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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0일 (월) 11:09 판
평안도(平安道)란 조선 시대의 행정구역이다. 현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 남포특별시 일대를 포괄하는 지명으로, 관서지방에 해당한다. [1]
개요
평안도라는 명칭의 어원인 평양과 안주는 둘 다 현재 평안남도에 속한다. 원래는 대동강, 청천강이 상류가 북쪽으로 뻗었기에 평안좌도, 우도로 구별했으며, 이 경우 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영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좌도에 속하게 된다. 평안남북도는 1896년 이후의 구분이다. 선조 21년, 평양에서 최정보란 자가 맹인 신고함과 작당하여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의금부에서 "친족살해가 일어난 평양을 전례에 따라 격하해야 하지만, 솔직히 평안도에서 평양을 대체할 도시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이조에서 "2번이나 평양을 격하하면 일개 현감이 도저히 평양같은 대도시를 다스릴 수 없게될 것이다"라고 평양 격하를 반대하면서 평양의 지위가 유지되었다. 만약 평양을 격하했다면, 조선시대 다른 도처럼 평안도도 한 번 이름이 바뀔 뻔했다. 관서팔경이라 함은 강계시의 인풍루(仁風樓), 의주군의 통군정(統軍亭), 선천군의 동림폭(東林瀑, 폭포), 안주시의 백상루(百祥樓), 평양부의 연광정(練光亭), 성천군의 강선루(降仙樓), 만포시의 세검정(洗劒亭), 영변군의 약산동대(藥山東臺)를 말한다.[2]
역사
평안도는 고조선·위만조선이 건국되었으며, 이 시기에 평양은 북쪽에 부여(扶餘), 동쪽에 예(穢)와 옥저(沃沮), 남쪽에 마한과 접하고 있었다. 한나라의 무제(武帝) 때 이곳에 낙랑·임둔·진번·현도의 4군이 설치되었다. 서기 43년(대무신왕 26)경 고구려의 영토가 살수(薩水 : 지금의 淸川江) 이북을 차지하였고, 광개토왕 때 낙랑군이 멸망하여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로써 400여 년간의 이곳에 대한 중국 통치가 끝났다. 장수왕 때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져 보장왕 때까지 316년간 이곳을 고구려가 다스렸다.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와 함께 9개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였다가 신라의 저항으로 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으며, 대동강 이남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 효소왕 이후에는 대동강 이북이 발해의 영토가 되었고, 10세기경 신라 경애왕 때 발해가 망하자 이 지역은 북여진(北女眞)·거란 등의 영토가 되었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철원을 근거로 이 지역에 13개 진을 설치하였고, 고려 태조가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였다. 995년(성종 14)에 관서도(關西道)라 하였고,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여 관서도를 다스렸다.
정종 때북계(北界)로 개칭하였다가 1102년(숙종 7)에 서북면(西北面)으로 바꾸었다. 1269년(원종 10)서북면의 여러 성이 몽고에 편입되어 자비령(慈悲嶺) 이북은 몽고의 영토가 되었다. 또한 서경에는 동녕로총관부(東寧路摠管府)가 설치되었으나 충렬왕 때 영토가 고려에 환원되었다. 충숙왕 때 침입한 여진족을 이곳에서 격퇴시켰으며, 공민왕 때 처음으로 강계·위원·초산·벽동의 군현을 이곳에 설치하였다. 1413년(태종 13)평안도로 개칭하였고, 1440년(세종 22) 여연(閭延)·상무로(上無路)·우예(虞芮)의 땅을 나누어 무창군(茂昌郡)으로 하고, 1443년 우예군을 증설하여 이 도에 편입시켰다.
1455년(세조 1)에 무창·우예군을 폐하였다. 조선 초기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8도로 정하고 각 도를 동서 또는 좌우로 나누어 불렀는데, 평안도는 평안동도와 평안서도로 구분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를 23부제로 변경함에 따라 평양·의주·강계의 3부(三府)로 되었고, 1896년 13도제로 개편함에 따라 청천강을 경계로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로 나누어졌다.[3]
특징
평안도는 상업이 발달하고 신분 질서가 약하던 곳이었는데, 북한 정권은 상업을 억제시키고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신분 제도를 만들어냈다. 그 차별이란 것도 따져보면 평양에 풍경궁을 두어 아예 고종이 제2의 수도로 육성하려고 시도했을 만큼 무작정 차별받는 곳도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의 경평전은 평양이 2번째로 큰 도시였기에 딱히 지역간 적대감정 없이 진행된 것이다. 현재로 따지면 서울과 부산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민족정기를 불어넣기 위해 축구를 하자면 대표 도시인 서울과 평양이 겨루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적대적 지역감정이 있는 엘 클라시코 같은 경우와 다르다. 평양 출신 선수 증언, 서울 출신 선수 증언 엘 클라시코 같았다면 지도층에 대한 반항을 막고자 80년대 3S 정책마냥 일제가 이를 부추 겼지만 오히려 일제가 이 경기를 금지시켰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의 일부 축구팀은 지역 연고자만 받는 경우도 있지만 경평전에서 서울·평양 축구단은 서울 사람이 평양으로 이적하기도 했다.
조선일보에서는 '평안도의 상인 정신이 대한민국을 설계했다'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족보가 없으니 근대인이며, 함석헌 같은 민주화운동가도 상놈 출신임이 자랑스러웠다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협력하는 모습도 있었다고 한다. 조만식은 애향심이 강해 평양에 남아 북한 정권에 대항하다 숨졌을 정도지만 독립운동 당시 "고향을 묻지 말고 국권 회복을 위해 인화 단결하자"라는 주장을 하였다. 독립 운동 당시 지역에 따른 파벌이 있었다고 하지만 평안도 출신 안창호와 경기도 출신 여운형이 같은 편에 서는 등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었다. 이 파벌도 따지고 보면 신분 차별에 가까운데, 이들과 대립했던 이승만과 달리 여운형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안창호는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전후 이곳 출신의 실향민이 대거 월남하여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도 탈북민은 함경도계가 많지만 북한 땅의 토속 문화에 대한 것은 평안도 문화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겠'을 '갔'으로 말하고, 'ㅈ' 발음을 잘 못하며 '네다'로 알려진 평안도 사투리, 간이 세지 않은 음식 등이 대표적이다. 숭실대학교는 평양의 숭실 학당을 모체로 하여 설립된 학교다. 경희대학교 설립자 조영식이 평안도 실향민이라 같은 실향민 집안인 문재인을 도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기독교 관련 인사도 많이 내려와 실향민이 세운 교회도 현재까지 남아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사상계 같은 잡지의 편집을 주도하여 지역성 문제가 거론될 정도였다. 기타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장기려, 유일한, 황순원 등이 유명하다. 지금도 현미 같은 연예인, 김응용 같은 스포츠계의 인사도 남아 있다.
북한에서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중심 지역이다. 1952년 평양 지진 기록이 있으며, 규모 6.3으로 보면 된다. 만약 평양에 경주 지진이나 포항 지진과 같은 지표면에서 진도 7의 지진 진앙지가 지하 9km에 일어날 경우, 포항보다 100배 더 심한 피해를 주며 가옥, 건물 등이 붕괴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되고, 평양은 아수라장이 되고 황해도는 진도 5.5~6급의 지진을, 백령도는 2003년 당시 상황과 거의 유사한 규모로 나갈 수도 있다.[2]
언어
평안도 사투리는 북한 표준어가 아니며, 북한 표준어와 차이가 큰 말투다. 북한 표준어는 언어학적으로 서울 방언에 기반하였으나 북한에서는 정치적 동기로 강하게 평양말이라고 주장한다. 본래 이 고장은 대중적으로 '평안도 사투리'라고 알려진, 학술적으로는 서북 방언이라고 부르는 방언을 사용하던 지역이었다.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정확한 예시는 백석의 시의 일부 어휘나, 황순원의 소설에서 볼 수 있다. 문장까지 확인하고 싶으면 황순원의 소설이 정확하다. 극적인 이미지로는 '오데로 갔나'라는 노래의 가사나, 드라마 야인시대의 시라소니 말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윗 문단에서 보듯 워낙 이곳 출신 피난민이 많아서인지 '네다'거리는 말투가 아예 북한 말투의 전형이라는 인식까지 생기게 되었다. 좀 더 언급하자면 이곳 사람들은 과장된 이미지로 '덩거당에 던깃불이 번떡번떡'이라고 말한다는 유머가 있다든지, '기니까', '~하라우', '알간 모르간' 같은 말투를 쓴다는 인식도 있었다.
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들은 문화어라는 표준 어문 규범을 도입하는데, 김일성의 명령으로 이것은 '평양말'로 규정되었다. 그런데 사실 문화어는 언어학적으로 서울 방언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두음 법칙을 교정시키고 사투리를 문학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투리를 탄압했기에 북한 사람들은 다른 지역 말투를 잘 모르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함경도 출신이 대부분인 탈북민이 한국에 정착하고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평양말이 정말 서울 말투에 가까운 문화어였던 것인 줄 알게 된 것이다. 성조가 있는 사투리를 쓰니 옛 평안도 말투도 다소 서울말과 비슷하게 들릴 여지가 있다.
남북 교류 과정에서도 북한의 학자들은 김일성의 명령을 어길 수 없기에 문화어를 두고 평양 말투라고 주장하였고, 남측에서도 면전에서 이런 정치적 주장을 반박할 수 없기에 평안도 출신 실향민의 말투와의 모순 등 이상한 점이 있어도 언급을 잘 못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평양말, 더 나아가 평안도 사투리가 서울말과 아주 비슷하더라는 주장, 북한 말투는 서울말과 차이가 심한 것 아니냐하는 양립이 불가능한 주장이 도는 혼란이 있었다. 이 전말이 알려지게 된 것은 곽충구 교수 등 소수의 북한 방언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문화어와 평안 방언과의 차이와 서울 방언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이연아 씨 같은 방송계 등에서 종사하던 일부 탈북민이 사실은 최근에도 평양에서 문화어와 좀 다른 말투가 쓰인다는 것을 증언하게 된 것에서 비롯하였다.[2]
음식
평안도는 옛날부터 중국과 교류가 많은 지역으로 사람들의 성품이 진취적이고 대륙적이다. 역사적으로도 평양과 가깝기 때문에 평양의 발달된 음식문화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평안도는 현재의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북한의 서부지역에 해당하며 대동강, 청천강, 성천강, 압록강 등 큰 강들과 서해에 접해있는 지역이다. 열두삼천리벌을 비롯한 넓은 벌이 많아 논농사와 밭농사가 활발한 주요 농업지대이면서도 신의주, 강계, 안주, 평성, 순천, 희천 등 공업도시들을 포함하고 있어 인구가 많다.
대동강과 압록강, 청천강 등에서 서식하는 민물 생선과 서해 바다에서 생산되는 해산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먹거리가 풍성하고 다양한 지역이다. 이로 인해 평안도 지역에서는 백김치, 동치미, 콩나물김치, 가지김치 등과 같이 음식에 양념을 많이 하지 않아 음식이 담백하고 상큼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분단 이후 북한의 농업정책이 주체농법으로 전환되면서 평안도의 잡곡생산이 옥수수 생산으로 편중되었고, 그 영향으로 옥수수 음식이 더욱 발달했다. 반면에 평안도 특산물의 생산이 제한되면서 일부 평안도의 전통음식이 사라지고 있다. 특히 북한의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평안도의 명물 전통음식이 많이 소실되고 있으며, 평안도 명물이었던 준치만두, 어복쟁반, 순안불고기 등 일부 음식들은 평안도 사람들조차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이 되어가고 있다.[4]
남북통일 후 전망
평안도는 대(對)중국 무역의 중심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과 남한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중간기착지로써 쓸모가 있는데다가, 인프라 건설비를 지원받기에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경의선 연선 지역(평양시~안주시~정주시~신의주시) 및 남포시, 구성시, 강계시 지역은 물론 크게 발전하겠지만, 나머지 산간 지역은 국방 면에서는 중국에서 어느 정도 완충지대로 두기를 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에서 대놓고 침략하겠다고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군인을 수십만씩 배치해서 긴장 관계를 조성하면서까지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으려고 자처할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수도권과 경상도에 이어 3번째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선거에서도 무시 못할 지역으로 예상된다. 더구나 현재 북한의 막장 같은 상황에서도 인구가 3번째로 많고 1,200만 명에 달하기 때문에 남북통일 뒤에는 경상도와 인구 면에서 맞먹을 확률이 높다. 자강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강도의 대부분은 평안북도에 흡수될 것이다.[2]
지도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