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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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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더불어민주당

더불어민주당은 대한민국의 정당으로, 제19대 대통령 문재인이 속한 집권 여당이다. 2014년 3월 26일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창당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요[편집]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합당으로 창당되었다. 2014년 3월 16일, 창당 발기인대회를 개최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당명을 발표하였으며, 공동창당준비위원장에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새정치연합 창당준비위원회 중앙운영위원장이 선출되었다. 이에 따라 새정치민주연합은 민주당의 126석과 새정치연합의 2석, 발기인 대회에 참가한 무소속 박주선, 강동원 의원을 합하여 총 130석의 원내 2당이 되었다. 통합 방식은 창당준비위원회 단계인 새정치연합과 민주당과 통합을 하고, 당명을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정하였다. 2014년 3월 26일, 새정치민주연합은 김한길과 안철수를 공동 대표로 하여 창당하였다. 이는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이 열린우리당을 당 대 당 합당하였던 과정과 유사하다. 2016년 10월 20일 더불어민주당은 원외 민주당을 흡수·합당하면서 영어 당명을 민주당(Democratic Party)으로 변경하였고, 기존에 사용하던 더민주와 새로이 사용하게 된 민주당을 약칭으로 병용하기로 했다.

  • 약칭 : 더민주, 민주당
  • 표어 :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 상징색 : 파란색
  • 이념 : 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 진보주의, 참여민주주의, 중도개혁주의
  • 당원 : 350만 명(권리 당원 : 170만 명, 일반 당원 : 180만 명)
  • 국가 재정지원 : 3,593,010,000원[1]

주요 인물[편집]

  • 이해찬 :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자이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시 정무부시장, 제38대 교육부 장관, 제36대 국무총리이고, 당내 최다선인 7선 국회의원이다.[2]
  • 이인영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초대 의장을 지낸 학생운동가 출신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언론학 석사 졸업했으며, 제17·19·20대 국회의원이자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이다. 또한, 전 민주당 4대강 대운하 반대특위 위원장, 전 민주당 야권통합특별위원회 위원장, 전 민주당 비정규직특별위원회 위원장, 전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상임 선거대책 본부장, 전 위원회 상임(공동) 선거대책본부장이었다.[3]
  • 조정식 :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이다. 또한, 국회 통합과 상생 포럼 대표의원이자 한-우크라이나 의원친선협회 회장이다.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했고,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전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장, 전 새정치민주연합 사무총장, 전 새정치민주연합 경기도 공천심사위원회 위원장, 전 민주당 경기도당 위원장, 전 민주당 원내부대표 및 원내대변인, 전 민주당 야권통합협상위원회 협상대표단 단장, 전 민주통합당 19대 총선 공천심사위원회 위원이었다.[4]
  • 윤호중 :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이자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이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 청와대 민정/정책기획 비서실 행정관, 새천년민주당 부대변인, 열린우리당 대변인, 민주당 수석사무부총장,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 민주통합당 사무총장, 새정치민주연합 디지털 소통본부장, 더불어민주당 사회적경제위원회 수석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유능한경제정당위원회 기획위원장, 더불어민주당 구리시 지역위원장,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간사위원, 국회 서민주거복지특별위원회 간사위원,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 더불어민주당 국민주권선거대책위원회 정책본부장, 국정기획자문위원회 기획분과위원장,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위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이었다.[1][5]

역사[편집]

고려민주당[편집]

해방 이후, 1945년 8월 18일에 원세훈 등이 창당한 최초의 한국 우익정당이다. 김병로와 백관수도 정당 결성 준비를 하자, 원세훈은 고려민주당을 해체하고 이들과 합작하여 조선민족당을 결성하였다.

한국국민당[편집]

1945년 8월 16일 이인, 윤보선 등이 만든 정당.

조선민족당[편집]

1945년 8월 28일 조헌영, 조병옥 등의 고려민주당계와 김병로계, 신간회 경성지회계, 윤보선, 이인계 등이 참여한 정당.

한국민주당[편집]

1945년 9월 16일에 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등이 만든 보수정당으로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이 참여하였다. 약칭은 한민당이다. 사실상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격이다. 미군정의 실질적 여당으로 초기에는 한국독립당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우호적이었으나, 임정 계열에서 송진우와 장덕수를 연이어 암살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7년 6월 이승만의 단정 수립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으나, 1948년 8월 15일 내각에서 배제당하자 야당화되었다. 1949년 1월 26일 대한국민회, 대동청년단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함으로써 흡수 해체되었다.(대표 : 신익희, 조병옥, 장면)

민주국민당[편집]

1949년 2월 10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이 대한국민회, 신익희 세력, 대동청년단(지청천 세력) 등과 통합하여 창당한 정당이다. 약칭은 민국당이다. 수차례에 걸친 개헌 파동 등 난관과 억압을 받다가 1955년 9월 19일 민주당에 흡수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신익희, 김도연, 이영준, 백남훈, 서상일, 조병옥 등이 있다.(대표 : 신익희)

민주당[편집]

1955년 자유당의 사사오입 개헌 사건을 계기로 민주국민당의 보수파와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 등의 범야권 세력이 모여 호헌동지회를 결성한 뒤, 호동을 중심으로 9월 18일 창당하였다. 그러나, 구 한민당-민주국민당 출신 구파와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계 등 신파의 내부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1956년 대선 후보 선출 전 곽상훈의 중개로,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내세워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신익희는 선거 직전 사망했고, 장면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무너진 이후,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 등 제2공화국의 집권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집권 이후 구파와 신파 간의 분당, 당내 분열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5·16 군사 정변 이후 해산되었다. 구파의 주요 인물로는 신익희, 조병옥, 윤보선, 김도연, 김준연, 김성수가 있었고, 신파의 주요 인물로는 장면, 곽상훈, 박순천 등이 있었다.(대표 : 신익희, 조병옥, 장면)

통일당[편집]

1957년 11월 18일, 민주당에서 제명당한 김준연의 주도로 창당하였고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해체되었다.

신민당[편집]

민주당의 구파가 분당하여 1960년 12월 14일에 창당하였다.

민정당[편집]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윤보선과 김병로 등을 중심으로 신민당·자유당·민주당·무소속 등 4개 세력의 단일 야당으로 모여 1963년 6월 28일 창당하였다. 그 해 5대 대선에서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지만, 박정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다. 1963년 11월 26일 김준연의 자유민주당을 흡수하였다. 6대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되었다. 이후,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반대 투쟁에 나서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1965년 5월 11일 제2야당인 민주당과 함께 한일기본조약 체결의 반대 투쟁을 단일화하기 위해 민중당을 신설 합당하여 소멸하였다.(대표 : 김병로, 윤보선)

민주당[편집]

1963년 7월 18일, 박순천 등을 중심으로 민주당이 재건되었다. 같은 해에 실시된 6대 총선에서 11석을 얻어 제2야당이 되었다. 1964년 6월에는 김병로의 국민의 당을 흡수하였다. 1965년 5월 11일에는 원내 제1야당인 민정당과 함께 한일기본조약 체결의 반대 투쟁을 단일화하기 위해 민중당으로 신설 합당하여 소멸하였다.(대표 : 박순천)

민중당[편집]

1965년 5월 제1야당인 민정당과 제2야당인 민주당이 한일기본조약체결의 반대 투쟁을 단일화하기 위해 통합하여 창당하였다. 그러나, 박순천계와 윤보선계의 계파 갈등이 지속되었고, 결국 윤보선을 비롯한 강경파는 탈당하여 독립했다. 1967년 2월 11일, 6대 대선을 앞두고 단일화를 위하여 신한당과 함께 신민당으로 신설 합당하여 소멸하였다.(대표 : 박순천)

신민당[편집]

1967년 2월 7일, 민중당과 신한당을 중심으로 분열된 민주 세력을 모아 창당했다. 1969년, 연임금지조항 삭제 등을 포함한 헌법 개정안에 반대를 당론으로 하던 중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 의원이 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헌법 개정안 가결 정족수는 117명이었는데, 이 3명의 의원이 개헌안을 지지하면서 개헌안 찬성 서명의원이 122명이 되었다. 이에 유진오 총재는 9월 긴급 전당대회를 열어 헌법개정지지성명을 낸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 44명을 제명하고 당을 자진해산함으로써 헌법개정지지성명을 냈던 의원의 의원직이 상실되었다. 무소속이 된 44명의 의원은 원내교섭단체인 신민회를 구성하여, 1969년 9월 22일 다시 등록하였다. 1970년 1월 26일에는 자유당 잔존파를 흡수 합당하였고, 같은 해 2월 3일에는 한국독립당 잔존파를 흡수 합당하였다. 김대중 후보가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대선 이후 신민당은 유진산파와 김대중이 지지하는 김홍일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1972년 9월 20일 유진산이 이끄는 소위 진산계만으로 시민회관에서 전당대회가 강행되어 유진산을 당수로 선출하자, 반 진산연합계는 효창동의 김홍일 자택에서 단독 전당대회를 열고 김홍일을 당수로 선출함으로써 두 개로 쪼개졌다. 그런 분당 상태에서 유신이라는 날벼락을 맞은 신민당은 충격을 받고 재통합하면서 유진산을 당수로 추대하였으며, 유진산은 선거 실시 전에 잠시 사임하였다가 선거 후 다시 당수로 복귀하게 되었다.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의해 자동해산되었다.(대표 : 유진오, 유진산, 김홍일, 김영삼, 이철승)

민주한국당[편집]

5·18 광주민주항쟁 이후, 1981년 1월 유치송을 총재로 하여 창당되었다. 약칭은 민한당이다. 같은 해 2월 제12대 대통령선거에 유치송을 후보자로 내세워 참여하였으나 7.7%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실시된 11대 총선에서는 총 81석의 의석을 확보하여 제5공화국의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민한당은 안기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창당된 사실상의 관제 야당으로, 정권을 견제한다는 야당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84년, 정치 활동 금지에서 해제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이 창당되자 소속 의원 10여 명이 탈당하여 옮겨갔으며, 1985년 12대 총선에서 35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쳐 신한민주당에게 제1야당의 자리를 내주었고, 그 후 소속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져 국회의원 3명의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였다. 마침내, 1988년 13대 총선에서 총재 유치송을 비롯한 후보자 전원이 낙선하여, 정당법에 따라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대표 : 유치송)

신한민주당[편집]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던 인사들이 1984년 12월 정치 활동 금지에서 해제되면서, 선명성을 지닌 정통 야당이 되살아나 전두환 정권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해금 인사들과 일부 민한당을 탈당한 인사들이 신당 창당을 결의, 새로운 야당 신한민주당을 1985년 1월 18일 창당했다. 약칭은 신민당이다. 이후 민한당에서 이탈한 의원들이 신한민주당에 가세하면서 의석수가 103석으로 늘어났고, 명실상부한 제1 야당으로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전두환 정권과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1986년 12월,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는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조치를 먼저 단행할 경우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파가 이민우 구상에 대해 반발하였고, 이철승, 이택돈 등의 내각제 개헌파가 이에 반박하면서 내분이 일어났다. 결국 1987년 4월 양김이 자파 의원 74명을 이끌고 집단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야당 돌풍의 주인공인 신한민주당은 존립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 1988년 4월 26일에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철승 등의 일부 인사들이 분전했지만 결국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고, 정당법에 따라 등록이 취소되었다.(대표 : 이민우, 신도환)

통일민주당[편집]

1987년 5월 1일, 김영삼과 김대중을 중심으로 창당했다. 약칭은 민주당이다. 신한민주당이 내분에 빠지자, 김영삼과 김대중이 새로운 야당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자신의 지지파 의원 (상도동계, 동교동계)들을 신한민주당으로부터 탈당시켜 창당하였다. 창당과정에서 이른바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도 발생하였다. 양김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하기도 했다. 통일민주당은 개헌논의의 중지를 선언한 전두환 대통령의 4·13조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여 6월 항쟁을 유발하였다. 그 결과 민주정의당 대표인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승리를 거둔 통일민주당은 대통령선거에 나설 후보자 선출 문제를 놓고 대립하다가 김대중계 의원 (동교동계)들이 10월 29일 집단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함으로써 분당되었다. 이후 통일민주당은 상도동계가 중심이 되어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참여하였으나, 유효 투표의 28.0%를 획득하는 데 그쳐 36.6%를 획득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을 통하여 민주자유당이 창당됨으로써 소멸하였다. 3당 합당에 반대하는 잔류파들은 꼬마민주당을 창당하였다.(대표 : 김영삼)

민주당은 13대 총선에서 득표율 2위(민주당 23.8%, 평민당 19.3%)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59석(지역구 46석, 전국구 13석)에 그쳐 원내 3당(평민당 70석)으로 밀려난다. 김영삼 총재는 평화민주당 (1987년) 김대중 총재에 대해 상당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던데다 현재의 구도대로 간다면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 민정당과 합당하여 여당의 지위를 얻고 자신의 조직을 총동원하여 차기 대권을 잡는다는 구상을 가졌다.

입장을 정리한 김영삼 총재는 민정당과 비밀리에 합당 협상을 펼쳤고, 또한 자신의 측근인 서석재가 1989년 동해시 보궐선거 당시 무소속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자 합당의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인이 3당 합당을 거부하며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다.

  • 3당 합당(三黨 合黨)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이 제2야당 통일민주당(약칭 민주당), 제3야당 신 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과 합당해 통합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것을 말한다. 3당 합당에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3당 야합이라고도 한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을 중심으로 3당 합당을 추진해 보수당(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 신 민주공화당(新民主共和黨)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었다. 공화당계 정당의 최후 직계 정당으로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흡수됐다. 김종필 총재의 출신지인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에 강력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약칭은 공화당(共和黨). 박정희 대통령 시절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12.12 군사쿠데타 이후 정치 금지되어 해체되었다. 이후 구 공화당계와 유정 회계 인사들은 김종철, 이만섭을 중심으로 국민당을 조직하고 대안 정당, 원내 제1당을 목표로 삼았으나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및 전두환 정권에 의한 박정희와의 차별화 정책, 구 3공, 유신 인사들에 대한 부정축재 혐의 처벌 등으로 원내 제1당, 대안 야당으로 발돋움하려는 목표는 실패하였다.
이후 충남, 북 일부와 수도권 일부, 전국구 몇 석에만 의존하던 한국국민당은 87년 정치정화법에 묶였던 김종필이 해금되어 정계 진출, 신당 창당을 주도하면서 와해, 흡수되었다. 1987년 6·29 선언 직후 김종필이 1987년 10월 30일 창당대회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어서 결성했다. 당 총재와 대통령 후보에 김종필을 지명하고 '민주공화당의 빛나는 이념과 한국국민당의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근대화를 주도한다'라 하였으며, 강령으로 자유민주주의 이념, 자유경제체제, 농어민과 노동자의 중산계급화 등을 채택했다.
김종필과 구 공화당계 인사들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을 환기시키며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전국 유세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12월 선거에서 180만 표를 얻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4위를 기록하였다. 87년 선거 직전 통일민주당의 분열로 원내 제2당으로 격상되었으나 다음 해 제13대 총선거에서는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에 이어 제3야당이 되었다.

평화민주당/신 민주연합당[편집]

평화민주당은 1987년 10월 29일 통일민주당에 참여했던 동교동계 인사들이 탈당해 1987년 11월 12일 김대중을 총재 및 대통령선거 후보로 추대함과 동시에 창당됐다. 약칭은 평민당이다. 김대중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27.0%의 득표로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3위로 낙선하였다. 그 뒤에 통일민주당, 신 민주공화당 등과 함께 국가보안법 대체 입법안, 5.18 진상조사 등 민주화 관련 법안에서 공조하기도 하였다. 신 민주공화당과 통일민주당이 3당 합당에 동조한 이후 평민당은 이우정, 신계륜, 장영달 등의 재야운동가를 영입한 뒤 1991년 4월 15일 신 민주연합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1991년 9월 16일, 3당 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된 일명 꼬마 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이 탄생하였다.(대표 : 김대중, 박영숙)

  • 민주당
1990년 6월 15일 삼당합당을 반대하는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등의 통일민주당 잔류 세력과 박찬종, 이철 등의 무소속 의원 등을 중심으로 창당했다. 보통 꼬마 민주당으로 불린다. 1991년 9월 16일 신 민주연합당과 함께 민주당으로 신설 합당되어 소멸하였다.(대표 : 이기택)

민주당[편집]

문민정부 수립 이후, 평화민주당이 확대 개편된 신 민주연합당과 삼당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 잔류파 등의 민주당의 합당으로 1991년 9월 16일 창당되었다. 1990년의 민주당과 구분해서 보통 통합민주당으로 부른다. 1995년 3월 7일에는 새 한국당을 흡수 합당하고 1회 지방 선거에서 선전하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9월 5일 김대중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소속 의원 95명 중 65명이 탈당하여 제2야당으로 추락하였고, 1995년 12월 21일 개혁신당과 함께 통합민주당으로 신설 합당되어 소멸하였다.(대표 : 김대중, 이기택, 홍영기, 박일)

통합민주당/민주당[편집]

1995년 12월 21일,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은 민주당 세력이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15대 총선에서 제4당으로 전락하였다. 1996년 6월 13일에 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고 결국, 1997년 11월 24일에 신한국당과 함께 한나라당으로 신설 합당하여 소멸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발한 노무현, 김원기, 김정길 등 당원 일부가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편집]

14대 대선에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던 김대중이 정계 복귀와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하자, 당시 민주당 소속 의원 95명 중 65명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신당에 참여하면서 국민회의는 창당과 함께 제1야당이 되었다. 1995년 9월 5일 창당하고 1995년 9월 11일에 공식 등록되었다. 약칭은 국민회의이다. 1996년의 15대 총선에서는 야당 분열의 결과로 정대철, 이종찬, 김덕규 등의 중진 국회의원들이 대거 낙선하는 등 참패하여 299석 중 79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으나, 1997년 12월 18일의 15대 대선에서 자유민주연합과의 공조를 통하여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 시켜 집권여당이 되었다. 16대 총선을 3개월 앞두고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해산되었다.(대표 : 김대중)

새천년민주당/민주당[편집]

2000년 1월 20일,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 개편해서 창당하였다. 각종 게이트 의혹과 아들들의 비리 연루로 김대중 대통령이 2002년 5월 탈당하기는 하였으나 사실상 집권 여당이었다. 국민 경선을 통해 노무현이 대선 후보가 되었고, 16대 대선에서 당선이 되어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듬해 노무현을 비롯한 당내 개혁 세력이 탈당하여 당세가 약해지고 야당이 되었다. 2004년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였다가 국민의 지지를 잃었다. 그로 인해, 17대 총선에서 9명의 의원만이 당선되어 원내교섭단체에서 제외되었다. 2005년 5월 6일에 새천년민주당에서 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마침내, 2007년 6월 29일 민주당과 중도개혁통합신당이 합당하여 박상천, 김한길을 공동대표로 하는 중도통합민주당이 출범하였다.(대표 : 김대중, 서영훈, 김중권, 한광옥, 한화갑, 정대철, 박상천, 조순형, 장상)

개혁국민정당[편집]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직전 친노계열의 인사들 주축으로 창당되었고, 한나라당에서 김원웅 등이 뒤에 합류하였다. 2003년 11월, 전국상임위원회 당내회의를 개최하고 모바일 투표 결과를 검토하여 당을 해산시킨다는 방침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12월, 유시민 의원은 한나라당, 민주당 내 개혁파 의원들과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고 입당하였다. 그러나, 선거관리위원회가 인터넷을 통한 해산 결의는 무효라고 결정하였고 잔류를 주장하는 당원들과 잡음이 있었으나, 2004년 9월 13일, 개정된 정당법상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공식 해산하였다.(대표 : 유시민, 김원웅, 오정례)

열린우리당[편집]

참여정부 수립 이후, 2003년 11월 11일에 개혁국민정당,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의 내 정당 개혁, 정치 개혁의 완수를 요구하던 개혁 세력들이 모여 창당한 정당이다. 약칭은 우리당이다. 같은 해 11월 17일에 정당 등록하였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으로 일시적인 민주당계 정당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사건의 여파로 17대 총선에서 1988년 이후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여 원내 1당으로 발돋움하였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수석 당원 자격으로 입당하여 집권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재보궐선거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연달아 참패하였다. 지지도는 계속해서 떨어졌고 잇따라 의원들이 탈당하여 과반이 무너졌다. 결국, 2007년 8월 18일에 신당인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되는 형식으로 합당하였다.(대표 : 김원기, 정동영, 신기남, 이부영, 임채정, 문희상, 정세균, 유재건, 김근태)

중도개혁통합신당[편집]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강봉균, 김낙순, 김한길 등 국회의원 23명은 2007년 2월 12일 중도개혁통합신당 추진모임을 만들었고 창당에 반대한 노웅래 등을 제외하고 신국환, 유필우가 추가로 합류하여 국회의원 20명으로 김한길 의원을 대표로 하여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 6월 29일에 민주당과 함께 중도통합민주당으로 합당하였다.(대표 : 김한길)

중도통합민주당/민주당[편집]

2007년 6월 29일 중도개혁통합신당과 민주당이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신설 합당하였다. 그러나 8월 3일 중도개혁통합신당 계열이 탈당하여 8월 9일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입당하였다. 그래서 2007년 8월 13일 당명과 로고를 민주당으로 원상복구하였다. 17대 대선에서 이인제를 대통령 후보를 내세웠으나 미미한 득표율로 낙선하였고 이듬해 2008년 2월 17일 대통합민주신당과 함께 통합민주당으로 합당하여 소멸하였다.(대표 : 박상천)

대통합민주신당[편집]

2007년 8월 5일에 열린우리당의 탈당파와 중도통합민주당의 탈당파,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를 중심으로 하는 선진평화연대 세력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의 미래창조연대 등 크게 4가지 세력이 뭉쳐 창당한 정당이다. 같은 해 8월 18일, 열린우리당을 흡수하는 형식으로 열린우리당과 합당하여 원내 1당이 되었다. 정동영을 후보로 내세워 2007년 대선에 참여했다. 부단히 친(親)노무현 이미지를 벗기 위한 명분 없는 차별화를 시도했으나, 이에 대한 국민들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여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에게 큰 표 차로 패배하였다. 이로 인해 이른바 친노 세력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한나라당 출신의 손학규를 당 대표로 세우고, 이명박 신정부에 대한 견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후 2008년 2월 17일 민주당과 함께 통합민주당으로 합당하여 소멸하였다.(대표 : 오충일, 손학규)

통합민주당/민주당[편집]

2008년 2월 17일에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창당하였다. 이 합당으로 열린우리당 출범부터 있었던 민주당계 정당의 분열이 종식되었다. 18대 총선에서 원내 2당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6일에 열린 제1차 정기 전국대의원대회를 통해 통합민주당에서 통합을 뺀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하였다. 이후 각종 재보선에서 여당인 한나라당 등 보수정당을 압도하며 대표 야당으로 자리매김하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범야권 단일화를 필두로 여당을 제치고 승리하여 정국 주도권 장악했으나 7.28 재보궐선거와 10.27재보궐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하며 당세확장이 주춤했다. 결국, 2011년 12월 16일 시민통합당,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함께 야권중통합의 일환으로 민주통합당으로 합당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동영, 김근태, 추미애, 천정배, 한명숙, 정세균, 손학규, 박지원 등이 있다.(대표 : 손학규, 박상천, 정세균)

국민참여당[편집]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열린우리당을 흡수 합당한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과의 합당 때 합류하지 않은 친노직계 세력이 주축이 되어 2010년 1월 17일 창당한 정당이다. 창당 추진 당시 '친노정당'이라고 불렸다. 사실상, 2002년에 창당되었던 개혁국민정당의 후속격이다. 참여정부와 국민 정부의 가치와 노선 계승을 표방했다. 2011년 12월 6일 민주노동당, 새진보통합연대와 함께 야권소통합의 일환으로 통합진보당으로 합당했다. 당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유시민, 이병완, 천호선, 권태홍, 박무 등이 있다.(대표 : 이재정, 유시민)

민주통합당/민주당[편집]

2011년 12월 16일 야권중통합의 일환인 민주당, 시민통합당,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합당으로 출범한 정당이다. 약칭은 민주당이다. 이번 합당으로 사실상 민주당계 정당의 분열이 종식되었다. 상징색은 기존의 민주당계와 비슷하게 노란색을 주색으로 하고 초록색을 보조색으로 사용했으나, 2013년부터는 기존의 민주당계와는 다른 파란색을 사용한다. 2012년 총선에서 사실상 패배하였다. 이후, 완전국민경선을 통해 18대 대통령 후보를 문재인으로 정하여 대선을 진행하였다. 이후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인적 쇄신 요구가 일어나게 되자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이해찬을 비롯한 2기 지도부 전원이 총사퇴했다. 대선 후보가 대표 권한 대행도 동시에 겸하는 체제가 되었다. 대선을 통해 정권교체를 노렸으나 낙선하여 야당으로 계속 남게 되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유지하다가 2013년 5월 4일,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대표를 선출하고 당명을 민주당으로 개명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문재인, 김한길, 한명숙, 문희상, 김진표, 정세균, 박영선, 신경민, 박원순, 송영길, 최문순, 안희정, 원혜영, 박지원, 박기춘, 문성근 등이 있다.(대표 : 원혜영, 이용선, 한명숙, 문성근, 박지원, 이해찬, 문재인, 박기춘, 문희상,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편집]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2014년 3월 26일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창당준비위원회)이 합쳐 출범한 정당이다. 2014년 3월 16일, 창당 발기인대회를 개최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당명을 발표하였으며, 공동창당준비위원장에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새정치연합 창당준비위원회 중앙운영위원장이 선출되었다. 이에 따라 새정치민주연합은 민주당의 126석과 새정치연합의 2석 그리고 발기에 참여한 무소속의 박주선과 강동원 의원을 합하여 총 130석의 원내 2당이 되었다. 통합 방식은 창당준비위원회 단계인 새정치연합과 민주당과 통합을 하고, 그 이름을 새정치민주연합을 하여 3월 26일에 안철수와 김한길을 공동 대표로 하여 통합창당하였다. 이는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이 열린우리당을 당 대 당 합당하였던 과정과 비슷하다.

대표
  • 2014년 03월 26일 ~ 2014년 07월 31일 : 1기 - 안철수, 김한길
  • 2014년 08월 04일 ~ 2014년 09월 17일 : 국민공감혁신위원장 - 박영선
  • 2014년 09월 18일 ~ 2015년 02월 08일 : 비상대책위원장 - 문희상
  • 2015년 02월 09일 ~ 2016년 01월 27일 : 2기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편집]

2015년 12월 28일, 새정치민주연합은 당명 공모전을 연 뒤 당무위원회 의결을 통해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을 최종 변경·확정하였다.

2015년 12월 13일 안철수 의원의 탈당과 비주류 의원들의 친노, 운동권 세력에 대한 패권주의의 비판과 대안 세력을 목적으로 한 국민의당으로의 대거 탈당을 통해 당내 혼란이 가중되었다. 2016년 1월 14일 문재인 대표가 직접 조기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하였으며, 1월 28일 문재인 대표의 사퇴 이후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으로의 당명 변경 이후 각종 분야 전문가들의 인재 영입을 통한 반전을 꾀했다. 김종인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을 영입하여 당의 외연을 확장하고 이후 탈당 도미노를 막는 등 당을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6]

각주[편집]

  1. 1.0 1.1 더불어민주당〉, 《위키백과》
  2. 이해찬 국회의원 소개〉, 《대한민국 국회》
  3. 이인영 국회의원 소개〉, 《대한민국 국회》
  4. 조정식 국회의원 소개〉, 《대한민국 국회》
  5. 윤호중 국회의원 소개〉, 《대한민국 국회》
  6. 도무재닷컴, 〈진보정당·민주당·더불어민주당의 역사 계보(건국 이후 ~ 현재까지의 당명 변천사)〉, 《티스토리》, 2016-06-23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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