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스랑
쇠로 갈퀴처럼 발을 만들고, 'ㄱ'자로 구부러진 한쪽 끝에 긴 나무자루를 박았다.
쇠스랑 발은 보통 3개이나, 지방에 따라 2개 또는 4∼7개가 달린 것도 있다. 논둑을 쳐내고 새로 붙일 때 흙을 긁어올리는 데도 쓰고, 흙덩이를 깨서 고르는 데도 쓴다. 또한, 밭을 파고 흙을 고르며 골을 타서 반반하게 고르기도 하고, 씨 뿌린 뒤에 흙을 덮기도 하며, 감자·고구마 등을 캐기도 한다. 이 밖에도 두엄을 쳐내고, 재를 퇴비와 섞는 일 등에 두루 쓴다.
근년에는 쇠스랑을 두엄치기에는 사용하지만 삶이나 갈이, 씨뿌리기에는 거의 쓰이지 않고, 쇠스랑 대신 서양에서 도입된 갈퀴(rake)를 쓴다.
개요[편집]
쇠스랑은 논밭을 갈고 썰 때, 파종 후 복토할 때, 또는 두엄·풀무덤 등을 쳐낼 때 쓰는 연장이다.
모양은 갈퀴모양으로 서너개의 발이 달리고 기역자로 구부러진 한쪽 끝에 나무자루를 박았다. 근래에는 서양의 포크처럼 발과 몸이 곧게 펴진 것을 쓰기도 하는데 이를 '호꾸'라 부른다. 한편, 강원도와 같이 나무가 흔한 곳에서는 가지가 두세 갈래로 벌어진 자연생의 물푸레나무를 이용하여 만들기도 한다.
수렁이 져서 소가 들어서기 어려운 논에서는 이것으로 파서 엎고, 덩어리진 흙을 깬다. 또, 밭의 흙을 파서 고르기도 하고 씨를 뿌린 뒤에 이것으로 흙을 덮기도 하며 두엄을 쳐내는 데에도 쓴다. 소가 갈고 남은 구석진 땅의 흙도 이것으로 다루며 밭에서는 등 부분으로 흙덩이를 부순다.
쇠스랑으로는 남자 한 사람이 하루에 1,000여 평의 밭을 고를 수 있다. 발이 두개인 것은 무게가 1.3㎏, 세 개짜리는 1.7㎏쯤 된다. 근래에는 쇠스랑의 목 부분을 한 번 더 구부려 힘을 더 잘 받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생산된다.
농가에서는 이것을 밤에 방문 밖에 놓아, 도둑을 잡기도 하였다. 달아나던 도둑이 쇠스랑 발을 밟으면, 자루가 벌떡 일어서서 이마에 큰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
상세[편집]
이빨이 보통 4개이거나 6개로 이루어져 있다. 써레와 비슷하다. 소쟁기가 없는 농가에서는 밭갈이를 할 때 쇠스랑이 많이 사용됐다. 흙덩이를 잘 고르게 하여 기름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쪽에서는 비탈진 밭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돌을 고를 때도 사용된다.
끝이 뾰족하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삼지창이나 기타 폴암처럼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 실제로 주로 농민들이 무기로 활용한 사례가 있다. 하지만 무기로 쓰기에는 이빨이 너무 많거나 자루나 이빨이 휘어 있는 등 여러모로 불편한 점도 있다.
미디어(특히 애니메이션)에서는 쇠스랑 끝부분을 밟고 반동으로 인해 날아오는 쇠스랑의 손잡이에 맞아 기절하는 슬랩스틱 코미디 클리셰가 많다.
또한 죽창드립과 비슷하게 서양에서 농민 반란, 마을의 자체적인 린치나 마녀 사냥 등을 일컬을 때 '횃불과 쇠스랑'(torches and pitchforks)이라 부르기도 한다. 스폰지밥, 티미의 못말리는 수호천사, 심슨 가족 등 미국 애니메이션에서 나온다. 더 위쳐 시리즈의 주인공인 게롤트역시 원작 소설 마지막 챕터에서 민란에 휩쓸린 와중에 쇠스랑에 맞아 죽었으며(..) 소설 이후를 다룬 게임 시리즈에서도 잊을만 하면 쇠스랑의 위험성을 설파하곤 한다
쇠스랑을 무기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캐릭터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저팔계다. 정확히는 쇠스랑 형태의 상보심금파(上寶沁金耙)라는 무기다. 서유기를 원작으로 한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에선 쇠스랑과 유사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나타난다.
영화 프릭스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조연 중 하나가 거대 거미를 무찌르려고 가져온다. 하지만 전기톱 든 사람이나 총든 사람도 죽어가는 통이라 한 마리도 못 죽이고 끔살당한다.
명칭[편집]
지역에 따라 '소시랑' · '소스랑' · '쇠시랑' · '소스랑이' · '쇠서랑' 등 비슷한 발음으로 불린다. 옛날에도 '쇼시랑'(『훈몽자회』) · '소시랑'(『해동농서』 · 『과농소초』 · 『임원경제지』) · '쇼시랑'(『사성통해』 · 『역어류해』)라 했고, 한자음으로는 小時郞(『증보산림경제』), 手愁音(『농사직설』)이라 쓰고. 한문으로는 鐵齒擺(『농사직설』) · 鐵齒鈀(『증보산림경제』) · 鐵杷子(『역어류해』) · 鐵搭(『과농소초』 · 『해동농서』 · 『임원경제지』) · 杷(『사성통해』)라 적었다.
경남 영산 지방에서는 삼지창과 비슷한 이른바 '포크(fork)'를 쇠스랑이라고도 한다.
구조 및 용도[편집]
쇠스랑은 괭이와 같은 구조를 가지지만 손가락 굵기의 끝이 뾰족한 2∼5 개의 발이 달렸다. 따라서 괭이보다 날이 땅에 잘 박히기 때문에 땅을 일구거나 흙덩이를 부수기에 좋다. 땅을 찍은 다음 자루를 들어올리면 흙덩어리가 일구어진다. 또한 쟁기로 간 흙덩이(쟁깃밥)를 쇠스랑으로 잘게 부수고 고르기도 했다.
쓰는 목적이나 토질에 따라 발의 수나 크기가 다른데 흙이 단단한 곳에서는 세 발 쇠스랑을, 부드러운 곳에서는 네 발 쇠스랑을 쓰고, 외양간을 치는데는 네 발 또는 다섯 발 쇠스랑을 썼다. 특히 두 발 쇠스랑은 갈이용으로 썼다. 『해동농서』의 '소시랑(鐵搭)'은 세 발이지만 내용에는 네 발, 여섯 발 쇠스랑도 사용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쇠스랑으로 한사람이 하루 1,000여 평의 밭을 고를 수 있으며, 밭갈이는 200여 평을 할 수 있었다.
외양간에 깔아두었던 짚이나 풀을 끌어낼 때, 끌어낸 짚이나 풀로 두엄을 만들기 위해 뒤집을 때 쓸모가 있다. 또한 밭을 파서 흙을 고르고, 씨를 뿌린 뒤에 흙을 덮거나 감자, 고구마 등을 캐는 데도 쓰인다.
유적 출토품[편집]
쇠스랑도 나무 쇠스랑이 있었는데, 광주 신창동 유적 출토품은 발이 세 갈래로 난 참나무로 만들었다(사진). 머리부분(頭部)에는 곧게 자루가 연결되는 장방형의 괴통이 있고, 괴통이 앞뒤가 경사지게 있어 자루와의 결합각이 60~70도 정도가 된다. 날은 가운데 날을 곧게 세우고 좌우를 대칭으로 파내어 중심을 향해 약간 휘어 있는 형태이다. 머리부분을 약간 경사지게 깎은 것은 신창동의 나무괭이와 비슷하다. 신창동유적에서는 날이 두 개만 있는 나무쇠스랑도 출토되었는데 날의 끝 부분이 몸체에서 직선으로 벌어져 있다
양장리 유적에서는 모두 3점의 나무 쇠스랑이 출토되었는데 상수리나무 판재를 깎아 만들었다. 몸체가 완전히 남아 있지는 않으나 아래 부분의 양 바깥쪽을 모나게 했는데, 아마도 자루와 묶기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발은 도구를 이용하여 깎아낸 흔적이 있으며 사용한 것이라서 끝이 둥글게 마모되었다. 신창동의 나무쇠스랑과는 달리 괴통이 없어 확실한 연장의 기능을 추정하기가 어렵다. 또 날의 허리부분이 오목하게 들어간 것으로 보아 곧은 자루를 달아 따비처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문화재관리국에서 1969년에 발간한 『한국의 농기구』를 보면 강원 도계 · 경남 영산에서 '쇠스랑' 혹은 '호꾸'라고 부르는 숟갈모양의 스페이딩 호크가 수록되어 있는데 양장리의 나무쇠스랑에 자루를 평행하게 연결한 모습과 유사하다. 물론 굽은 자루를 달아 일반적인 쇠스랑처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다.
철제 쇠스랑은 갈퀴모양의 세 가닥 발에 괴통이 직각으로 있어 나무자루가 직각이나 예각으로 연결된 것을 알 수 있다. 쇠스랑에 나무자루가 달린 완전한 모양은 이성(二聖)산성 내 저수지 출토품이 유일하다. 쇠스랑은 3-4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5-6세기 대에는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무안 양장리 유적의 예에서 보듯이 쇠스랑 출현 이후에도 나무 쇠스랑은 일정기간 계속 존속했다. 철제 쇠스랑은 황오리 16호분 등 경주의 여러 고분 외에도 서울 구의동유적 · 아차산성 · 이성산성 · 대모산성 · 경주 안압지 · 월성 해자 등 생활유적에서 수십 점이 출토되었다. 산성 등에서 실제 사용하고 폐기한 것으로 추정되는 쇠스랑들을 보면 돌이 많고 거친 토지를 다스리는데도 사용된 것 같다. 그리고 일부 갈고리형(鉤戈) 무기로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