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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년에 이집트는 아랍연맹에 복귀하고 본부도 다시 카이로로 돌아왔지만, 이때 아랍연맹은 심각한 내부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라크]]는 원유 가격 인상을 통해 불황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이 주도권을 쥐고있었던 [[OPEC]]이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되려 [[쿠웨이트]]를 비롯한 여러 아랍국가들이 OPEC이 지정한 산유량 할당을 초과해 계속 증산을 했기 때문에 원유 가격 폭락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쿠웨이트는 무시했고 국경에 있는 루마일라 유전을 둘러싸고 양국은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양국의 대립은 그렇게 커져갔고 마침내 1990년 8월 2일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쿠웨이트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 ||
− | 많은 국가들이 국제 여론을 따라 쿠웨이트측에 섰고 아랍연맹도 비난 결의를 했지만 PLO와 | + | 많은 국가들이 국제 여론을 따라 쿠웨이트측에 섰고 아랍연맹도 비난 결의를 했지만 PLO와 [[리비아]]가 이라크 측에 서서 결의안에 반대하고 [[예멘]]은 보류, [[요르단]]은 기권함으로써 이라크를 두둔하여 아랍연맹의 파벌은 극에 달했다.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많은 아랍연맹국들이 1991년 [[걸프 전쟁]]에 [[미국]] 편으로 참전하여 이라크를 공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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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프전 이후로 아랍연맹의 정치적 역할은 점점 감소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중동의 정치 문제 해결에 거의 개입하지 않고있는 상황이다. 지역 통합도 걸프협력회의와 아랍마그레브연합 등보다 좁은 지역에서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더 많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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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리아 내전=== | ||
+ | 2011년 10월 30일 [[카타르]] [[도하]]에서 외무장관 회의가 열리고 [[시리아 내전]]에 대해 토론했다. 31일에는 아라비 사무총장이 시리아 정부의 반정부 시위에 대한 무력 탄압을 종료시키기 위한 로드맵을 밝혔다. 11월 2일 폭력행위 중단 등의 조정안을 수용하여 시리아와 합의했지만 탄압은 계속되었고, 끝내는 시리아 내전이 발생하고 말아 결국 11월 16일부터 시리아는 회원국 자격이 정지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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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년 11월 16일 [[모로코]] [[라바트]]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열고 시리아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 회의는 시리아 정부에 대해 3일 이내에 탄압을 중지하도록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경제 제재를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11월 27일 카이로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열고 시리아에 대한 제재 조치를 19개국(22 개국·기구 회원국)의 찬성으로 승인했다. 제재 조치는 아랍과 시리아 정부와의 관계 단절, 시리아에 아랍 각국 정부의 투자 금지, 아랍 각국에있는 시리아 자산의 동결, 시리아 정부 고위관리들의 도항 금지, 시리아의 민간 항공의 노선 연장 금지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12월 3일에는 다시 카타르 도하에서 장관급 회의를 열고 시리아에 대한 제재에 대해 협의했다. 시리아는 반발하며 자국과 친한 중동 국가들인 [[이란]], [[이라크]], [[레바논]], [[알제리]] 등과 함께 제재를 해제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아랍연맹은 거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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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타=== | ||
+ | 2009년 3월 30일과 31일 동안에는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제 21회 아랍연맹 정상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중동 비대량 살상무기 지대를 창설함으로써 핵무기를 보유한 이스라엘에 대해 핵확산 금지조약(NPT)에 서명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를 받도록 국제 사회가 압력을 가할 것을 요구했다. 중동 평화 문제 논의에서는 아랍 연맹 회원국인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야만적인 침략"이라고 비난했다. 2015년 3월 29일. 지역의 불안정화의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합동군 창설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2020년 9월에 [[아랍에미리트]], [[바레인]]이 [[이스라엘]]과 수교를 맺자 [[팔레스타인]]이 순회의장직을 그만두겠다고 발표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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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 == 참고자료 == | ||
− | * 〈[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B%AF%B8_%EA%B5%AD%EA%B0%80_%EC%97%B0%ED%95%A9 | + | * 〈[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B%AF%B8_%EA%B5%AD%EA%B0%80_%EC%97%B0%ED%95%A9 아랍 연맹]〉, 《위키백과》 |
− | * 〈[https:// | + |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9E%8D_%EC%97%B0%EB%A7%B9 아랍 연맹]〉, 《나무위키》 |
== 같이 보기 == | == 같이 보기 == | ||
* [[국가연합]] | * [[국가연합]] | ||
− | * [[ | + | * [[걸프협력회의]] |
− | * [[ | + | * [[이슬람협력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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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7일 (목) 12:17 판
아랍연맹(아랍어: الجامعة العربية), 옛 명칭 아랍국가연맹(아랍어: جامعة الدول العربية)은 북아프리카, 아프리카의 뿔, 아라비아 주변의 아랍권이 결성한 지역 기구이다. 1945년 3월 22일 이집트 왕국, 이라크 왕국, 트란스요르단,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공화국이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결성했다. 예멘 왕국이 1945년 5월 5일 회원국으로 참여했다. 현재 아랍연맹의 회원국은 22개국이지만, 시리아의 참여는 2011년 11월 시리아 내전의 영향으로 자격이 정지된 상황이다.
아랍연맹의 주요 목적은
- 회원국 사이의 관계를 가까이 하고 협력을 증진한다.
- 독립과 주권을 보장한다.
- 아랍 국가들의 문제와 이익을 공공적으로 고려한다.
- 군사적 방어수단에서의 협력한다.
아랍연맹교육문화 및 과학기구와 아랍 경제연합위원회와 같은 산하 기구를 통해 아랍연맹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계획을 아랍권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하고 있다. 회원국 사이의 정책적 관점을 조율하고, 공통 관심사를 숙고하고 1958년 레바논 위기와 같은 분쟁을 제한하고, 아랍권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러한 산하 기구들은 회원국을 위한 토론회의 역할을 했다. 아랍연맹은 경제적 통합을 촉진하는 획기적인 문서들의 결정과 제안을 위한 강단으로 이용되었다.
아랍연맹은 참가국의 대표로 구성된 이사회가 최고기관으로 그 아래에 실행기관인 사무총국, 상임위원회, 공동방위이사회 등의 다른 전문기관들이 있다. 이사회는 1년에 2번 개최되는 것 외에 가맹국 또는 일반 이사회의 요청에 따라 긴급 이사회를 열 수 있다.
역사
20세기에 들어서 아랍 지방에 아랍 민족주의가 고조되기 시작하면서 아랍 국가들 간의 지역 협력기구를 설립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아랍 국가들이 추축국 측에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41년 5월 29일 영국의 앤서니 이든이 주장해 1945년 3월 22일에 알렉산드리아 의정서의 발효를 통해 아랍 7개국이 가맹하여 결성되었다.
1963년부터 가말 압델 나세르의 제창에 의해 아랍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82년 이후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2000년에 다시 재개하여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다. 정상회의는 1년에 한 번 회원국의 도시 중 한 곳에서 임의로 선발되어 이루어진다. 아랍 국가들이 점점 독립적인 노선을 가게 되면서 회원국 수 확대해 나갔는데 1973년에 모리타니가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당시까지는 아랍 국가로 간주되지 않았던 지부티와 소말리아, 코모로 등의 국가들이 회원국 지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이후 이집트의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범아랍주의)에 근거하여 아랍 지방의 통일을 목표로 제창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집트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이라크 등의 국가들은 아랍권에서 주도권을 잡으려하고 서로 종속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번번히 좌절되었다.
중동전쟁에서 공동보조를 취하고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측이 대패하여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가 확립되면서 같은 해 9월 아랍 정상회의에서 아랍연맹은 이스라엘에 대해 "이스라엘과 평화도 없고, 협상도 없으며, 승인도 없다."라는 "3 No"원칙을 내세웠다. 1978년 3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맺어지는데, 이 합의에서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총리의 메나헴 베긴 사이에서 양국의 휴전과 상호 인정이 체결되어 아랍연맹에 격진을 가져왔다. 아랍연맹의 대이스라엘 공동정책인 "'이스라엘과 평화도 없고, 협상도 없으며, 승인도 없다."'의 원칙을 위반했다며 이집트를 강하게 비난했고, 다음 해 1979년에 이집트는 아랍연맹의 주도국 지위에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아랍 연맹에서 추방되고 만다. 동시에 아랍 연맹의 본부도 튀니지의 튀니스로 이전했다.
걸프 전쟁
1990년에 이집트는 아랍연맹에 복귀하고 본부도 다시 카이로로 돌아왔지만, 이때 아랍연맹은 심각한 내부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라크는 원유 가격 인상을 통해 불황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이 주도권을 쥐고있었던 OPEC이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되려 쿠웨이트를 비롯한 여러 아랍국가들이 OPEC이 지정한 산유량 할당을 초과해 계속 증산을 했기 때문에 원유 가격 폭락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쿠웨이트는 무시했고 국경에 있는 루마일라 유전을 둘러싸고 양국은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양국의 대립은 그렇게 커져갔고 마침내 1990년 8월 2일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쿠웨이트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많은 국가들이 국제 여론을 따라 쿠웨이트측에 섰고 아랍연맹도 비난 결의를 했지만 PLO와 리비아가 이라크 측에 서서 결의안에 반대하고 예멘은 보류, 요르단은 기권함으로써 이라크를 두둔하여 아랍연맹의 파벌은 극에 달했다.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많은 아랍연맹국들이 1991년 걸프 전쟁에 미국 편으로 참전하여 이라크를 공격했다.
걸프전 이후로 아랍연맹의 정치적 역할은 점점 감소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중동의 정치 문제 해결에 거의 개입하지 않고있는 상황이다. 지역 통합도 걸프협력회의와 아랍마그레브연합 등보다 좁은 지역에서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더 많다.
시리아 내전
2011년 10월 30일 카타르 도하에서 외무장관 회의가 열리고 시리아 내전에 대해 토론했다. 31일에는 아라비 사무총장이 시리아 정부의 반정부 시위에 대한 무력 탄압을 종료시키기 위한 로드맵을 밝혔다. 11월 2일 폭력행위 중단 등의 조정안을 수용하여 시리아와 합의했지만 탄압은 계속되었고, 끝내는 시리아 내전이 발생하고 말아 결국 11월 16일부터 시리아는 회원국 자격이 정지되었다.
2011년 11월 16일 모로코 라바트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열고 시리아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 회의는 시리아 정부에 대해 3일 이내에 탄압을 중지하도록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경제 제재를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11월 27일 카이로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열고 시리아에 대한 제재 조치를 19개국(22 개국·기구 회원국)의 찬성으로 승인했다. 제재 조치는 아랍과 시리아 정부와의 관계 단절, 시리아에 아랍 각국 정부의 투자 금지, 아랍 각국에있는 시리아 자산의 동결, 시리아 정부 고위관리들의 도항 금지, 시리아의 민간 항공의 노선 연장 금지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12월 3일에는 다시 카타르 도하에서 장관급 회의를 열고 시리아에 대한 제재에 대해 협의했다. 시리아는 반발하며 자국과 친한 중동 국가들인 이란, 이라크, 레바논, 알제리 등과 함께 제재를 해제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아랍연맹은 거부하였다.
기타
2009년 3월 30일과 31일 동안에는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제 21회 아랍연맹 정상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중동 비대량 살상무기 지대를 창설함으로써 핵무기를 보유한 이스라엘에 대해 핵확산 금지조약(NPT)에 서명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를 받도록 국제 사회가 압력을 가할 것을 요구했다. 중동 평화 문제 논의에서는 아랍 연맹 회원국인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야만적인 침략"이라고 비난했다. 2015년 3월 29일. 지역의 불안정화의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합동군 창설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2020년 9월에 아랍에미리트, 바레인이 이스라엘과 수교를 맺자 팔레스타인이 순회의장직을 그만두겠다고 발표했
현재 회원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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