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불(火)은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여 연소하면서 에너지를 빛과 열의 형태로 방출하는 산화 과정이다. 보통 가연성 물질이 충분한 산소, 열과 결합할 때 발생한다. 원자가 고온의 상태에 놓이면 전자를 잃고 전리되는데, 이렇게 전리된 고온의 플라스마가 내는 전자기 파동이 불의 형태가 되어 보이는 것이다. 1777년에 프랑스의 화학자인 라부아지에가 증명한 불타는 현상인 연소는 산소와 다른 물질이 급속하게 결합하면서 생긴다.
인류는 불을 이용하여 조명으로 사용하고 체온을 보존하며 짐승으로부터 안전을 유지하고 음식물을 익혀 먹는 등 많은 이익을 얻었다. 이로 인해 영양소를 더 많이 흡수할 수 있게되어 뇌 발달 등에 큰 도움을 주었다. 불을 문명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물과 함께 불을 일으키기 위한 연료의 확보는 모든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자원이 되고 있다.
인간의 사고 속에서도 불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고대 그리스나 중국의 철학에서는 불은 원소의 하나로 생각되었으며, 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대표적으로 불을 숭배하는 종교는 배화교(조로아스터교)가 있다.
또한 불은 화재나 전쟁 등 죽음이나 파괴의 상징으로 여겨질 때도 있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 경복궁 화재 사건, 숭례문 방화 사건, 창경궁 문정전 방화사건 등은 불로 인하여 발생했다.
개요
불은 빛과 열을 내는 에너지로서, 인류 문명을 떠받쳐 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크게 다른 존재로 이 세상에 군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불의 발견과 이용에 있었다.
구석기시대부터 인간이 불을 사용해 왔음은 이미 밝혀져 있는 일이다. 불은 어둠을 밝혀 주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또한 추위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고 음식물 조리와 흙을 빚어 굽거나 쇠붙이를 녹여 가공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렇게 널리 문명의 불씨가 되었던 불은 또한 인간에게 여러 가지 상상력의 대상으로서 역사를 살찌워 주기도 하였다. 흔히 그것은 생명력 또는 창조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불은 또 가지고 있는 무서운 파괴력의 연상으로 흔히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청정(淸淨)한 힘 또는 정화의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 기술의 원천인 불은 우리 나라 역사에서도 그 나름의 전개 과정을 보여주었고, 상징으로서의 불 또한 역사의 뚜렷한 자취를 민속이나 관행 속에 남겨 주었다.
불의 역사
자연의 불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자연에서 일어나는 불과 사람이 만들고 보존해가는 불이 있다. 자연히 발생한 불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으로 일어나는 불과 땅에서 솟아오르는 지진·화산 등의 지각 활동으로 일어나는 불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산에서 나무끼리 부딪쳐서 저절로 불이 일어나는 일도 있다.
우리 나라 역사에도 이런 자연적인 불에 대한 기록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기록된 화재는 132년(신라 지마왕 21) 궁궐의 남문에 불이 난 경우이다. 그 뒤에도 삼국시대와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를 통하여 많은 화재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들 화재의 대부분은 원인이 설명되어 있지 않고, 또 당시로서는 가장 대형 건조물이었던 궁궐 등이 피해를 입은 경우가 많다. 이는 당시 사람들은 이런 불이 자연히 일어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이들 대부분은 실화이거나 아니면 일부 방화였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별로 강하지 않았다.
실제로 불이 저절로 일어날 수 있다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었다. 벼락이 떨어져서 건물 등이 불에 타다 남은 흔적들은 흔히 이곳 저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333년(백제 비류왕 30) 5월에는 별똥이 떨어져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태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있다.
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일어난 불이라는 뜻에서 '천화(天火)'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1324년(충숙왕 11) 3월에는 궤동리에서 불이 나 바람도 없이 번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여 사람들은 이를 '천화'로 여겼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 조선 초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 1417년(태종 17) 윤5월에 평안도 의주의 통사 허풍(許豐)의 집에 벼락이 쳐서 불이 나고 그의 아내가 벼락을 맞은 일이 있었는데, 이를 《태종실록》은 '천화'라 규정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자연의 불 외에 땅에서 저절로 솟아오르는 듯한 자연적인 불도 있었다. 신라 진평왕 때인 609년(진평왕 31) 정월에 경주 모지악(毛只嶽)의 땅 속에서 불이 일어나 가로 4보, 세로 8보, 깊이 5자의 땅을 10월까지 태우고 꺼졌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 657년(무열왕 4)에는 역시 경주 토함산에 불이 일어나 3년이나 계속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런 기록은 적지않게 남아 있다.
1445년(세종 27) 함경도 경성에서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그 곳 봉동에서는 가로 32자 반, 세로 12자 넓이의 땅이 타고 있었다고 하며,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경상도 상주에서 역시 땅에서 저절로 불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바로 이 경우를 비롯한 몇 가지의 지화(地火)에 대한 기록을 소개한 허봉(許篈)의 《해동야언》은 상주에서 이러한 보고가 있자 임금은 내관 이효지(李孝智)를 보내어 현장조사를 실시하였고, 그는 현장에서 타고 남은 돌덩이를 가져왔는데 이 돌을 불에 올려 놓았더니 불에 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아직 석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이효지가 상주에서 석탄을 가져다가 태워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땅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불 중에 화산의 경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에는 단 한 번 화산임이 분명한 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1002년(목종 5) 6월 탐라산(지금의 한라산)의 네 곳에서 붉은 용암이 솟아 나와 닷새 만에 그쳤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당시의 화산 폭발은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던 듯하지만, 이 땅에서 있었던 마지막 화산활동의 기록임이 확실하다. 왕실에서는 대학박사 전공지(田拱之)를 한라산에 파견하여 그 그림을 그려오게 하였다.
이러한 자연적인 불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은 '불귀신(화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수도 있었고, 또 재이설(災異說)에 좇아 지상의 잘못에 대한 하늘의 응징으로 여긴 경향도 강하게 보인다.
즉, 정치가 잘못되고 또는 어떤 인물의 행실이 잘못되었을 때 불이 일어난다고 해석하는 수가 많았다. 또 이런 화재는 때로는 그에 대한 조짐이 있어서 미리 예측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1090년(선종 7) 3월 어느날 밤에 크게 천둥 번개가 치더니 신흥창(新興倉)에 불이 나 많은 재물이 다 타버리고, 불꽃이 하늘을 찔렀다.
이에 어사대가 일관을 비판하여 "화재의 일어남에는 반드시 조짐이 있었을 터인데, 어찌 그런 보고가 없었는가?"하고 추궁하자, 태사승(太史丞)이 지난해에 화성이 천곤성(天困星)에 접근하여 이를 보고했으나 태사국 지사 최사겸(崔士謙)이 이를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두 관리가 모두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인공의 불
역사시대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충격법이나 마찰법으로 불을 만들어 사용할 줄 알았다. 충격법으로 불을 만들려면 부싯돌(차돌)을 황철광으로 세게 쳐서 불꽃을 만들고, 거기에 마른 쑥 같은 인화하기 쉬운 것을 달아 불이 붙게 했다.
마찰법은 구멍 뚫린 나무판을 고정시키고 그와 직각으로 나무막대를 구멍 속에 넣어 세게 마찰하여 나무막대에 불을 붙이는 방식이다.
이런 원시시대의 방법 외에도 오목거울이나 볼록렌즈를 써서 햇빛을 모아 불을 일으키는 방식도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오목거울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2세기부터의 일로 알려져 있고, 화경(火鏡)으로서의 오목거울은 양수(陽燧) 또는 금수(金燧)라고 알려졌다.
오목거울은 고려 때 많이 만들어졌고, 17세기 초에 간행된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오목거울로 햇빛을 모으고 거기에 마른 쑥을 대놓으면 불을 붙일 수 있다고 적혀 있다.
또 햇빛을 모아 똑같은 원리로 불을 만들 수 있는 볼록렌즈는 이미 통일 이전의 신라 때부터 혹은 그 전부터 화주(火珠)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실제로 일반 서민들이 불을 필요에 따라 새로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대개 가정에서는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켜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화로에 보관한 불씨를 죽이지 않고 지키는 일이야말로 그 집안 며느리 또는 주부의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민담에 전해오는 불씨를 지키기 위하여 온갖 고초를 겪는 며느리의 이야기가 그런 사정을 잘 보여 준다.
일반 가정에서는 불씨를 대대로 지켜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정부에서는 때로 새 불을 만들어 쓰는 격식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병조에서는 해마다 다섯 차례 불을 다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 5회의 개화(改火)는 각각 입춘·입하·토왕절·입추·입동에 행하며, 그 때마다 바닥으로 쓰는 널빤지 나무와 그 구멍에 넣고 마찰하는 막대가 각기 다른 종류를 쓰게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불을 새로 만드는 의식으로는 청명 때에 내병조(內兵曹)에서 실시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청명(淸明) 때 정부에서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로 불을 일으켜 각 관청에 나누어 준다고 적혀 있고, 《열양세시기》에는 같은 일을 한식 때 행했던 것으로 적고 있다.
한식에 내병조에서 버드나무를 뚫어 새로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은 그 불씨를 각 관청과 대신들에게 내려준다는 것이다. 《열양세시기≫에 이 일을 한식날에 행한 것처럼 기록된 것은 잘못이고, 《동국세시기》의 기록처럼 불을 만들어 새로 나눠 준 일은 청명날에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이유를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청명은 시기로 볼 때 한식과 같은 날이거나 아니면 하루를 앞서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 동지의 순간에서 꼭 104일 4시간 10분 정도 뒤인데, 한식은 동지 뒤 105일째의 날을 지정한 잡절이다.
한식에 음식을 데워 먹지 않는 풍습은 바로 청명에 새로 만들어 나눠 준 불이 시간이 걸려야 고관들의 집에 도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불도 일년 내내 같은 불을 계속해서 쓴다면 더러워지거나 기운이 쇠진한다는 뜻에서 옛사람들은 새 불을 일으켜 새 봄을 맞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을 만드는 방법은 1880년대 후에야 근대적인 것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한성주보》에 보도된 것처럼 조선에서 처음으로 성냥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영국인이 1885년 8월 서울의 양화도(楊花渡)에 성냥공장을 세우면서부터였다. 때를 같이 하여 석탄과 석유가 연료로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석탄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지식은 이미 조선 초에 알려져 있었음이 밝혀져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기 시작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석유 또한 개화기에 들어와 외국에서 수입하여 시중에서 판매하면서 특히 등유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연료가 알려지기 시작한 개화기는 또한 불에 대한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 그런 시기였다. 처음으로 전기에 대한 근대적 지식이 퍼지면서 제2의 불로서 그것이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둥 번개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고, 또 비단옷을 문지르면 '탁탁'하는 소리를 낸다는 것쯤은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이미 18세기 또는 그 전에 정전기현상에 대해 관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욱 근대적인 정전기현상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초 이규경(李圭景)이 남긴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서울에 뇌법기(雷法器)를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을 돌리면 번쩍번쩍하면서 불을 내며 여러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둘러서면 자극을 주기도 한다는 기록을 남겨 그것이 정전기 발생장치였음을 말해 준다.
실제로 전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수입한 전기시설이 궁궐 안에 설치되어 전등불을 환히 밝힌 때인 1884년 이후의 일이다.
1898년 4월 조선 황실과 미국인들의 협력으로 설립한 한성전기회사가 처음으로 동대문 발전소에 120㎾ 발전기를 설치하여 서울 진고개 일대에 전등을 달아 불을 켠 것이 우리 나라에 '제2의 불'이 켜진 시초였던 셈이다.
전기는 전신과 전차 등에도 이용되면서 자리잡기 시작했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후반까지 전기 사정은 어려운 형편이었다. 경제발전과 함께 한국에서 불은 곧 제3의 불이라는 원자력까지 포함하기 시작했다. 원자력 발전은 원자 폭탄의 개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42년에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과학자 페르미는 자신이 설계한 CP-1에서 처음으로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을 성공시켰다. 그 후 1945년에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전쟁에 직접 이용하는 비극을 목격한 인류는 1951년부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53년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엔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제창했으며 미국이 보유한 원자력기술을 세계에 공개했다. 이후 많은 국가에서 원자력발전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했다. 1956년에는 영국에서 최초로 상업용 원자로가 가동되었으며, 1957년에는 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62년에 트리가 마크 Ⅱ(TRIGA Mark-Ⅱ) 연구용 원자로가 처음으로 가동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1971년에 기공된 우리 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는 1978년부터 상업 운전을 시작했다. 그 후 1973년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석유의 대체 에너지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99년 말 현재 우리 나라에서 가동 중인 원자로는 총 16기로 전기 생산량이 세계 8위에 해당하며, 우리 나라 총 전기 생산량의 40% 이상(정확하게 41.39%, 1999년 현재, IAEA 보고서)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섬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나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로 붕괴 사건은 원자력 발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체르노빌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31명에 불과했지만 방사성 낙진으로 13만 4,000명의 주민이 영구히 이주하고 그 후 60년 이내에 구소련과 유럽에서만 2만∼4만 명이 방사능오염으로 사망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사건 후 원자력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퍼져 선진국에서 시민들의 반대로 핵발전소 건설이 지연되고 원자로의 주문이 취소되어 원자력산업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원자력 발전소 가동시 필연적으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 오염은 심각한 환경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전기가 조명을 위한 불로서 원시적인 불을 완전히 대체한 것과 달리, 열을 얻는 방법으로서의 불은 전기보다는 다른 것이 널리 이용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무를 때서 밥을 짓고 방을 덥히던 방법은 석탄을 사용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특히 석탄 사용은 1960년대 이후 늘어나어 다섯 가지의 연탄으로 규격화되어 난방용의 주류를 이루다시피 했고, 그 뒤에서야 산에 나무가 울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난방용 석탄 사용은 급격하게 감소했다. 1998년 현재 에너지 소비 중 석탄의 비율은 20.7%에 불과하다. 1988년에는 1년간 1,413만 4000톤의 석탄이 채굴되었으나, 이후 급격하게 감소되어 1991년에는 658만 톤이었고, 1999년에는 39만 6000톤에 불과했다.
우리 나라의 석탄 매장량은 약 15억 톤 정도이며 그 중 반이 경제적 효용성이 있어 채굴 가능성이 있다. 각종 가스는 우리 나라에서 새로운 형태의 불로 점점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스가 처음 이용된 것은 1909년 11월 3일, 용산에 있는 가스 제조공장에서 가스등용으로 점화식을 가지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민간용 도시가스는 1972년 5월에 서울시 직영으로 용산구 이촌동에 LPG/AIR 방식으로 3천 가구에 공급하기 시작했고, 그 해 11월 14일 강서구 염창동에 나프타 분해방식으로 공급한 것이 처음이었다.
1986년부터는 인도네시아에서 LNG를 수입하여 도시가스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오만, 카타르 등에서 수입하고 있다. 발전용 및 가정용 등으로 연간(2000년 추정치) 약 1,415만 톤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2000년 기준으로 보면 에너지 총소비량의 8.4%에 이른다.
이와 함께 석유 역시 중요한 연료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우리 나라에 처음 석유가 들어온 것은 1880년대 미국의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제품을 수입하면서부터이다. 알렌이 지은 ≪Korea Fact & Fancy≫의 연표에는 1898년에 서울 시내에서 석유등이 점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부터 석유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석유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큰데, 2000년 1/4분기 기준으로 에너지 총소비량 중 석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62.3%나 된다. 같은 기간에 원유의 수입 총량은 2억 2000만 배럴에 달한다.
최근에는 깨끗하고 거의 무한정한 태양열을 이용한 태양열 주택 등이 건설되어 태양을 직접 이용하거나 태양전지를 이용한 발전, 태양열을 이용한 발전, 풍력 발전, 소수력 발전, 파력 발전, 조력 발전, 해양 온도차 발전 등의 대체 에너지 개발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제4의 불이라고 할 수 있는 핵융합 에너지에 대해 세계 각지에서 연구의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불의 온도
불의 온도는 산소가 많을 수록 온도가 올라가기도 한다.
- 일반적인 온도
- 촛불의 불꽃: 1,400 °C
- 용접 토치의 불꽃: 2000 °C
- 분젠버너의 불꽃: 1,300 ~ 1,600 °C
- 소형발염기(blow torch)의 불꽃: 1,000 °C
- 담뱃불
- 흡입시 : 800 °C
- 흡입하지 않는 평상시 : 400 °C ~ 585 °C
- 눈에 보이는 불의 온도
불꽃의 온도는 빛깔에 따라 다르다.
- 빨간 빛깔
- 눈에 보임: 525 °C
- Dull: 700 °C
- Cherry, dull: 800 °C
- Cherry, full: 900 °C
- Cherry, clear: 1000 °C
- 주황 빛깔
- Deep: 1100 °C
- Clear: 1200 °C
- 흰 빛깔
- Whitish:
- Bright: 1400 °C
- Dazzling: 1500 °C
불의 구성물질
불의 구성물질은 다음과 같다.
점화법
라이터는 가장 쉽고 편하게 불을 낼 수 있지만 그만큼 지속적인 연료 보충이 필요하다. 연료를 구할 수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다음은 성냥이다. 습기에 약하고 물에 젖으면 못쓰는 단점이 있지만 일단 장기 보존은 라이터보다 우월. 그냥 가만히 놔둬도 연료가 증발하는 라이터와는 달리, 반영구적 보관이 가능하다. 케이스나 사포에 대고 긁으면 불이 잘 붙는다. 다만, 바람과 비가 오면 난이도는 수직 상승.
파이어스틸은 라이터와 성냥보다 더 어렵지만 매우 오래 간다. 장기 생존에는 더 도움이 되는 장비로, 불쏘시개 위에 쇠막대를 긁고 스파크를 낼 줄만 알면 오래 버틸 수 있다.
마지막은 도구 없이 나무만으로 점화. 레츠고 시간 탐험대 불피우기처럼 나무판에 무조건 비빈다고 해서 불이 나지 않는데 이유는 마찰 면적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앞뒤로 구멍이 뚫린 판을 이용한다면 마찰 지점에 막대기와 나무판의 마찰로 생긴 나뭇가루에 불씨가 생겨서 자연스럽게 밑으로 떨어지므로 불쏘시개로 받치고 작업하는 게 좋다. 구멍 난 판을 만들거나 구하기 힘들다면 나무를 반쯤 쪼개서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화재로 번질 땐 겉잡을 수 없을 만큼 통제가 안 되지만, 반대로 써먹어야 하는데 안 붙는 경우도 많다. 특히 야생에서 자연에 널려있는 물건 만으로 불을 피우거나 불씨를 지켜낸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몇 번 해보면 화석연료의 편리함에 얼마나 크게 의존해 왔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풀떼기를 이용해 불을 지피는 건 그다지 추천되지 않는다. 나무에 비해 오래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 특히 뿌리는 나무건 풀이건 불에 넣지 말자. 뿌리의 특성 상 물을 많이 머금는 데다 흙이 많이 묻어 있어 불이 오히려 꺼지는 경우가 많다.
발화점과 인화점
불이 붙을 수 있는 온도를 인화점이라고 한다. 발화점은 불이 저절로 불이 붙지만, 인화점은 한 지점의 연소반응이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느냐의 차이다. 대개 인화점이 발화점보다 훨씬 낮다. 인화점에서 물질의 열에너지(온도)+연소열로 확산되는 에너지=발화점에서 물질의 열에너지(온도)이기 때문. 그래서 발화점과 인화점의 차이가 커 인화점이 낮고 발화점이 높을수록 큰 에너지를 방출하여 오히려 위험하다. 비슷한 경우도 없지는 않다. 발화점이 상온과 근접한 경우 그러한 물질은 잘 사용하지 않고 인화성 물질들도 대부분 발화점은 100도 이상이므로 대부분은 인화점이 중요하게 간주된다.
물이 불을 끄는 원리 또한 물질의 발화점이 100도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인 데서 기원한다. 일회용 가스라이터 같은 경우 7~80도에서도 자연발화가 가능해서 가끔 폭발 사고가 문제가 되기도 하는 편. 발화점이나 인화점은 인화물질의 농도와 주변 산소의 농도에 따라 크게 달라지며 인화물질의 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지므로 액면 그대로의 값을 믿으면 안 된다. 고체나 액체 상태보다 기체 상태가 인화점이 낮으며 쉽게 기화가 가능할수록 인화점은 낮지만, 기체는 밀도가 낮으므로 단위 부피당 방출하는 에너지는 작다.
화재
특히 화재 진압은 초기 3분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하며, 한번 산불이나 대규모 화재가 났다 하면 사람의 힘으로 진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맞불을 놓거나 불이 진행하는 경로에 앞서 나무를 베어내어 탈 것을 제거해 막아내는 정도. 게다가 화재로 인해 가열된 공기가 상승기류를 만들어 불이 솟구치기라도 하면 화재 상황 시 최악의 시나리오인 화염선풍이 발생하여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린다. 도쿄 대공습 때의 도쿄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화염선풍마저 발생할 정도의 화재는 불에 직접적으로 닿지 않더라도 복사열만으로 멀리 있는 나무마저 태워버리기에 대형 산불은 진압이 아니라 전투에 비교해야 할 정도로 막는 것이 매우 힘들다. 게다가 대단위의 화재는 수증기 증발 가속, 공기 대류 촉진, 엄청난 재의 생성 등으로 일시적인 기후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굳이 화염선풍까지 가지 않더라도 목재가 많은 곳은 산은 물론 도시조차도 불이 한번 번지면 겉잡을 수 없이 커져서 일본의 경우 화재로 도시가 없어져 버린 일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에도시대에는 자의건 실수건 방화는 무조건 사형으로 다스렸다 한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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