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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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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사명대사(泗溟大師)는 조선 중기 김천 직지사로 출가한 고승(高僧)이자 의병장이다.

개요[편집]

  • 사명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하여 휴정의 휘하에서 왜군과 싸웠다.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정유재란 때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웠다. 1604년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속성은 임(任), 속명은 응규(應奎)이며,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泗溟堂 또는 四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1]
  • 사명대사(1544년 10월 17일 ~1610년 10월 12일)는 조선 중기의 고승, 승장(僧將)이다. 속성은 임(任),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당호는 사명당(泗溟堂), 별호는 종봉(鍾峯), 본관은 풍천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법명인 유정(惟政)보다 당호인 사명당(泗溟堂)으로 더 유명하고,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 부른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읜 사명당은 13세에 황여헌(黃汝獻)을 사사(師事)하다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선(禪)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거기에서 불교의 오의(奧義)를 깨달았다. 1604년(선조 37)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교토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조선인 3500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嘉義)의 직위와 어마(御馬) 등을 하사받았다. 그때는 청허가 입적한 이듬해로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의 영탑에 애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선조의 부보를 듣고 한양으로 달려와 배곡한 후 광해군의 서변을 지키게 하려 하였으나 병을 얻어 응하지 못하고 가야산에 들어가 사망했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해인사에 홍제존자비(弘濟尊者碑)가 있다. 승려의 몸으로 국가의 위기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외교) 등 눈부신 활약은 후세 국민이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2]
  • 사명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승장(僧將)이다.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으로 더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존경하는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 지칭할 때가 많다. 승려의 몸으로 국난이 닥치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 조약 등 공훈을 세워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544년(중종 39) 음력 10월 2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상서이동면 고라리(現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400번지)에서 아버지 임수성(任守成)과 어머니 달성 서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중병으로 인해 1610년(광해군 2) 그곳에서 세수 65세, 법랍 50세로 입적했다. 사실 광해군은 서쪽 경계가 불안해 그로 하여금 서쪽을 지키게 하려고 했지만, 그가 병으로 인해 명을 행하지 못하자 약을 지어서 보냈으며, 그가 입적하자 매우 슬퍼하면서 장례를 지원할 정도로 조선시대 숭유억불이 일상인 가운데 왕에게 이렇게까지 대우받았던 승려도 없었다. 입적한 후 다비한 그의 사리는 해인사의 부속 암자인 홍제암 내 부도에 안치했으며, 이후 세워진 비석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었고, 이후로는 강화 협상을 하는 등 조선을 구한 승려 중 1명으로 입적 이후 제자로 거둔 승려들과 '유발제자' 격인 허균이 그가 남긴 시문 등을 모아 7권의 『사명당대사집』을 남겼고,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도 같이 전하고 있다.[3]
  • 사명대사는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별호는 종봉(鍾峯). 아버지는 임수성(任守成)이다. 사명대사(泗溟大師, 1544~1610)는 직지사에 6년간 머물렀으며 주지를 지냈다. 1575년(선조 8) 왕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의 수사찰(首寺刹)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6년 해인사에 잠시 머물렀고, 다시 휴정의 곁에서 도를 닦다가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604년(선조 37)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 성과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때 잡혀 간 3,000여 명의 사람을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1605년 6월 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7세를 전후하여 할아버지에게 『사략(史略)』을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1559년 아버지가 작고하자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의 제자가 되었다. 3년 뒤 승과(僧科)에 합격하면서 많은 유생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20세 연장인 박순(朴淳)과 5세 연하인 임제(林悌)와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당시 재상인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老子)』, 『장자(莊子)』, 『문자(文子)』, 『열자(列子 )』와 시를 배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등이 있다.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4]

사명대사의 생애[편집]

  • 사명대사는 형조판서에 추증된 임수성(任守城)의 아들로서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명종 16)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휴정(休靜;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 석방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1593년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이듬해 전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승하한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사명대사동상 및 유정대사충의비[편집]

  • 사명대사동상 및 유정대사충의비(泗溟大師銅像-惟政大師忠義碑)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부산어린이대공원에 있는 사명대사의 동상이다. 임진왜란 때 의승병대장(義僧兵大將)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의 동상과 충의비(忠義碑)이다. 유정(사명대사, 유정대사)은 임진왜란 때 평양성 탈환과 한양 수복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왜란이 끝난 후에는 부산 범어사와 백양사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포로 3,500명을 데리고 귀환한 바 있다. 1981년 부산불교연합회는 유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의 백양사 터로 추정되는 현 부산어린이대공원 안에 동상을 건립하였고, 해마다 동상 앞에서 추모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사명대사 동상은 높은 연화 기단위에 입상으로 세워졌으며, 기단부에 '홍제존자사명대사상'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동상 뒤쪽을 둘러싸고 있는 비석에는 사명대사의 발자취를 설명하는 명문과 건립문, 의승병들의 전투장면이 묘사된 부조가 새겨져 있다.

밀양 표충비[편집]

  • 밀양 표충비(密陽 表忠碑)는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에 있는 조선 시대의 비석이다.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일명 사명대사비라 부른다. 크기는 높이 약 4m, 너비 약 1m, 두께 54.5cm이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어 왜병을 크게 무찌르고 일본에 전쟁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3,000명을 환국시킨 유정(惟政:泗溟大師)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옛 표충사(表忠寺) 터, 즉 표충사(表忠祠)의 동쪽인 이곳에 1742년(영조 18) 대사의 5대 법손(法孫) 남붕(南鵬)이 경산에서 갖고 온 돌로 건립하였다. 비신(碑身)과 화강암의 비개(碑蓋)를 갖추었고, 경주석재인 빗돌은 까만 대리석이며 좌대석(座臺石)과 이수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뒷면에는 휴정(休靜의 행장(行狀)이 새겨져 있고 측면에는 밀양 표충사에 대한 내력, 그리고 기허(驥虛)대사의 비명이 명시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영중추부사 이의현이, 글씨는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이 쓰고 판중추부사 유척기가 전서하였다.

밀양 사명대사 생가지[편집]

  • 밀양 사명대사 생가지(密陽 四溟大師 生家址)는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 있는 사명대사의 생가지이다. 1992년 10월 21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승려 유정(惟政:사명대사)이 태어난 곳이다. 풍수지리설에 명산이라는 이곳에서 조부 때부터 살았다. 1544년(중종 30)에 진사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3세 때 가출하여 직지사 신묵(信默)에게 가서 승려가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사명대사의 어린 시절에 얽힌 많은 일화가 전해오며, 또한 사명대사가 때때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쉬던 바위가 아직도 있다.

사명당대사집[편집]

  •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은 조선 선조 때의 승려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의 시문집. 목판본, 7권 1책, 규장각 도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책이다. 1612년(광해군 4) 제자 혜구(惠球) 등이 그의 유문을 처음 수집·간행하였으나 전해지지 않고, 그 뒤 1652년(효종 3)에 공봉산인(公峰山人) 성일(性一) 등이 재판하였다. 임진왜란의 병화(兵火)로 대부분의 저작(著作)이 유실되고 시(詩) 100수(首), 문(文) 10여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허균(許筠)의 서문과 권말에는 해안(海眼)이 편찬한 사명당의 행적을 적은 글이 실려 있다. 이 책은 한국 불교사상의 흐름과 사명당의 생애와 사상 및 당시의 사회상을 알리는 귀중한 자료이다.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편집]

  •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泗溟大師의 金襴袈裟와 長衫)은 조선 시대의 고승 사명당대사의 가사와 장삼이다. 1973년 7월 16일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표충사(表忠寺)에 소장되어 있다. 금란가사는 황금색 단으로 된 승려의 법의인데, 유물의 재료는 중국산 비단이다. 크기는 가로 270cm, 세로 80cm, 조(條) 넓이 3.5cm, 조와 조 사이 6.5cm이고 모두 28조이다. 장삼은 베로 만든 길이가 길고 소매가 넓은 승려의 옷으로, 유물의 재료는 백색 세목(細木)이다. 치수는 장삼 길이 144cm, 파장 143cm, 뒷품 55cm, 진동 85cm, 수구 85cm, 깃 넓이 13.5cm, 안단 6.8cm, 곁바대 길이는 18.5cm, 곁바대 넓이 3cm, 끈 길이 18.5cm, 끈 넓이 2.5cm, 치마 1폭 넓이 34.5cm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유정(惟政,1544~1610)〉, 《두산백과》
  2. 유정 (승려)〉, 《위키백과》
  3. 유정(조선)〉, 《나무위키》
  4. 사명대사〉,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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