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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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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딜방아
물레방아의 일종인 통방아
한국민속촌에 있는 연자방아

방아곡물절구에 넣고 탈각(脫殼) ·정곡(精穀)하거나 제분하는 데 이용되던 농기구이다.

그 종류는 지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발로 디디어 찧는 디딜방아, 물의 힘을 이용하는 물레방아, 그리고 소 ·말 등의 축력(畜力)을 이용하는 연자방아 등이 있다.

이러한 탈각 ·제분 등에 이용된 기구는 석기시대에 석명(石皿)과 석봉(石棒) 한쌍으로 알이 작은 곡식을 탈각하고 제분하는 데 사용하였던 갈돌[磨殼石:碣石]에서부터 맷돌로 발전하였다. 이 때까지 인력(人力)을 유일한 동력으로 쓰던 단계에서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아, 축력을 이용하는 연자방아로 발전하는 단계에 이르러 능률에 큰 진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방아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강원도 道溪에 몇 개의 재래식 물레방아가 보존되어 있음), 발동기와 병행하는 변형된 물레방아 100여개가 전국에서 가동되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상세

방아는 곡물을 쓿어 겉껍질을 벗기거나 빻아서 가루를 내는 데 쓰는 연장이다.

나무나 돌로 만든 것이 많으나 이나 도자기로 만든 것도 있다.

방아는 갈돌에서 비롯되었다. 다양한 방아의 유형을 발전 경로 면에서 구분해보면, 첫째 갈돌에서 돌확 · 맷돌 · 매통 · 토매 · 연자매로 발전한 무리와,

둘째 갈돌에서 절구 · 디딜방아 · 물방아 · 물레방아 따위로 나아간 무리로 나눌 수 있다. 앞의 것은 아래짝 위에 놓인 물질을 위짝을 돌려서 으깨듯 부수는 연장이고, 뒤의 것은 공이로 내리쳐서 찧는 연장이다.

인류는 식량생산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굳은 나무열매를 갈돌로 가루를 내어 먹었다. 갈돌은 윗부분이 평평한 돌판에 둥근 돌(갈개)을 한 손에 쥐고 으깨듯 문질러 쓰는 연장이었으나, 뒤에는 안장처럼 앞뒤가 들리고 갈개도 방망이모양으로 바뀌어서 국수 밀듯 두 손으로 밀어 쓰게 되었다.

갈돌은 우리 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의 유적에서 나오며, 이러한 유적지가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시기에 널리 보급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한편,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초기인 앙소문화(仰韶文化) 유적에서 거의 완전한 모양의 갈돌 11점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안장형 갈돌은 전 유럽 · 북아프리카 · 서남아시아 · 몽고 · 동만주 등 주로 밀 생산지대에 분포하며,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500년에 이것을 사용하는 석상이 발견되었다.

돌확은 오늘날에도 농가에서 보리를 대끼거나 고추 따위의 양념을 빻는 데 많이 쓴다. 갈판은 자연석을 방아확처럼 우묵하게 파거나 평평한 바닥에 전이 달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전라남도지방에는 벽과 바닥을 우툴두툴하게 구운 오지확도 있다. 갈개는 흔히 손 안에 드는 둥근 돌을 쓰나 도제(陶製) 확에는 흙으로 구운 것을 사용한다.

맷돌은 도시국가가 성립되는 등 식량의 대량 소비에 따라 생겨난 연장이다. 이것은 기원전 10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오리엔트지방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한쪽으로는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한나라)에, 다른 쪽으로는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

맷돌이 우리 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937년 봄 평안남도 대동군 토성리의 낙랑군터에서 화강암으로 만든 맷돌(지름 52㎝, 윗돌 높이 21㎝, 아랫돌 높이 13㎝)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도 1∼2세기경에는 맷돌을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맷돌은 다시 일본에 전래되었는데, 『일본서기』에는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이 이를 전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우리네 맷돌은 위짝과 아래짝의 두께가 서로 비슷한 것과 아래짝이 매우 높고 주둥이가 길게 달리도록 만든 것의 두 종류가 있는데, 뒤의 것은 남부지방에서 많이 쓴다. 앞의 것은 받침 위에 올려 놓거나 함지 또는 맷방석 따위에 앉혀 놓는다.

맷돌의 재료로는 흔히 화강석을 쓰나 벌레가 파먹은 듯한 구멍이 나 있는 청흑석(靑黑石)이나 속돌로 만들며, 속돌제는 매우 가벼워서 이것으로는 풀매를 제작할 뿐이다. 화강석제는 마찰면이 닳아 없어지기 쉬우므로 이따금 쪼아 주어야 하지만 남부지방에서는 맷돌에 홈을 새겨서 쓴다.

이 홈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르나, 어떠한 경우에도 양쪽의 것이 평행이 되지 않도록 하며, 두 짝의 홈이 만나는 점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가도록 한다. 이렇게 해야 곡식이 잘 갈릴 뿐 아니라 갈린 가루가 바깥쪽으로 밀려 나가 떨어지는 것이다.

큰 맷돌에 많은 양의 곡물을 갈 때는 맷손에 맷지게를 연결하고 두세 사람이 노를 젓듯이 돌리며, 경우에 따라 Y자 모양으로 끝이 벌어진 맷손을 잡아맨 맷지게를 천장에서 내린 줄에 걸고 서너 사람이 돌리기도 한다.

맷돌에서 더욱 발전한 것이 연자매이다. 연자매는 맷돌보다 수십 배나 크고 사람 대신 소나 말이 돌리게 되어 능률도 그만큼 높다. 맷돌은 위짝과 아래짝을 마주 포갠 채 돌리나, 연자매는 아래짝 가운데에 박은 기둥을 의지하여 위짝을 세워 돌리는 구조이다. 곳에 따라서는 톱니장치를 한 연자매도 나타났는데, 이것은 톱니의 회전에 따라 아랫돌이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가축의 힘을 이용한 연자매는 서양의 경우 15세기 무렵에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1313년에 간행된 중국의 왕정(王禎)이 쓴 『농서(農書)』에는 연자매의 위짝을 두 마리의 나귀가 끄는 그림과 함께 톱니장치를 한 것이 실렸다. 우리 나라 문헌으로는 1527년(중종 22)에 나온 『훈몽자회(訓蒙字會)』가 있다. 이 책에는 맷돌을 가리키는 마(磨) 자 외에, 연(碾) · 애(磑) · 아(砑) 자의 새김이 실려서 당시에 연자매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또한 1690년(숙종 16)에 간행된 『역어유해(譯語類解)』에 ‘연자(碾子)’가 실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이때는 연자매가 널리 보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나 말이 귀한 데에서는 연자매를 사람이 돌리기도 하였으며, 특히 현무암으로 만든 제주도의 것은 비교적 가벼워서 사람이 운전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디딜방아나 물레방아를 쓰지 않았던 만큼 마을마다 연자매를 공동으로 세웠는데, 이에는 대체로 혈연이 중심이 되었으며, 아버지가 쓰던 방아를 아들이 쓰게 마련이었다.

매통은 쌀을 주식으로 삼는 지역의 연장으로, 밀을 상식하는 서양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원리나 공정은 맷돌이나 연자매와 같으나 벼의 껍질을 벗기는 데에만 쓰기 때문에 재료가 나무인 것이 다를 뿐이다. 몸체는 길이 50㎝ 정도의 통나무(지름 40∼60㎝) 두 짝으로 이루어지며, 두 짝이 서로 닿는 마구리에는 요철로 이를 파놓았다.

곡식을 위짝 중앙에 길이로 낸 구멍에 흘려 넣으면서 앞뒤로 돌리면 껍질이 벗겨져 나온다. 위짝은 아래짝 기둥을 의지하여 돌아간다.

매통은 중국 남부의 수도(水稻)지대에서 발명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수당(隋唐)시대부터 써왔다. 이에 대한 우리 나라의 기록은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海東農書)』에 처음 보이지만, 우리에게서 건너간 것으로 생각되는 매통이 일본에서는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도 있었다고 하니 사용연대는 훨씬 더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 중국 · 일본의 매통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중국 것은 이[齒]를 매통처럼 세로로 파서 위짝을 회전시켜야 하지만, 우리나 일본 것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팠기 때문에 반회전시켰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한 사람 또는 서너 사람이 돌리지만, 두 나라에서는 반드시 두 사람이 마주보며 돌린다.

한편, 일본 것은 아래짝의 기둥이 위짝 위로 솟아올랐으며, 이를 위짝에 있는 손잡이모양의 가로막대에 꿰어 놓았다. 그리고 위짝에 잡아맨 새끼줄을 두 가닥씩 잡고 앉은 채로 돌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비하여 우리 것은 아래짝 기둥은 위짝 밖으로 나오지 않으며 위짝 가운데에 박힌 손잡이를 한쪽씩 쥐고 서서 돌린다.

토매의 기능은 매통과 같으나 형태가 조금 다르다. 이것은 둥우리모양의 그릇에 진흙을 다져 넣은 것으로, 위쪽에 단단한 나무를 박아 이[齒]로 삼는다. 매통보다 매우 능률적이나 무게 때문에 낟알이 깨지는 흠이 있다. 중국에서는 원대(元代)에 생겨났으며, 1766년(영조 42)에 유중림(柳重臨)이 간행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도 보인다. 일본에는 17세기 초에 전래되었다.

절구는 돌이나 나무토막을 우묵하게 판 것으로 벼농사를 많이 짓는 아시아지역에서 널리 사용된다. 유럽에서는 적어도 그리스시대 이전부터 썼으며, 로마시대에 널리 보급되었으나 로마시대 말기부터 중세에 이르는 사이에 수차(水車)가 발달됨에 따라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중국의 경우 『역경』의 계사전(繫辭傳)에 “황제 요 · 순이 만들다. 나무를 잘라 공이를 만들고 땅에 박은 절구를 쓴다. 절구는 매우 쓸모 있어 만민을 구하다.”라는 내용이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구는 옥수수농사를 짓는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도 중요한 연장의 하나로 손꼽았다. 절구는 또 그 형태에 따라 허리 부분이 좁은 잘록절구와 위아래가 밋밋한 통절구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통절구는 중부지방에서, 잘록절구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많이 쓴다.

그러나 제주도의 절구는 이와 달라서 넓고 큰 함지를 닮았으며 가운데에는 돌확을 박았다. 이러한 절구는 여러 사람이 둘러서서 찧는 데 편리하다. 한편, 절구공이에도 차이가 있어서 중부에서는 가운데가 잘록한 것을 쓰나 남부지방에서는 손으로 쥐는 부분만을 가늘게 깎은 것을 사용한다.

일본 절구와 공이에도 이와 같은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는 한국 절구의 전래 사실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이도 곧은 공이와 굽은 공이 두 가지가 있다. 굽은 공이에는 나무자루에 직각이 되도록 쇠몽둥이를 박은 것이 많으며, 큰 나무 끝에 돌을 박아 쓰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 굽은 공이는 18세기에 나타났으며, 절구도 통절구로 바뀌었다.

디딜방아는 절구에서 비롯되었다. 절구는 주로 손의 힘을 빌렸으나 디딜방아는 몸무게를 실은 발의 힘을 이용하게 되어 그만큼 능률이 높아졌다. 디딜방아의 역사도 절구 못지않게 오래되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후한시대의 무덤에서 흙으로 빚은 디딜방아의 모형이 출토되어 적어도 기원전에 디딜방아가 사용되었음을 알려 준다. 우리 나라의 것으로는 황해도 안악에서 발견된 고구려 무덤의 벽화를 들 수 있다.

방앗간에서 한 사람은 방아를 찧고 다른 한 사람은 찧은 곡식을 키에 담아 까부르는 장면이다. 이 무덤에서는 347년이라는 묵서명(墨書名)이 발견되었으므로 고구려에서의 디딜방아 역사는 4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셈이다.

일본에는 7세기 무렵에 들어갔으며 나라시대 노래집인 『만엽집(萬葉集)』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한편, 유럽에서는 중세에 사용되었다. 디딜방아는 우리 나라 · 중국 ·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 인도 · 카프카스 · 라오스 · 버마(지금의 미얀마) · 우크라이나 · 이탈리아, 그리고 폴란드 · 헝가리 · 스위스 북부 · 독일을 비롯한 동부 유럽에서도 쓴다.

그런데 우리네 방아와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기타 지역의 방아 사이에는 형태상의 큰 차이가 있다. 우리 방아는 다리가 Y자 모양으로 벌어져서 두 사람이나 그 이상이 서로 마주서서 찧으나(양다리방아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음), 다른 곳의 방아는 곧은 나무로 되어 한 사람이 쓴다(이를 외다리방아라 함).

다시 말하면, 양다리방아는 우리의 발명품이다. 다만, 앞에서 설명한 고구려 벽화의 방아는 외다리방아인데 이는 디딜방아가 중국에서 들어온 초기에 해당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도 우리 나라 남부지방에서는 외다리방아를 더러 쓰기도 한다.

물레방아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바퀴를 돌리고 이에 따라 공이가 오르내리도록 고안한 방아이다. 물레의 '물'은 '물[水]'을, '레'는 수레 · 굴레의 '레'처럼 '바퀴'를 뜻하는 말이다.

물레방아는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낙차가 없는 데에서는 물이 흘러가는 힘을 빌리기도 하는데, 이를 물방아라고 부른다. 어느 것이나 바퀴 굴대에 붙은 두 개의 누름대가 바퀴가 돌 때마다 번갈아 가며 방아채를 눌러서 공이가 오르내리게 한다. 근래에는 바퀴를 돌리는 힘만을 물에 의존할 뿐, 내부에는 기계장치를 한 것이 많이 생겨났다.

이 방아는 서아시아지방에서 발명되었으며, 로마에서는 1세기경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중국에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서역으로부터 들어왔다. 우리 나라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 권148 지리지의 것으로, 지금의 서울 세검정 근처에 물레방아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예로부터 물레방앗간은 잘 곳이 없는 사람들의 유숙처나 남녀의 밀회장소로 이용되었다. 또 민간에서는 이곳에서 해산하면 사내아이를 낳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더 많은 남아가 태어나리라고 여겨 진통이 시작되는 산모를 일부러 업어와 몸을 풀게 하기도 하였다.

종류

디딜방아

디딜방아(문화어: 발방아)는 발로 디디어 곡식을 찧거나 빻게 된 방아이다. 굵은 나무 한 끝에 공이를 박고, 다른 한 끝에 두 갈래가 나게 하여 그 곳을 발로 디디게 하였다. 공이가 닿는 아래에는 방아확을 파 놓았다.

디딜방아는 지방에 따라 딸각방아, 발방아, 돈방아라 했고 외다리방아의 경우는 디염[욤]방아라 했다. 그리고 옛날에는 방아 또는 방하라 했으며, 한문으로는 대(碓), 망대(䃃碓)라고 썼다.

이에는 한쪽이 가위다리처럼 벌어져서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마주 서서 찧는 양다리방아와 한쪽이 벌어지지 않고 곧아서 한 사람이 찧는 외다리방아의 두 가지가 있다. 외다리방아의 가장 오랜 증거는 황해도 안악의 옛 고구려 무덤의 그림으로서 이 무덤은 4세기에 만들어졌으므로 이미 4세기 이전부터 이것을 써 왔음이 분명하며, 이 방아는 근래까지 전남의 해안 지방에서 사용되었다.

디딜방아의 분포지역은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대륙, 인도네시아 등지의 도서 지역, 일본 ·네팔 ·인도 등이지만, 양다리방아는 한국 고유의 발명품으로서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다. 심지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외다리방아를 나란히 설치하여 쓸지언정 한국처럼 양다리방아를 만들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양다리방아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노래를 불러가며 찧는 까닭에 매우 능률적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고달픔을 덜 수 있는 장점도 지녔다. 공이로는 나무, 돌을 쓰지만 나무 공이 끝에 겉을 우툴두툴하게 만든 쇠통을 끼우기도 한다. 확으로는 작은 돌절구를 땅에 묻으며 천장에서 늘인 새끼줄을 쥐고 방아를 찧는다.

물레방아

물레방아는 큰 바퀴를 물의 힘으로 돌려 곡식을 찧는 방아로, 큰 나무바퀴를 가로지르는 굴대에 넓적한 나무가 달려 있고, 이것이 공이를 끼운 방아채를 누르도록 설치되어 있다.

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나무바퀴가 돌아가면 눌림대가 방아채의 끝을 눌러 방아채가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이때 방아채 끝에 달린 공이가 땅에 묻혀 있는 속이 우묵한 통인 방아확 속에 있는 곡식을 찧는다.

몽테스키외는 물레방아가 농업 노동자의 일을 빼앗아갔다고 비난한 바 있다.

연자방아

연자매라고도 한다. 발동기가 없던 옛날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밀을 빻을 때 마소의 힘을 이용한 방아이다.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 아래 위가 잘 맞닿도록 하고 마소가 끌고 돌린다. 정미소에 밀려 강원도 산골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옛날에는 마을마다 하나씩 있어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을 연자방앗간 또는 연자맷간이라 하였다.

기계방아

현재 방앗간서 사용되는 자동화된 방아형태를 말한다. 주로 읍 단위의 시골동네에 존재하며, 가정집에서는 하기 힘든 대량의 제분이나 정미 작업, 참기름이나 들기름 등의 착유, 떡 제조 등 여러 작업을 의탁받아서 수행하고 있다. 특히 떡의 경우 일반적인 떡집처럼 단순히 떡을 만들어서 파는 게 아니라, 손님이 떡을 뽑고자 하는 쌀을 가져오면 그걸로 가래떡 등을 뽑는 등의 작업이 주가 된다.

방아찧기

곡식을 이용하기 쉽게 껍질이나 겨를 벗겨내고 부수거나 가루로 만드는 일을 말한다. 여기에는 찧기, 쓿기, 빻기, 타기 따위의 일이 있다. 찧기란 쓿고 빻는 일을 총칭하는 말이고, 쓿기는 곡식의 겨를 벗겨 깨끗하게 하는 일, 빻기는 가루로 만드는 일, 타기는 곡식을 성글게 부수는 일을 가리킨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갈무리해둔 곡식을 햇볕에 잘 말려 방아를 찧는데, 보통 추운 겨울철에 많이 했다. 대체로 화로에 잉걸불을 담아놓거나 겻불을 피워놓고 일하는 것이 보통이다. 방아 찧는 일은 섬세하고 잔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부녀자가 주로 하고 집안의 노인이나 아이들이 거들었다. 또한 "저녁방아는 찧어도 새벽방아는 못 찧겠네."라는 방아노래의 가사처럼 오랜 시간 작업해야 하는 매우 지루하고 고된 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찧을 곡식이 많으면 힘을 덜기 위하여 이웃과 품앗이를 하는 풍습이 있고, 여럿이서 장단을 맞추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일종의 노동요인 방아노래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방아에는 곡식에 충격을 주어 곡식의 알갱이끼리 또는 알갱이와 연장 사이의 마찰력과 충격력으로 쓿거나 빻는 절구, 디딜방아, 물방아, 물레방아가 있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운동하는 물체 사이에 곡식을 넣어 쓿거나 타거나 빻는 매통, 맷돌, 연자매가 있다. 곡식의 종류와 찧은 곡식의 용도에 따라 사용하는 연장에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곡식의 양이 많으면 디딜방아와 연자매를 쓰고 적으면 절구나 맷돌을 쓴다. 나락을 쌀로 만드는 쌀방아는 디딜방아, 물방아, 물레방아, 연자매를 쓴다. 디딜방아는 확돌에 나락을 넣고 찧다가 절반가량 껍질(왕겨)이 벗겨지면 키나 풍구로 까부르고, 다시 찧고 까부르기를 반복하여 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는데 보통 세벌 찧기로 끝낸다. 디딜방아에는 방아채를 밟는 사람이 1~4명, 방아확의 곡식을 돌보는 사람, 까부르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물방아와 물레방아는 찧는 방식이 디딜방아와 같지만 물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에 방아채를 밟는 사람은 필요가 없다.

연자방아는 둥글고 큰 두 개의 방앗돌로 구성되는데, 바닥에 눕힌 아랫돌(바닥돌) 위에 윗돌(방앗돌)을 세운다. 아랫돌 위에 나락을 깔고 그 위를 소에 메워 윗돌을 빙빙 굴리면 나락의 낱알이 서로 눌리고 비벼져서 왕겨와 겨가 벗겨진다. 보통 한 번에 5센티미터 두께로 한 가마 분량의 나락을 깐다. 윗돌이 구르면서 밖으로 밀려 내려오는 나락을 한 사람이 함께 돌면서 비로 쓸어 고줏대 쪽으로 모아 올린다. 연자방아는 다른 방아보다 훨씬 빠르고 수월하게 방아를 찧을 수 있지만 나락이 부서지는 손실이 많기 때문에 보통 보리방아에 많이 쓰고, 나락은 애벌찧기만 하고 두벌과 세벌찧기는 디딜방아를 썼다. 만일 두벌과 세벌도 연자방아를 쓸 때는 나락을 바싹 말리거나 솥에 쪄서 말린 다음 방아를 찧기도 한다.

연자방아는 윗돌을 굴리는 방틀에 소를 메워 돌리는데, 회전반지름이 2미터 남짓 되는 작은 원을 계속해서 돌아야 하므로 소가 어지러워한다. 그래서 검은 헝겊으로 소의 눈을 가리고 돌리기도 하였다. 소는 보통 아이들을 시켜 몰게 하였다.

디딜방아나 연자방아로 세벌찧기를 해서 나온 쌀은 겨가 완전하게 벗겨진 백미(白米)가 아니고 현미(玄米)에 가깝기 때문에 한 번을 더 찧어 백미로 만들거나 현미 상태로 보관하다가 밥을 짓기 전에 절구에 넣고 찧어서 겨를 볏겨낸다. 이때 물을 조금 넣고 찧으면 겨가 잘 벗겨진다.

디딜방아나 연자방아보다는 뒤에 나온 매통은 왕겨만을 벗겨내는 도구로서, 굵은 통나무 두 토막을 맷돌처럼 위짝과 아래짝으로 하고 그 위와 아래 면을 울퉁불퉁하게 홈을 낸다. 위짝의 가운데에 난 구멍으로 나락이 흘러내려가게 하고 위짝을 손으로 좌우로 밀고 당기면 홈 사이의 마찰력에 의해 왕겨가 벗겨진다. 매통에서 나온 쌀은 겨가 전혀 벗겨지지 않은 현미(매조미쌀)이기 때문에 밥을 지을 수 있는 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절구나 디딜방아로 다시 찧어야 한다.

조, 수수, 보리를 찧는 방법도 나락과 같이 세벌찧기를 한다. 다만, 수수와 보리는 겉껍질이 단단하고 매끄럽기 때문에 물을 뿌려 불려가면서 찧는다. 그러고도 완전히 겨가 벗겨지지 않으면 밥을 짓기 전에 절구에 찧거나 돌확으로 쓿는다. 한편 메밀방아에는 맷돌을 쓰는데, 거칠게 타서 메밀쌀로 만들거나. 가루로 만들 때는 맷돌로 여러 번 타거나 디딜방아로 빻은 다음 체로 쳐낸다.

전통적인 우리의 방아는 일제강점기 이후 도정기(搗精機)가 도입되면서 급속하게 자취를 감추었고, 예전의 물레방앗간도 발동기나 전동기를 갖춘 정미소(精米所)로 바뀌었다. 그나마도 최근에는 대부분 사라지고 대규모 도정공장, 제분공장, 미곡종합처리장이 이들을 대신하고 있다. 다만 재래시장 같은 곳에 있는 소규모 방앗간에서 고추방아나 떡방아를 찧을 수 있지만, 여기서도 최신식 기계를 쓰는 것은 마찬가지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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