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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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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女王, queen regnant)은 왕국에서 성별이 여성인 군주를 가리키는 칭호이다.[1]

개요[편집]

여성 왕. 남편이 왕인 왕비와 달리 여성 본인이 왕인 경우이다. 영어에서는 여왕과 왕비 둘 다 Queen이라고 하기 때문에 오역하기 쉽다.

여성 황제는 여제(女帝)라고 하고, 전반적인 여성 군주는 여주(女主)라고 한다. 여왕의 반대말로 남왕(男王)이라는 단어는 없다.

2024년 1월 마르그레테 2세의 양위로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주권국가의 여왕은 당분간 단 한 명도 없게 되었다.[2]

역사[편집]

동아시아[편집]

한국

우리나라는 신라에만 여왕이 존재했는데 신라는 선덕여왕(덕만공주),진덕여왕,진성여왕 이렇게 3명의 여왕들이 있는데 이들 중 선덕여왕, 진덕여왕은 골품제와 연관이 크다. 성골이어야 왕이 될 수 있었는데 성골 남자가 모두 죽어버린 상황이었고, 여기서 진골 남성들보다는 성골 여성들에게 왕위 계승의 우선권이 있었던 것. 성골 여성들조차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자, 그제서야 진골 남성 중 가장 유력자였던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두 여왕 이후에는 한동안 여왕이 없었다가, 47대 헌안왕이 아들이 없고 딸만 둘 있자 여왕 논의가 나왔다. 그러나 헌안왕이 "유교적 관점에 의하면 여자를 왕에 올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본받을 수 없다"고 고사하였고, 대신 왕족 중에서 똑똑한 사람을 후계자로 삼고자 해서 테스트를 거쳐 김응렴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이었다. 결국 신라의 3번째 여왕은 30여년 뒤에 즉위한다.

진성여왕의 경우 골품제와는 연관이 없지만, 오빠인 50대 국왕 정강왕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전례를 들어 왕위를 넘긴 것이다. 그런데 진성여왕 스스로가 훌륭한 전례가 되어, 그 이후로는 한국사에서 다시는 여왕이 탄생하지 못했다. 물론 시대가 갈수록 국풍이 사라지고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고려나 조선대쯤 가면 여왕이 절대 용납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으므로, 진성여왕의 실정이 아니었더라도 여왕은 더 이상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여왕이 등장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우선 중국의 정사 삼국지와 한국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토요가 있었다. 이들을 제외하고 일본 국내 기록에도 등장하는, 확실히 일본 황실 계보에 드는 사람 중에서 최초인 스이코 덴노(593~628)도 한국의 선덕여왕(632~647)보다 먼저 재위했다.

일본은 태후가 섭정하는 수렴청정의 개념이 없어서 8명의 여제가 나왔다. 7, 8세기 일본에서는 남자 후계자가 어리거나 미확정인 상황이 잦아 6명의 여제가 재위했는데, 코켄 덴노가 남총인 도쿄에게 푹 빠져 신탁을 구실로 그에게 선양까지 하려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 때문에 차라리 섭정을 붙이는 식으로 오랫동안 여제가 없다가 에도 시대 때 2명의 여제가 더 나왔다.

중국

중국 역사상 측천무후 1명만 논란의 여지 없는 여황제이고, 역사학자에 따라 원고낭진석진까지 여황제로 보아 최소 1명부터 최대 3명의 여황제가 있었다.

6세기에 북위에서 여황제인 원고낭이 나타났지만, 여자아기를 남자아기로 속인 사기 즉위였고 재위 기간이 1일에 불과해 의미가 없었다.

7세기에 이웃나라인 야마토(일본), 신라(한국), 동여국(티베트), 참파(베트남)에서 계속 여왕이 나타났고, 중국 민간에서 여황제를 자칭한 진석진까지 나타나니, 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측천무후가 황위를 찬탈해 여황제가 되는데 성공했다.

측천무후 직후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 며느리 위황후, 손녀 안락공주 총 3명이 여황제가 되려고 시도했으나 다들 실패하면서 이후 중국에 여황제는 없었다.

한편 수당시대 티베트에 여왕이 대대로 다스린 동여국이 있었다. 다만 티베트는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중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논외이다.

유럽[편집]

유럽은 여왕이 어느 정도 있었는데, 기독교의 영향으로 일부일처제가 자리 잡아 서자 계승이 불가능하여 딸의 계승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Jure uxoris'라고 여왕의 남편을 공동 왕으로 삼았으나 점차 여왕이 기혼이라도 단독으로 재위하게 되었다. 다만 유럽에서는 여성의 즉위를 막는 살리카법이 존재해 살리카법을 철저하게 따른 프랑스, 독일 등에서는 여왕이 없었다.

유럽에서는 살리카법을 철저하게 따르지 않는 한 모계 계승이 인정되었고, 여왕은 본인이 임신을 하기 때문에 후계자의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로웠으나, 최고 권력자가 직접 임신을 해야 하는 높은 위험 부담이 있었다. 군주정 하에서 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후계자 생산이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통치자가 후계자를 하나 낳는데 거의 1년간 전념해야 하는 상황은 체제의 안정을 몹시 위협하는 단점이었다.

더욱이 준 살리카법을 따르는 왕정국가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권이 인정될지언정 왕위 계승은 남성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여성에게 왕위 계승권이 돌아오는 상황이라 함은 왕가에서 왕위에 적합한 남성의 씨가 말랐다는 뜻이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여왕이 직계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 특히 출산 중 급사할 경우 제대로 된 왕위 계승권자가 남아있지 않을테니 이후의 정국은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이어질 수 있다는걸 의미했다. 여왕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엘리자베스 1세의 경우에도 여왕이라는 이유로 인해 늘 군주로서 약점을 갖고 있었다.

현대까지 남아있는 유럽 왕실들은 대부분 절대적 맏이 상속법으로 개정해 미래에는 여왕이 쉽게 나타날 전망이며, 가까운 미래의 유럽 국가에서는 남성 국왕보다 오히려 여왕이 더 많아질 것이다. 현재 입헌군주제 국가들 중 스페인노르웨이, 스웨덴, 벨기에, 네덜란드 모두 차기 또는 차차기 왕위 계승자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3~40년 후 이들이 차례로 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면, 유럽에서 남성이 국왕으로 재위하는 국가는 대공국이나 공국을 합쳐도 영국과 덴마크,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된다.

영국

영국은 총 15명의 여성 군주를 배출했다.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가 엘리자베스 1세빅토리아 여왕이라서 세계에서 여왕으로 가장 유명한 국가가 되었으며, 또한 20세기 중반부터 2022년까지 재위한 엘리자베스 2세의 포스 덕분에 현대인들에게도 여왕으로 유명하다.

영국 여왕들은 선왕 직계의 딸로서 여왕이 된 경우가 의외로 잘 없다. 이전의 왕이었던 남자 형제나 언니의 뒤를 이었거나, 아예 방계 왕족으로 왕이 된 경우가 많다. 메리 1세는 선왕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였고, 엘리자베스 1세는 선왕 메리 1세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앤 여왕은 메리 2세의 친 여동생, 빅토리아 여왕은 윌리엄 4세의 조카였다.

그나마 메리 2세엘리자베스 2세는 아버지 다음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메리 2세는 아버지 제임스 2세를 쫒아낸 의회가 옹립한 왕이었고, 엘리자베스 2세는 태어날 때만 해도 둘째 왕자였던 조지 6세의 딸이었다.

2022년 엘리자베스 2세의 뒤를 이어 아들 찰스 3세가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차기 국왕과 차차기 국왕 모두 남성이기 때문에 다시 여왕이 등장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스페인 역사상 여왕은 총 16명으로, 16세기까지 각국에서 여왕이 15명 나왔고, 통일 왕국 성립 후 프랑스의 보르본 왕조가 스페인에 들어서면서 살리카법이 생겨 한동안 여왕이 없다가 1830년에 살리카법이 폐지되어 이사벨 2세 여왕이 즉위했다.

스페인의 현 국왕 펠리페 6세도 아들이 없고, 장녀 레오노르 공주와 차녀 소피아 공주 뿐이다. 따라서 펠리페 6세가 사망하거나 생전 양위를 하여 왕위에서 퇴위할 경우, 스페인은 다음대에 여왕이 즉위할 것이 확정적이다.

네덜란드

네덜란드 여왕은 3명 뿐인데 살리카법 때문이 아니라 왕실이 19세기 와서야 만들어져서 그렇다.

네덜란드는 1890년부터 2013년까지 123년간 빌헬미나 여왕, 율리아나 여왕, 베아트릭스 여왕 3대에 걸쳐 여왕이었다. 때문에 한때 '여왕의 나라'라고 불리기도 했다. 베아트릭스 여왕 다음으로 그 아들인 빌럼알렉산더르 국왕이 즉위했으나, 그 또한 아들이 없이 딸만 셋이다. 따라서 빌럼 국왕이 사망하거나 퇴위하면 그 다음 대에서는 거의 확정적으로 또 여왕이 나올 것이다.

러시아

러시아의 여성 군주는 총 11명인데, 그 중 4명은 러시아 제국의 여제들로, 러시아의 초대 임페라토르(황제)인 표트르 1세 사후 그 아내인 예카테리나 1세를 시작으로 2대, 4대, 6대, 8대 황제가 여성이었다.

여제들이 연속으로 즉위한 것은 아니지만 여제들 사이사이의 남자 황제 3명이 모두 단명하여 사실상 여제들이 연달아 재위하는 것처럼 연표가 형성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여제 시대는 1720년대부터 1790년대까지 70여년 동안 이어지다가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 파벨 1세가 여제 계승을 금지하여 끝났다.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역사상 여성 군주는 단 2명 뿐이다. 고대에 마르코만니족의 여왕 프리티길암브로시우스와 교신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오랫동안 살리카법 때문에 여왕이 없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에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아들이 없던 카를 6세가 국본조칙으로 여성 계승권을 인정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여성 군주가 나타났다. 단 그때 오스트리아 대공이 겸임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여성의 즉위가 불가능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도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가 아닌 황후로서 통치했다.

중동[편집]

중동에서는 서자 계승이 가능하니 딸에게의 계승이 불필요하여 여왕이 드물었다. 중동의 여왕들은 오히려 남편에게서 권력을 넘겨받는 부부 상속을 통해 즉위한 사례들이 많았으며, 유럽과는 반대로 왕이 아내를 공동 군주로 삼은 사례도 종종 있었다.

현대에 들어서도 중동에 남아있는 군주정들은 전제군주제 또는 군주가 실권을 가진 명목상 입헌군주제이고 왕위 계승법이라는게 옛날 시대부터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여왕은 여전히 드물다.

이집트

고대 이집트 수천년 동안 여성 파라오는 매우 드물게 나타났는데, 왕비들 중에서 남편이 죽은 후 단순한 섭정을 넘어 직접 파라오가 되는 사례가 간혹가다 있었다.

그러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누이 아르시노에 2세와 근친혼하고 그녀를 공동 파라오로 삼은 것을 시작으로 근친혼 부부가 공동으로 재위하게 되었는데, 이는 왕가의 신격화 작업을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여성 파라오가 많이 나왔으나, 그들 대부분은 남성 파라오와 공동 통치자였고 단독으로 재위한 여성 파라오는 몇명 없었다.[27]

그러나 이집트에 이슬람교가 도래한 후의 여왕은 샤쟈르 알 두르 뿐으로, 그녀는 아이유브 왕조에서 맘루크 왕조로 왕권을 넘기는 중간 다리 역할로서 잠깐 재위했다.

예멘

성경에서 등장하는 전설적인 시바의 여왕이 군림했다는 시바는 예멘사의 사바로 비정되고 있다.

예멘의 주요부를 약 90년간 지배한 술라이히 왕조에서는 건국자 알리 앗 술라이히가 아내 아스마를 공동 군주로 존중했고, 그 뒤를 이은 아흐마드도 이를 따라서 아내 아르와와 공동으로 통치했다. 아르와는 남편 사후 약 40년간 단독으로 재위했고, 시바의 여왕에 빗댄 '셰바의 작은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2]

각주[편집]

  1.  〈여왕〉 《위키백과》
  2. 2.0 2.1  〈여왕〉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 여왕〉 《위키백과》
  • 여왕〉 《나무위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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