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국가
분단국가(分斷國家)란 본래는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나, 실제로는 그 영역 전체를 지배하는 단일 통치 기구가 없어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의해 복수의 지역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통치 기구가 공존하는 불안정한 상태의 국가를 말한다. 간략히 분단국이라고도 한다.
보통 일방의 주권만 부정되는 분리주의 또는 독립운동 따위의 개념과 달리, 궁극적으로는 상대 정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다시 흡수하여 재통일된 단일국가를 목표로 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래는 하나의 국가였다가 두개로 갈라진 국가라 할 지라도 서로 정상적으로 주권을 인정하고 상대국의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분단국가가 아니다.
양자간의 통일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통일에 대한 방법론과 권력 구성을 두고 이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기 때문에 분단 상황은 오래 지속되는 편이다.
유형[편집]
- 국제형 분단 : 특정 국가가 너무 강대해서 주변국에 위협이 될 시(독일), 혹은 특정 국가의 위치가 두 세력의 사이에 위치할 시(대한민국) 강대국들이 강제로 갈라버린 국가들이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과 북한, 독일연방공화국-독일민주공화국이 대표적 사례이다. 독일은 재통일된 단일국가를 다시 형성한다.
- 내쟁형 분단 : 같은 나라 안에서 뜻이 안 맞아 계속 다투다 갈라지게 되는 유형을 말하는데, 북키프로스-남키프로스,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의 사례가 있다.
원인[편집]
20세기 중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고 세계 곳곳에 퍼지면서 좌우 대립이 극심해졌다. 공산주의는 기존 자본주의 사회를 뿌리부터 엎는 혁명을 주장하였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들 공산주의자들을 사회 불온세력으로 다루었다. 때문에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한 사회의 틀로 묶어두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이 대립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과 소련 공동의 적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세계 곳곳에 자신들의 세력을 투사했다.
독일은 패전의 결과로 점령되어(연합군 점령하 독일)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면서 분단된 예이다. 한편 세력권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미소 양국은 현지의 우익과 좌익을 포섭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어떤 지역들에서는 단일한 정치체를 형성/유지했지만, 좌익과 우익의 세력이 비등비등한 경우 둘 다 강대국을 끼고 있어 상대를 온전히 몰아내지 못하는 교착 상태, 즉 분단에 이르렀다.
이처럼 분단국가는 주변 강대국의 영향을 크게 받기에 이를 빌미로 상대국을 괴뢰 정권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자신들은 진정한 민족국가이지만 다른 진영은 강대국의 사주를 받아 억지로 세워진 정권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북한을 소련의 괴뢰 정권으로 규정했었고(북괴), 북한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미국의 괴뢰 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외에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 공화국-베트남 민주 공화국, 서독-동독 모두 자유진영 측에서는 상대국을 소련의 괴뢰 정권으로, 공산진영 측에서는 상대국을 미국의 괴뢰 정권이라고 주장했다.
키프로스는 자본주의-공산주의 간의 이념대립으로 분단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계와 터키계간의 민족 분쟁으로 분단되었기에 남키프로스는 북키프로스를 터키의 괴뢰 정권이라 주장하고 북키프로스는 남키프로스를 그리스의 괴뢰정권이라 주장하여 다른 분단국가와 양상이 유사하다.
현존하는 분단국가[편집]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48년 ~ )
- 한국의 분단은 1945년에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각각 분할점령하면서 조짐을 보이게 되었다. 1948년 UNTCOK의 주관아래 실시된 5.10 남한 총선거를 바탕으로 8월 15일 대한민국이 북위 38도선 이남에 수립되었으며, 동년 9월 9일에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근간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북위 38도선 이북에 수립되었다. 1950년 6월 25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에 대하여 한국 전쟁을 일으켰다가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휴전 협정 이후부터 현재와 같은 경계를 이루며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유엔의 감시 하에 휴전 상태에 있다. 양측은 초반 할슈타인 독트린 방식의 하나의 한국 외교원칙을 내세웠으나, 현재는 동시승인 및 수교를 사실상 용인하고 있으며 1991년에는 양측 모두 유엔에 가입하였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모두 서로가 다른 쪽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통일반대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해 분단국가로 분류한다.
- 1912년 청나라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의 결과로 중화민국이 건국된 이후, 현대 중국의 분단은 1949년 10월 1일에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이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하고,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가 중화민국을 타이베이로 천도(국부천대)하면서 시작되었다. 양측은 현재까지 할슈타인 독트린 방식의 하나의 중국 외교원칙을 고수하여 동시수교를 불허하고 있으나,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2758호 결의로 유엔에서 중국 대표의 지위를 갖던 중화민국의 대표 자격이 경질되자 중화민국은 유엔을 탈퇴하였고, 이 여파로 중화민국의 외교적 입지가 현격히 좁아져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이 타국과의 외교관계를 압도하게 되었다. 현재 중화민국을 국가로 인정하고 수교하고 있는 나라는 유엔 회원국 중 14개 국가에 불과하며, 중화민국에서는 리덩후이를 시작으로 현실론적 관점에 입각한 두 개의 중국을 주장하기도 하고, 본성인의 주도에 의한 탈중국화 운동까지 가세하여 매우 복잡한 정세를 가지고 있다.
- 키프로스섬의 분단은 1974년에 그리스 군사 정권의 지지를 받은 그리스계 민족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에 터키는 터키계 동족 보호를 명분으로 동년에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북부를 터키군이 점령하였다.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은 미국과 북대서양 조약기구로부터 비밀리에 후원을 받았다. 극단적 민족주의의 발호로 일어난 이 분쟁으로 인해 수 천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으며, 터키의 후원으로 키프로스섬 북부에서 실권을 잡은 터키계의 북키프로스 정부가 수립되면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분단된 양측은 유엔에 의해 설정된 휴전선(Buffer Zone)을 사이에 두고 평화유지군의 중재로 제어되고 있다. 한편 북키프로스를 터키의 괴뢰 정권으로 간주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키프로스에 대한 교류를 지양하라는 취지로 유엔 회원국에 권고함으로써 현재까지 북키프로스는 터키만이 유일한 수교국으로 외교적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고, 남부의 키프로스 공화국의 경우 분단 이전인 1960년부터 유엔 회원국 지위를 유지해오고 있으며, 2004년 5월부터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
과거의 분단국가[편집]
- 베트남 (베트남민주공화국 - 베트남공화국)
- 베트남의 분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였던 베트남이 1945년 9월 2일에 호치민의 주도로 하노이의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은 프랑스가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벌이게 되었으나,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완전한 독립을 맞았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분단시켰고, 기존에 약속한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 지엠의 주도로 베트남공화국으로 변모하여 남북 대결이 본격화되었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으나,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미군은 철수하였다. 1975년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주도로 베트남 공화국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었고,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남북이 통일되었다.
- 예멘 (예멘아랍공화국 - 남예멘)
- 예멘은 과거에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북예멘(예멘아랍공화국)과, 영국령이었던 남예멘(예멘인민민주공화국)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하면서 북예멘은 1912년에 독립하여 전 세계 국가적으로 빨리 독립하였다. 그러나 남예멘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모두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승리하여 독립하지 못했다. 결국 남예멘은 소련의 힘을 빌려 영국과 대립하여 마침내 1967년에 독립하였다. 이후 서로 간의 대립이 팽팽하다가 독일 통일이 되는 같은 해, 1990년 5월에 남북 통일정부 구성에 평화적으로 합의하여 잠깐 통일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서로 간의 권력분배에 관한 갈등이 촉발하고 남북 예멘의 종교의 문제 갈등까지도 심각하여 결국 1994년 남예멘은 연방에서 탈퇴하여 예멘민주공화국을 선포해 분단 상황으로 돌아가 남북내전으로 비화했다. 이 내전은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던 북예멘의 군대가 남예멘의 수도 아덴을 점령하여 비로소 예멘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이는 냉전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유주의가 사회주의를 유일하게 무력으로 승리하는 전쟁으로 남게 되었다.
- 최근에는 옛 남예멘 지역을 중심으로 분리독립 요구가 증가하고 있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한편 북예멘 중 상당수 지역에서 우세한 시아파를 믿는 후티가 반란을 일으켰고, 후티가 수도를 장악한 이후 남예멘 분리주의자들은 남예멘의 독립을 유보하고 남예멘 출신 하디대통령의 정통 예멘정부를 따르기로 하면서 실질적으로 재분단된 채 서로 통일을 추구하는 모습이 되었다. 현재는 남예멘 분리주의자 가운데 후티와의 분리 협정을 통한 종전과 재분단을 요구하는 사람이 생겨나 복잡한 상황이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네 개의 점령지역으로 나뉘었으며, 연합국에 의해 독일이 분할 점령된 원래 목적은 독일이 재결합하지 못하게 억제하여 전쟁을 도모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냉전의 영향으로 프랑스·영국·미국의 점령 지역은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소비에트 연방의 점령 지역은 일부가 폴란드 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으로 편입된 후 독일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다만 서베를린은 소비에트 연방의 점령 지역이 아니었던 탓에 독일 연방 공화국의 월경지가 되어 지리적으로 수도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독일민주공화국에 둘러싸인 서베를린은 독일 분단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1961년 독일민주공화국은 서베를린의 고립을 촉진하기 위해 베를린 장벽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독은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고, 동독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하는 계기를 절정으로 분단이 고착화되기도 했으나, 1974년 FIFA 월드컵에서도 16강까지도 동반 진출하였다. 그리고 이후 1990년 10월 3일 독일민주공화국이 해체되면서 독일민주공화국의 관할에 있었던 독일 지역이 독일연방공화국에 병합하는 형태로 독일의 재통일이 완성되었다.
- 당시 19세기에는 미국은 냉전과는 달리 북부 지방은 공업을, 남부 지방은 농업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남부인들은 흑인들을 짐승처럼 돈을 사고 팔며 여성들은 집안일을, 남성들은 목화따는 일을 하도록 하여 그들을 노비처럼 부려먹고 차별했다. 그래서 흑인들은 억울하고 비참한 생활을 때로는 피할 수 없었고 극단적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다가 에이브러햄 링컨이 흑인 차별 대우를 반대를 주장하여 1861년에 대통령이 되자 이에 반박한 남부인들은 7개 주부터 연방 탈퇴를 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임명하여 후에는 6개 주까지도 추가로 탈퇴하여 총 13개 주로 구성된 아메리카 남부 연합을 결성하였다. 즉, 공업을 빌미로 흑인 해방을 주장한 아메리카 합중국과 흑인을 엄청난 차별을 하고 일을 부려먹겠다는 아메리카 남부 연합은 1861년부터 남부가 먼저 전쟁을 시작하여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1863년에 에이브러햄 링컨이 흑인 해방을 하고, 유리한 전보를 통해 남부보다 앞선 산업시설을 통해 마침내 1865년 아메리카 합중국이 정식 통일되어 흑인도 해방되었다. 그러나 해방된 흑인들은 옛 남부인이 결성한 KKK단이라는 집단에게 당하여 온갖 협박과 제대로 된 자유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1960년대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의 흑인 평등 사상을 주장하여 비로소 흑인과 백인은 그나마 차별이 약하게 되고 KKK단에서 활동한 백인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