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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0일 (금) 14:57 기준 최신판

외야수(外野手)는 야구에서 수비 포지션 중 하나로, 야구장의 외야(내야를 넘어 넓게 펼쳐진 잔디 구역)를 지키는 선수를 말한다. 좌익수, 우익수, 중견수가 있으며, 거의 대부분의 플라이아웃을 잡는 선수들이다.

개요[편집]

외야수(外野手)는 야구 또는 소프트볼에서 외야의 수비를 하는, (포수 입장에서, 왼쪽부터) '좌익수'(레프트), '중견수'(센터), '우익수'(라이트)의, 3명의 야수(野手)다. 원래, 외야는 내야에 비해 넓게 되어 있는데 내야수 4명에 비해 외야수는 3명이므로, 내야수보다 이 빨라야 하고 타구의 착지 지점을 읽는 능력이 요구되는 포지션이며, 강한 송구능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또 수비력 이상으로 타격이 중시되는 포지션이기도 하여, 메이저 리그에서는 OPS가 높은 선수가 수비력이 높은 선수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감독 중에서는 외야수 출신이 드물다.[1]

상세[편집]

각자 역할에서 많이 차이나는 내야수와는 달리 셋 다 스킬 자체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동양야구가 수비력을 중요시하는 반면 선수들의 운동능력 차이가 크지 않다 보니 상대적으로 좌 / 우익수의 수비범위 요구치가 넓은 편이다. 그래서 마쓰이 히데키 같은 선수가 일본에선 중견수로 뛰었을 정도이다. 이와 달리 메이저리그는 중견수에 운동능력 뛰어나 수비범위가 넓은 선수를 세울수만 있으면 좌 / 우익수는 타격만 잘하면 주력이 딸리건 말건 그냥 쓴다.

외야수는 내야수보다 상대적으로 타격 능력의 비중을 높게본다. 좌익수와 우익수는 1루수와 비교되고, 수비가 비교적 중요하다 평가받는 중견수도 3루수와 비교될 정도로 수비 부담이 적고 타격 능력이 중요하다. 특히 좌익수, 우익수 같은 코너 외야수는 수비가 쉽고 타구가 적게 날아가는 편이기 때문에 코너 외야수의 1순위 덕목은 타격 능력(특히 장타력)이며, 타격은 좀 되지만 수비능력이나 팀 사정 등으로 포지션에서 밀려난 내야수 / 포수 / 투수 등이 가장 만만하게 옮겨가는 자리가 좌 / 우익수이기도 하다. 특히 프로 레벨에서는 왼손잡이 야수의 경우 내야수 자리에서는 1루수만 할 수 있으므로 유일한 내야수 자리인 1루수를 맡을 수 없다면 남은 건 외야수 밖에 자리가 없다. 일반적으로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보다 공격 때 유리한 것을 생각해보면, 좌투좌타 야수들은 수비 부담을 덜 받는 대신 그만큼 타격에서는 생산력을 더 많이 뽑아내야하는 책임감이 뒤따른다. 메이저에서는 타격 능력은 진퉁이지만 나이가 들어 코너 외야수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수비 능력이 하락한 경우에는 1루수나 지명 타자로 옮기게 된다.

수비적인 측면에서는 '편안하게 수비하는 외야수가 최고의 외야수'라 할 정도로 공이 떨어질 위치를 정확히 읽어내는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 야구에서 모든 수비가 그렇지만 외야수는 날아오는 타구에 대한 판단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정확한 판단지점을 읽어내는 데에는 시각과 더불어 청각도 크게 작용한다. 그 밖에 넓은 공간을 수비할 수 있는 빠른 발, 그리고 정확하고 강한 송구를 할 수 있는 어깨가 외야수비시에 중요하다. 우리 팀 투수의 스타일과 현재 상황, 상대 팀 타자의 성향을 토대로 타구 판단을 미리 하고 수비에 임하면 라면 수비로도 공을 잡아낼 수 있지만, 그게 안 되면 호수비 작렬 플레이어가 된다. 라면수비의 대표격인 이병규를 비롯하여 전성기의 이순철, 박재홍, 정수근 등은 순간적인 반응도 뛰어났지만 기본적으로 타구판단이 탁월했던 외야수들이었다. 정수근은 파인플레이처럼 보이려고 쉽게 잡을 수 있는 타구를 일부러 어렵게 잡는다는 말까지 했다. 최소한 두산 베어스 시절에는 맞는 말이었다. 2006년 제1회 WBC에서 이진영이 선보인 국민우익수 다이빙캐치도 사실 수비코치의 수비 시프트 미스에서 나왔다.

MLB 기준으로는 수비 비중을 중견수 > 우익수, 좌익수 순으로 놓고 좌익수와 우익수는 거의 동급으로 놓지만 KBO 기준으로는 우익수가 좌익수보다 수비 비중이 높다고 평가한다. KBO에서는 송구 능력이 좋은 외야수가 흔치 않기 때문이고 발은 조금 느리더라도 송구가 정확하고 어깨가 좋은 외야수는 우익수로 놓는다. 좌익과 우익을 굳이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많은 우타자가 또 당겨치는 비율이 많으니 포구에는 좌익, 1, 2, 3, 홈에 모두 뿌릴 일이 많은 송구의 우익이라 하겠으며, 선수에 대한 데이터가 아무것도 없을 경우, 덮어놓고 우익수가 좌익수보다 수비가 좋다라고 생각해도 90%는 맞다고 봐도 된다.

내야수는 신속하면서 정확한 동작을 하며 왼쪽(=1루)으로 던져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우투가 아니면 곤란한 반면, 외야수는 좌투 / 우투 여부가 크게 상관없기 때문에, 투수를 할만한 어깨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1루수 자리를 차지할 만한 타격 능력이 없는 좌투 야수는 외야수로 가는 선택지만 남아있기 때문에 외야수를 하기 싫어도 외야수로 갈 수밖에 없다. 물론 송구동작이나 타구방향에 따른 대처 등을 고려할 때 왼손잡이가 중견수와 우익수, 오른손잡이가 좌익수를 보는 것이 주자의 진루를 저지하는 면에서 더 유리하다는 주장도 있으며, 실제로 어지간한 좌투 외야수들은 중견수를 보지 않으면 대개 우익수 수비를 연습하게 된다. 하지만 좌투인지 우투인지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뿐, 풋스텝이 좌익수에 적합하냐 우익수에 적합하냐, 타구판단능력이 어떠냐, 가장 중요한 송구능력이 얼마나 좋냐, 팀의 사정이 어떠냐가 크게 작용한다. 추신수나 닉 스위셔, 안드레 이디어, 베이브 루스, 카림 가르시아 같은 선수들도 있지만 조니 데이먼 같은 소녀어깨 야수들은 중견수를 못본다면 여지없이 좌익수로 밀리게 돼있다. 조시 해밀턴이나 카를로스 곤잘레스처럼 팀의 사정에 따라서 혹은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이리저리 오가는 선수들도 있다.

안정성이 강조되는 포지션이기도 하다. 흔히 "내야수가 실수하면 한 베이스를 내주지만 외야수가 실수하면 한 점을 내준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다. 내야수는 실수로 공을 뒤로 흘려도 뒤에 다른 내야수나 외야수가 커버하기 때문에 주자들은 대부분 원 베이스 진루 밖에 하지 못한다. 반면 외야수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만약 외야수가 실수로 공을 뒤로 흘리거나 알을 까게 된다면 그 경기를 터트리는 최악의 역적으로 전락하게 된다. 특히 외야수는 내야수에 비해 어지간해서는 기록원이 실책을 잘 주지 않기 때문에 외야에서 실책을 하면 팬들에게 더 많은 욕을 얻어먹어도 싸다.

반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는 대개 구장들의 사이즈와 모양이 천차만별이기에 외야 세 포지션의 수비 난이도가 선수가 뛰는 홈 구장의 특성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펜웨이 파크인데, 이 구장은 그린 몬스터라는 기괴한 레프트 방향 펜스 때문에 제아무리 리그 최고의 좌익수라도 수비력이 하락할 수밖에 없고, 원래 못하는 선수는 더 못하게 된다. 이 경기장에서 좌익수 수비로 명성을 떨친 선수는 칼 야스트렘스키뿐이다. 또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미닛 메이드 파크도 유사한데, 이 구장은 플러스로 센터필드 방향에 비탈길도 있어서 더욱 막장이다. 물론 대체로 중견수가 최고 난이도임엔 웬만한 구장빨이라도 변함 없다.

외야수의 비중은 야구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데 야구 수준이 낮은 사회인야구나 아마추어들의 경우는 외야까지 날아가는 볼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비중이 적다. 일본 야구만화에서 나오는 우익수 9번타자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타자의 타구가 강해지고 비거리가 늘어나는 프로레벨이 되면 안타로 주울 공도 많아지고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최근까지 계속 비중이 늘어나는 추세였지만 2000년대 초반처럼(한미일 전부 해당) 홈런이 많이 나오게 되는 시대가 찾아오면서 잡을 수 있는 타구의 수가 줄어들게 되어 비중은 약간 줄어들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리그 전체의 (홈런):(시합수*2)의 비율이 1이 넘어가는 시점부터 외야수의 비중이 줄어든다고 본다.

옛날에 비하면 외야수들도 수비 비중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외야수 3명이 처리하는 아웃카운트의 수의 합계는 가장 많이 처리하는 내야수인 2루수와 비교할때 1배 ~ 1.2배에 불과하다.

외야수들이 처리하는 타구는 내야에 비해 야수 전후좌우 방향으로의 안타 또는 땅볼, 뜬공 정도로 일견 단순해 보이는 데다 타자의 방망이에 맞은 순간부터 외야수가 처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꽤 있기 때문에 처리하기 쉽지 않을까 생각하는 팬들이 많지만, 외야로 가는 프로의 타구는 생각보다 그리 만만하지 않다. 타구는 탑스핀을 먹었냐 백스핀을 먹었냐에 따라 최초판단보다 먹혀서 떨어질수도, 뻗어서 뒤로 날아갈 수도 있고, 친 타자가 좌타자인지 우타자인지, 밀었는지 당겼는지에 따라 타구가 좌우로 휘기도 한다. 스핀이 죽은 채 날아오는 공은 시속 170km/h짜리 너클볼처럼 흔들리며 날기도 하며, 그 날의 바람 방향에 따라 극단적으로 꺾이는 타구 역시 발생할 수 있다. 타구만큼이나 외야수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하늘과 조명이다. 일반적으로 5 ~ 7시 사이에 시작하는 프로야구의 경우 대낮에 시작해 깊은 밤하늘 아래 끝나는 만큼 이닝마다 달라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공을 따라다녀야 하는데, 여기에 더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도 문제고 구름이 있어도 문제며, 햇빛도 거슬리고 조명탑도 거슬리게 된다. 심지어 어떤 선수들은 돔 뚜껑도 싫어한다. 모든 게 다 거슬리는 이유는 복합적인데, 너무 맑으면 전력질주하면서 공이 날아가는 것을 바라볼 때 순간적으로 공간감각이 상실될 수 있고 구름 생김새가 좀 요란하면 구름에 먹혀서 따라가던 공을 놓칠 수도 있다. 조명은 특히 치명적이라서 으로 공을 쫓다가 조명 - 공 - 야수의 시선이 직선상에 놓이면 사람도 동물인지라 순간적으로 고장난 듯 행동하게 되기도 한다.

MLB 기준 페어 구역 안이라면 필드 어디라도 수비 시작 위치를 잡을 수 있는 포지션이다. 즉, 내야로 내려와서 수비를 시작해도 된다. 지명타자는 수비 자체를 안 나가고, 투수는 마운드에 없으면 반칙투구 혹은 보크, 포수은 페어구역에서 시작하는 것 자체가 반칙투구 혹은 보크이며, 내야수는 외야에서 수비를 시작하면 포지션 폴트에 걸린다.[2]

여담[편집]

가끔씩 2아웃임에도 불구하고 아웃카운트를 착각해 관중석으로 공을 던져주거나 공을 찾지 못해 만세를 부르며 벌러덩 자빠지거나 공 잡으려다 툭 쳐서 홈런을 만들어주는 팬서비스 정신을 발휘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공을 잡으려다 헤딩해서 홈런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2017년 시즌 KBO 리그에서 각종 타격 스탯들의 최상위권은 거의 다 1루수, 지명타자 아니면 외야수들이 차지하고 있다. 스탯티즈 기준(규정타석 달성)으로 2017 시즌 wOBA TOP 20 랭킹 중에서 1루수 5명, 외야수가 7명, 지명타자 2명이다. 반면 2루수 / 3루수 / 유격수는 합쳐서 고작 5명이고 포수는 1명도 없다. 이래서 19년 FA 양의지가 4년 125억 잭팟을 터뜨리게 된다

그외에도 꾸준히 리그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하거나 떠오르는 유망주 선수들 또한 다른 포지션들에 비해 꾸준히 나오고 있기 때문에 포지션들 중 제일 풀이 좋고, 국가대표 선발이나 팀별 엔트리 경쟁이 제일 빡센 포지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가장 지명 비율이 낮은 포지션이 외야수다. 전문 외야수들이 상위 라운드에 지명되는 경우는 적으며 KBO 리그에서 주전으로 뛰는 외야수들의 상당수가 포수나 내야수에서 포지션을 바꾼 경우다.

타구가 외야수 앞에까지 날라갔지만, 외야수가 이를 잡아 1루에 송구하여 타자주자를 아웃시키거나 또는 선행주자를 아웃시킬 경우 외야수 앞 땅볼이 기록된다. 타구가 빠르고 외야수의 어깨가 강할 경우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외야수에게는 역대급 호수비로 남게되지만, 타자에게는 뒷목 잡게 만드는 상황이 된다.[2]

외야수 출신 감독 징크스[편집]

여담이지만 KBO와 NPB는 공통으로 외야수 출신 감독이 잘 나오지 않고, 나와도 대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외야수 출신 감독들은 전술 운용에서 창의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돌대가리라는 비아냥도 있을 정도다. 투수포수, 내야수와는 달리 외야수는 머리보단 몸을 쓰는 포지션이다 보니 좋은 감독감이 안 나온다는 소리도 있다.

특히 KBO 리그의 경우 역대로 따져봐도 외야수 출신 감독이 매우 드물며, 前 LG 트윈스 감독이자 前 한화 이글스의 단장인 박종훈을 끝으로 외야수 출신 감독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2015 시즌부터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게 된 이종운이 4년 만에 외야수 출신 감독의 명맥을 잇게 되었지만, 성적 부진으로 1년만에 경질되었다. 그런데 그 후임 감독도 조원우도 외야수 출신 감독이며 2017년 키움 히어로즈의 운영팀장으로 지내다가 감독으로 선임된 장정석 역시 외야수 출신 감독이다.

KBO 리그에서 외야수 출신으로 가장 성적이 좋았던 감독은 롯데 팬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백골퍼라는 멸칭으로 유명한 백인천이다. 1990년 LG 트윈스가 우승을 차지한 게 외야수 출신 감독으로 올린 성적이다. 그 다음으로 좋은 성적을 낸 외야수 출신 감독은 박영길이다. 하지만 백인천은 일본프로야구 시절에 포수로 데뷔했고, 포수로도 플레이 타임이 꽤 되어서 순수한 외야수는 아니다.

일본프로야구의 경우는 한국보다 외야수 출신이 더 많이 뽑히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마유미 아키노부, 카네모토 토모아키처럼 말아먹은 사례도 있지만, 아키야마 코지나 마나카 미쓰루 같은 성공 사례도 꽤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확실히 다르다.

마유미 아키노부의 경우는 선수 시절의 영광에 힘입어 감독이 되긴 했지만, 정작 그가 감독하던 3시즌 동안 소속 팀 한신은 크게 부진하였다. 하지만 마유미는 전문 외야수가 아니라 고교 시절 유격수 출신이고 전성기땐 내외야를 가리지 않고 수비를 볼수 있었던 유틸리티였다.

일본프로야구 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前 감독인 아키야마 코지도 부임 당시 외야수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언론으로부터 의문을 제기당했으나, 팀을 2011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모든 불신을 잠재웠다. NPB에서 외야수 출신 감독이 리그 우승을 달성한 건 공교롭게도 10년 단위로 벌어졌는데, 1981년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오사와 케이지, 1991년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야마모토 코지, 2001년에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와카마츠 츠토무 감독이 리그 우승에 성공했는데 공교롭게도 딱 10년 뒤 2011년에 아키야마 코지 감독이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아키야마 감독은 2014년 일본시리즈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면서 "외야수 출신 감독은 돌이다."는 편견 및 고정관념을 다시 한 번 깨부쉈다.

2015년에는 마나카 미쓰루가 야쿠르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직전 2시즌을 최하위에 머무르던 야쿠르트를 2015시즌에 세리그 우승 팀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어 2016년에는 쿠리야마 히데키 감독이 닛폰햄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그 해 만년 약체 팀이던 요코하마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2년 연속 가을야구로 이끈 알렉스 라미레스도 외야수 출신이다.

어쨌든 아키야마, 마나카의 성공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외야수 출신 감독이라고 해서 무조건 능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 2014 시즌 기준으로 KBO 리그에서 종신감독으로 칭송받는 하위 팀 감독들은 전부 다 투수, 포수, 내야수 출신이긴 했다. 다만 이건 외야수 출신 감독이 한 명도 없어서 그랬던 것이니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끈 외야수 출신 감독이 절대로 나올 수가 없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2016시즌 센트럴 리그는 감독 6명 중 5명이 외야수라는 꿈의 시츄에이션이 만들어졌다. 유일한 예외라면 현역 때 포수였던 타니시게 모토노부 前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이다.

단 메이저리그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대표적인 명장 중 한 명이라고 평가를 받는 벅 쇼월터도 선수 생활 대부분을 외야수로 보냈고, 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감독이자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 락토버를 일궈낸 클린트 허들 감독, 그리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 28년만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안겨준 찰리 매뉴얼과 밀워키 브루어스 구단 역사상 최다승으로 2011년 NLCS에 진출시킨 론 로니키, 그리고 2016년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역대 최다 부상자 명단 신기록에도 팀을 지구 우승으로 이끈 데이브 로버츠, 국내에서 빵감독으로 알려진 감독이자 2022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휴스턴 애스트로스 감독 더스티 베이커가 대표적인 외야수 출신 야구감독이다. 메이저리그의 경우에도 포수 출신의 명감독 비율이 높은 건 똑같지만, 외야수 출신 감독이 전부 완전히 죽을 쑨 경우는 아니다. 오히려 메이저리그의 경우는 감독의 역량에 포지션은 관계가 없으며, 포수 출신의 비율이 높은 것일 뿐인 현 추세이다. 1901년 ~ 1981년까지 메이저리그 감독의 포지션 및 경력 등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오히려 외야수는 21.6%를 차지한 포수에 이어서 16.6%로 감독을 두 번째로 많이 배출한 포지션이었다. 감독들의 승률 역시 498로 중간 정도이며 투수나 유격수, 포수 출신 감독들보다 높다.

애초 포지션에 따른 감독 적합성 여부는 철마다 달라지는, 일종의 징크스에 불과하다. 프로야구계에선 한때 투수는 야수들과는 달리 타자들만 상대하기 때문에 감독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들이 떠돌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감독은 선수시절 프랜차이즈 스타급은 되는 명성의 선수만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 때문에 프랜차이즈 스타급 외야수들 중 은퇴 이후에도 팀과의 관계가 원만했던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감독 수업을 거치고 올라오면 자연스럽게 외야수 감독이 다시 등장할 수 있다.

2017 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조원우 감독이 한국 프로야구사에 외야수 출신 감독으로는 1987년 박영길 이후 30년 만에 포스트 시즌 진출에 성공함으로써 외야수 출신은 감독하면 안 된다는 편견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만, 최초의 사례가 나온 뒤라면 향후 충분히 외야수 출신 감독이 나올 수 있을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원우가 감독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건 아니다. 동시에 장정석은 발암야구로 유명해졌다. 사실 넥센 히어로즈의 여러 사정으로 인해 2017년 기준 사실상 이장석이 감독이나 마찬가지고 장정석은 그냥 아바타일뿐이라는 자조섞인 소리가 나온다. 즉 외야수 출신 투수 출신이고 나발이고가 문제가 아니라는 소리다.

2019 시즌부터는 롯데 자이언츠의 조원우 감독마저 전 시즌은 플루크였다는 게 드러나면서 2018시즌이 끝나고 야인이 됨으로써 키움 히어로즈의 장정석 감독이 유일한 외야수 출신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장정석은 여러 악재를 뚫고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거두는 저력을 보이면서 평가가 많이 좋아졌다. 다만, 구단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아 2020 시즌에는 외야수 출신 감독이 전멸이었다가 2021년 시즌 도중 롯데 허문회 감독의 경질 후 래리 서튼이 신임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외야수 출신 감독이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서튼의 경우는 외국인 감독으로서 엔트리 운영이나 타순 변동 등 팀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역시나 다른 외야수 출신 감독처럼 경기 운영 방식은 아직까지 팬들의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있다.[2]

종류[편집]

  • 좌익수 (Left Fielder)
  • 외야의 왼쪽에서 수비한다.
  • 타구를 빠르게 쫓아가고 잡는 능력이 중요하다.
  • 강한 어깨로 타구를 내야로 빠르게 송구할 수 있어야 한다.
  • 중견수 (Center Fielder)
  • 외야의 중앙에서 수비한다.
  • 외야수 중에서 가장 넓은 범위를 커버해야 하므로 빠른 발과 뛰어난 수비 능력이 요구된다.
  • 중견수는 외야수의 리더 역할을 하며, 외야 전체를 조율한다.
  • 우익수 (Right Fielder)
  • 외야의 오른쪽에서 수비한다.
  • 다른 외야수보다 강한 송구 능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오른손 타자가 친 공이 우익수 쪽으로 많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 주자가 3루로 진루하려는 상황에서 정확한 송구로 주자를 저지할 수 있어야 한다.

역할[편집]

타구 처리
  • 외야에 날아오는 공을 빠르게 잡아내는 것이 주 역할이다.
  • 플라이 볼: 공중으로 뜬 공을 직접 잡아 타자를 아웃시킨다.
  • 라인 드라이브: 빠르고 직선으로 오는 공을 처리한다.
  • 그라운드볼: 땅에 굴러오는 공을 재빠르게 잡아내어 주자를 견제하거나 내야로 송구한다.
주자 견제
  • 외야에서 잡은 공을 강하고 정확하게 내야로 던져 주자의 추가 진루를 막는다.
  • 강한 송구 능력: 주로 우익수와 중견수에게 필수적이다. 먼 거리에서도 홈플레이트나 3루로 정확하게 공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수비 범위 커버
  • 외야는 넓은 지역을 포함하므로, 빠른 발과 순간적인 판단력을 이용해 공을 잡아내야 한다.
  • 중견수: 외야의 리더로서 좌익수와 우익수의 범위를 보조하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 위치 선정: 타자의 타구 경향이나 투수의 공 배합을 파악해 적절한 위치로 이동한다.
내야와의 협력
  • 공을 내야로 정확히 송구하는 컷오프 플레이를 통해 수비 효율성을 높인다.
  • 공이 내야수를 넘어가거나 잘못 처리되는 경우 백업 역할을 수행해 실책을 방지한다.
특수 상황 대처
  • 주자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며 수비에 임한다.
  • 예: 희생 플라이 상황에서 잡은 공을 홈으로 송구해 득점을 막는다.
위치 조정
  • 타자의 스윙 방향, 파워, 상황에 따라 포지션을 조정해 효율적인 수비를 준비한다.
  • 예: 왼손 타자의 강한 당겨 치기 성향에 대비해 우측으로 이동한다.
팀의 최후 방어선
  • 공이 외야를 지나면 바로 실점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므로, 외야수는 경기장에서 실점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 역할을 한다.

외야수는 넓은 수비 범위를 커버하는 동시에 강력하고 정확한 송구와 신속한 판단력을 필요로 하는 포지션이다. 각 상황에 따라 공격적인 주자를 막거나 위험한 상황을 수습하며, 팀의 안정적인 수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역할을 한다.

전문성[편집]

외야수의 전문성은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얼마나 멀리 달릴 수 있느냐, 시야와 바람 등 각구장의 조건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 라인 드라이브를 얼마나 잘 처리하느냐, 송구를 얼마나 잘하느냐이다.

센터에는 가장 유능한 수비 요원을 배치한다. 커버해야 하는 지역이 가장 넓은 그는 강한 어깨가 필요하며, 좌중간에서나 우중간에서나 모두 송구를 잘 할 수 있어야 하며, 2루수나 유격수가 잡을 수 없는 짧은 플라이까지 재빨리 달려들며 처리할 수 있어야 하며, 좌익수나 우익수의 수비까지 백업해야 한다. 그에겐 우중간 지점에서 3루나 홈으로 송구해야 할 경우가 자주 생기며, 수비 기회가 다른 외야수에 비해 훨씬 많다. 수비의 비중을 따진다면 그는 포수, 투수, 유격수 다음으로 중요하다. 어떤 감독은 유격수보다 중견수를 더 중요시하기도 한다. 내야수의 실책은 한 베이스를 허용할 뿐이지만, 외야수의 에러는 세 개 루를 네주기 때문이다.

우익수는 중견수보다도 어깨가 강할 필요가 있다. 라이트 깊은 곳에서 3루 또는 홈으로 실점을 막는 결정적인 송구를 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좌익수는 어깨가 비교적 약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3루까지는 송구 거리가 짧을 뿐 아니라 홈 송구도(거리상으로는 우익수나 다름없지만) 포수가 처리하기에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포수는 우익수로부터 공이 날아올 때는 일단 공을 받고 나서 몸을 돌린 후 주자를 태그해야 한다. 그러나 좌익수로부터 송구가 날아올 때는 주자와 공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왼손잡이 선수는 중견수나 우익수로 기용되는 일이 많지만 좌익수는 흔치 않다. 거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레프트 파울라인 부근에서 공을 잡았을 경우 왼손잡이 야수라면 2루로 송구하기 위해 몸을 반바퀴 돌려야 하므로 단타로 막을 것을 2루타로 내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3]

외야수가 지켜야 할 사항[편집]

  • 준족, 강한 어깨를 갖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 실책은 용납되지 않는다. 외야수의 뒤쪽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1루수가 빠뜨린 볼은 우익수가 커버를 하지만, 우익수가 빠뜨린 볼은 커버플레이어가 없다. 1루수가 빠뜨린 볼은 타자를 1루 진루를 허용하지만, 대개 이런 경우는 타자가 3루까지 진루가 가능하다. 만약 우익수가 볼을 빠뜨린다면 1루수와 2루수는 중계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우익수쪽으로 달려가 준다.)
  • 백업을 잊지 않는다. (1루쪽 타구에 대해서 중견수와 우익수는1루수나 2루수가 항상 볼을 빠뜨릴 수가 있다는 생각으로 미리 앞으로 커버플레이에 들어간다.)
  • 자신의 능력을 감안하고 수비위치를 연구한다. (발걸음의 속도, 어깨의 강약 등을 머릿속에 넣어둔다.)
  • 타자의 타구 습성을 빨리 파악한다. (일반적으로 라인에 치우친 타구는 벗어나는 일이 많다.)
  • 플라이의 경우는 재빨리 낙하지점을 계산에 넣고 그 곳으로 달려간다.
  • 선글라스는 필수 용품이다. 반드시 연습시에 써서 습관이 되도록 한다.
  • 외야수의 송구는 주자 앞의 누를 향해 던지도록 한다. (주자가 1루에 있다면 2루에, 2루에 있다면 3루 방향으로 중계플레이를 한다.)
  • 타자주자의 주력. 그리고, 베이스 러닝 능력 등을 머릿속에 넣어둔다.
  • 플라이볼을 잡을 때는 낙하지점으로 달려오는 동료 야수들에게 자기가 그 볼을 처리하겠다는 신호를 큰소리로 외친다. (내.외야의 중간지점의 타구는 외야수가 잡는 것이 원칙이다.)
  • 타구를 향한 스타트는 그라운드의 상태가 좋을 때는 발끝에 힘을 주고 달려간다. 그러나, 그라운드의 상태가 나쁠 때는 발바닥 전체로 스타트 한다.
  • 볼을 먼 곳으로 던져야 할 때는 '원바운드'로 던진다.
  • 등뒤에서 바람(수비측에서 볼 때)이 불어올 때는 플라이나 라이너성 타구에 신경을 써야 한다. 자칫하면 타구가 맥없이 떨어지거나 솟아오르는 일이 있다.
  • 싱글캐치, 슬라이딩캐치. 다이빙캐치 따위는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결코 의도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 외야수로부터 내야수에게 던지는 송구는 낮게, 그리고 어깨를 향하여 던진다 (컷트맨에게 송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 외야수는 고독감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시합중에는 서로가 큰소리를 내어 지시하거나 격려를 해준다.
  • 자신이 수비위치를 바꿀 경우에는 반드시 다른 외야수에게 알린다.
  • 연습 때는 가끔 내야를 맡아 땅볼 처리연습도 한다.
  • 경기의 이닝수, 점수차, 아웃카운트, 주자의 위치 또는 그날의 날씨까지도 확실히 머릿속에 넣어둔다.
  • 다음에 일어날 플레이를 예측한다.
  • 2사 1루의 경우, 장타를 맞기 전에는 점수를 줄 염려가 없기 때문에 수비를 깊숙이 하되 외야 사이로 타구가 뚫리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 타구는 가급적이면 양손으로 잡아낸다.
  • 외야수는 포구도 중요하지만 송구가 더욱 중요하다. (송구하는 거리가 길므로 그 정확성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 커버플레이와 송구 지시를 잊지 않는다.
  • 컷오프맨에게 정확히 볼이 전달되도록 한다.
  • 땅볼 타구를 느릿느릿 쫓아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3]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야수[편집]

1위 추신수
  • 생년월일: 1982년 7월 13일
  • 투타: 좌투좌타
  • 주요 소속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준수한 장타력과 정상급의 출루 능력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무려 16시즌을 소화한 선수로 한국인 선수 중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남겼으며, 명실상부한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부산고 시절 추신수는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2001년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고 얼마 뒤 타자로 전향했다. 4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친 추신수는 2005년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이듬해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되면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았다.

2008년 추신수는 94경기에서 0.309의 타율과 14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타자로 자리 잡았고, 2009년과 2010년 2년 연속으로 3할 20-20을 달성하며 리그 정상급 외야수 중 하나로 등극했다.

2011년 다소 주춤했던 추신수는 2012년 다시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 됐다. 그리고 역사적인 2013년, 추신수는 또다시 20-20 클럽에 가입했고 0.423의 출루율로 리그 2위에 오르며 커리어하이 시즌을 만들어냈다.

이런 추신수의 활약에 반한 텍사스 레인저스는 추신수에게 당시 기준 메이저리그 역대 27위에 해당하는 7년 1억30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안겼다. 추신수는 7년 동안 MLB 경력의 마지막까지 텍사스의 중심타자로 활약했고, 특히 2018년에는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추신수는 메이저리그에서의 1652경기 동안 0.275의 타율과 0.824의 OPS, 218홈런과 157도루를 기록했다. 7차례나 20홈런 이상을 때려냈으며 4차례 20도루 이상을 기록했고, 20-20클럽에 3번 가입, 3할 타율과 4할 출루율을 2번씩 기록한 바 있다.

텍사스에서 MLB 경력을 마무리한 추신수는 국내로 돌아와 SSG 랜더스에 입단했고, 입단 첫 해 추신수는 건재함을 과시하며 4할대의 출루율과 20-20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4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을 것을 선수 본인이 스스로 예고한 상태이다.

국가대표팀에서 추신수는 2009년 WBC 준우승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기록한 바 있다. 이전까지는 보수적인 한국내 감독들의 성향으로 인해 선발되지 않았고, 이후에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세계 최고들이 모이는 MLB에서 수차례 정상급의 성적을 냈기에 추신수를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야수로 선정했으며, 다른 포지션에도 그에 준하는 성적을 낸 한국인 선수가 없으므로 필자는 그가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생각한다.

주요 시즌: 2013년(MLB) 155경기 타율 0.285 162안타 21홈런 20도루 OPS 0.885

2위 장훈
  • 생년월일: 1940년 6월 19일
  • 투타: 좌투좌타
  • 주요 소속팀: 토에이 플라이어즈

수많은 차별에도 한국 국적을 지키며 NPB에서 무려 23시즌을 활약해 유일한 통산 3000안타를 기록한 NPB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이다. 베스트 나인 16회와 올스타 19회, 타격왕 7회, 안타 1위 3회, 출루율 1위 9회 등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많은 타이틀을 따냈다.

1959년 데뷔 첫 해 신인왕을 수상한 장훈은 이듬해 커리어 첫 3할 타율을 기록하며 19년 연속 올스타와 11년 연속 베스트나인 선정의 시작을 알렸다. 3년 차엔 커리어 첫 타격왕에 올랐고 4년 차엔 31홈런-23도루, OPS 1.032에 출루율 1위로 MVP까지 수상했다.

5년 차인 1963년에는 33홈런과 41도루를 기록하며 30-30을 달성했고, 1965년까지 4년 연속 20-20을 달성했다. 커리어 전체가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훈이지만 1967년부터 1970년까지는 특히 더 맹활약했던 기간으로 무려 타격 및 출루율 1위 4연패를 달성했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는 다시 출루율 1위 3연패를 달성했고, 1974년에는 커리어 마지막 타격왕에 오르기도 했다. 1976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장훈은 요미우리에서도 3년 연속 3할-20홈런을 기록하며 활약을 이어갔다.

1980년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한 장훈은 5월 28일 NPB 역대 최초의 3000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했고, 9월 28일에는 역대 3번째 500홈런을 기록했다. 이후 1981년을 끝으로 23년의 선수생활을 마무리했고 1990년 일본야구전당에 헌액 됐다.

장훈은 NPB 통산 타율 0.319, OPS 0.933, 3085안타, 504홈런, 319도루를 기록했다. 3085안타와 타격왕 7회, 9년 연속 3할 타율, 3할 타율 16회 등은 NPB 역대 최고 기록이며, 이외에도 OPS 1.0 이상을 6번 기록했고 20-20을 5회나 달성했다.

한국인 차별이 만연했을 시기에 이렇게 무수히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점은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며, 더 많은 야구팬들이 장훈의 이러한 업적에 대해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장훈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요 시즌: 1970년(NPB) 125경기 타율 0.383 176안타 34홈런 OPS 1.112

3위 양준혁
  • 생년월일: 1969년 7월 10일
  • 투타: 좌투좌타
  • 주요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KBO 역사상 최고의 야수 중 하나로 무려 18시즌 동안 꾸준하게 활약하며 수많은 기록을 세워 '양神'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은 선수이다. 통산 타율 3할-출루율 4할-장타율 5할을 기록했음은 물론이고, 0.950의 경이로운 OPS는 역대 2위에 해당한다.

1993년 타율, 출루율, 장타율 타이틀을 모두 따내며 화려하게 프로무대에 등장했고, 당연히 그 해 신인왕에 올랐다. 1996년에는 타율, 장타율, 안타, 1998년에는 타율, 출루율, 안타 등 삼성 1기 시절 양준혁은 그야말로 타이틀을 휩쓸고 다녔다.

이후 트레이드로 해태와 LG로 옮겨 다니는 와중에도 양준혁의 활약은 계속됐다. 특히 2001년에는 개인 통산 4번째 타격왕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며, 9년 연속 3할 타율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2002년 삼성으로 돌아온 양준혁은 2007년에는 KBO 역대 최초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는 대업을 남겼다. KBO 통산 2318안타와 351홈런, 타격왕 4회, 출루율 1위 3회, 안타 및 장타율 1위 2회, 골든글러브 8회, 20-20 4회를 남긴 양준혁은 2010년 은퇴를 선언했다.

이외에도 그가 남긴 기록과 업적이 너무 많기에 필자가 이를 다 적지 못한 것에 대한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1루로 전력질주라는 본인의 신념을 프로통산 마지막 타석까지 지킨 양준혁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이다.

주요 시즌: 1997년(KBO) 126경기 타율 0.328 145안타 30홈런 25도루 OPS 1.082

4위 장효조
  • 생년월일: 1956년 7월 6일
  • 투타: 좌투좌타
  • 주요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타격의 달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타격 메커니즘을 가졌던 선수이며, 심판들 사이에서는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라는 얘기가 돌 정도로 뛰어난 선구안을 자랑했다. 통산 타율은 0.331로 KBO 역대 2위, 통산 출루율 0.427로 KBO 역대 1위에 올라있다.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제철 야구단에서 실업야구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육군 경리단 소속으로 군복무를 하던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전했고 4번 타자로 활약하며 대표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1983년 만 26세의 늦은 나이에 KBO 무대에 데뷔했고, 데뷔 첫 해부터 타율, 출루율, 장타율, 안타 4관왕을 기록했다. 이런 활약을 보이고도 '참신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신인왕을 놓쳤으니 이미 프로 데뷔 이전부터 장효조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84년 타율 4위로 잠시 숨을 고른 장효조는 이후 1985년부터 타격왕 3연패를 달성했다. 특히 1987년에는 역대 3위에 해당하는 0.387의 타율로 MVP까지 수상했으며, 출루율 및 외야수 골든글러브 5연패를 달성했다.

1988년에도 3할 타율과 4할 출루율을 기록했으나, 그동안 장효조를 곤란하게 여겼던 삼성은 선수협 파동을 구실로 그를 롯데로 트레이드해버렸다. 롯데에서 장효조는 1991년 타격 2위, 출루율 1위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고, 1992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늦은 나이에 데뷔하고도 이렇게 많은 업적들을 남긴 것은 장효조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지를 증명한다. KBO 리그가 빨리 생겼다면 그가 더 많은 업적을 세웠을 것이 확실하며, 필자의 부족한 필력이 혹여 그의 업적을 누락하지나 않았을까가 걱정이다.

주요 시즌: 1983년(KBO) 93경기 타율 0.369 117안타 18홈런 22도루 OPS 1.093

5위 김현수
  • 생년월일: 1988년 1월 12일
  • 투타: 우투좌타
  • 주요 소속팀: 두산 베어스

한 때 '4할을 못 치는 것이 약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은 완성형 타자이다. KBO 통산 안타 5위에 올라있으며, 국가대표팀에만 무려 10차례나 선발되는 동안 꾸준하게 좋은 활약을 펼쳐 한국 야구의 최전성기에 크게 공헌했다.

2006년 두산에 신고선수로 입단했고, 3년차이던 2008년 안타, 타율, 출루율 1위를 차지하며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2009년 또다시 안타 1위에 이번에는 20홈런을 넘기며 장타력까지 과시했고, 2010년에도 역시 20홈런을 넘기며 외야수 골든글러브 3연패를 달성했다.

이후로도 김현수는 계속 3할과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으나 너무 높아진 기대치에 비해서는 아쉽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5년 28홈런을 기록하며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고, 2016년 MLB 진출을 시도했으나 그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2018년, 2년 동안의 MLB 도전을 마치고 돌아온 김현수의 행선지는 LG 트윈스였다. 김현수는 복귀 첫 해부터 타격왕에 올랐고, 2020년에는 통산 5번째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LG에서의 김현수의 활약은 현재 진행 중이다.

김현수는 베이징 올림픽 일본전 이와세를 상대로 대타 적시타를 기록하며 대표팀에 눈도장을 찍었고, 2009년 WBC에서는 대회 올스타팀의 지명타자로 선정됐다. 또 2015년 프리미어 12에서는 대회 MVP에 등극했고, 그 외의 대회에서도 정상급 활약을 선보인 바 있다.

주요 시즌: 2009년(KBO) 133경기 타율 0.357 172안타 23홈런 OPS 1.037

6위 백인천
  • 생년월일: 1942년 9월 27일
  • 투타: 우투우타
  • 주요 소속팀: 토에이 플라이어즈

KBO 역사상 유일한 4할 타율을 기록한 선수이며,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NPB에서 통산 1839안타, 209홈런-212도루를 기록하고 타격왕까지 하는 굵직한 커리어를 남겼다. 커리어 초반에는 포수였으나 외야수로 전향하고 전성기를 맞았다.

고교 시절이던 1959년 역대 2번째로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으며, 1961년에는 농협 야구단 소속으로 실업야구 무대에 데뷔했다. 1962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대표팀의 준우승에 공헌했고, 토에이(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계약하며 NPB에 진출했다.

1965년 116경기에 나서 14홈런을 기록하며 주전급 선수로 도약했고, 이후 거의 매년 두 자릿수 홈런과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할 수 있는 선수로 거듭났다. 1967년과 70년에는 퍼시픽리그 올스타 외야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1972년에는 타율 0.315와 OPS 0.874, 그리고 20-20에 홈런 하나가 부족한 훌륭한 성적으로 통산 3번째 올스타에 선정됐으며, 1975년에는 0.319의 타율과 OPS 0.853을 기록하며 타격왕에 오르고 베스트 나인에까지 선정됐다.

1979년 타율 0.340와 18홈런, OPS 0.927을 기록하며 커리어하이 시즌을 만든 백인천은 이후 하락세를 겪었다. 그러던 중 고국인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창설됐다는 소식이 들렸고, 백인천은 NPB 통산 2000경기라는 대업 달성에 31경기만을 남겨두고 한국행을 선택한다.

KBO 원년, 백인천은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로 뛰면서 어쩌면 영원히 깨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4할 타율을 기록했고, 타율 및 안타 1위, 홈런 2위에 더해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됐다. 이후 백인천은 1984년 마흔을 넘긴 나이로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주요 시즌: 1982년(KBO) 71경기 타율 0.412 103안타 19홈런 OPS 1.242

7위 최형우
  • 생년월일: 1984년 1월 18일
  • 투타: 우투좌타
  • 주요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역대 유일한 KBO 통산 1500타점을 달성한 선수이며, 2023년 종료 시점에서 안타 3위, 홈런 5위 등 다양한 부분에서 최상위권에 올라있는 '꾸준함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이다. 또한 KBO 역대 4명에 불과한 통산 타율 3할-출루율 4할-장타율 5할을 기록 중이기도 하다.

2002년 포수로 삼성에 입단했으나 2005년 방출됐고, 군복무를 마치고 2008년 삼성에 외야수로 재입단했다. 그리고 해당 시즌 좋은 활약을 보이며 2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신인왕을 수상하게 됐다. 출발은 늦었지만 출발 이후의 최형우는 누구보다 빨랐다.

이후 2010년대 삼성이 통합 4연패를 달성하는 동안 최형우는 4번 타자 자리를 꾸준하게 지켰다. 2016년까지 삼성 시절의 활약으로 최형우는 타격왕, 홈런왕, 안타 1위 및 장타율 1위를 각 1번씩 기록했고, 외야수 골든글러브만 4번을 따냈다.

이후 최형우는 고향팀 KIA로 FA 이적을 선택했다. KIA에서도 최형우의 활약은 계속됐고, 2017년에는 출루율 1위와 외야수 골든글러브, 2020년에는 타격왕과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따냈으며 40대에 접어든 현재에도 KIA의 중심타자 자리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주요 시즌: 2016년(KBO) 138경기 타율 0.376 195안타 31홈런 OPS 1.115

8위 심정수
  • 생년월일: 1975년 5월 5일
  • 투타: 우투우타
  • 주요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

압도적인 힘을 보유해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을 가졌던 선수로, 전성기는 짧았지만 그 전성기 동안은 이승엽에게도 절대 밀리지 않았던 선수이다. 장타력뿐만 아니라 타석에서 볼넷을 얻어내는 능력도 뛰어났고, 수비에서는 최고 수준의 송구 능력을 뽐냈다.

OB에서 데뷔한 심정수는 프로 2년차이던 1995년 만 20세의 나이에 잠실을 홈으로 쓰며 21홈런을 기록하고 장타력을 뽐냈다. 1999년과 2000년에는 2년 동안 60홈런을 기록하며 KBO 역사상 최고의 클린업 트리오 중 하나인 '우동수'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2001년 시즌을 앞두고 현대로 트레이드 됐고, 2002년부터 그의 압도적인 전성기가 시작됐다. 2년 동안 무려 99홈런을 기록했고, 특히 2003년에는 출루율 및 장타율 1위에도 오르며 KBO 역사에 길이 남을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이후 심정수의 커리어는 빠르게 내리막을 걸었다. 시력 문제로 정교함이 심각하게 떨어졌고, 2007년 커리어 첫 홈런왕에 올랐지만 전성기 성적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2008년 22경기 출전에 그친 심정수는 결국 그 해를 끝으로 삼성에서 유니폼을 벗었다.

전성기는 다소 짧았지만, 그 전성기는 KBO 역대 최고 수준이었고, 은퇴 시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KBO 통산 홈런 3위에 해당하는 328홈런을 남기기도 하는 등 누적 성적도 결코 부족하지 않기에 심정수를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야수 8위로 선정했다.

주요 시즌: 2003년(KBO) 133경기 타율 0.335 154안타 53홈런 OPS 1.198

9위 박재홍
  • 생년월일: 1973년 10월 2일
  • 투타: 우투우타
  • 주요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

KBO 역대 최고의 5툴 플레이어 중 하나로, 마치 쿠바 선수들과 같은 우수한 신체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리틀 쿠바'라고 불렸다. KBO 통산 300홈런-250도루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며, 1번 하기도 힘든 30-30을 무려 3번이나 달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1996년, KBO 역사상 최초의 30-30에 더해 홈런왕에 오르는 등 역대 최고 수준의 루키 시즌 활약을 선보이며 만장일치 신인왕을 수상하고 강렬하게 등장했다. 1997년에는 부상으로 96경기만 나왔음에도 20-20을 달성하고 OPS 1을 넘기며 활약을 이어갔다.

1998년에는 또 다시 30-30을 기록하며 외야수 골든글러브 3연패를 달성했고, 2000년에는 2번째 3할 타율과 3번째 30-30을 기록하며 전성기의 방점을 찍었다. 데뷔 첫 5년 동안의 박재홍은 KBO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선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01년 이후의 박재홍은 전성기만큼의 강력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강타자라고 불리기에는 충분했다. 2001년 이후로도 3할 타율을 3번, 두 자릿수 홈런을 8번이나 더 기록했으며, 통산 300홈런과 267도루를 남기고 2012년에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박재홍은 대표팀에도 여러 차례 선발되어 아시안게임 금메달 2회와 올림픽 동메달 1회를 따낸 바 있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졌던 그가 해외 진출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더 본격적으로 경쟁할 수 있었다면 그 또한 꽤나 재미있는 볼거리였을 것이다.

주요 시즌: 2000년(KBO) 132경기 타율 0.309 151안타 32홈런 30도루 OPS 0.977

10위 이병규
  • 생년월일: 1974년 12월 8일
  • 투타: 좌투좌타
  • 주요 소속팀: LG 트윈스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컨택 능력을 가진 선수 중 하나로, 우타석으로 흘러나가는 공을 타격해 안타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배트 컨트롤 능력이 뛰어났다. 잠실에서 30-30을 기록할 정도의 장타력과 주력을 가졌으며, 어려운 타구도 쉽게 처리하는 수비 또한 일품이었다.

1997년 KBO 신인왕에 오르고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고, 개막전에 3안타를 치고 한 인터뷰로 화제를 끌기도 했다. 1999년에는 최다 안타 1위에 올랐고, 30-30 클럽에 가입하는 역사적인 활약을 선보였다.

2001년까지 안타 1위 및 외야수 골든글러브 3연패를 달성했고, 2005년에는 커리어 첫 타격왕에 올랐다. 일본 진출 이전까지 이병규는 타격왕 1회, 안타왕 4회, 득점 1위 1회, 외야수 골든글러브 6회 등의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했다.

2007년 주니치의 러브콜에 일본 진출이 성사됐으나,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고, 결국 3년 만에 LG로 복귀했다. 국내 복귀 이후 이병규는 3차례 3할 타율을 더 기록했고, 2013년 타격왕과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뒤 2016년을 끝으로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이병규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대표팀의 단골 외야수였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2개와 올림픽 동메달 1개를 목에 건 바 있으며, 2006년 초대 WBC 4강 진출을 경험하기도 했다.

주요 시즌: 1999년(KBO) 131경기 타율 0.349 192안타 30홈런 31도루 OPS 1.014

11위 손아섭
  • 생년월일: 1988년 3월 18일
  • 투타: 우투좌타
  • 주요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KBO 역대 최고의 안타 제조기로 박용택의 통산 안타 1위 기록을 경신할 것이 유력하며, 향후 커리어에 따라 3000안타도 노려볼 수 있는 선수이다. 또한 단순히 안타만 많이 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선구안과 일발 장타, 준수한 주력까지 보유한 팔방미인이기도 하다.

2007년 롯데에서 데뷔한 손아섭은 2010년 0.306로 첫 3할 타율을 기록했고, 2018년까지 무려 9년 연속 3할 타율을 이어갔다. 이 기간 외야수 골든글러브 5회, 최다안타 타이틀 3회, 6년 연속 4할 출루율, 2년 연속 20-20 등 다 쓰기에 버거울 정도로 많은 기록을 쌓았다.

간혹 롯데 시절 손아섭을 두고 '이기적이다', '찬스에 약하다'와 같은 근거 없는 비난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손아섭은 오히려 뛰어난 워크 에씩으로 다른 팀 팬들에게까지 많은 존경을 받은 선수였으며, 그 어떤 지표로 평가해도 찬스에 강한 클러치 히터였다.

2022년을 앞두고 롯데 구단의 이해할 수 없는 판단으로 인해 손아섭은 NC 다이노스로 이적하게 됐다. 2023년 손아섭은 최다안타 타이틀을 따냈고 커리어 첫 타격왕에 올랐으며, 지명타자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는 등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했다.

손아섭은 국가대표팀에서 WBC에 2번 참가했으며, 2개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고 2015년 프리미어 12 우승을 경험한 바 있다. 특히 2015년 프리미어 12에서는 4강 일본전 9회에 대타로 나서 안타를 기록하며 역전의 중요한 발판을 놓기도 했다.

주요 시즌: 2014년(KBO) 122경기 타율 0.362 175안타 18홈런 OPS 0.994

12위 박용택
  • 생년월일: 1979년 4월 21일
  • 투타: 우투좌타
  • 주요 소속팀: LG 트윈스

통산 2504안타를 기록해 KBO 역대 최다 안타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이며 역대 3명뿐인 200홈런-200도루를 기록한 호타준족이다. LG의 암흑기와 도약기를 모두 겪고 원클럽맨으로 영구결번까지 지정된 구단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02년, 프로 무대에 데뷔했고 그 해 KBO 신인왕에 올랐다. 2004년에는 커리어 첫 3할 타율을 기록했고, 2005년에는 도루왕과 득점 1위 타이틀을 따내 이듬해 열린 WBC에도 승선했다. 이 시기의 박용택은 2할 후반대 타율과 많은 도루를 기록하는 가치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2009년 타격왕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타격에 눈을 뜨며 박용택은 한 단계 높은 선수가 됐다. 2018년까지 10년 연속 3할 타율이라는 KBO 역대 유일한 기록을 세웠으며, 3차례 외야수 골든글러브와 1차례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박용택은 2009년 타격왕 등극 당시 논란을 빚기도 했지만, 그 사건을 은퇴식 날 롯데 팬들 앞에서 사과할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20년에 가까운 꾸준한 활약과 훌륭한 팬서비스까지, 박용택은 이 순위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선수라고 생각한다.

주요 시즌: 2009년(KBO) 111경기 타율 0.372 168안타 18홈런 22도루 OPS 0.999

13위 이영민
  • 생년월일: 1905년 12월 1일
  • 투타: 우투우타
  • 주요 소속팀: 식산은행 야구단

한국 야구 초기의 기반을 다진 레전드로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야구뿐만 아니라 육상은 물론 축구까지 잘하는 최고의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이영민은 당시 일본 야구 최고의 강속구 투수 미야다케를 상대로도 초장거리 장외홈런을 칠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고, 일본이 메이저리그 올스타를 상대하기 위한 팀을 꾸릴 때 포함된 한국인 선수는 그가 유일했다.

NPB가 창설될 때 그 역시도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었으나, 한국인 차별에 불만을 갖고 프로에 입단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해방 직후까지 선수로 활동한 이영민은 이후 야구 행정가로도 활동했다.

이영민은 육상 대회에서 5종목을 석권하고 400M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축구에서도 선수로 여러 대회를 우승하고 대표팀 감독을 맡아 올림픽 첫 승 및 8강 진출이라는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이런 여러 업적들을 감안하면 이영민은 한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한야구협회는 그를 기리기 위해 1958년부터 고교야구에서 최고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이영민 타격상'을 시상하고 있다.

14위 박현식
  • 생년월일: 1929년 3월 11일
  • 투타: 우투우타
  • 주요 소속팀: 육군 야구단

이영민과 김영조의 뒤를 잇는 홈런왕으로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였다. 홈런이 거의 나오지 않던 시기에 활약했음에도 역대 4명에 불과한 실업야구 통산 100홈런을 달성했다고 전해진다.

학창 시절에는 투수였으나, 실업 야구 무대에서는 외야수로 전향해 오랜 기간 슬러거로 이름을 날렸다. 30대 중반인 1965년에도 대표팀에 뽑히고, 30대 후반인 1968년까지 현역생활을 이어간 것은 최근의 기준으로도 놀라운 일이며, 그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롱런이었다.

박현식은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6회 연속 출전으로 아시아 야구 연맹에게서 공로상을 받아 '아시아의 철인'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6회 대회 결승전에서는 홈런을 기록하고 한국 야구사 첫 우승에 크게 공헌한 바 있다.

박현식은 은퇴 이후 지도자 및 행정가로도 활동했고, 특히 인천 야구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SK 와이번스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야구 꿈나무들에게 '박현식 타자상'을 시상한 바 있다.

15위 윤동균
  • 생년월일: 1949년 7월 2일
  • 투타: 좌투좌타
  • 주요 소속팀: OB 베어스

1970년대 실업야구 최고의 강타자 중 하나로 큰 체격에도 부드러운 스윙과 빠른 발, 준수한 외야 수비 등 모든 것을 갖춘 만능 외야수였다. 국제무대에 강해 아시아선수권과 세계선수권에서 모두 타격왕에 오른 경험이 있다.

실업야구 시절 MVP와 타격왕 등을 비롯해 많은 타이틀을 따낸 것으로 전해지며, 원래는 1980년부터 플레잉 코치로 뛰다가 은퇴할 계획이었으나 KBO리그가 탄생하자 마음을 바꿔 만 32세의 늦은 나이에 프로 데뷔를 선택했다.

프로야구 원년, 그는 나이를 잊은 듯 맹타를 휘둘렀고 4할을 기록한 백인천에 이어 타격 2위에 올랐다. 출루율은 4할, 장타율은 5할을 훌쩍 넘길 정도로 우수한 성적이었고, 베스트 10의 우익수로도 선정됐다. 이후로도 윤동균은 OB의 중심타자로 꾸준하게 활약했다.

윤동균은 1989년 만 40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고, KBO 최초의 은퇴 경기가 열렸다. 그의 통산 OPS는 0.790으로 그가 투고타저 시대에 활약한 노장인 것을 감안하면 아주 높은 수치임이 분명하며, KBO리그가 빨리 생겼다면 더 대단한 활약을 선보였을 것이 확실하다.

주요 시즌: 1982년(KBO) 77경기 타율 0.342 97안타 OPS 0.965[4]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외야수〉, 《위키백과》
  2. 2.0 2.1 2.2 외야수〉, 《나무위키》
  3. 3.0 3.1 ciankorea, 〈외야수비의중요성(외야수는 야구의 숨겨진꽃이다)〉, 《네이버 블로그》, 2012-05-16
  4. 마드리드의 거인,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야수 TOP 30-2(15~1위)〉, 《티스토리》, 2024-05-13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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