. 계백 장군은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왔을 때 죽음을 각오한 5,000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 김유신의 5만 대군을 맞아 황산벌에서 싸웠다. 결사대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4번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중과부적으로 결사대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전쟁이 끝난 후 김유신은 계백의 시체를 찾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 계백의 충성 어린 죽음을 본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백제의 유민들과 묘소 인근 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묘제를 지내오던 관행이 이어져 오다가 1680년(숙종 6)에 계백의 위패를 주향으로 모신 충곡서원(忠谷書院)을 건립하고 향사를 지내왔다. 근래에 이르러 본격적인 고증작업을 하게 되었다. 1966년 묘를 발견할 당시, 봉분이 반 이상 붕괴되어 내광이 노출되었으며 광벽까지 일부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부적면 사람들이 지석(支石)을 안치하고 내광회벽을 완봉한 후 봉분 둘레 47.6m, 지름 15.15m, 높이 6.5m로 복묘하였다. 1976년 5월 19일에는 봉토를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전백제계백장군지묘(傳百濟階伯將軍之墓)'라고 씌어 있다.

팔충사[편집]

  • 팔충사(八忠祠)는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 있는 사당이다. 1998년 12월 30일 부여군 향토유적 제25호로 지정되었으며, 백제의 계백을 비롯한 흥수, 성충, 복신, 도침, 혜오화상, 곡나진수, 억례복유의 8충신과 황산벌에서 항전한 백제 5천 결사대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이 계백장군을 비롯한 8충신의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 부소산에 있던 삼충사의 옛 건물을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면적 400㎡로 경내에는 사당 본체 건물과 성화대, 외삼문이 세워져 있는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이고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솟을삼문형으로 되어 있다. 사괴석(四塊石) 담장 옆으로는 1981년에 세운 팔충사 건립비, 1984년에 건립한 사적비 등 모두 4기의 비석들이 있고 외삼문 아래에는 관리사무소인 충의재(忠義齋)가 자리 잡고 있다. 해마다 9월 무렵에 백제 8충신과 5천 결사대의 구국충절을 기리는 팔충제를 지낸다.

계백에 대한 평가[편집]

  •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계백에 대한 기록은 고작 황산벌 전투에 국한되어 있으며, 그나마도 백제본기나 계백열전에 나와있는 내용보다 신라측 기록에서의 관창열전 등에서 오히려 계백에 대한 묘사가 더 자세한 편이다. 즉, 계백에 대한 기술은 철저히 신라의 입장에서 쓰인 기록으로, 신라인들 역시 비록 적대국인 백제국의 장수이지만 계백의 인품을 꽤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인품 존중'보다는, 의자왕을 '막장'이라 표현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주장도 있다. 계백을 띄워주는 것만으로도, '의자왕은 훌륭한 충신을 죽게 만든 폭군'이라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더해, 충신이라는 점에서 추모받았다는 점도 한 요인이 된다.
  • 계백은 김유신을 상대로 강했다는 것이고, 그러한 사실을 의자왕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본대가 소정방의 13만 대군을 막는 동안 하루라도 김유신의 5만 대군을 막아서 시간을 벌게 한 것으로 보인다. 황산벌 전투로 후대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평가를 했는데 대체적으로 충신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계백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평가는 '나라를 지킨 충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이미 고려 시대에서부터 있었다. 계백은 『삼국사기』 열전에 입전되었다. 백제인은 오직 3명만이 열전에 들어갔는데, 그중 한 명인 것이다.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 중기에 백제인으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한 인물들을 모아 놓은 편에 들어가 있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수로 평가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 계백이 충신으로서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조선 시대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1603년(선조 36)에 전대 왕들의 능묘를 수리하라고 이르면서 전대의 충신들의 묘소도 정비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 백제의 충신으로 성충과 계백이 언급되고 있어 계백이 어느 정도 알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계백은 1617년(광해군 2)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충신편에 실려, 조선에서 존경받고 본받아야 하는 충신으로 널리 알려졌다. 1575년(선조 8)에는 부여현감 홍가신(洪可臣)이 이 고장 출신인 백제의 3충신 성충·흥수·계백과 고려 이존오(李存吾)를 기리기 위해 사우(祠宇)를 건립하였는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사액(賜額)을 받고 의열사(義烈祠)라 명명되었다. 1688년(숙종 14)에는 계백과 함께 조선시대 사육신 등을 모신 충곡서원(忠谷書院)이 지역 유림들에 의해 건립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권근은 계백이 가족을 죽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무도하다고 비판하였으나, 이러한 평가는 곧 역전되어 신하로서의 도리를 강조한 유학자들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계백(階伯,?~660)〉, 《두산백과》
  2. 계백〉, 《나무위키》
  3. 계백〉, 《위키백과》
  4. 계백〉,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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