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Chinatown)은 중국 한족의 세력이 가장 약화되었던 송대부터 시작되어 청나라 말기에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퍼진 한족이 이주한 나라에서 모여 살며 형성한 지역이나 그 사회이다. 지금은 유태인 다음으로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 상인들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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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차이나타운은 중화권에 해당하는 중국 대륙, 홍콩, 마카오, 대만 이외의 나라에서 해외 거주 중국인, 대만인인 화교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서 사는 곳을 일컫는 말이다. 화교 네트워크가 광범위한 만큼 전세계 각지에 분포하고 있다. 중국어에서는 주로 당인가(唐人街)라 부른다. 여기서 당인(唐人)은 물론 중국 당나라 사람이 아닌 현대 중국인, 대만인이다. '고려'나 '조선'이 'Korea'의 의미로 현대 한국과 해외에 있는 교포의 범칭으로 쓰이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동명의 영화 역시 중국어 제목이 당인가다. 한편 일본에서는 중화가(中華街)라고 부르는데 중화권에서 '중화가'라 하면 전 세계의 차이나 타운이 아닌 요코하마, 고베, 나가사키 등 일본 속의 차이나타운만을 가리켜 쓰는 편이다. 그래서 중화가는 일본에서만 쓰는 용어이다.
영어권에서는 물론 차이나타운(China Town)이며 한국은 화교의 이주 역사가 짧다 보니 영어인 차이나타운을 그대로 쓴다. 사실 한국어로는 차이나타운으로 붙여서 쓰는 것이 용법상 맞다. 해외에선 화교들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부를 축적하여 경제적인 실권자가 되자 화교들의 거점이 되었다. 한 예로 서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차이나타운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영국 런던, 페루 리마 차이나타운이며 아시아에선 일본의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고베 차이나타운, 나가사키 차이나타운 그리고 싱가포르의 차이나타운이 손꼽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은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 있는 비논도(Binondo)라는 지역이다. 1590년대 당시 필리핀을 식민 지배하던 스페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피난해 온 복건 및 광동 출신 중국인 이민자들을 위한 자치지구를 마련하기 위해 건설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후 멕시코 및 쿠바, 푸에르토리코로도 재이주했다. 이런 역사 덕에 필리핀 화교들은 대거 스페인화되어 성명부터 스페인어이고 가톨릭을 믿으며 스스로를 스페인인으로 여기게들 되었다. 호세 리살의 가문이 스페인화된 화교 가문이다.[2]
역사[편집]
차이나타운 최초의 시작은 북송 시기 해외무역을 하던 무역상들의 중간 보급소였다고 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청나라 말기에 노동자 계통의 한족 중국인들이 해외에서 거주하는 장소이다. 아편전쟁 패전 후 청에서 쿨리를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남아공, 말레이 반도 등으로 송출하면서 해외로 이주하는 중국인들이 생겨났으며 이들 중엔 호키엔 및 광동지방 출신이 가장 많았다. 특히 멕시코, 쿠바, 캐나다, 푸에르토리코, 페루 등 아메리카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해협식민지에 쿨리가 대거 들어갔다. 그리고 홍콩이 영국의 영토가 된 이후 영국, 호주, 뉴질랜드로도 화교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15~16세기부터 남중국해 연안 항구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 걸쳐 중국인 정착촌이 존재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현지 사회에 통합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큰 규모의 차이나타운은 많지 않다. 1860년 베이징 조약 체결로 청나라의 자국민 해외 이주 금지 정책이 철폐된 이후 중국인의 해외 이주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아시아 이외에도 차이나타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구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차이나타운이 형성됐다. 영국은 1850년대 후반 리버풀에 많은 중국인 이민자가 유입됐다. 비슷한 시기 미국으로의 이민도 시작됐다. 입국 장소인 샌프란시스코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됐으며 현재도 북미에서 가장 큰 규모로 손꼽힌다. 중국인 이민자들은 주로 건설 현장이나 부두, 탄광 등 육체노동 현장에 투입됐다. 1860년대 진행된 대륙횡단철도 공사에도 참여해 철도가 지나는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차이나타운이 만들어졌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850년대 골드러시 시기에 중국인 이주민이 유입돼 멜버른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됐다.
미국에서는 19세기 후반 경기침체가 이어지자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큰 비율을 차지한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종차별과 갈등이 심화됐다. 1882년 중국인의 미국 이주를 금지한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이 시행됐다. 1943년 법이 폐지될 때까지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시민권을 받을 수 없고 재산도 가질 수 없었다. 차이나타운도 규모가 줄었으며, 1970년대 베트남 전쟁으로 난민과 망명자들이 미국에 건너오면서부터 다시 활성화됐다. 이후 미국의 차이나타운은 다양한 아시아계 사람들이 거주하며 교류한 지역으로 변모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정작 전 세계 자원개발 및 인프라 투자사업인 일대일로를 진행한 과정에서 현지인은 전혀 고용하지 않고 중국인 노동자만 쓰고 중국산 원자재만을 사용하면서 결국 헛수고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과거 한국이 아라비아반도 여러 공사 현장에 일할 현지인 노동자나 기술자가 없어서 한국인 노동자나 기술자를 쓴 경우와 다르게 아프리카나 자원개발을 한참 하는 파키스탄 같은 다른 개발도상국에는 싼 인건비 및 실업자인 현지인들을 얼마든지 써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꼭 중국인 노동자를 데려가니 반중 감정을 부채질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화교만 해도 광동어를 쓰는 광동인들이며 표준 중국어를 못해서 중국 대륙인과는 영어로 소통해야 한 처지다. 이들에게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냥 중국 국토를 참절한 공산비적에 불과할 뿐이다. 화교들이 일찍이 그 나라 국민으로 정착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선 대규모 반화교 폭동이 여러차례 일어나기도 했다. 중국과 견원지간인 베트남에서는 1975년 공산화 이후 화교들을 해외로 대거 추방하여 1979년 중월전쟁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런 여파로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의 화교는 오로지 경제 활동만 할 수 있고 정치계나 사법 기관, 권력 기관 등으로의 진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국적은 당연히 두 나라 국적이다. 그러나 정치계 진출은 제한돼 있고 재계,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태국이나 필리핀의 경우는 아예 화교가 현지에 동화되어서 시노타이, 시노 필리피노라 불리며 정체성을 민족이 아닌 거주지역으로 두고 현지식 이름과 언어를 1순위로 사용할 정도로 동화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푸젠성 출신들이지만 민남어나 객가어를 대부분 구사할 줄 모른다. 그래서 이 둘은 차이나타운이 없거나 규모가 크지 않다. 예외적인 경우가 바로 방콕의 후아람퐁역 일대다.
일본의 화교 역사는 일본 제국이 청일전쟁 후 청의 대만성이었던 포르모사섬을 식민지로 삼은 뒤 일본 열도에 정착한 대만 출신 한족 본성인들의 후예다. 이들은 주로 도쿄 근처인 가나가와현의 요코하마에 정착했다. 그리고 현재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차이나타운 역시 요코하마에 있다. 그 이외에도 게이한신권의 고베 및 규슈 지방에도 차이나타운들이 있다. 특히 규슈에 있는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의 차이나타운은 도시 규모에 비해 크며 공자를 모시는 문묘가 존재한다. 일본에선 요코하마, 나가사키, 고베 차이나타운을 3대로 간주한다.
한국의 경우 과거엔 인천역 앞과 북창동 등 인천 중구의 화교 거주 지역을 전통적으로 차이나타운이라고 불러왔으나 21세기 들어서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림동, 구로구 가리봉동 일대 등 조선족 및 한족 중국 대륙인 거주지가 주로 차이나타운으로 불린다.[3]
특징[편집]
차이나타운은 거리 입구에 패방(牌坊)이 세워져 있다. 패방은 중국 전통 건축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지는 탑 모양의 문(門)이다. 패루(牌樓)라고도 한다. 여러 개의 기둥에 지붕을 얹은 모양으로 화려한 채색과 정교한 장식이 특징이다. 기둥은 붉은색이 많으며 양쪽에 석사자(石狮子)를 세우기도 한다. 차이나타운 거리 전체에서 중국 문화를 느낄 수 있다. 많은 가게가 중국어 간판을 사용하며 중국의 전통적인 물품이나 음식 등을 판매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차이나타운 내 한자 표기가 의무화되어 있기도 하다. 중국 이외에도 한국·베트남·태국·말레이시아 등 다양한 아시아 식당이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지역에서 설날과 중추절 등에 행사를 진행한다. 거리에서 장단에 맞춰 용춤과 사자춤을 선보이는 퍼레이드가 유명하다. 용춤과 사자춤은 부정한 것을 쫓고 운을 가져다준다는 의미가 있다. 중국 전통 무술이나 공연을 진행하기도 하며 월병 등 다양한 전통 음식도 판매한다.
세계의 차이나타운[편집]
일본의 차이나타운[편집]
아시아 최대 크기이며 중화가(中華街)라고도 불리는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을 필두로 고베 차이나타운, 나가사키 차이나타운과 같은 기존 빅 3 외에 최근엔 도쿄에 이케부쿠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차이나타운[편집]
대한민국의 인천 중구 북성동 인천역 앞에는 짜장면의 탄생지인 차이나타운이 있다. 개화기에 한국에 온 화교(중국사람)들이 치외법권 적용을 받던 공동체인 즉, 중국 조계지였던(참고로 일본사람들이 치외법권 적용을 받던 공동체였던 일본 조게지는 인천광역시 중구청 및 주변이다. 일본 하역회사(지금의 팟알카페), 영사관(지금의 인천 중구의회), 상인들이 의상실, 잡화점 등 가게로 사용하는 일본 전통가옥이 있다.) 차이나타운에는 화교들이 공부하는 중산학교 담장에 삼국지 벽화가 있다. 담장에는 삼국지의 줄거리와 벽화가 그려져 있다. 화교들의 종교공동체인 천주교 인천교구 해안성당, 도교 법당인 의선당(義善黨, 도교의 여덞 신선들이 바다를 건너는 벽화가 있다.), 월병, 공갈빵을 파는 가게, 천주교 제물포 순교성지(1845년 김대건 부제가 페레올 주교를 조선 천주교회의 큰어른으로서 모셔오기 위해 교우들과 중국 상하이에 출발했다는 곳이며,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다.)등이 있다.
부산에도 중구 영주동 부산역 맞은편에 차이나타운이 있으며, 화교 학교 등이 시설이 건립되어 있다. 1998년 안상영 시장 시절 상하이시(上海)와 자매 결연을 맺은 후 상해가(上海街, 혹은 상해 거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러시아인 유흥가와 접하여 차이나타운으로서의 분위기를 잃어가고 있으나 규모는 커지고 있다. 또한 매년 가을 '부산 차이나타운특구 문화축제'를 개최한다. 그 밖에 서울 마포구 연남동과 서대문구 연희동, 영등포구 대림동, 구로구 구로동 등의 상점 골목이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차이나타운[편집]
미국과 캐나다에는 서부 지역에 골드러시와 철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노동자로 들어오기 시작하며, 그들의 인구가 늘어났다. 화교들의 이민이 늘면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 밴쿠버, 토론토, 몬트리올 등의 대도시들에 차이나타운이 생겼다. 1997년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양될 예정이었던 홍콩에서 중국 공산당의 통치에 위협을 느껴, 대다수가 밴쿠버에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홍쿠버"(홍콩 + 밴쿠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가장 큰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인데 약 4만 명이 거주하며, 상점·학교 등 외에 절·극장까지 갖추고 있다.
영국의 차이나타운[편집]
영국이 홍콩을 지배한 후에 그쪽에서부터 많이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런던, 버밍엄, 맨체스터, 리버풀, 뉴캐슬 등의 대도시에 차이나타운이 생겼으며, 맨체스터의 차이나타운이 영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그 밖의 차이나타운[편집]
유럽에서는 파리의 차이나타운이 유명하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쿠알라룸푸르, 자카르타의 차이나타운이 잘 알려져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시드니, 멜번 등의 대도시에 차이나타운이 들어섰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