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루치스탄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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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치스탄은 이란 남동부에 위치해 있는 지역이다.[1]
목차
개요
발루치스탄은 주로 건조한 사막 지대이며 바다와 접해 있지만 역사적으로 항만 배후지가 잘 발달하지 못한 관계로 이웃 신드, 구자라트, 오만, 호르무즈 해협 지역이 해상 무역이 활발한 것과 다르게 해상 무역이 빈약한 편이다. 주로 발루치족이 산다.[2]
역사
케르만은 본래 사산 제국의 창건자 아르다시르 1세가 발루치스탄 방면 유목민족들의 습격을 대비하여 세운 베흐-아르다시르 (바르다시르) 요새에서 비롯되었다. 사산 제국은 바르다시르에 현재의 케르만 주와 비슷한 면적을 관할하는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644년, 이슬람 제국 (라쉬둔 왕조) 군대가 사산 조의 마지막 총독을 전사 시키고 일대를 정복하였다. 그럼에도 도시는 고립된 위치 덕에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 소수 종파인 카와리지파의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다만 후자는 698년,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후 인도 (신드) 원정의 거점으로서 아랍인들이 이주해 왔고, 725년경 시민의 대부분은 무슬림이었다. 그무렵부터 도시는 모직물 산업이 발달하였다.
일야스 왕조
9세기 무렵 아바스 왕조의 중앙집권이 약화되자 현 케르만 주 일대는 자치를 누렸다. 10세기 경부터 바르다시르는 현 지명인 케르만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932년, 사만 왕조의 장군이었던 소그디아나 출신의 무함마드 이븐 일야스는 내분에서 패배하자 남하하여 명목상으로 아바스 왕조의 영토이던 케르만 주를 점령, 독립하였다. 일야스 왕조는 2대 37년간 유지되었으나 결국 부와이 왕조에게 멸망하였다.
부와이 왕조
케르만을 정복한 부와이 왕조의 샤한샤 아두드는 983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그의 세 아들이 연이어 케르만을 다스렸다. 장남 샤라프와 차남 삼삼이 모두 요절하자 막내 바하 앗 다울라가 제국을 이어받았는데, 그는 1012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바하의 장남 술탄 앗 다울라가 이라크와 파르스를, 차남 카왐 앗 다울라가 케르만을 지배하였다. 카왐은 가즈니 제국의 도움으로 파르스를 침공했으나 격퇴당하였고 이로써 부와이 왕조는 분열되었다. 1024년, 술탄 앗 다울라가 사망하였고 아들 아부 칼리자르가 파르스를 상속받았다.[2] 이후 파르스와 케르만 간의 내전이 벌어졌는데, 1028년 카왐이 독살당하며 케르만은 아부 칼리자르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1048년, 아부 칼리자르가 사망하자 이라크와 파르스의 영토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 분할되었고, 케르만은 차그릴 베이의 아들 카부르트가 이끄는 셀주크 제국군에게 정복되었다.
셀주크 왕조
부왕 차그리과 형 알프 아르슬란의 치세 동안 케르만을 다스린 카부르트는 1053년 오만을 점령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1072년, 조카 말리크 샤가 즉위하자 이듬해 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튀르크 장수들 대부분은 카부르트를 지지했지만 말리크 샤의 유능한 재상 니잠 알 물크는 아르투크 왕조 등 비투르크 군대를 동원하여 그해 5월 16일, 하마단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추격전 끝에 카부르트는 사로잡혔고 니잠의 주장대로 그와 반란에 가담한 그의 네 아들은 처형되었다. 다만 반란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카부르트의 세 아들들은 사면되어 케르만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케르만 셀주크의 기원이 되었다.
카부르트의 장손인 이란 샤가 1101년 아사신 (이스마일파 암살단)에게 살해되자 막내 케르만 샤의 후손들이 아미르 직위를 이어나갔다. 12세기 들어 셀주크 제국은 와해되었고 케르만 셀주크는 사실상 독립하였다. 비록 1154년 오만을 상실하긴 했지만 1159년 무함마드 2세 사후 붕괴해버린 셀주크 제국[3]과 달리 실권을 유지하였다. 당시 케르만은 향신료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학문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아흐마드 산자르의 시대부터 호라산을 유린한 오우즈 부족은 호라즘 제국과 카라키타이의 압박에 밀려나 1179년부터 케르만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180년 대규모로 남하한 오우즈 족은 네르마쉬르에 정착하고 케르만 셀주크의 투란 샤 (케르만 샤의 증손)에게 충성을 서약하였는데 1184년 투란 샤가 암살되며 정국은 안개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편 1153년 산자르가 사망한 후로 호라산의 사라크를 장악한 오우즈 족장 말리크 디나르는 1179년, 호라즘-카라키타이 연합군이 침공해 오자 니샤푸르를 장악한 토간 샤에게 의탁하였다. 토간 샤는 일시적으로 사라크를 수복하였으나 1181년 재차 상실하였고 오히려 투스까지 빼앗겼다. 1185년 토간 샤가 사망하고 아들 산자르 샤가 즉위하였는데, 그는 말리크 디나르를 축출하였다. 이에 말리크 디나르는 동족 오우즈 족이 이미 진출해 있던 케르만으로 향하였다. 여담으로 1187년 호라즘 제국은 결국 니샤푸르를 정복하였고 산자르 샤는 애꾸가 되었다. 당시 케르만 셀주크는 투란 샤의 암살 이후 그의 조카 무함마드 샤가 즉위한 상태였다.
오우즈 부족 & 호라즘 왕조
말리크 디나르는 케르만 귀족들의 차별로 불만이 가득하던 오우즈 부족의 지도자가 되었고 무함마드 샤와 대립하였다. 곧 케르만 셀주크의 행정력은 붕괴하였고 무함마드 샤는 수도를 밤으로 옮겨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186년, 그는 지원 병력을 구하러 이라크로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말리크 디나르는 바르다시르를 점령하고 케르만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란 각지를 전전하던 무함마드 샤는 호라즘 왕조의 군대를 빌리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구르 왕조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말리크 디나르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 투란 샤의 여동생과 결혼하였고 호르무즈를 원정, 오만을 다시 복속시키는 등 케르만 경제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1195년, 말리크 디나르가 사망하고 아들 파루크 샤가 계승하였다. 하지만 부왕과 달리 그는 오우즈 부족을 통제하지 못하였고 케르만은 재차 혼란에 빠졌다. 파루크 샤는 셀주크 제국을 멸망시키며 강대해진 호라즘 제국에 의탁하려 했으나 그전에 사망하였다. (1196년) 그리고 그 의도대로 같은 해 호라즘 제국군은 오우즈 족을 격파하고 케르만을 병합하였다. 오우즈 족은 호라즘 군대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호라즘의 지배 역시 오래 가지 못하였다. 20여년 후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이란은 혼란에 빠졌다.
후서요 (쿠틀루그 칸국)
1210년 카라키타이(서요)가 호라즘 왕조에게 패배했을 당시 포로로 사로잡힌 거란 황족들이 있었다. 부라크 하집, 하미드 푸르라는 아랍식 이름으로만 전해지는 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무함마드 샤의 휘하 장수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220년, 칭기즈칸의 대침공으로 호라즘 제국이 와해되고 무함마드 샤가 피신지에서 병사하자 그들은 북인도의 델리 술탄 왕조에 의탁할 생각으로 남하하였다. 그러던 중 현재 이란 동남부인 케르만의 총독이 그들을 공격했는데, 부라크는 오히려 케르만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하였다. (1222년) 부라크는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에게 조공하여 그로부터 쿠틀루그 칸이란 칭호를 받았다. 거란 왕실은 본토인 동몽골에서 3000km 가 넘게 떨어진 곳에서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이들은 후서요, 쿠틀루그 칸국, 키르만(현대 중국어 발음으로 치얼만) 왕조 등으로 불린다. 1226년 부라크는 호라즘의 잘랄 웃 딘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이내 다시 복종하였다. 하지만 이후 몽골군이 다가오자 그에 복속하였고 이로써 다른 서아시아 지역들과 달리 케르만 일대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1235년 부라크가 사망하자 아들 루큰 앗 딘이 계승한다. 1252년 루큰이 사망하자 그의 사촌이자 하미드 푸르의 아들인 쿠투브 앗 딘이 부라크의 딸 쿠틀루그 투르칸과 결혼하고 즉위한다. 1257년에 쿠투브가 어린 아들 핫지를 남기고 요절하자 거란 귀족들은 핫지의 모친 쿠틀루그 투르칸을 공동 통치자이자 나머지 공동 통치자인 핫지의 섭정으로 세웠다. 훌라구 칸에 의해 그녀가 군주임이 확정된 1264년부터 케르만의 쿠트바(금요 예배 선언문)에서 쿠틀루그 투르칸의 이름이 앞섰고, 아바카 칸 덕분에 핫지와의 권력 다툼에 이긴 1267년부터는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녀는 딸 파디샤 하툰을 일 칸국의 아바카 칸(훌라구의 아들)과 결혼시키며 양국간의 우호를 다졌다. 하지만 1282년, 쿠틀루그 투르칸을 지지하던 아바카 칸이 사망하고 동생인 테구테르 칸이 즉위하였다. 그리고 몽골 왕녀와 결혼한 쿠투브 앗 딘의 서자 잘랄 웃 딘이 테구테르 칸의 승인을 받아 쿠틀루그 투르칸을 폐위시켰다. 그녀는 일 칸국의 수도인 타브리즈까지 가서 탄원했지만 효과는 없었고 1283년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한편, 아바카 칸이 사망하자 그의 차남인 게이하투 칸와 결혼한 (중세 몽골에선 남편 사후 부인이 의붓아들과 이어서 혼인) 파디샤 하툰은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1291년에 게이하투 칸이 즉위하자 파디샤 하툰은 그의 도움을 얻어 이복동생 잘랄 웃 딘을 처형하고 케르만의 두번째 여왕이 되었다. (1292년) 마르코 폴로는 그녀를 '경쟁자였지만 동생을 제거할만큼 대담한 군주'로 묘사했다. 그러나 1295년, 동맹이던 게이하투 칸이 사망하고 사촌인 바이두 칸이 즉위하자 그녀의 입지는 불안해졌다. 결국 같은 해 잘랄 웃 딘의 과부 쿠르두진은 바이두 칸의 승인으로 정변을 일으켜 파디샤 하툰을 처형하였다. 이후 5명의 군주가 더 재위했는데, 그 마지막인 쿠투브 앗 딘 2세는 조공을 제대로 안하다가 일 칸국의 올제이투 칸에 의해 폐위되고 말았다. (1306년) 케르만에는 나시르 앗 딘이 몽골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여담으로 폐위된 쿠투브 앗 딘 2세는 이란 중남부 파르스 지방으로 도주했는데, 그의 딸은 추후 무자파르 왕조를 창건하는 무바리즈 앗 딘과 결혼하였다. 1336년 일 칸국이 와해되자 무바리즈는 1340년 케르만을 정복하였다.
중근세 (사파비 왕조)
무자파르 왕조 시대인 1349년, 케르만에는 자미 마스지드 (금요일 모스크)가 세워졌다. 그러던 1387년, 케르만은 티무르 제국에게 정복되었고 이후 흑양 왕조, 백양 왕조를 거쳐 16세기 초부터 사파비 제국령이 되었다. 1596년, 케르만은 반란을 일으켰는데 아바스 1세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의 친구인 쿠르드 족 출신의 간즈 알리 칸이 총독이 되었다. 이때부터 케르만에는 키질바시가 주둔하게 되었다. 건축에 조예가 깊었던 간즈 알리 칸은 케르만 중심부에 1598년의 카라반사라이를 중심으로 하맘 (목욕탕), 바자르, 광장, 조폐소, 저수시설 등을 세웠다. (간잘리 복합단지) 이는 현재까지도 케르만 도심의 중심부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도들의 집이 파괴되었고 이슬람 성직자들의 탄압도 심해졌다. 따라서 그들은 아바스 1세에게 탄원하였다. (1600년) 이에 친히 케르만까지 행차한 아바스 1세는 조사 끝에 청원을 받아들여 조로아스터교도들에 대한 보호 칙령을 반포하였다. (1606년)
비록 문책을 당하였지만 간즈 알리 칸은 1611년 발루치스탄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1616년에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가하여 조지아 원정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1622년, 무굴 제국으로부터 칸다하르를 정복한 아바스 1세는 간즈 알리 칸에게 그곳을 맡겼다. 1624년, 그가 사망하자 아들 알리 마르단 칸이 칸다하르를 계승하였고 케르만은 타마스프 콜리 칸에게 넘겨졌다. 여담으로 알리 마르단 칸은 1638년 칸다하르를 무굴 제국에 넘기고 항복하였고 이후 펀자브 총독을 역임하는 등 천수를 누렸다. 한편, 간잘리 복합단지는 1631년 하맘을 마지막으로 완성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후 1660년대 들어 케르만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상관이 세워졌고 특산물인 카펫이 영국과 독일 등지로 수출되었다.
케르만 학살 (1794년)
18세기 들어 아프샤르 왕조를 거쳐 케르만은 1758년 잔드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1793년, 도시는 잔드 왕조의 마지막 군주 로트프 알리 칸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 카자르 왕조 군을 격퇴하고 케르만에 피신한 로트프 알리 칸은 6개월간의 격렬한 공성전 끝에 이듬해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케르만 시민들은 끝까지 알리 칸을 도와 저항하였는데, 그 대가로 카자르 조의 아가 무함마드 칸은 9일간 도시를 약탈하게 하였다. 그동안 시민들 중 2만여명의 성인 남성이 눈알을 뽑힌 후 살해되었고 그 눈알 덩이를 전시했으며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가 되었다. 젊은 미남 국왕인 로트프 알리 칸은 붙잡혀 고문당하고 죽었다. 로트프 알리 칸의 어린 아들은 거세되었고 왕비는 강간당하고 공주들은 성노예로 끌려갔다. 특히 가장 격렬히 저항했던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카자르 왕조 내내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케르만은 1801년 총독으로 부임한 이브라힘 칸에 의해 재건되었지만 현대에 들어서야 과거의 인구를 회복할 수 있었다.
현대
2003년 이란 일류신 Il-76 추락 사고가 나기도 하였고 2005년에 대지진을 겪었다.
2024년 1월 3일, 가셈 솔레이마니 추도식 도중 연속으로 폭발물이 터지는 테러 공격으로 구조대원 3인을 포함, 103명이 사망했다.[3]
발루치족
발루치족은 이란과 파키스탄에 살고 있는 종족이다. 발루치족은 12세기부터 이란과 파키스탄 국경 부근 오지에 거주해왔다. 총 인구는 약 800만 명에 이르며 동부, 서부, 남부 발루치족으로 구분된다. 언어는 인도-이란어족에 속하는 발루치어를 사용하며 쿠르드어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들이 대대로 살아온 지역은 한때 비옥한 땅이었으나 현재는 비가 올 때를 제외하고는 높고 메마른 바위산과 황폐한 사막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 수니파 이슬람교도로서 신앙심이 깊으며 봉건적인 부족 통치제도가 행해진다.
부족 대부분은 험한 환경조건에도 밀 농사 등의 농업에 종사하며 양, 소, 등을 사육하는 유목생활도 겸한다. 여름에는 산과 계곡의 진흙집에서 정착 생활을 하고 겨울에는 가축을 방목하기 위하여 평지와 바닷가 지역으로 옮겨간다. 최근에는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4]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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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발루치스탄〉, 《나무위키》
- ↑ 〈시스탄오발루체스탄주〉, 《위키백과》
- ↑ 〈케르만〉, 《나무위키》
- ↑ 〈두산백과: 발루치족〉,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발루치스탄〉, 《나무위키》
- 〈시스탄오발루체스탄주〉, 《위키백과》
- 〈케르만〉, 《나무위키》
- 〈두산백과: 발루치족〉,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서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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