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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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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Africa)는 유럽의 남쪽, 아시아의 서쪽에 있는 대륙이다. 아프리카 주변으로 북쪽에는 지중해, 북동쪽에는 수에즈운하홍해, 남동쪽에는 인도양, 서쪽에는 대서양이 있다. 이 대륙에는 분쟁 지역인 소말릴란드를 빼고 마다가스카르와 여러 지역을 포함하여 총 55개국이 있다. 아프리카 연합에서는 서사하라를 정식으로 국가로 인정하여 55개국으로 분류하고 있다.[1]

개요[편집]

아프리카(Africa)는 지질학적으로는 아프로-유라시아 대륙의 일부로, 북쪽으로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과, 북동쪽으로는 수에즈 운하와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인접해 있다. 이름의 유래는 라틴어로 튀니지 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단어인 '아프리(복수형 Afri, 단수형 Afer)'에 라틴어로 '~의 땅'을 뜻하는 접미사인 '~ica'가 붙어서 '아프리의 땅'이라는 뜻의 '아프리카'라는 단어가 완성되었다. 그 외에 고대 그리스어의 아프리케(Aphrike, 추위 없는), 페니키아어의 아파르(Afar, 먼지), 라틴어의 아프리카(Aprica, 햇빛이 내리쬐는)가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이런 어원의 원조로 알려진 사람도 이 때문에 레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라는 단어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속주가 설치된 옛 카르타고 영토, 지중해와 사하라 사막 사이에 끼인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만 가리키는 좁은 명칭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대항해시대를 거쳐서 사하라 남쪽으로도 크고 아름다운 땅이 계속 이어져 있음이 알려진 이후로는 최북단 튀니지부터 최남단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현재는 가장 낙후한 지역이지만 인류의 발상지이기도 하며,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모든 대륙에 퍼졌다.[2]

역사[편집]

고역사[편집]

중생대 초 아프리카는 판게아의 일부로 지구의 다른 대륙과 붙어 있었다. 아프리카는 트라이아스기에 가까워질 때까지 초대륙 전체를 통틀어 수각룡, 고용각룡, 원시 조반목이 지배적인 균일한 동물군을 이루었다. 후기 트라이아스기 화석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발견되며, 북부보다는 남부에 더 많이 나온다. 트라이아스기와 쥐라기의 아프리카 지층에 대해 철저히 연구되지는 않았으나, 두 시대는 전지구적인 영향으로 발생한 멸종 사건으로 경계를 이룬다. 전기 쥐라기 지층은 후기 트라이아스기의 층과 비슷한 모양으로, 남쪽에는 노두(outcrop)가 더 흔하고 화석층은 적은데, 북쪽으로 갈수록 화석층이 많아진다. 쥐라기가 지나면서 아프리카에는 용각류와 조각류와 같은 더욱 거대해진 공룡 무리가 늘어났다. 중기 쥐라기 지층은 아프리카에서 잘 보이지 않고 연구도 잘 되지 않은 실정이다. 후기 쥐라기 지층도 탄자니아의 텡데구루(Tendeguru) 동물군을 빼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후기 쥐라기 텡데구루는 북아메리카 서부 모리슨층에서 발견된 화석과 유사하다. 중생대 중반, 약 1억5천만~1억6천만여 년 전에 마다가스카르 섬이 아프리카에서 떨어져나왔는데, 이 섬은 인도와 여타 곤드와나 땅덩어리에 붙어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의 화석 가운데는 아벨리사우루스와 티타노사우루스가 있다.

마다가스카르와 달리 아프리카 본토는 중생대에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판게아의 나머지 땅덩어리가 계속 갈라지면서, 다른 대륙과 관련하여 큰 변화가 있었다. 후기 백악기 초에 남아메리카는 아프리카에서 떨어져 나가 남대서양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류 변화로 전지구의 기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백악기에 아프리카에는 거대한 육식 공룡 등 알로사우루스류나 스피노사우루스류가 살았다. 티타노사우루스는 이 지역의 고대 생태계에서 중요한 초식 동물이었다. 백악기의 유해는 쥐라기 유해보다 많으나, 동위원소 연대 측정이 안 돼서 정확한 시기를 알기 힘든 경우가 많다.

선사 시대[편집]

고인류학자 대부분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류가 발생하였으며, 지구상에서 인간이 최초로 거주한 땅이라고 보고 있다. 20세기 중반 인류학자들은 아마 7백만여 년 전에 인간이 살았던 여러 증거와 화석을 발견하였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동위원소 연대측정에 따라 기원전 3백9십만~3백만 년경),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대략 기원전 2백3십만~1백4십만 년경)),] 호모 에르가스터(기원전 1백9십만~6십만 년경) 등 현생 인류의 조상으로 보이는 초기 유인원 여러 종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선사 시대에 아프리카는 (다른 대륙과 마찬가지로) 나라가 없었으며, 코이족나 산족처럼 사냥과 채집으로 먹고 사는 무리들이 살았다.

빙하 시대가 끝나자(기원전 10,500년 경 추정) 사하라 사막은 비옥한 녹지 계곡으로 바뀌었으며, 아프리카 사람들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해안 고지나 내륙에서 나와 이 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후가 따뜻하고 건조해지자 기원전 5000년경 사하라 지역은 점차 건조하여 살기 힘든 곳이 되었다. 사람들은 사하라를 떠나 제2폭포 밑의 나일강 계곡으로 가서, 영구적인 혹은 반영구적인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큰 기후 정체가 일어나자 중앙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 계속 많이 내리던 비가 줄었다. 이 시기부터 동아프리카는 건조한 날씨가 우세하게 되었으며, 이후 200여 년 동안 에티오피아에서 이어졌다. 아프리카에서 농경이 발생하기 전에 소가 가축화되었는데, 아마 사냥ㆍ채집도 병행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000년경 북아프리카에서 소는 이미 길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사하라-나일강 지역에 사람들은 알제리에서 누비아 사이 지역에 흔하던 나귀나 염소 등의 여러 동물을 길들였다.

기원전 4000년에 사하라의 기후는 급속하게 건조해졌다. 이 기후 변화로 호수와 강은 크게 말라버리고, 사막화가 심해졌다. 그리하여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줄어들고, 농경 집단이 서아프리카의 열대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 일조하였다. 기원전 1000년경, 북아프리카에 철기가 도입되어, 사하라를 지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북부 지역에도 급속히 확산되었다.[24] 기원전 500년경 금속 가공은 서아프리카에서 보편화되었다. 기원전 500년경에 동서 아프리카 지역에 철기 이용이 완전히 확립되었는데, 다른 지역은 기원후 몇백 년이 돼서야 철기를 가공하게 되었다. 이집트, 북아프리카, 누비아, 에티오피아에서 기원전 500년경에 만들어진 구리 유물이 서아프리카에서 발굴되기도 하였는데, 이 시기에 사하라 사막 사이로 무역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문명[편집]

기원전 3300년경 북아프리카에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문자가 생기면서 역사 기록이 등장한다. 세계적으로 오래된 문명인 이집트는 다른 지역에 영향을 주면서 기원전 343년까지 존속하였다. 이집트의 영향력은 오늘날 리비아와 크레타 북부, 가나안, 남쪽으로는 악숨 왕국, 누비아까지 이르렀다. 북서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와 무역을 하면서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아프리카에 온 첫 유럽인은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었다.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 사람에게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를 세웠으며, 그가 죽은 뒤 이 도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이후 로마 제국이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을 정복하여, 이 지역은 경제와 문화 면에서 로마 세계에 편입되었다. 로마인의 거주지는 오늘날 튀니지나 여타 해안 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는 팔레스티나에서 이집트를 따라 이곳까지 전파되었으며, 남쪽으로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어 누비아까지 퍼졌으며, 최소 6세기에는 에티오피아까지 이르렀다.

7세기 초에 새로이 발흥한 아랍의 이슬람 제국이 이집트를 지나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하였다. 이 지역의 베르베르족 상류층은 급속히 무슬림 아랍 부족에 통합되었다.8세기에 우마위야 왕조의 수도 다마스쿠스가 함락되자, 지중해 세계에서 이슬람의 중심지는 시리아에서 북아프리카의 알 카이라완으로 옮아갔다. 무슬림 북아프리카는 다양하게 발전하여, 신비주의자, 학자, 법학자, 철학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이슬람은 주로 무역로와 이주를 통해 사하라 이남에도 퍼졌다.

9세기 ~ 18세기[편집]

식민 지배 이전의 아프리카에는 10,000개 이상의 국가와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3] 이들은 제각각의 정치 조직과 지배 체제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는 아프리카 남부의 산족처럼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는 작은 가족 집단도 있고, 아프리카 남부와 중부의 반투어권 씨족 집단처럼 좀 더 크고 조직을 갖춘 집단도 있으며, 더 나아가 아프리카의 뿔의 씨족 집단, 사헬 지역의 왕국들, 서아프리카의 요루바와 이그보(Igbo) 혹은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해안의 무역 도시와 같은 자치 도시국가나 왕국처럼 더욱 체계를 갖춘 나라도 있었다.

기원후 9세기경 초기 하우사 등 일련의 왕조 국가들이 사하라 이남 사바나에서 서부 지역부터 중부 수단을 지배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나라는 가나, 가오, 카넴-보르누 제국이었다. 가나는 11세기에 쇠퇴하였으나, 말리 제국이 뒤를 이어 13세기에 서부 수단 대부분을 통합하였다. 카넴은 11세기에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서아프리카 해안의 삼림 지역에는 북쪽 무슬림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 왕국들이 성장하였다. 이그보의 은리 왕국(Nri)은 9세기에 세워진 초기 왕국이었다. 또 오늘날 나이지리아 땅에서 매우 오래된 왕국으로, 에제 은리(Eze Nri)가 다스렸다. 은리 왕국은 이그보 우크부(Igbo Ukwu)에서 발견된 정교한 청동 유물으로 유명하다. 이 청동 유물은 9세기경으로 보인다.

요루바의 도시국가와 왕국 가운데 역사상 최초의 나라 이페(Ife)는 이페의 우니(Ooni)라는 성직자 오바(oba, 요루바어로 "왕" 혹은 "지배자"를 뜻한다)가 다스렸다. 이페는 아프리카에서 종교와 문화면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으며, 청동 조각의 독특한 자연주의 전통으로 유명하였다. 이페의 정부 형태는 오요 제국(Oyo)에서 수용하여, 이곳의 오바(임금)은 오요의 알라핀(alaafin)이라고 하였으며, 한때 수많은 다른 요루바 혹은 비(非)요루바 도시국가와 왕국을 다스렸다. 다호메이의 폰 왕국(Fon)은 오요의 지배를 받는 비 요루바 나라 중 한 곳이었다.

알무라비툰은 사하라 사막의 베르베르 왕조로, 11세기에 광활한 북서 아프리카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다. 바누 힐랄과 바누 마킬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아랍 베두인 부족의 연합체로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이집트를 거쳐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이주하면서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이 융합하여, 지역 주민이 아랍화되고, 아랍 문화는 이슬람을 기초로 지역 문화의 여러 요소를 흡수하였다.

말리 제국이 붕괴하자 손니 알리(Sonni Ali, 1464~1492)라는 지역 지배자가 니제르 중부와 수단 서부에 송가이 제국을 세우고 사하라 사막간 교역을 장악하였다. 손니 알리는 1468년 팀북투를, 1473년에는 젠네(Djenne)를 함락하여 교역 수입과 무슬림 상인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정권을 세웠다. 그의 후계자 아스키아 무함마드 1세(Askia Mohammad I, 1493?1528)는 이슬람을 국교로 삼아 모스크를 짓고, 수단의 아프리카 무슬림 학문 전통을 세운 알 마길리(al-Maghili)와 같은 학자들을 가오에 보냈다. 11세기경 카노(Kano), 지가와(jigawa), 카치나(Katsina), 고비르(Gobir) 등 일부 하우사 국가는 성벽 도시로 발전하여, 무역에 종사하고 대상(隊商)을 맞아들이며 재화를 생산하였다. 15세기까지 이들 소국들은 당대 수단 제국의 변경에 있었으며, 서쪽의 송가이와 동족의 카넴 보르누에 공물을 바쳤다.

노예 무역의 정점[편집]

유사 이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서도 노예제가 있었다. 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랍의 노예 무역은 사하라 사막과 인도양 교역로를 통하여 1천8백만의 아프리카 노예를 데려갔다. 1482년 포르투갈인들은 엘미나에 자리를 잡고 기네아 해안에 수많은 무역 항구를 설립하였다. 주요 상품은 노예, 황금, 상아와 후추였다. 유럽인들이 1492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자, 이전에는 육상 무역이며 여러 대륙에 걸쳐 분화되었던 노예 무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메리카를 주축으로 급속하게 발달하게 되었다.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대서양간 노예 무역으로 7백만~1천2백만의 노예가 신세계로 보내졌다.

서아프리카에서는 1820년대에 대서양간 노예 무역이 쇠퇴하면서 이곳 나라들은 갑작스러운 경제 변화를 맞았다. 신세계에서 노예 수요가 떨어지고,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반노예제 입법이 늘어나고, 영국 해군이 서아프리카 해안에 출몰하면서 노예 무역은 점차 쇠퇴하여 아프리카 나라들은 새로운 경제 형태를 찾게 되었다. 1808년에서 1860년 사이 영국의 서아프리카 함대는 약 1,600여 척의 노예선을 나포하고 배에 있던 150,000명의 아프리카인을 해방하였다. 노예 무역을 불법화하는 데 거부한 아프리카 지배자들에 대한 응징도 이루어졌는데, 가령 "라고스의 찬탈자 왕"은 1851년 권좌에서 쫓겨났다. 반노예제 조약에 50개 이상의 아프리카 나라들이 승인하였다. 서아프리카의 강대국 아산테 연맹, 다호메이 왕국, 오요 제국은 제각기 변화에 적응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아산테와 다호메이는 팜유, 코코아, 목재, 금 등 오늘날 서아프리카 수출의 기반을 이루는 "합법적 상업"의 발전에 주력하였다. 적응에 실패한 오요 제국은 내전으로 붕괴하였다.

식민주의와 아프리카 쟁탈전[편집]

19세기에 유럽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영토 쟁탈전을 벌이며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을 병탄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식민 국가가 생겼으며, 독립국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일부 정착하여 세운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신봉하는 에티오피아(유럽인들은 이곳을 "아비시니아Abyssinia"라고 불렀다) 밖에 없었다. 유럽의 식민 지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으며, 전쟁이 끝나면서 여러 나라들이 점차 독립을 얻었다. 아프리카의 독립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국가들이 약화되면서 활발해졌다. 1951년 이탈리아 식민지 리비아가 독립하였다. 1956년 튀니지와 모로코가 프랑스에서 독립하였다. 가나는 이듬해 그 뒤를 따라 사하라 이남에서 최초의 독립 국가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나머지 나라는 이후 10년 사이 독립하였으며, 상당수는 평화적으로 독립하였지만, 일부는 특히 알제리처럼 전쟁을 거쳐 독립하기도 하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최초로 독립을 얻은 나라이지만, 1994년까지 백인 정착민들의 백인 지배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지속되었다.

식민 지배 이후[편집]

오늘날 아프리카에는 54개 독립 주권 국가가 있으며, 이들 나라를 가르는 국경선은 대부분 유럽 식민 지배 시대에 획정된 것이다. 식민 지배 이래 아프리카 나라들은 불안정, 부패, 폭력, 권위주의에 시달렸다. 대다수 아프리카 국가는 대통령제 형태의 공화국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민주적인 정부를 이룬 나라는 거의 없으며, 대개 쿠데타가 되풀이되며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독립 이후 아프리카의 정치 지도자는 대부분 장군 출신으로, 교육 수준도 낮고 민주적인 통치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이질적인 종족들이 이들 지배자 밑에서 통합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정치 불안정의 요인이다. 여러 정치인들은 정치적 이익("분할하여 통치하라")을 위해 식민 통치로 발생하거나 악화된 종족 갈등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여러 나라에서 군대는 질서를 제대로 유지할 유일한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군사 지배가 나타났다. 1960년대 초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아프리카는 70번 이상의 쿠데타와 13번의 대통령 암살이 발생하였다. 유럽인들이 그어놓은 국경선 때문에 국경 및 영토 분쟁도 흔하며, 무력 갈등이 널리 일어나고 있다.

미합중국과 소비에트 연방간의 냉전과 국제통화기금의 정책도 아프리카의 불안정에 한몫하였다. 한 나라가 독립하면 이 나라는 두 강국 중 한 곳과 동맹해야 하기 마련이었다.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소련의 군사 원조를 받았으며, 아프리카 중부와 남부의 경우 미국,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다. 1970년대 새로이 독립한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소련과 동맹을 맺었으며, 아프리카 서부와 남부에서는 반정부 운동에 자금을 지원하여 소련의 영향력을 억누르고자 하면서 갈등이 고조되었다. 1984년 에티오피아의 기근으로 수십만명이 굶어죽었다. 어떤 이는 마르크스 소비에트 정책이 이런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주장하였다. 현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파괴적인 군사 충돌은 제2차 콩고 전쟁이다. 1996년부터 2004년까지 이 전쟁과 그 여파로 5백4십만 여명이 죽었다. 2003년부터 다르푸르 분쟁이 계속되어 인도주의적 재앙이 되었다. 에이즈도 해방 이후 아프리카의 심각한 문제거리이다.

자연 환경[편집]

지리[편집]

아프리카는 지중해를 사이로 유럽과 떨어져 있고, 아시아와는 대륙의 북동쪽 끝에 폭 163km의 수에즈 지협(수에즈 운하가 지나간다)으로 이어진다. 대륙 최북단 튀니의 라스 벤 사카림(37°21′ N)에서 대륙 최남단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굴라스 곶( 34°51′15″ S)까지 거리가 약 8,000 킬로미터에 이른다. 또 대륙 최서단 베르데곶(17°33′22″ W)부터 대륙 최동단 소말리아 라스 하푼(51°27′52″ E)까지 거리는 약 7,400km이다.[12] 해안선은 26,000km로 굴곡이 매우 적은데, 면적이 아프리카의 1/3 정도인 10,400,000 km2밖에 되지 않는 유럽은 해안선이 32,000km에 이른다. 고대 로마의 기록에 따르면 "아시아"는 아나톨리아와 동방의 여러 지역을 일컬었고, 아프리카는 이집트의 서쪽을 이르는 말이었다. 두 대륙의 정확한 구분선은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그었는데, 본초자오선을 알렉산드리아로 잡고, 홍해와 수에즈 지협을 두 대륙의 경계로 삼았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의 진짜 규모를 알게 되자, '아프리카'의 의미는 확대되었다. 지리적으로 아프리카는 아라비아 반도,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을 포함하며, 유라시아판과 충돌하는 아프리카판을 이룬다. 에티오피아구와 사하라-아라비아 사막은 북쪽과 생물지리학적으로 통합되어 있으며, 아프리카아시아어족도 북쪽 지역을 언어학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지질[편집]

현재 아프리카판은 에티오피아에서 서부 모잠비크까지 이어지는 동아프리카 열곡대에 의해 둘로 나누어지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지진과 화산 활동이 활발하다. 다른 곳에서의 지진은 비교적 드문 편이지만 최근에 일어난 곳은 지중해 일대와 맞닿아 있는 모로코, 알제리에서 자주 관측되기도 한다.

기후와 생물[편집]

아프리카의 기후는 열대에서 고산지의 아북극에 이른다. 북부 지역은 건조하거나 사막이며, 중부와 남부 지역에는 사바나 초원과 울창한 밀림(열대우림)이 있다. 둘 사이에는 수렴 지대가 있으며 식생은 주로 사헬이나 스텝이 지배적이다.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야생 동물의 수와 종류, 영역, 분포 밀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보이며, 큰 육식 동물(사자, 하이에나, 치타 등)과 초식 동물(물소, 영양, 코끼리, 낙타, 기린 등)이 인간이 소유하지 않은 평원에 자유로이 살고 있다. 또 아프리카는 온갖 밀림 생물(뱀이나 영장류)이나 수생 생물(악어나 양서류)들의 서식지이다.

아프리카의 강과 호수[편집]

아프리카에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긴 강인 나일강과 세계에서 수심이 제일 깊은 콩고강이 있고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호수인 빅토리아호수를 비롯해 아프리카의 대호수로 알려진 거대한 호수들이 있다.

지역 구분[편집]

한국에서는 보통 아프리카 사람 또는 아프리카 말 정도로 뭉뚱그려서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아시아 전체를 두고 '아시아 사람' 또는 '아시아 말'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6]아프리카는 아시아만큼이나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공존하는 곳이다. 한국과 이란이 같은 아시아임에도 많이 다른 것처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비롯한 적도 이남 아프리카와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의 문화가 비슷할 리가 없다. 특히 북아프리카는 같은 아랍권으로 분류되는데도 그 중에서 모로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프리카보다는 차라리 스페인에 더 가까운 나라이며 알제리와 튀니지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프리카보다는 프랑스에 더 가까운 나라이다. 한 나라 안에서도 한국과 일본의 차이 이상으로 민족 집단간에 정체성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도 같은 나라 내부인데도 네덜란드와 보츠와나급으로 차이가 매우 심하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지칭하는 아프리카는 주로 사하라 이남의 흑인계 아프리카를 의미하기는 한다. 아랍 문화에 가까운 북아프리카는 예외적으로 치는 편이다. 그러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만 따져도 대단히 광활한 지역을 지나치게 단순화해 하나로 뭉뚱그리는 것에 가깝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유전적으로도 상당히 다르다. Y 염색체 하플로그룹에 따르면 모로코의 베르베르인, 나미비아의 코이코이족, 피그미족, 말리의 도곤족, 베냉의 퐁족, 투아레그족과 소말리인, 하우사인, 그리고 말라가시인의 유전자는 상당히 상이하다. 언어상으로도 당장 니제르콩고어족, 아프리카아시아어족, 나일사하라어족, 코이산어족, 오스트로네시아어족까지 어족만 최소 5개 이상이다. 물론 고립어도 있다.

대부분 오랜 시간 동안 독자적으로 존재해온 유라시아 각국과는 달리, 대부분의 근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각국은 전통적인 부족 단위가 아닌 유럽의 서구 열강이 자신의 편의에 따라 구분 지은 것이 그대로 국경선이 된 것이기 때문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국민들은 부족성 다음이라면 ('아시아인' 같은 완전히 무의미한 구분과는 달리) '아프리카인'이라는 정체성과 소속감이 상당히 강한 것은 사실이다. 서구 열강 식민제국에 맞서 아프리카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범아프리카주의(Pan-Africanism)의 부흥도 한 몫 했다. 다만 사하라 이북의 북아프리카는 아랍인이니까 전혀 상관 없다. 모리타니, 차드의 국내 갈등과 남수단과 수단의 갈등을 보면 이 문제를 잘 알 수 있다.

여러 가지로 아프리카의 문화권을 나눠볼 수 있겠지만, 크게 사하라 사막이 가장 큰 분기점으로 두 구역이 나뉜다. 사하라 사막 이북은 넓은 의미에서 중동(혹은 리비아 ~ 모로코를 마그레브로 따로 지칭) 문화권에 포함되는 반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많이 포함한다. 물론 이 안에서도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동아프리카, 남아프리카 정도의 구획을 나눌 수 있으나 여기에서 다루기 곤란한 점도 많고, 무엇보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 자체가 적은 탓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편 19세기 당시 서구 열강들이 땅 크기를 균일하게 나누기 위해서 지도상에 줄 긋는 것처럼 만든 국경선이 현재의 많은 아프리카 각국의 국경선이 되었다. 아프리카 국경선의 반듯반듯한 모양새는 바로 이것이 원인이다. 원래 국경이라는 건 강이나 산처럼 국경으로 쓰기 편한 게 있으면 그쪽으로 긋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프리카는 그렇지 않아서 그냥 선 쭉 그어버린 경우도 못지 않게 많다. 이 결과 수천 개의 정체성 및 종족이 50여 개 국가에 합쳐졌다. 하지만 서로 원수인 여러 민족이 한 국가에 존재하거나 같은 민족이 나뉘기도 했고, 이 외에도 종교, 인종 분쟁의 씨앗을 무수히 심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나마 유럽의 식민 통치 시기에는 각지의 소국들을 하나의 식민 통치 기구 하에 편성하여 분쟁을 조정할 수 있는 기구가 존재했지만, 식민 통치가 끝난 이후에는 갓 성립된 정치체제가 이를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이로 인한 불만이 폭발하여 수많은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프리카 지역 부족/종족들의 경계와 국경선을 비교한 지도. 이 복잡하게 쪼개져 있는 판도를 정치, 문화, 사회 등의 면에 대한 고려를 거의 하지 않고 그냥 지도에 줄 긋고 국경을 정했으니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열강이 지배할 당시에는 적어도 그 분쟁을 통제할 힘이라도 있었지, 독립한 후부터는 통제할 세력도 없겠다 해서 이제 말 그대로 막 나가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하루에 수많은 목숨이 죽어나가는 막장 대륙이 되고 말았다. 나이지리아만 해도 250개 이상의 민족이 존재하며 콩고민주공화국도 이와 비슷하다. 사실 그렇다고 해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모두 완전히 다민족국가는 아니고 레소토처럼 인구의 99.7%가 한 민족인 나라도 있다. 그래도 2002년에는 아프리카 경제 공동체(AEC)와 아프리카 단결 기구(OAU)를 통합하여 유럽연합과 비슷한 아프리카 연합을 창설함으로써 뭉치려고 하고 있다.

경제[편집]

아프리카에는 천연 자원이 풍부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저개발 지역으로,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질병과 바이러스(에이즈와 말라리아 등), 그리고 심각한 인권 침해를 자행하기도 하는 정부의 부패, 국가 계획의 실패, 높은 문맹률, 해외 자본의 부족, 빈번한 부족간 혹은 군사 충돌(게릴라전에서 학살에 이르기까지) 등이 있다. 국제 연합 2003년 인권 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최하위 25개국(151위에서 175위까지)은 모두 아프리카 국가였다. 의료 부족과 더불어 빈곤, 문맹, 영양 실조, 부적절한 수도 공급과 위생으로 아프리카 사람들 상당수가 고통받고 있다. 2008년 8월에 세계 은행[49]에서는 하루 1.25$ 수입(이전의 기준은 하루 1.00$)을 새로운 국제 빈곤선으로 정하여 세계의 빈곤 수치를 개정하여 발표하였다. 2005년에 인도의 하루 수입이 2.50$(PPP) 이하였던 인구가 85.7%였는데,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의 경우 이 지역 인구 중 80.5%가 그에 해당하였다. 이 수치를 통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나라들이 세계에서 빈곤(하루 수입 1.25$)을 줄이는 데 가장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1981년 이곳 인구의 약 50%(2억 명)이 빈곤 상태였으며, 1996년 이 수치는 58%까지 올랐다가 2005년에 50%로 떨어졌다.(3억8천만 명)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평균적인 빈곤 인구는 하루 수입이 겨우 70센트 밖에 되지 않으며, 1973년 수치보다 2003년에 더 악화되어, 일부 지역에서 빈곤이 증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빈곤은 식민 지배와 냉전에 기인한 것이다. 어떤 곳의 경우 정부나 외국 회사가 주도한 경제 자유화 계획이 실패한 탓이기도 한데, 외부 요인보다는 국제 정부 정책의 문제를 드는 연구도 있다. 부분적으로 문제는 국제 지원금이 목화, 코코아와 커피 등 수출용 곡물을 재배하는 것에만 쓰이고 자립적 농업에는 투자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또한 만성적인 자본 유출에 시달리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로 유입되어 오는 자본은 곧바로 나가는데, 이는 수출 품목이 외국 소유이라서 (석유가 좋은 예이다.) 곧바로 외국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경우거나 또는 세계 은행이나 공업 국가에 융자금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5년에서 2005년까지 아프리카의 경제성장률은 올라가서, 2005년에 평균 5%대이다. 앙골라, 수단, 적도 기니 등 일부 국가는 더 높은 성장률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 세 나라는 최근 석유 추출을 시작하거나, 석유 정제 용량을 늘렸다. 최근 몇 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은 점차 아프리카 국가와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2007년 중국 회사는 아프리카에 총 10억 달러를 투자하였다.

인구[편집]

대략 아프리카인의 80%가 사하라사막의 남쪽에 거주한다.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인들 사이에는 폭넓은 신체적 특성 차이가 존재한다. 그 중 가장 차이나는 것은 큰 키로 알려진 마사이족과 세계에서 가장 키가 작은 것으로 알려진 피그미인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자신을 아프리카인이라 칭하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 무게를 지닌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네덜란드계 백인들은 300년간의 식민 역사를 위시하여 자신들을 "아프리카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토지의 재 분배가 화제인 현대 남아공에서는 "아프리카인"이라는 명칭은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와 일치한다. 한편 19세기 노예 무역의 대한 응답은 자신을 흑인또는 아프리카인 이라 부르는 것에 일정한 혜택을 가져다왔다. 최근 존 케리 미 대통령 후보의 부인이 자신을 아프리칸 아메리칸 이라고 칭한 것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프리카에는 유럽 백인의 식민 지배보다 더 긴 역사를 지닌 아랍계열 민족의 상업 교류와 사하라 북부의 이슬람 정복이 있다. 또한 인도와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많은 수의 인도 혈통의 민족과 아랍 혈통의 민족을 아프리카에 정착시켰다.

문화[편집]

아프리카는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 여럿의 겹쳐지는 문화를 지닌다. 가장 많이 쓰이는 문화적 구분은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와 아랍 세계의 문화와 연계되는 이집트와 모로코 사이의 북부 국가들이다. 이러한 비교법에서 사하라 남쪽의 국가들은 다문화에 포함되는데 그중 영향력이 큰 반투어군을 들 수 있겠다.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와 나머지 영역, 특히 예전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 또한 문화적으로 경계를 지을 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프리카의 지역과 기본적으로 근대적인 지역이다. 전통주의자들은 가끔 목축주의자들과 농경주의자들로 나뉘기도 한다.

아프리카의 예술은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을 표출한다. 가장 오래된 것은 니제르에서 발견된 6,000년 된 석판이며, 이집트의 기자의 피라미드는 4,000년 후 에펠 탑이 세워질 때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에티오피아 라리벨라에 있는 단석 교회들 중 성 제롬의 교회는 공학적 신기로 평가된다. 아프리카의 음악은 아프리카의 가장 역동적인 예술 표현이다. 이집트는 오랫동안 아랍 세계의 문화적 집중점이었지만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 특히 서 아프리카의 리듬 전통은 대서양 노예 무역을 통해 근대의 블루스, 재즈, 레게와 로큰롤으로 전해졌다. 대륙의 근대 음악은 남부 아프리카의 놀라운 완성도의 합창 노래와 콩고 민주주의 공화국의 음악이 주도하는 수쿠의 춤 리듬등을 들 수 있다. 21세기의 최근 트렌드는 아프리카의 힙합의 발생이며 특히 세네갈에서 전통적 음발라와 섞인 형태를 볼 수 있다.

교통[편집]

아프리카의 교통체계는 식민지시대에 식민국의 전략적 의도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광산·농업·임산자원의 개발·반출에 적합하도록 정비되었다. 각국의 식민지정부는 개별적으로 자국 식민지에 철도망을 건설하였으나, 이웃 여러 나라와의 연관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철도는 화물수송을 위주로 하며 현재에도 총수송량의 약 3/4은 수출용 화물이다. 아프리카의 철도 총연장은 약 7만5,000km 로 약 30%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철도수입의 절반 이상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차지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외 지역의 철도는 각 영역마다 궤도가 다르고 정합성(整合性)이나 제휴성이 약했지만, 독립 뒤에는 일부 지역에서 기존 노선의 연장과 새로운 노선이 건설되었다. 특히 내륙국인 잠비아와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을 연결한 〈탄자니아-잠비아 철도〉는 중국의 원조와 기술협력에 의해 완성되었다.

한편, 철도와 수운(水運)의 이용이 한정된 아프리카에서는 도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농산품의 집하·운송과 소비물자 및 승객의 수송에 편리한 소형트럭을 많이 이용하고 있지만, 도로포장률이 낮고 도로의 유지·보수 등이 완전하지 못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UN의 아프리카경제위원회는 몸바사와 라고스를 잇는 사하라횡단고속도로와 서아프리카의 라고스에서 다카르를 잇는 고속도로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도시간(間)의 교통은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으나, 지역간 운반 교통으로는 북부지방에서는 낙타, 중부지방에서는 흑인, 남부에서는 소를 많이 이용한다. 도로망의 발달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정치적·군사적 필요성에서 시작되었으며, 경제 산업상의 목적은 그 다음이었다. 따라서 독립이 된 지금은 도로가 크게 부족하다. 수운(水運)은 콩고 강, 나일강, 니제르 강, 잠베지 강 등이 하천 교통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해안지방의 도시인들은 국제적인 무역항이 많다. 특히 수에즈 운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지름길 역할을 한다.

아프리카 지도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아프리카〉, 《위키백과》
  2. 아프리카〉,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아프리카 국가
아프리카 도시
아프리카 지리
아프리카 문화
아프리카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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