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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이란의 경제는 중앙계획의 국유 석유회사와 국유 기업, 농촌지역의 농업 및 소규모의 상업, 벤처에 의한 서비스업 등의 민영 기업으로 이루어져 있는 혼합경제며, 전체 경제 비중에서 약 3분의 2가 국영 기업의 몫이다. 석유개발 이전에는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으며, 공업은 페르시아 융단을 생산하는 전통적 수공업이 있을 뿐이었으나, 정부는 이전부터 줄곧 시장화 개혁을 행하여, 석유에 의존하는 이란 경제의 다각화를 도모하여, 수익을 자동차 공업, 우주항공 산업, 가전 제조업, 석유화학 공업, 핵 산업 등 타 부문에 분산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공업력 수준이 낮아 품질이 좋지 못하다. 차바하르 자유무역지역, 키슈 섬 자유무역지역의 설정 등을 통하여 투자환경의 정비에 노력하여 수억 달러 단위로 외국 투자를 유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대 이란의 중산계층은 두텁고 견실하여 경제는 발전을 지속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고인플레, 고실업률이 문제이다. 인플레율은 2007년 평균 18.4%, 2008년 4월(이란력)에는 24.2%에 이르렀다. 재정적자는 만성적인 문제로서, 이것은 식품, 가솔린 등을 중심으로 년 총계 약 72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정부보조금이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란은 OPEC 제2위의 석유 생산국으로서, 확인되고 있는 세계석유 매장량의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다음가는 세계 제2의 석유 수출국이다. 1996년에 매우 견실했던 원유가격은 이란의 재정적자를 보충하고, 채무 원리금 미지급금의 상환에 충당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천연가스 매장량에서도 러시아에 이어 세계 제2위이다.
취업 인구의 약 55%가 종사하는 농목업이 이란의 기간산업이지만, 기후와 지형조건 때문에 농경지는 총면적의 10%에 불과하며 휴한지가 많아 작부 면적은 매년 농경지 면적의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이란고원에서의 농경지는 오아시스 주변의 좁은 지역에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보링에 의한 지하수 개발과 트랙터의 보급 등 생산 기술의 개선도 약간은 이루어진 편이나, 농업 기술은 아직 낙후된 상태이며, 대토지 소유 제도가 근절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산성이 낮아, 농업 생산액은 총생산액의 20% 정도에 머물고 있다. 주요한 농작물은 밀·보리·야채·사탕무·면화·포도·멜론 등이며 카스피해 연안에서는 벼·차·오렌지의 재배를 볼 수 있다. 농업에 있어서 국가투자, 생산자유화에 의한 활성화를 목적으로, 외국에 대한 판로 확장, 마케팅 등으로 수출시장을 개발하여, 전반적으로 개선되었다. 대추야자, 피스타치오, 화훼 등 수출용 농업 생산물의 확대, 대규모 관개 계획에 의한 1990년대의 이란 농업은 경제 부문 중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이 있었던 분야이다. 농업은 여전히 이란의 최대의 고용을 유지하고 있는 부문이다. 이란은 바이오테크놀로지와 의약품 제조 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주요 무역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 중국, 일본, 한국 등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시리아, 인도, 쿠바, 베네수엘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개발도상국과의 경제 협력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역내의 터키와 파키스탄의 통상을 확대시키고 있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시장 통합의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
이란 경제제재는 이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제제재로 인해 이란 리알의 가치는 폭락했다. 2012년에는 1달러에 16,000리알이던 것이 2013년 4월에는 36,000리알까지 떨어졌다. 2016년 1월 16일 이란이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을 잘 이행함에 따라서, 이란에 대한 모든 경제제재는 해제되었다.[2]
언어
이란인의 대부분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며, 이덕분에 페르시아어가 이란의 국어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여러 이란계 언어들이 드문드문 사용되고 있다.
이란 북부, 그중에서도 특히 길란과 마젠데란에서는 코카서스어 계열의 언어인 길라키어와 마젠데라니어가 매우 많이 사용되고 있다. 길란 지방에서는 인근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서 사용되는 언어인 타일리시어도 널리 사용된다. 또한 쿠르디스탄 지역에서는 쿠르드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루리와 라리어도 이란 남부에서 사용되고는 한다. 이란에서 페르시아어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아제르바이잔어이며, 그 외에도 여러 튀르크계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란에서 사용되는 여러 소수 언어들 가운데에서는 아르메니아어, 조지아어, 아랍어 등이 있다. 쿠제스탄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은 쿠지 아랍어를 사용하며, 키르카시아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들도 있다. 그러나 점차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에 동화되면서 키르카시아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수준이다. CIA의 월드 팩트북에 의하면, 이란 인구의 53%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며, 16%가 아제르바이잔어를, 10%가 쿠르드어를, 7%가 마젠데라니어와 길라키어를, 7%가 루리어를, 2%가 투르크멘어를, 2%가 발로치어를, 2%가 아랍어를 사용하고, 나머지 2%는 아르메니아어, 조지아어, 키르키시아어 등을 사용한다.
종교
이란의 국교는 시아파에 속하는 열두 이맘파이며, 대략 전체 인구의 90%에서 95%가 열두 이맘파에 속해있다. 그리고 전체 인구의 4%에서 8%가 수니파 무슬림으로, 주로 쿠르드인들과 발루치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2%는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로, 대부분이 기독교인, 조로아스터교도, 유대인, 바하이교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란 정부에서는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수니파를 공인하였으며, 이란 의회에서도 공식적으로 의석을 배정해주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고대 이란 계열의 종교에는 가장 대표적으로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등이 있었으며, 메디아, 아케메네스 제국, 파르티아 제국, 사산 제국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 지방에서 그 세가 왕성했다. 그러나 사산 제국이 멸망하고 본격적으로 이슬람교가 들어오면서 몇 백년에 걸쳐 점진적인 이슬람화가 이루어졌고, 16세기에 사파비 왕조가 본격적인 시아파로의 개종을 명령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구의 대부분이 수니파를 믿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로는 인구 대부분이 시아파로 전향하면서 시아파의 맹주 격인 국가로 변모하였다.
유대교는 이란과 굉장히 연이 깊은데, 가장 대표적으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루스 대제가 바빌로니아를 침공하여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내준 예가 심지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다만 현재는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현재에도 이란에는 8,700명에서 25,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이란에서 살고 있다고 전한다. 이 덕분에 현재 이란은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한편 기독교인의 경우, 대략 25만 명에서 37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으며, 이슬람교를 제외하면 공인받은 종교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세가 왕성한 종교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아르메니아인들이나, 이들 또한 정부와 사회의 압력을 받아 종교를 시아파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한편 이란 내에서 바하이 신앙은 정부의 공인을 받지 못했고, 이 때문에 정부의 탄압을 종종 받았다. 현재 바하이교는 이란에서 35만 명의 신도를 거느리며 이슬람 다음가는 제2의 종교이나, 1979년의 이슬람 혁명 이래 사형과 강제 개종, 시민권 거부 등 다양한 방법들을 통하여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와 술을 먹지 않지만 라마단 기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주요도시
야즈드
이란 중부의 도시이며 야즈드주의 주도로 이스파한에서 동남쪽으로 270km, 시라즈에서 동북으로 300km, 케르만에서 서북으로 300km 떨어져 있다. 이란 고원의 중앙에 위치한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 무역의 거점으로서 번영하였다. 인구는 53만 명이며, 이란에서 15번째로 큰 도시이다. 1375년에 지어진 금요일 모스크가 관광지이다.
야즈드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신' 이란 뜻이며, 사산 제국 시기에 국교이던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였다. 이름은 샤한샤 야즈데게르드 1세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지금도 당시 유적이 남아있고, 이슬람 팽창 이후로는 카비르 사막 지대에 위치한 입지조건 덕에 역사적으로 큰 변동이 없어 지금도 중세의 가족 중심 문화가 깊게 배어있다.
중세 시기에는 카쿠이 왕조의 수도였고 (1051 ~ 1141년), 그 후로는 토착 아타베그들이 통치하였다. 1297년 일 칸국에게 흡수되었다가 1315년에 복구된 아타베그 국은 1319년 무자파르 왕조에 의해 정복된다. 무자파르 조 역시 야즈드를 중심으로 삼았다가 1340년 케르만을 정복한 후 그곳으로 천도한다. 1350년, 무자파르 조와 대립하던 인주 왕조는 야즈드를 포위했으나 이듬해 격퇴되었다. 그후 1353년 반격에 나선 무자파르 조가 역으로 쉬라즈를 점령하며 인주 왕조는 멸망하게 된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큰 변고가 없이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평화 덕에 구도심에는 바자, 함맘(목욕탕), 시나고그(유대교 회당), 조로아스터교 사원, 이슬람 사원 등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탄성을 자아낸다. 또한, 사막에서 생존하기 위한 관개 시설인 카나트 시스템과 전통 가옥들도 완벽히 보존되어 현존한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3]
이스파한
이스파한은 이란 제3의 도시(2012년 현재 인구 175만명)이자 2번째로 큰 광역권의 중추도시다. 1946년 이스파한 대학교가 세워졌고, 이맘 광장과 함께 붙어있는 샤 모스크, 알리 카푸 궁전, 셰이크 로트 폴라 모스크 등이 가장 유명하지만 이외에도 반크 성당[13], 체헬 소툰, 시오세폴 다리, 커주 다리 등 볼거리가 많은 도시다. 이란 전통 수공예의 중심지이기도 한데, 나무, 금속, 뼈를 얇은 막대모양으로 만들어서 그걸 한데 엮어 무늬를 만들고, 일정한 패턴을 만든것을 얇게 켠 다음 목판위에 붙여 장식하는 허탐 커리(Khâtam kâri)와 동을 두드려서 만든 그릇이나 접시 위에 에나멜을 칠해 구워 도자기 비슷하게 만든 미너 커리(minâ kâri), 그리고 자잘한 터키석조각들을 동으로 만든 그릇 위에 붙여서 장식하는 피루제쿠비(Firoozekoobi)가 이 도시에서 만들어진다. 그 외에도 카페트나 다양한 전통 수공예 장인들이 사는 곳이다.
1987년 프랑스의 피에르 에르메라는 셰프가 이스파한이라는 디저트를 출시했는데 이스파한은 이전 페르시아의 수도명이기도 하지만 다마스크 품종의 장미 이름이기도 하다.
2015년 지하철이 개통되었으며, 그리고 왠지 모르게 이스파한의 시내 모습은 이란의 다른 대도시인 테헤란이나 쉬라즈에 비해서 조금 더 깔끔하게 정비가 된 느낌이다. 오리엔트 정교회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이스파한의 아르메니아인 거주구역 노르 주가는 레바논을 제외하면 중동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2017년 경상북도 경주시와 자매결연을 하였다.[4]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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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서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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