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기
쟁기(plow)는 소나 말에 끌려 논이나 밭을 가는 농기구이다. 농작물을 재배할 땅을 갈고 흙을 잘게 부수는 데 사용해 온 기구이다. 땅을 뒤엎으면 통기성을 증가시켜 흙에게 새 공기를 쐬어주고, 영양소를 땅 위로 끌고와 식물의 성장을 돕는다. 이 작업으로 잡초를 땅속으로 묻어버릴 수 있다.
땅을 파거나 뒤집는 데 사용했던 '뒤지개(digging stick)'나 '따비(weederplow)'에서 발달한 것으로, 처음에는 사람이 끌었으나 점차 소나 말 등을 이용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트랙터를 동력(動力)으로 이용한다.
가축을 사용한 쟁기의 사용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와 이집트(Egypt) 등에서 기원전 3500년 무렵부터 나타난다. 쇠로 된 보습을 사용하기 전에는 나무나 돌을 다듬어서 썼는데,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3000년 무렵의 황해도(黃海道) 봉산(鳳山) 지탑리(智塔里)의 신석기 유적에서 긴 타원형의 돌보습이 발견되었다. 이 돌보습은 가래(shovel)처럼 줄을 걸어 당겨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8년 발굴된 평안북도(平安北道) 염주(鹽州) 주의리(做儀里)의 유적에서는 수레바퀴와 함께 참나무로 만든 쟁기의 술이 출토되었는데, 기원전 8~7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新羅)의 제3대 노례왕(弩禮王, 재위 23~57) 때에 "비로소 쟁기 보습과 얼음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始製犁耜及藏氷庫作車乘)"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22대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이 논밭을 갈 때 소에 쟁기를 매어 끌게 하는 우경(牛耕)을 전면적으로 실시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신라는 이 시기에 국가 정책으로 우경(牛耕)을 장려했지만, 민간(民間)에서는 이미 널리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高句麗)에서는 그 이전 시기부터 우경(牛耕)과 쟁기 사용이 보편화해 있었다. 랴오닝성[遼寧省] 푸순[撫順]의 고이산성(古爾山城)에서는 4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철제 보습이 출토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황해도(黃海道) 안악(安岳)의 고구려(高句麗) 고분(古墳)에서는 코뚜레를 한 소가 여물을 먹는 모습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삼국시대 초기부터 철제 보습이 만들어져, 중기 이후부터는 소를 이용한 쟁기의 사용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벼농사가 일찍부터 발달한 한국에서는 소의 힘을 이용해 논밭을 가는 쟁기를 널리 사용해 왔으며, 쟁기질을 할 줄 알면 농사(農事)를 다 배웠다고 할 정도로 그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한국의 전통 쟁기는 크게 호리쟁기와 겨리쟁기로 나뉘는데, 소 한 마리가 끄는 것을 호리쟁기라 하며, 두 마리 이상의 소가 끄는 것을 겨리쟁기라 했다. 그리고 ‘술’의 형태에 따라 눕쟁기, 선쟁기, 굽쟁기 등으로 구분한다.
개요
쟁기는 농기구의 일종으로 땅을 갈아엎는 데 쓰이는 도구이다. 주로 빈 땅을 농경지로 바꾸거나, 오랫동안 농사를 반복하여 단단해진 땅을 갈아엎어서 비옥하게 만드는 데 쓰인다. 괭이나 삽으로도 땅을 갈아엎을 순 있지만 쟁기 쪽이 압도적으로 효율이 좋다. 다만 단단한 땅을 파헤쳐서 갈아엎으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는 점이 문제.
소 한 마리가 끄는 쟁기는 호리, 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는 겨리라고 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각도 등을 잘못 설계하면 전혀 써먹을 수가 없는 등, 제작에도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제작비용이 만만찮아 역사에는 제대로 된 쟁기가 너무 비싸 마을이 공동소유를 했다던가, 쇠보습이 없는 나무쟁기를 썼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흔했다. 사용도 마찬가지로 요령이 필요한 편이다.
인류의 농사 초창기에는 인력으로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 말 따위 가축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이 발명되어 전세계로 퍼져서 인류의 식량생산에 큰 공헌을 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트랙터같은 기계의 힘을 이용하지만 쟁기 자체는 변함없이 중요하다. 인류가 농업을 시작한 이후부터 땅을 갈아엎는 효율을 크게 향상시켜 농업생산력을 높인, 농업역사 초기의 중요한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 Carucate 또는 Carruca라고 불리는 쟁기는 중세 농업혁명의 중요한 발명이었다. 그 이전에는 유럽 쟁기는 앞에서 줄을 묶어 끄는 쇠말뚝 정도에 불과했는데 새로운 쟁기는 날카로운 철제 쟁기날(보습)과 쟁기날의 후방에 위치한 볏(mouldboard)이 있어 쟁기날이 깊게 잘라서 파낸 흙을 볏으로 뒤집어엎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쟁기몸통이 개선되어 훨씬 크고 무거워졌지만 더 적은 힘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이, 밭고랑도 똑바르게 땅을 팔 수 있었다.
특히 9세기 독일 북부의 춥고 숲이 우거지고 단단해 경작이 불가능하던 땅을 숫소 8마리가 끄는 대형 쟁기로 갈아 경지를 늘렸다. 농업생산성을 크게 올리고 수확을 늘려 9세기 전후 중세시대 하층농민들의 생활을 크게 향상시키고 중세 유럽의 인구가 늘어나게 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중세의 발명품이다. 하지만 11-13 세기의 유럽의 인구과잉을 유발하기도 했다. 14세기에는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인구가 크게 줄었다.
사람의 힘으로 끄는 쟁기는 '인쟁기'라고 부르는데, 아직도 차량이 들어가기 힘든 곳이나 취미 레벨의 텃밭 가꾸기에서 종종 사용된다. 인쟁기나 작은 엔진이 달린 쟁기 정도는 시중에 판매되는 제품도 있지만, 손재주가 있다면 자전거 프레임 따위로 자작하기도 한다. 재미삼아 개나 염소 따위가 끌게 하는 케이스도 있다.
텃밭이 넓다면 여기서 조금 더 나가 오토바이, ATV 따위에 쟁기를 DIY로 달아버리는 괴짜도 있다. 취미생활의 스케일이 큰 미국에서는 쟁기를 포함한 ATV용 농기구(아마존닷컴 ATV IMPLEMENTS 검색결과)를 팔기도 한다. 트랙터를 살 돈이 없는 제3세계의 농민들도 이렇게 다룰 때가 있다. 사실 포드T 자동차가 엔진 동력을 농기계로 쓰라고 광고한 역사가 있는, 오래된 일이다.
명칭
쟁기라는 이름은 '잠기'에서 비롯되었다. 1553년(명종 8)에 나온 ≪불설대보부모은중경 佛說大報父母恩重經≫에서 '철리경지(鐵犂耕之)'를 "잠기로 가라."로 새겼고, 윤선도(尹善道)의 시조에도 "잠기연장 다스려라."라는 구절이 있다.
잠기는 본디 무기를 가리키는 '잠개'의 바뀐 말로, 예전에는 농기구를 무기로도 썼기 때문에 두 가지를 같은 말로 적었던 것이다. 잠기는 19세기 초 장기로 바뀌었으며, 오늘날의 쟁기가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역사
초기에는 사람, 수소, 혹은 말이 쟁기(plow)를 끌었다. 바퀴가 달린 쟁기는 중세 유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20세기에는 쟁기의 동력으로 증기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가스를 사용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부드럽게 일구어둔 흙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 단지 땅에 구멍을 내고 씨앗을 밀어 넣는 것보다 더 좋은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땅을 파는 막대기는 가장 처음으로 만들어진 농기구 가운데 하나였다.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만들어진 쟁기는 약 8,000년 전의 것인데, 여러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사람은 가지의 뾰족한 끝부분이 땅을 고를 수 있도록 당겼고, 다른 사람은 갈라진 부분을 세운 상태로 아래로 힘을 주면서 밀었다. 기원전 2000년경의 이집트 사람들은 장비를 단 수소가 끄는 나무 쟁기로 땅의 표면을 부드럽게 일구었다. 로마인들은 쟁기에 철로 제작한 날을 덧대었지만, 이 쟁기는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북유럽 지역의 척박하고 딱딱한 경작지를 일구는데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수소, 그리고 다음에 말이 끄는 바퀴 달린 쟁기의 발전으로 인해 중세 초기에는 농업이 전 유럽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16세기경에는 볏(moldboard)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쟁기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진전이었다. 볏은 쟁기의 보습 위에 달린 구부러진 금속판을 말하는 것이다. 볏은 보습에서 잘게 갈린 흙, 즉 볏밥을 한쪽으로 뒤집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서 땅을 더욱 부드럽게 일굴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한 번도 경작된 적이 없는 광활한 토지를 경작하는 '특별한' 문제에 직면했던 19세기에 비로소 쟁기의 형태에 변화가 생겼다. 1837년에 버몬트의 발명가 존 디어(John Deere)는 대초원의 땅을 일구는데 적합한 강철 쟁기를 만들었다. 찐득찐득한 흙을 깨끗이 일구어내는 데에는 그가 개발한 매끈한 쟁기 볏이 제격이었다. 그는 20년 동안 해마다 10,000대의 쟁기를 판매했다. 또한 디어(Deere)와 다른 제조업자들은 타고 운전할 수 있는 쟁기인 설키 플라우(sulky plow)를 내놓았는데, 농부가 쟁기에 탈 수 있었기 때문에 운전이 용이했다. 증기를 이용한 쟁기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한국의 쟁기
우리나라의 쟁기는 이미 5~6세기 고구려시대의 쟁기보습이 출토된 바가 있고, 고려시대의 보습과 볏은 크기나 모양이 재래의 것과 꼭 같아 이미 오래 전부터 발달된 쟁기가 쓰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쟁기는 술의 모양에 따라 선쟁기 · 눕쟁기 · 굽쟁기로 구분된다.
선쟁기는 형태상으로 가장 고식적(古式的)이지만, 쟁기술이 땅에 닿지 않아 사실상 술이 없는 쟁기다 그래서 부리기는 어렵지만 삼각형 구조라 보습이 흙 속으로 잘 파고들기 때문에 땅이 척박하고 돌이 많은 강원도 등의 산골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반대로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사용돼 온 눕쟁기는 술이 길게 땅바닥에 닿기 때문에 쟁기가 안정되어 부리기가 쉬우나 쟁기가 크고 무거운 단점이 있어 땅이 부드러운 평야지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눕쟁기는 술이 곧은 것과 둥근 것이 있는데 곧은술 눕쟁기는 눕쟁기의 전형적인 형태로 술-자부지-성에-한마루가 4각을 이루는 중국쟁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고, 둥근술 눕쟁기는 자부지를 밀어 술을 세우면 선쟁기처럼 쓸 수 있고 눕히면 곧은술 쟁기처럼 사용하는 특징을 가졌다. 눕쟁기의 사진에서는 보습과 볏이 빠져 있다.
굽쟁기는 기본적으로 자부지-술-성에가 삼각형을 이루는 선쟁기의 형태지만 짧은 술이 있어 눕쟁기의 안정성도 가진다. 그래서 굽쟁기는 작고 가벼운데다 경기력(耕起力)이 좋고 안정성이 뛰어나 19세기 말엽부터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굽쟁기는 일본으로 소개되어 경심(耕深) 조절방식과 볏이 개량되어 일정기(日政期)에 다시 수입되었다.
그 후 까막머리의 견인점(牽引點)을 바꾸어 경폭(耕幅)을 조절하는 방식과 쟁깃밥의 반전방향을 바꿀 수 있는 빗살형 볏쟁기가 등장하였고, 결국 이러한 유형의 쟁기가 지금의 경운기와 트랙터에 사용되는 쟁기의 모체가 되었다.
서양쟁기와 같이 철제 성에(beam)와 두 개의 자부지를 가진 개량 쟁기도 보급되었으나 널리 이용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쟁기는 소 한 마리에 쓰는 호리와 두 마리에 쓰는 겨리가 있다. 호리는 소백산맥 이남지방에서, 겨리는 중부 이북의 산골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겨리를 부리기 위해서는 회전할 때, 바깥에 바깥 소와 안 소의 자리가 정해져 있어서, 안소와 바깥소가 자리를 바꾸면 쟁기질을 못한다. 이러한 불편 때문에 소백산맥 이남에서는 산간지역이라 하더라도 겨리를 쓰지 않았다.
쟁기로 하루 1,000∼1,500평의 논을 갈 수 있었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