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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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테가(Gitega)는 부룬디의 수도로, 기테가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약 13만 5천 명으로 옛 수도 부줌부라 다음으로 부룬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2019년 1월 16일 부룬디 정부가 부줌부라로부터 동쪽으로 약 62km 정도 떨어진 국토 중앙에 위치한 기테가로 수도를 이전했다.[1]
개요
기테가는 부룬디 중부, 루비론자강과 루루부강의 합류 지점에서 남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언덕으로 둘러싸인 넓은 고원에 있다.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의 상업수도 탕가니카호의 부줌부라, 동쪽의 탄자니아 국경과 각각 62km 떨어졌고 북쪽 르완다 국경 약 72km 떨어져 있다. 부룬디에서 가장 큰 루부부 국립공원 (Ruvubu National Park)은 동쪽으로 26km 떨어져 있다. 기테가는 17세기에서 1966년까지 부룬디 왕국의 왕도였다. 독일인들은 부룬디가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일부였던 1912년에 기테가 마을을 세웠다. 2007년 3월, 부룬디의 대통령 피에르 은쿠룬 지자(Pierre Nkurunziza)는 기테가가 부줌부라보다 수도로서 더 좋은 위치에 있다고 말하며, 부룬디가 수도를 기테가로 다시 옮길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2018년 12월 24일, 은쿠룬 지자는 기테가가 부룬디의 수도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예상된 의회의 동의(대통령의 CNDD-FFD당이 양원에서 여유 있는 과반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는 2019년 1월 16일 투표를 통해 도착했으며, 일부 부처는 이틀 후 이미 이동을 시작했다. 2021년 12월 7일, 기테가의 과밀한 교도소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최소 38명이 사망하고 69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교육기관으로 2014년에 설립된 기테가 폴리테크닉 대학교(Polytechnic University of Gitega)가 있다. 1972년 4월 29일 기테가에서 부룬디의 마지막 음와미(왕실)인 은타레 5세(Ntare V)가 살해되었다. 기테가에는 기테가 국립박물관이 있으며 여러 카옌다 왕실 보호 구역과 궁궐이 있다.[2][3]
부룬디
부룬디(룬디어: Uburundi, 프랑스어: Burund, 영어: Burundi) 또는 부룬디 공화국(룬디어: Repubulika y'Uburundi, 프랑스어: République du Burundi, 영어: Republic of Burundi)은 아프리카 중앙에 있는 나라이다. 수도는 기테가이다. 북쪽은 르완다, 동쪽과 남쪽은 탄자니아, 서쪽은 콩고민주공화국에 접하고, 남서쪽은 탕가니카호(Lake Tanganyika)를 사이로 콩고민주공화국과 국경을 이룬다. 1962년에 부룬디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였으나 1966년에 지금의 공화정이 되었다.
부룬디는 적도성 기후를 가진 내륙국이다. "아프리카의 심장"으로 불리며, 남서쪽에는 탕가니카호와 맞닿는 고원에 있다. 중앙 고원의 평균 고도는 5,600 ft이며, 국경에서는 이보다 낮다. 2,685m (8,809 ft)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카론제 산은 부줌부라의 남동쪽에 있다. 남동쪽과 남쪽 국경은 대략 1,370m 정도이다. 탕가니카 호수의 북쪽 루지지강을 따라가는 좁고 긴 땅은 유일하게 915m보다 낮은 지역이다. 이 지역은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서쪽 확장인 알버틴 단층의 일부를 형성한다.
땅은 대부분 경작지 또는 목초지인데, 이렇게 만듦에 따라 산림 벌채, 토양 침식, 서식지 상실이 일어났다. 산림 벌채는 인구의 지나친 증가에 따라 전 국토에 걸쳐 일어나서 단지 60,000헥타르 정도만이 남았으며 지금도 매년 약 9%씩 진행되고 있다. 국립공원은 두 개 있는데, 북서부의 키비라 국립 공원(르완다의 Nyungwe Forest 국립공원과 인접한 저산대 우림)과 북동부의 루루부 국립 공원(Rurubu)이다.
나일강의 가장 먼 원류는 부룬디에 있다. 비록 빅토리아호가 일반적으로 나일강의 수원으로 생각되지만, 카가라강은 빅토리아호에 이르기 전 690km를 흐른다. 카가라강의 상부 지류 루비론자강은 부룬디의 키키지산에 있다.[4]
역사
이 지역의 최초의 거주자는 피그미족인 트와족이다. 그들은 반투족의 이주 도중에 반투민족에 대부분 대체되고 흡수되었다.
부룬디는 16세기부터 독립 왕국으로 존재하였다. 1903년 부룬디는 독일 식민지가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벨기에에 넘어갔다. 부룬디는 1923년 벨기에에 의한 국제연맹의 루안다-우룬디 위임 통치령의 일부였고, 이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뒤 벨기에 행정부에 의한 유엔 신탁통치를 받았다. 부룬디 군주제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왕조의 창시자인 은타 레 루샤치가 17세기에 르완다로부터 부룬디에 왔다고 한다. 따른 보다 믿을 만한 출처에 따르면, 은타레는 동남쪽의 부하로부터 왔고 은코마 지역에 그의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1966년 군주제의 몰락 때까지, 왕정은 부룬디를 그 과거와 연결해주는 마지막 연결 고리로 남아 있었다.
1962년의 독립 때부터 1993년의 선거까지, 부룬디는 연이은 군부 독재자들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그들 모두는 소수민족인 투치족이었다. 이 기간 동안 1964년과 1980년대 후반의 주요 분쟁, 그리고 1972년의 부룬디 인종 청소를 포함한 광범위한 인종 폭력이 있었다. 1993년 부룬디는 최 초의 민주 선거를 치렀는데, 여기서 후투족 중심의 부룬디 민주 전선(FRODEBU)가 승리하였다. FRODEBU의 지도자 멜콰이어 은다다예는 부룬디 최초의 후투족 대통령이 되었으나, 수 개월 뒤 투치족 장교 그룹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이 죽음은 부룬디를 심한 내전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은다다예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무수한 투치족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투치족 위주의 군대는 비슷한 수의 후투족을 학살하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이러한 불안정의 시기는 1996년 이전 대통령 피에르 부요야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을 때까지 이어졌다. 2000년 8월, 두 개의 정치 그룹을 제외한 모두가 동의한 평화 협상은 민주정치의 부활을 위한 일정을 계획하였다. 수 년의 폭력이 더 계속된 뒤에, 2003년 부요야의 정부와 가장 큰 후투족 반군 그룹인 CNDD-FDD 간에 휴전이 조인되었다. 그 후 FRODEBU 지도자 도미티엔 은다이지예는 부요야의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가장 극단적인 후투족 그룹 Palipehutu-FNL (일반적으로 "FNL"로 알려져 있다)은 아직 협상을 거부하였다. 2004년 8월 이 단체는 부룬디 서부의 가툼바 난민 캠프에서 152명의 콩고계 투치 난민을 학살하였다. 이 공격에 대한 반응으로 부룬디 정부는 FNL 지도자 아가톤 르와사와 파스튀르 하비마나에 대하여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테러단체로 규정하였다.
2005년 5월, FNL과 부룬디 정부간에 마침내 휴전이 합의되었지만 전투는 계속되었다. 재개된 협상은 FNL이 무기를 내려 놓는 대가로 포괄적 사면을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 현재 진행 중이다. 2005년 중반의 일련의 선거에서 이전의 후투 반군인 National Council for the Defense of Democracy-Forces for the Defense of Democracy (CNDD-FDD)가 승리하였다. 2006년 9월 7일, 두 번째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부룬디 재건의 노력은 실질적으로 2006년 이후에 시작되었다. UN은 평화유지 임무를 종료하고 재건을 돕는데 다시 집중하였다. 경제적 재건을 이룩하기 위하여 르완다, 콩고민주공화국, 부룬디는 "대호수 국가 경제 공동체"를 다시 발족하기로 하였다. 또한 부룬디는 르완다와 함께 2007년 동아프리카공동체(EAC)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2006년 9월 정부와 마지막 남아 있던 무장 반군 단체 FLN과의 휴전 조약은 완전히 이행되지 않았고 FLN 고위 구성원은 그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며 휴전 감시 팀에서 떠났다. 2007년 9월 수도에서 FLN 당파간 충돌이 있어 20명이 죽고 주민들이 대피하기 시작하였다. 모반자 단속이 다른 지역에서도 보고 되었다. 모반한 당파는 무장 해제 및 정치범 석방에 있어 정부에 동의하지 않았다. 2007년 후반과 2008 초반에 FLN 전투원들은 이전에 이들이 살았던 곳의 정부가 보호하는 수용소를 공격하였다. 시골지역의 집들도 약탈되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2007년 보고서는 개선이 필요한 많은 지역을 언급한다. 민간인들은 FLN에 의해 저질러진 반복적인 폭력의 희생자이다. 이들은 또한 소년병을 모집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도 높다. 범죄자는 구속과 처벌로부터 벗어난다. 사법 시스템에 대한 개혁이 시급하다. 인종청소, 전쟁 범죄, 비인도적 범죄는 여전히 처벌되지 않은 채이다. 표현의 자유는 제한된다; 언론인들은 정당한 직업적 활동을 한 이유로 자주 체포된다. 2007년 1월에서 11월 사이 총 38,087명의 부룬디 난민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008년 3월 말, FLN은 그들을 체포로부터 잠정적으로 면제시켜 주는 것을 보장하는 법안을 채택할 의회를 찾았다. 이것은 일반적인 범죄까지는 덮어주지만, 전쟁 범죄나 비인도적 범죄와 같은 국제 인권법 위반을 막아주지는 않는다. 정부가 이것을 과거에 사람들에게 주었지만, FLN은 잠정적 면제를 받지 못하였다.
2008년 4월 17일 FLN은 부줌부라를 포격했다. 부룬디 군대는 반격했고 FLN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새 휴전 협정이 2008년 5월 26일 승인되었다. 2008년 8월 대통령 은쿠룬지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장관 찰스 은콰쿨라의 중재로 FLN 지도자 아가톤 르와사를 만났다. 이것은 2007년 6월 이래 첫 직접 만남이었다. 양측은 평화 협상 동안 발생할 수 있는 어떤 논쟁이라도 풀어낼 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기로 동의하였다.
난민 수용소는 이제 문을 닫았고 45만명의 난민들이 돌아갔다. 부룬디 경제는 산산조각났다. 2011년 기준으로 부룬디는 세계에서 1인당 총 수입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이다. 난민들이 돌아옴과 함께 소유권 분쟁이 시작되었다.
부룬디는 현재 아프리카 연합 평화유지군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는 알샤밥에 대항하는 소말리아 임무를 포함한다.[5]
기아문제
부룬디는 내부의 정치적 불안과 내전으로 인해 심각한 기아수준을 유지해왔다. 매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2010년-2011년 부룬디는 아동 발육부진율이 57.5%로 2011-2015년 자료와 추정치를 구한 모든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적합한 자료 활용이 가능해서 온전한 GHI 점수를 산출한 마지막 해였던 2014 세계기아지수 보고서에서 부룬디는 기아지수를 산출한 모든 국가 가운데 기아지수가 가장 높아 극히 위험한 단계에 해당했다. 부룬디는 1993년과 2005년 사이에 내전에 휩쓸렸고 그로 인해 끝내 전체 인구의 식량안보와 영양 상황이 악화되고 농업과 생태가 타격을 입고 경제 불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부룬디의 불안 수준은 2016년 초 증가해서 유니세프는 "큰 영양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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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아프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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