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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썸네일|300픽셀|'''아이티''' 국기 '''아이티'''(프랑스어: Haïti, 영어: Haiti)또는 '''아이티 공화국'''(프랑스어: Répub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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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와 민주화===
 
===쿠데타와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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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드 뒤발리에가 축출당하고 망명하자, [[앙리 낭피]] 중장이 권력을 잡았다.  
클로드 뒤발리에가 축출당하고 망명하자, 앙리 낭피 중장이 권력을 잡았다. 낭피는 비밀 경찰 제도를 해체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87년 3월 국민들에 의한 대통령과 법률의 선거를 규정하는 헌법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민간 선거인들에 의한 선거관리를 군부로 옮기려 하였다. 대통령 선거가 1987년 11월 29일에 치러질 예정이었으나, 투표장들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선거인들을 공격한 결과로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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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1월에 새 선거가 실시되어 의회와 민간인 대통령을 뽑았으나, 6월 낭피는 정부를 무너뜨리고 자신을 군사 정권의 우두머리로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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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9월에 아이티의 대통령 경호원 부대들은 낭피를 축출시켰다. [[프로스페르 아브릴]] 중장이 대통령이 되어, 독재자로 정권을 잡았다.
1988년 1월에 새 선거가 실시되어 의회와 민간인 대통령을 뽑았으나, 6월 낭피는 정부를 무너뜨리고 자신을 군사 정권의 우두머리로 선언하였다. 9월에 아이티의 대통령 경호원 부대들은 낭피를 축출시켰다. 프로스페르 아브릴 중장이 대통령이 되어, 독재자로 정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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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3월 아브릴 대통령은 그의 통치에 반항하는 데모에 의하여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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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12월 아이티 국민들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90년 3월 아브릴 대통령은 그의 통치에 반항하는 데모에 의하여 사임하였다. 12월 아이티 국민들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91년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선출된 좌파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1991년 9월 라울 세도라 장군의 군부 쿠데타로 아리스티드를 축출했고, 그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아리스티드 지지파인 《아이티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전선》은 많은 이들이 살해되었다. 그 조치로 미주 기구(OAS)는 아이티와 무역에 보이콧하였다. 그러자, 많은 아이티인들이 작은 보트를 타고 미국으로 탈출하려했다. 먼저, 미국 정부는 피난민의 대부분을 아이티로 돌려보냈다. 후에 피난민들은 쿠바의 관타나모 만에 있는 미군 기지로 보내졌다. 군사 정권은 유엔(국제 연합 아이티 미션)과 미국의 군사 작전, 경제 제재 등 압력, 또는 군사적 압력을 받고 정권을 반납하게 된다. 세도라 장군이 하야하고 아리스티드가 1994년 대통령에 복귀했다. 1996년, 아리스티드파인 르네 가르시아 프레발이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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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선출된 좌파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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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9월 [[라울 세도라]] 장군의 군부 쿠데타로 아리스티드를 축출했고, 그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2000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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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티드 지지파인 《아이티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전선》은 많은 이들이 살해되었다. 그 조치로 미주 기구(OAS)는 아이티와 무역에 보이콧하였으며 [[유엔]]과 미국은 아이티 정부에 경제 제재 또는 군사적 압력을 주었다.  
2001년에는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의 지도력 아래 아이티는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정을 겪어 4년 만에 쿠데타로 쫓겨난다. 그 후 아리스티드는 아프리카로 피난갔다.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이 다시 아이티에 도착하였고, 과도적 정부가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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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세도라 장군이 하야하고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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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아리스티드파인 [[르네 가르시아 프레발]]이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2004년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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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에는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2004년에 몰아닥친 홍수와 열대성 폭풍 진(Tropical Storm Jeanne)에 의하여, 5,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2004년 2월 5일 《아이티 해방 재건 혁명 전선》이 북부의 마을 고나이브로에서 봉기 했다. 1994년 이후에 군의 해체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반정부 무장 세력에 대해 정부 측은 무력으로 충분한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2월 29일,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사임하고, 이웃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출국했다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망명했다. 아렉산드르 최고재판소 장관이 1987년의 헌법의 규정에 따라서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아리스티드 전대통령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있어 프랑스군의 보호 하에 들어갔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미국의 관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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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티는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정을 겪으면서 2004년에 쿠데타로 쫓겨난다. 그 후 아리스티드는 아프리카로 피난갔다.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이 다시 아이티에 도착하였고, 과도적 정부가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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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아이티 국민들은 의회를 뽑았고, 2월에 대통령 선거를 통해 [[르네 프레발]]이 51%의 득표율로 당선하였고, 5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프레발은 가난한 아이티인들을 후원하는 희망당의 당원이었다.
삼자평의회는 즉시 지식인 회의를 시작하여 유엔 사무국에 있던 라트르츄를 수상으로 지명하여, 정부를 구성했다.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유엔은 임시 대통령 아렉산드르의 요청에 근거하여 다국적 임시군(MIF)의 현지 파견을 승인했고, 3월 1일에는 미군을 주력으로 아이티에 상륙했다. 4월 20일에는 〈안보리 결의안 1542호〉가 채택되어 MIF의 후속으로서 브라질 육군을 주력으로 하는 《국제연합 아이티 안정화 미션》(MINUSTAH)을 설립하고, 치안 회복 등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여러 차례 기간 연장으로 2011년에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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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포르토프랭스와 레카이에서 식품 가격의 인상을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의회는 자크-에두아르 알렉시 총리를 면직시키는 투표를 하였고, 9월 미셸 피에르-루이가 아이티의 두 번째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해에 몰아닥친 열대석 폭풍과 허리케인에 의하여, 수백명의 국민과 수천명의 노숙자들이 사망하였다. 고네이브(Gonaives)가 크게 파괴되었고, 아이티의 농업은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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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미셀 마르텔리]]농민행동당(Repons Peyizan)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하여, 2011년 4월 20일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6년 재선거
 
2006년 아이티 국민들은 의회를 뽑았고, 2월에 대통령 선거를 통해 르네 프레발이 51%의 득표율로 당선하였고, 5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프레발은 가난한 아이티인들을 후원하는 희망당의 당원이었다.
 
 
 
2008년 폭동
 
2008년 포르토프랭스와 레카이에서 식품 가격의 인상을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의회는 자크-에두아르 알렉시 총리를 면직시키는 투표를 하였고, 9월 미셸 피에르-루이가 아이티의 두 번째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해에 몰아닥친 열대석 폭풍과 허리케인에 의하여, 수백명의 국민과 수천명의 노숙자들이 사망하였다. 고네이브(Gonaives)가 크게 파괴되었고, 아이티의 농업은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2010년 대지진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2010년 아이티 지진입니다.
 
2010년 아이티 지진은 2010년 1월 13일 한국시각 오전 6시 53분 9초, 1월 12일 현지 시각 오후 4시 53분 9초에 아이티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아이티의 수도인 포르토프랭스 인근 지표면으로부터 13 킬로미터 깊이에서 발생했다.[10]
 
 
 
이 지진으로 아이티 대통령궁(르네 프레발 아이티 대통령은 무사했다.)과 국회 의사당을 포함한 포르토프랭스의 주요 건물들이 붕괴했거나 손상됐으며, 감옥, 공항, 병원과 같은 시설도 폐쇄됐다.[11][12] 그리고, 포르토프랭스의 교도소가 무너져 약 4000명에 이르는 수감자가 탈출했다. 국제 적십자 위원회는 이번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인구가 아이티 전체 인구의 1/3인 3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 바 있었다. 실제 사망자는 22만 명이 넘었으며 부상자 수는 30만 명에 달하였다.[13] 지진의 원인은 아이티를 지나는 엔리퀼로-플렌테인 가든 단층(en:Enriquillo–Plantain Garden fault zone)의 이동으로 추정된다.[14]
 
 
 
2011년 대통령 선거
 
2010년 인기가수 출신인 미셀 마르텔리가 농민행동당(Repons Peyizan)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하여, 2011년 4월 20일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11년 5월 14일 수도 포르토프랭스 대통령궁 앞 광장에서 국내외 주요 인사 1,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아이티 대통령직에 공식 취임했다.
 
  
 
== 지리 ==
 
== 지리 ==
전체 면적은 1,284,000 km2이며 세계에서 21번째로 큰 나라이다. [[페루]]보다 조금 작으며 [[남아공]]보다는 약간 수준이다. 차드는 중앙 아프리카에 위치하였으며 북쪽은 [[리비아]], 서쪽은 [[니제르]]와 [[나이지리아]], 남쪽은 [[카메룬]]과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동쪽은 [[수단 (국가)|수단]]과 이어져 있다. 차드는 아프리카의 중심에 위치하였고, 오랜 내전과 부정부패로 인해 "아프리카의 죽은 심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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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는 [[대앤틸리스 제도]]의 서쪽 지역에 있는 섬으로서 두 번째로 섬이다. 아이티는 [[카리브 제도]]에서 [[쿠바]]와 [[도미니카 공화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나라이다. 쿠바와는 8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아이티의 지형은 산세가 드센 편이고 해안 지대에는 작은 평원과 강, 계곡이 있다. 가장 농업 생산지이자 비옥한 계곡은 플랜 드 라르티보니트(Plaine de l'Artibonite)이다. 섬의 중앙과 동부 지역은 높은 고원이 있다. 가장 높은 곳은 픽 라 세예(Pic la Selle)로서 2,680 m이다. 도미니카 공화국과는 36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식민 지배의 잔해로 차드의 국경선은 자연적인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다. 동쪽과 남쪽은 산맥지대로서 북쪽의 분지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차드 호(수면 면적 1만 6,000km2)는 자국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330,000 km²의 수량을 담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호수이다. 차드에서 가장 높은 산은 휴화산인 [[티베스티 산]]이며 [[사하라 사막]]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높은 산지이다.
 
 
 
== 기후 ==
 
매년 열대 기후가 나타나는데 차드의 남북 전체에 나타나며 5월에서 10월 동안 우기이다. 북쪽 사헬 지대에서는 6월에서 9월만 우기 지대에 해당하다. 지역적 강우가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세 지형을 나눈다. 사하라 사막은 북쪽 끝부분에 있는데 연간 강수량이 50mm 미만이다. 사실 이 지역이 사하라 사막 내에서도 가장 더운 지역에 해당한다. 이 지역의 생물군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끔 가다 종려나무만이 듬성듬성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사하라 사막 일대의 영향이 차드 중심부까지 미치며 이 일대의 강수량이 300~600mm 정도이다. 사헬 지대가 나타나며 여러 관목 지대와 함께 스텝 기후가 나타나고 남쪽으로 가면 사바나 기후가 나타난다. 이 지대의 강수는 900mm 이상에 달한다. 키가 큰 관목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새와 파충류, 큰 포유류가 많이 나타난다. 차드의 가장 큰 강은 차리 강이며 여러 강의 지류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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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아이티는 열대우림 기후로 열대림으로 우거진 천국이어서 60%가 산악 지대를 이루어 숲이 많았다. 그 이후로 숲은 단지 2%만 사라져 그 지역은 비옥한 농토로 바뀌었다. 근래에 들어서는 침식이 산악 지대 인근에 심해지는데다 벌목이 주요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어 환경 파괴가 심각해지기도 했다. 때문에 아이티의 삼림 채벌 문제가 국제적으로 이슈가 되기도 하여 숲을 일구려는 지원이 있기도 했다.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아이티는 단위 면적 당 생물다양성이 가장 높은 지역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환경단체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무려 6,000여 종 이상의 식물이 아이티에 살고 있으며 이 중 35%가 위기종이다. 새의 경우 220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21종이 멸종위기종이다. 이렇게 생물 다양성이 높은 이유는 섬 내에도 해발고도와 지형적 요인으로 소기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 주민 ==
 
== 주민 ==
주민은 200개 이상의 부족으로 나뉜다. 크게 나누면 북부·중부의 이슬람교 중심의 부족과 남부의 비이슬람교 중심의 부족으로 나눌 수 있다. 문맹률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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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아프리카]]에서 유럽인에 의해 노예로 끌려온 흑인이 대부분이며 혼혈민족 및 백인 등도 소수 있다. 아이티 사람의 약 95%가 아프리카계이고 나머지의 대부분은 물라토(백인과 아프리카인의 혼혈)이다. 엘리트인 물라토 및 기타 흑인 간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격차가 현저하다. 그리고 독립 후 [[중동]]에서 이민온 아랍계 아이티 사람들도 있다.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아이티에 끌려온 사람들의 뿌리는 세네감비아(현재 [[세네갈]]과 [[감비아]]), 월로프인, 밤바라인, 풀라인, 만딩고인과 같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과 황금 해안(지금의 [[가나]])의 환티인, 노예 해안(현재 [[나이지리아]], [[베냉]])의 폰인, 이보인, 요루바인, 또는 콩고인, 앙골라인 등 매우 다방면에 걸쳐있지만, 아이티 흑인 문화 주류가 된 것은 다호메이 왕국(현 베냉) 출신의 폰인의 문화이며, 부두교와 조상 신앙 등 다호메 문화가 아이티에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아프리카 각지에 뿌리를 가지고 대립하고 있던 노예들은 다호메의 부두교를 통해 유대를 달성했다.
  
북부에는 아랍인과 아프리카 부족 토우보우 족이 살고 있으며, 남부는 여러 아프리카 종족들이 차지하며 최남단에는 사라 족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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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외로 이민한 난민도 적지 않고, 미국의 [[마이애미]]와 [[뉴욕]](아이티 미국인), [[캐나다]]의 [[몬트리올]](아이티 캐나다인), [[프랑스]][[파리]], [[바하마]], [[도미니카 공화국]]에 큰 아이티 이민자 사회가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와 아랍어다. 그 외에도 현지어로 남부의 사라어 등 120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차드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 지도 ==
 
== 지도 ==
{{지도|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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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Haiti}}
  
 
== 참고자료 ==
 
== 참고자료 ==
* 〈[https://ko.wikipedia.org/wiki/%EC%B0%A8%EB%93%9C 차드]〉,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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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9D%B4%ED%8B%B0 아이티]〉, 《위키백과》
* 〈[https://namu.wiki/w/%EC%B0%A8%EB%93%9C 차드]〉, 《나무위키》
+
* 〈[https://namu.wiki/w/%EC%95%84%EC%9D%B4%ED%8B%B0 아이티]〉, 《나무위키》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 [[은자메나]]
+
* [[포르토프랭스]]
* [[중앙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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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미니카공화국]]
  
 
{{국가|검토 필요}}
 
{{국가|검토 필요}}
[[분류:아프리카]]
+
[[분류:남아메리카]]

2022년 5월 24일 (화) 16:21 판

아이티 국기

아이티(프랑스어: Haïti, 영어: Haiti)또는 아이티 공화국(프랑스어: République d'Haïti, 영어: Republic of Haiti)은 북아메리카 카리브해의 섬나라이며, 수도는 포르토프랭스, 언어는 프랑스어아이티어이다. 국명 아이티는 '높은 산들의 나라'(land of high mountains)를 뜻하는 타이노족의 말인 Haiti(Hayti)에서 유래되었다.

개요

  • 수도: 포르토프랭스
  • 면적: 27,750 km²
  • 인구: 11,680,288 명 (2022년)
  • 공용어: 프랑스어, 아이티어
  • 정치체제: 공화제, 이원집정부제
  • 대통령: 아리엘 앙리 (대행)

역사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히스파니올라섬을 발견한 이래, 섬의 원주민이던 타이노 족아라와칸 족 등 토착민들이 학살과 질병으로 인해 몰살당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들을 데려와 일하게 하였으며, 이들이 현 아이티 인들의 선조이다.

독립 투쟁

처음에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나 1697년의 《라이스윅 조약》으로 섬의 서쪽 3분의 1은 프랑스가 점령하였다. 프랑스는 이곳을 프랑스령 생도맹그(Saint - Domingue)라고 불렀다.

프랑스 혁명(1789년)과 프랑스 인권 선언에 고무된 생도맹그의 유색인종과 흑인은 억눌린 자유와 시민들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1791년 8월 22일 아프리카계 다수민족들이 시작한 혁명은 투생 루베르튀르, 장자크 드살린, 앙리 크리스토프 등이 이끄는 흑인 반군은 백인 지주를 처형한 뒤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1793년,영국군이 생도맹그를 침공하였다. 1793년 8월에 산도밍고의 저항군은 영국함대를 격퇴시켰다.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의 처형되고 유색인종과 흑인 노예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프랑스인 판무관 송토나폴베렐은 본국의 의회에 승인을 받지도 않고, 식민지에서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했다. 6개월 후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이 이끄는 국민 공회는 노예제도 폐지안을 승인하고, 1794년 2월 4일 이를 프랑스 전 식민지로 확대했다.

나폴레옹은 1801년 11월에 3만명의 아이티 원정대를 통해 식민지 재탈환과 노예제 부활을 시도하였으나 아이티 인들은 프랑스의 침공을 물리쳤으며 1804년 1월 1일 정식으로 독립하였다. 이로써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탄생하였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독립하였으며,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가 되었다.

미국 점령

세계 최초로 흑인노예들에 의해 주도된 민중혁명과 헌법에 의해 수립된 흑인 공화국이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을 틈타 침공해 온 미국에 의해 1915년 ~ 1934년까지 점령되었다.

1915년, 미국은 채무 상환을 구실로 해병대를 아이티에 보내 점령하고 1947년까지 아이티의 대외 재정을 미국이 계속 관리하였다.

1934년 세계 공황의 영향과 니카라과의 산디노 군에 고전을 하자, 루즈벨트 대통령의 선린 외교 정책으로 인해 아이티에서도 해병대가 철수하였다. 미국 점령 이후 몇 명의 뮬라토 대통령이 공화제 하에 교체되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되었고, 1946년에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듀마르세 에스티메가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사회 보장 및 노동 정책의 개선, 다수파 흑인의 정치적 자유 확대 등 다양한 진보적인 개혁을 시도했지만, 개혁은 뮬라토와 흑인과의 충돌 등 국내 혼란을 초래했다. 1950년 에스티메는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뮬라토 층과 흑인 엘리트들에 의한 쿠데타로 흑인 엘리트 군인이었던 폴 마그로워에 의한 군사 정권이 탄생했다. 그의 시대, 경제는 커피와 미국에서 관광 등 경제에서 한때 호황을 누렸지만, 또 다시 재선을 시도한 것을 계기로 전국에서 총파업이 일어나 혼란을 겪은 가운데 1956년 말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1957년 쿠데타로 탄생한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민정 이양과 대통령 선출을 놓고 총파업과 쿠데타가 반복되는 정치 혼란, 9월에 열린 총선을 계기로 흑인 다수파를 대표하는 의사이자,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58년부터 독재자의 길에 들어 서면서 경찰과 국가 재정 등을 사유화시켜, 현대에서도 보기 드문 최악의 군사 독재 체제를 탄생시켰다.

뒤발리에는 계엄령을 발동하여 언론과 반대파를 탄압하고, 비밀 경찰 통통 마쿠트를 발족시켜 많은 국민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며, 살해했다. 1971년에 뒤발리에가 사망하자,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베이비 독")가 뒤를 이었으며 1986년까지 장기에 걸쳐 뒤발리에 부자 주도 아래 암흑 시대가 계속되었다.

쿠데타와 민주화

  • 클로드 뒤발리에가 축출당하고 망명하자, 앙리 낭피 중장이 권력을 잡았다.
  • 1988년 1월에 새 선거가 실시되어 의회와 민간인 대통령을 뽑았으나, 6월 낭피는 정부를 무너뜨리고 자신을 군사 정권의 우두머리로 선언하였다.
  • 1988년 9월에 아이티의 대통령 경호원 부대들은 낭피를 축출시켰다. 프로스페르 아브릴 중장이 대통령이 되어, 독재자로 정권을 잡았다.
  • 1990년 3월 아브릴 대통령은 그의 통치에 반항하는 데모에 의하여 사임하였다.
  • 1990년 12월 아이티 국민들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 1991년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선출된 좌파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 1991년 9월 라울 세도라 장군의 군부 쿠데타로 아리스티드를 축출했고, 그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아리스티드 지지파인 《아이티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전선》은 많은 이들이 살해되었다. 그 조치로 미주 기구(OAS)는 아이티와 무역에 보이콧하였으며 유엔과 미국은 아이티 정부에 경제 제재 또는 군사적 압력을 주었다.
  • 1994년, 세도라 장군이 하야하고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복귀했다.
  • 1996년, 아리스티드파인 르네 가르시아 프레발이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 2001년에는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아이티는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정을 겪으면서 2004년에 쿠데타로 쫓겨난다. 그 후 아리스티드는 아프리카로 피난갔다.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이 다시 아이티에 도착하였고, 과도적 정부가 수립되었다.
  • 2006년 아이티 국민들은 의회를 뽑았고, 2월에 대통령 선거를 통해 르네 프레발이 51%의 득표율로 당선하였고, 5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프레발은 가난한 아이티인들을 후원하는 희망당의 당원이었다.
2008년 포르토프랭스와 레카이에서 식품 가격의 인상을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의회는 자크-에두아르 알렉시 총리를 면직시키는 투표를 하였고, 9월 미셸 피에르-루이가 아이티의 두 번째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해에 몰아닥친 열대석 폭풍과 허리케인에 의하여, 수백명의 국민과 수천명의 노숙자들이 사망하였다. 고네이브(Gonaives)가 크게 파괴되었고, 아이티의 농업은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 2010년, 미셀 마르텔리가 농민행동당(Repons Peyizan)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하여, 2011년 4월 20일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지리

아이티는 대앤틸리스 제도의 서쪽 지역에 있는 섬으로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아이티는 카리브 제도에서 쿠바도미니카 공화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나라이다. 쿠바와는 8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아이티의 지형은 산세가 드센 편이고 해안 지대에는 작은 평원과 강, 계곡이 있다. 가장 큰 농업 생산지이자 비옥한 계곡은 플랜 드 라르티보니트(Plaine de l'Artibonite)이다. 섬의 중앙과 동부 지역은 높은 고원이 있다. 가장 높은 곳은 픽 라 세예(Pic la Selle)로서 2,680 m이다. 도미니카 공화국과는 36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1925년 아이티는 열대우림 기후로 열대림으로 우거진 천국이어서 60%가 산악 지대를 이루어 숲이 많았다. 그 이후로 숲은 단지 2%만 사라져 그 지역은 비옥한 농토로 바뀌었다. 근래에 들어서는 침식이 산악 지대 인근에 심해지는데다 벌목이 주요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어 환경 파괴가 심각해지기도 했다. 때문에 아이티의 삼림 채벌 문제가 국제적으로 이슈가 되기도 하여 숲을 일구려는 지원이 있기도 했다.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아이티는 단위 면적 당 생물다양성이 가장 높은 지역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환경단체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무려 6,000여 종 이상의 식물이 아이티에 살고 있으며 이 중 35%가 위기종이다. 새의 경우 220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21종이 멸종위기종이다. 이렇게 생물 다양성이 높은 이유는 섬 내에도 해발고도와 지형적 요인으로 소기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민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유럽인에 의해 노예로 끌려온 흑인이 대부분이며 혼혈민족 및 백인 등도 소수 있다. 아이티 사람의 약 95%가 아프리카계이고 나머지의 대부분은 물라토(백인과 아프리카인의 혼혈)이다. 엘리트인 물라토 및 기타 흑인 간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격차가 현저하다. 그리고 독립 후 중동에서 이민온 아랍계 아이티 사람들도 있다.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아이티에 끌려온 사람들의 뿌리는 세네감비아(현재 세네갈감비아), 월로프인, 밤바라인, 풀라인, 만딩고인과 같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과 황금 해안(지금의 가나)의 환티인, 노예 해안(현재 나이지리아, 베냉)의 폰인, 이보인, 요루바인, 또는 콩고인, 앙골라인 등 매우 다방면에 걸쳐있지만, 아이티 흑인 문화 주류가 된 것은 다호메이 왕국(현 베냉) 출신의 폰인의 문화이며, 부두교와 조상 신앙 등 다호메 문화가 아이티에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아프리카 각지에 뿌리를 가지고 대립하고 있던 노예들은 다호메의 부두교를 통해 유대를 달성했다.

또한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외로 이민한 난민도 적지 않고, 미국의 마이애미뉴욕(아이티 미국인), 캐나다몬트리올(아이티 캐나다인), 프랑스파리, 바하마, 도미니카 공화국에 큰 아이티 이민자 사회가 있다.

지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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