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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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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土器, earthenware)

토기(土器, earthenware)는 으로 만든 그릇을 말한다. 신석기 시대에 발명되었다고 여겨진다.

점토에 조개껍질·운모·석영· 등을 섞어서 토기를 만든다. 토기는 물이나 곡물을 담는다든지, 곡물을 저장한다든지, 물건을 삶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토기의 모양은 손으로 빚는다든지, 점토를 가늘게 꼬아서 말아 올린다든지(卷上法), 고리 모양을 쌓아올리는 방법(輪積法)으로 만들어져서 요철(凹凸)을 정형하고 토기의 살갗을 마연(磨硏)한다. 정형이나 마연할 때에 무늬가 새겨지고 그 다음에 가마에서 굽는다.

이윽고 회전반(回轉盤)이 발명되어 토기의 성형(成形)이 쉬워지고 고패가 발명되어 대량으로 균질의 토기 제작이 가능해졌다. 또한 오리엔트에서는 장토(粧土)를 하고 그 위에 적색계통의 안료로서 무늬를 그린 채문토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토기에 유약을 바른 도기가 만들어졌다.

개요[편집]

토기는 흙을 빚어 5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소성시켜 만든 용기를 말한다. 고고학에서는 800도 이상의 온도에서 구워진 것을 도기(陶器), 1000도 이상 올라가고 유약이 발린 것을 자기(瓷器)라고 하지만 통상적으로 삼국시대에서 남북국시대까지는 토기, 고려~조선시대에는 유약이 발린 것을 자기, 그렇지 않은 것을 도기로 보는 경향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토기'라는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로 원래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단어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도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토기라는 단어가 정착되어 많이 사용된다. 미술사 연구자들은 토기보다 도기라는 용어를, 고고학 연구자들은 반대로 토기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토기는 유약, 돌가루 등을 쓰지 않기 때문에 색깔과 경도(硬度)는 온도, 가마기술에 따라 달라진다. 때문에 높은 온도에서 구워지지 못한 신석기 시대 토기들은 물에 오랫동안 넣어두면 녹기도 한다. 기와, 화분 등 현재의 토기는 가마를 이용해 만들지만, 과거에는 구덩이에 토기를 넣고 땔감을 위에 쌓은 후 불을 붙여 만드는 노천 소성 기법이 많이 쓰였다. 재질은 흔히 흙을 빚어서 초벌구이와 재벌구이를 하여 만든다. 토기(도기)는 유약을 사용하느냐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유약을 사용한 토기도 있고, 사용하지 않은 토기도 있다. 화려한 토기에는 색을 넣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고고학적으로 토기는 대단히 많은 점을 시사하는데, 토기의 등장은 인류가 신석기 시대를 맞이하여 정착생활을 하였음과 그에 따른 주거공간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이전 구석기 시대에 인류는 이동생활을 해왔기에 어쩌다 있는 동굴을 제외하곤 일정한 주거공간이 없었으며, 이렇다할 가재도구가 필요하지도 둘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세계 선사시대 토기의 발전상에 있어 공통적인 특징은, 신석기 시대에 비해 청동기 (혹은 금석병용기) 시대 토기는 더욱 투박해지고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ex 빗살무늬 / 채색토기 -> 민무늬 / 무채색토기) 이는 기존에 수공업으로 일일이 만들어 소중히 여겼던 토기가, 직업 분화 및 사회와 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생산 시대가 열리며 빠른 보급과 판매를 위해 단순화되었기 때문이다.

매우 오래 전에 사용한 원시적인 세라믹이지만 현대에도 사용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벽돌이며, 화분 중에서도 유약을 바르지 않고 흙을 구워 만든 토분이 있다.

신석기시대[편집]

기술의 진보로 식량을 저장하거나 익혀먹기 위해 토기가 발명되고, 수렵과 농경을 위한 도구로 마제석기가 사용되었다. 기원전 6500년경, 북이라크의 쟈르모나 팔레스티나의 예리코에서 최초의 농경·목축이 시작되며, 기원전 6천 년경에는 이집트도 농경의 중심지대가 된다. 드디어 기원전 5천 년경에는 오리엔트 지방 일대가 신석기시대로 접어들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마제석기 시기와 토기를 갖게 되지만, 농경·목축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가 오래 계속되다가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아서 기원전 3천 년경까지에는 거의 모든 지방에서 농경·목축을 실시하게 된다.

이집트의 토기[편집]

이집트의 토기는 일반적으로 조잡한 제품이고 질이 좋은 것은 상(上)이집트에 한정되었다. 선왕조 시대에는 흑정토기(黑頂土器=블랙 톱)와 채문토기(彩紋土器=배와 동물의 무늬) 및 적·흑색 마연토기(磨硏土器) 등이 현저하였으며 녹로는 초기 왕조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왕조시대에는 기술이 침체하고 문양은 단순 또는 소멸하여 실용기화됨으로써 파이안스에 그 주역을 넘겨 주게 되었다. 용기 외에 인물이나 동물에 흡사한 조형적인 것도 있다. 토기에 광택을 내는 방법은 기원전 4세기경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의 토기[편집]

부뚜막모양 토기, 경기도 박물관 소장
빗살무늬 토기
민무늬 토기

토기는 보통 500~1000℃ 이하에서 구워지지만 그 이상에서 구워진 것은 도기(陶器)라 부르고, 유약을 바른 것을 자기(磁器)라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오는 유약을 바른 자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기라 부른다. 토기는 만들기 쉬운 반면 부서지기 쉬워서 신석기시대 이래로 유적 출토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물이다.

각 시대별로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민무늬토기(無文土器),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 삼국토기(三國土器), 통일신라토기(統一新羅土器) 등이 있다. 신석기시대는 빗살무늬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덧띠무늬토기(隆起文土器), 단도마연(丹塗磨硏)토기, 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토기 표면에 빗같은 다치구(多齒具)의 시문구로 새기거나 그어 만든 각종 문양이 들어가 있는 토기로 기본적으로 첨저(尖底)에 포탄형을 이루나 일부 평저(平底)의 기형도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손으로 빗고 한데가마(露天窯)에서 만든 토기이다. 문양 구성이 기하학적인 선을 배합하여 만들었다고 하여 기하문토기(幾何文土器)라고도 하고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無文土器)에 상대되는 말로 유문토기(有文土器)라고 부르기도 한다.

빗살무늬토기는 B.C. 6000~5000년 전에 출현하였다고 보는데 중국 동북지방, 시베리아 등과 멀리 북부 유럽에서도 분포하고 있어 북방문화권(北方文化圈)을 이룬다. 덧띠무늬토기(隆起文土器)는 토기 표면에 가는 점토띠를 손으로 붙여 만든 토기로 부산 동삼동 유적을 비롯한 남부지역에서 발견되는데 빗살무늬토기보다도 더 아래층에서 발견되고 있어 더 이른 시기의 토기임을 알 수 있다.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는 토기 표면에 붉은 칠을 하고 마연한 토기로 남부지역의 신석기시대 후기에 나타난다. 채문토기(彩文土器)는 나진 초도 유적과 평북 용천 신암리 등 북부지방 일부에서 발견된다. 이는 토기를 구운 후에 적색·황적색 등으로 표면에 문양을 그렸는데 태토와 채색수법이 중국 요령지방의 토기와 유사하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紅陶), 검은간토기(黑陶) 등이 있다. 민무늬토기는 일반적으로 갈색 내지는 황갈색의 색상, 무문양, 납작바닥(平底)을 기본으로 하는 기형, 장석·석영립 등 화강암계의 굵은 사립이 섞인 태토를 사용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민무늬토기는 빗살문토기와 마찬가지로 손으로 빚고 한데가마에서 구웠는데, 지역마다 그 형태가 다른 독특한 기형의 토기가 있다.

즉 압록강 중상류에 분포하는 공귀리식토기, 청천강 이북과 중국 동북지역에 널리 분포하는 미송리식토기, 대동강과 재령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팽이형토기(角形土器), 충청도와 전라도에 분포하는 송국리식토기, 전역에 고르게 분포하는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골아가리토기(口脣刻目土器), 한강 이남에서 청동기시대 후기에 나타나는 아가리띠토기(粘土帶土器) 등이다. 붉은간토기는 고운 흙을 사용하고 표면을 반들거리게 만들고 산화철을 바른 것으로, 기형은 둥근 바닥의 긴 목을 가진 단지이다. 함경지방으로부터 중부지역을 거쳐 남부지역까지 분포하고 있는데 고인돌과 주거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검은간토기는 흑색마연토기라 불려지기도 하는데 긴목항아리를 기본으로 청동기들과 함께 출토되는 예가 많아 청동기시대 후기에 속한다.

철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와 타날문토기가 사용되었다. 민무늬토기에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가 발전되어 경도가 높아지고, 기형이 다양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라고도 부른다. 또한 중부지역에서는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라 불려지는 입바라진항아리(外反口緣壺)가 특징인 반면에 남부지역에서는 단면삼각형 아가리띠토기(三角粘土帶土器)가 특징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기형이 있는데 깊은바리(深鉢)모양, 독(甕)모양, 항아리(壺)모양, 손잡이, 굽다리, 바라모양토기와 잔, 시루, 굽다리접시, 토기뚜껑 등이 있다.

타날문토기(이는 종래 金海式土器에 해당됨)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에 비해 태토가 정선되고 손으로 빚는 대신에 회전축이나 녹로를 사용하여 기벽이 일정하고 기면에는 타날문이 찍혀 있다. 가마도 종래의 개방된 노천요(露天窯)가 아니라 지붕을 씌운 터널형의 굴가마(登窯)를 채용하여 높은 화력을 내어 매우 단단한 토기를 구웠다. 타날문토기에는 경도에 따라 연질과 경질로 나누고, 색상에 따라 연질은 적갈색, 회색, 흑색, 회백색 등으로 나누어지고, 경질은 회청색을 띤다. 낙동강유역의 널무덤과 덧널무덤에서 많이 출토되는 연질회색토기는 타날문토기에 속하며 기형에는 목긴항아리, 항아리, 주머니호, 화로모양토기 등이 있다. 이는 와질토기(瓦質土器)로도 불린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각각 특징적인 토기들이 제작되고 사용되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한식(漢式)계통의 회색 또는 흑회색의 납작바닥토기, 손잡이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표면을 마연하여 광택이 나는 마연흑도도 있고, 입큰납작바닥네귀항아리(廣口平底四耳壺)와 뚜껑이 있는 원통형 삼족기(三足器)도 있다. 표면은 대체로 무문(無文)이지만 직선(直線), 파상문(波狀文), 연화문(蓮花文) 등이 어깨 부분에 시문되어 있다.

백제토기에는 승석문(繩蓆文)이 보편적으로 시문되고, 삼족기가 존재하며 납작바닥토기가 많고, 형태가 특이한 그릇받침(器臺)이 출토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백제토기는 태토나 색상으로 보아 3종류로 나누어진다. 태토가 민무늬토기처럼 거칠고 화분형이 많은 적갈색연질토기, 표면이 잘 마연된 흑색토기, 그리고 경질과 연질의 회청색토기가 있다. 기형에는 둥근바닥항아리, 납작바닥항아리, 굽다리접시, 세발토기, 뚜껑접시, 벼루 등이 있는데 초기에는 둥근바닥이 유행하다가 중기 이후에는 납작바닥이 많아진다. 또한 뼈단지(骨壺)도 많이 제작되었다.

신라토기는 타날문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정선된 태토에 굴가마에서 환원염으로 구웠으며 녹로를 사용하여 다량으로 생산하였다. 고온으로 구워진 경질토기로 흡수성이 거의 없고 표면에 유약을 바르지 않았으나 자연유가 부분적으로 덮여지는 경우도 있다. 기형은 기본적으로 굽다리접시와 목긴항아리가 있으며, 특색 있는 기형에는 동물형토기와 토우가 있다. 세부 형식에서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나누어진다. 신라군은 자체적으로 토기가 발전한 반면에, 가야군은 청동기나 목기의 형식을 본뜨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는 태토나 소성이 신라토기와 같으나 기형이나 문양에 많은 변화가 있다. 즉 기대(器臺)나 이형토기(異形土器)가 없어지고, 굽다리접시, 목긴항아리의 받침이 짧아지며, 뚜껑 꼭지가 보주형으로 변한다. 또 입넓은목긴항아리, 납작바닥목긴병 등이 나타나며 문양에서도 종래의 기하학적 요소에서 화려한 인화문(印花文)으로 변화된다. 이 시기는 불교의 성행으로 화장용 뼈단지가 많은 것이 특징이며 녹유(綠釉)를 시유한 토기가 출현한다.

참고자료[편집]

  • 토기〉, 《위키백과》
  • 토기〉, 《고고학사전》
  • 토기〉, 《나무위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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