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
유세(遊說)는 선거에서 투표로 당선되기 위해 유권자들을 직접 만나고 후보자의 정견을 설득하는 것을 말한다.[1]
역사[편집]
유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자기 의견을 주장하여 설득하는 행위를 말한다. 특히 기원전 8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 춘추전국시대 여러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던 때 학식이 뛰어나고 책략에 능한 일군의 사상가, 정치가, 학자들이 열강을 돌아다니면서 각 나라의 군주들에게 정치적 대책, 외교적 대안을 제시하였는데 이런 활동을 많이 했던 이들을 유세가(遊說家)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사기》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태공(太公) 여상(呂尙)은 보고 들은 것이 많았다. 주(紂)왕을 섬겼으나 그가 무도(無道)하여 떠났다. 제후에게 유세하였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서쪽 주 서백(周西伯)에게 귀의하였다.'[或曰: '太公博聞, 嘗事紂. 紂無道, 去之. 遊說諸侯, 無所遇, 而卒西歸周西伯主.']'라는 구절에서, 《통감절요》 〈주기(周紀) 신정왕(愼靚王) 을사(乙巳) 5년조〉의 '소진(蘇秦)의 아우 소대(蘇代)와 소려(蘇厲) 또한 유세로써 제후들에게 명성이 높았다.[蘇秦弟代, 厲亦以遊說, 顯於諸侯.]'는 문장에서, 《한비자》 〈오두(五蠹)〉에 '일을 그르치고도 처벌을 받지 않으면 유세하는 자들이 누가 명예와 이익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 기회를 엿보는 짓을 누군들 하지 않으려 하겠는가?[事敗而弗誅, 則遊說之士孰不爲用矰繳之說而徼幸其後?]' 등 유세라는 표현은 여러 문헌에서 흔히 보인다.
유가(儒家)의 공자와 맹자, 도가(道家)의 노자, 장자, 법가(法家)의 한비자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백가 유파의 사상가들이 그들의 사상과 원칙을 정치의 이론적 토대로 삼도록 설득하기 위해 제후 군주들을 만났다. 의견이 채용이 되면 높은 지위에 오르고 부국강병에 큰 공적을 세우기도 하였다. 개인의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경우도 있고 천하의 평안을 도모하기 위한 유세도 있었다.
지금은 주로 선거를 통해 공직의 인원을 정할 때, 당선을 위해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자신 또는 소속 정당의 주요 정책을 피력하러 다니는 행위를 가리킨다.[2]
대한민국[편집]
공직선거법에 의해 규율되고 있다. 공직선거법 제7장에 해당하는 내용들로 규정되고 있다.
1980년대 선거까지는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정도 되면 수십~수백만명씩 정당의 조직원을 동원해서 세를 과시하고는 했지만 21세기 선거에서 이런 방식의 대규모 동원유세는 사라진 상태. 물론 정당의 운동원 조직을 쓰기는 하지만 끽해야 만명 단위다. 공직선거법 상에 대어 놓은 선거비용 문제도 현실적으로 이런 대규모 동원유세를 하면 선거자금이 바닥나기 십상이기 때문인데, 선거자금이 바닥나면 결국 검은 돈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21세기 선거에서는 거대 동원유세가 사라지게 된 것.
요즘에는 선거유세 철이 되면 트럭을 개조한 선거차량이 돌아다닌다. 이 선거차량은 대형 브라운관으로 홍보 방송을 내보내며 선거송을 튼다. 그런데 이들 중 많은 수가 안전성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한다.
선거 유세 중 주택가와 상가에서 시끄럽게 틀어대는 노래 때문에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지만 있으나마나한 소음제한 규정 때문에 신고하더라도 주의만 줄 뿐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고 있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선거 유세 차량의 소음은 150dB 수준으로 자동차의 경적 소음이 110dB, 전투기 이착륙 시 소음이 120dB인 것을 보면 얼마나 시끄럽게 틀어대는지 실감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한국과 일본만 소음으로 생활권을 침해하는 수준의 기형적인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는 형국인데, 일본에서는 SNS나 현수막 등을 이용해서 선거차량으로 소음을 일으키는 후보는 보이콧 운동을 벌이는 등 나름의 대책은 세우고 있지만 나몰라라 식의 탁정행상으로 정치권 수준에서의 유의미한 정책은 나오지 있지 않은 상황이라 개선의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 후보가 유세를 할 때는 소속 당 색의 점퍼를 구비해서 입고 다닌다.
- 대한민국 역사의 유명한 유세들
- 한강백사장 유세 - 1956년 5월 3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민주당(1955년) 신익희 대통령 후보와 장면 대한민국 부통령 후보의 합동연설회. 무려 30만이 넘는 서울시민이 몰려들면서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외치며 정권교체를 호소한 민주당의 지지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하지만 이틀 뒤 신익희가 사망하면서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막지 못했다.
- 장충단공원 유세 -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장충단공원에서 한 유세. 추정 100만에 달하는 인파가 몰린 이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박정희씨가 영구집권해 총통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1972년에 현실이 되었다.
- 여의도 유세 -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통일민주당 김영삼 대통령 후보,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가진 여의도 유세에 모두 100만명(추정 130만명)이 넘는 유권자가 운집했다.
- 노무현 명동 유세 -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공식 선거일정 마지막날 유세. 이 유세는 내용보다는 당시 단일화 파트너였던 정몽준 전 국민통합21 대표의 지지철회에 결정적 원인제공을 한 돌발사고들이 발생한 걸로 알려져 있다.
- 추미애 삼보일배 -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새천년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이었던 추미애가 전국 유세에서 했던 삼보일배.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국민들이 정치권에 분노하면서 그 역풍이 강력하게 일자 그 역풍을 막기 위해 자기 선거구 유세도 포기하고 시도했지만 결국 새천년민주당은 총선에서 박살이 나고 추미애도 낙선하고 말았다.
- 박근혜 피습 사건 -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한나라당 당대표 자격으로 유세하던 박근혜가 피습당한 사건이다.
- 이명박은 배고픕니다 -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때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유세중 남긴 각종 먹짤들. 과거에는 정치인의 서민들 속 유세장면이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이때 이명박 후보가 남긴 주옥같은 먹짤과 위 슬로건으로 인해 정치인의 먹짤이 조명받기 시작했다. 유세 내용보다는, 먹방이라는 콘텐츠가 정치인들의 선거유세에 주요 레파토리로 주목받은 첫번째 사례이다.
- 뚜벅이 유세 -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때 새정치민주연합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후보가 선거 막판 시도했던 유세방법. 서울 각지를 도보로 이동하면서 선거유세를 하고 그 장면을 24시간 풀로 미디어에 공개하는 유세방식. 이후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뚜벅이 유세를 같은 방식으로 시도했다.[1]
타국의 선거유세[편집]
미국의 선거 캠페인에는 세 가지 기본 요소가 존재한다.
- 타국과 유사한 거리 유세 - 후보가 번화가에서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럴 때 언론도 동원된다.
- 광고 및 언론를 통한 홍보. 유료 광고, 어떤 사안에 대한 기자회견, 인터넷 홍보 등
- 현장 홍보 (Field campaign): 유권자에게 일대일로 하는 홍보
현장 홍보는 타국에서 보기 힘든 형태이기 때문에 좀 더 자세히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미국에서 투표는 사전에 등록을 한 시민권자만 할 수 있다. 등록제의 기원은 미국의 특수한 정치 환경에 기인한다. (초기에는 땅을 소유한 백인만 투표를 할 수 있었다.) 등록을 하면 "유권자"라고 부른다. 2016년 대선을 기준으로 전국 등록률은 백인 74%, 흑인 69%, 아시안 56%, 라티노 57% 이다. 이 등록 정보는 - 이름, 전화번호, 주소, 나이 등 - 관련 단체들에게(정계, 학계, 시민단체 또는 개인) 전량 공개된다. (사회보장번호나 운전면허증 번호 등의 정보는 제외)
후보들은 이 정보를 활용해 초기부터 유권자들에게 홍보를 해 왔다. 명단 관리 방법은 인구 증가와 더불어 명단이 커지면서 종이에서 컴퓨터 데이터베이스로 옮겨가고, 홍보 방법은 집 방문과 우편 발송에서 전화 걸기, 문자 메시지, 페이스북 메시지 등으로 발전해왔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전화 걸기 및 집 방문 일을 할 자원봉사자 및 유급 담당자 고용이 하나의 선거 캠페인 업무 분야가 된다. 2012년 오바마 캠페인은 100만 명의 유권자에게 전화걸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1]
후보자가 같이 사진도 찍고 시장에 나가는 것은 한국과 똑같지만, 소음 공해 문제까지 가는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유세활동을 펼친다. 춤과 노래가 없이 오로지 연설로만 유세를 하며, 확성기를 사용하기는 하나 후보자들의 목소리가 우렁차지 않고 비교적 차분한 어조이기 때문에 한국에 비하면 조용한 편이다. 또한 후보자 동행자도 많이 다니지 않는다.
선거차량의 경우, 선거법에 따라 주행중에는 후보명과 정당명, 문구이외의 선거운동이 금지되어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저 3가지 패턴을 반복해서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거차량을 시끄럽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또한 한국처럼 열린 형태의 개조트럭이 아닌 승합차에 후보 이름이 적힌 간판을 위에 얹은 차량을 쓰고 있는데, 이 역시 선거법에 오픈 형태의 차량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선거 홍보도 골목마다 설치된 홍보 형식의 광고 정도의 모습을 지내며, 나무로 만들어진 판자에는 한국처럼 누구 후보 붙힌다.[1]
국시유세단[편집]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은 대한제국 말기에 선전 활동을 수행한 정치 단체이다. 줄여서 국시단이나 유세단이라고도 불렀다.[3]
결성 목적과 조직[편집]
국시유세단의 결성 목적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통치해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국시유세단은 조선이 일본의 보호를 벗어나면 홀로 서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으며,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도 보호통치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활동 자금을 통감부와 대한제국 내각에서 지급 받은 관제단체 성격이 짙으며, 특히 이완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발기인은 고희준, 신광희, 예종석 등 6명이다. 일진회 회원인 고희준의 주도로 1909년 7월 26일에 원각사에서 첫 모임을 갖고 단원 28명을 선정했다. 이튿날에는 국시유세단 발기회를 개최해 정식으로 출범했다. 주요 활동은 각 지방에 회원들을 파견하여 인민들에게 국시 취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국시유세단이 밝힌 국시는 "한일 양국 교제에 기인하여 이해공통주의를 채택"하는 것이었다.[3]
활동[편집]
이 무렵 일본의 보호통치나 한일 병합에 반대하는 여론을 막기 위해 내각은 전국 13도에 선유위원을 파견해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했다. 선유위원 대부분은 국민연설회 회원 중에서 선발되었고, 총리대신 이완용이 국시유시단에 금화 400원을 기부했을 만큼 정부와 밀착한 행보를 보였다. 통감부가 거액의 활동비를 지원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시유세단이 일본에 아첨하여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단체이며 일진회를 견제하기 위한 조직이라며 비난했다.
여론은 좋지 않았지만 내각과 통감부의 지원을 얻은 국시유세단은 8월부터 연일 여러 지역에서 연설회를 개최하여 유세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초기에는 주로 서울 지역에서 학교를 빌려 유세하고 취지서를 인쇄해 돌리는 방식이었고, 차츰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관중을 끌기 위해 당시 드물던 유성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국시유세단의 활동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자 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인 유학자 정병조가 "유세단의 취지도 모르면서 공연히 비방"한다는 반박문을 각 신문에 실었다.
그러나 여비가 많이 필요한 지방 유세를 시작하면서 국시유세단의 재정은 점차 어려워졌다. 9월 들어서는 재정 문제 때문에 유세위원에서 탈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정부가 각 도에 훈령을 보내 유세단원을 후히 대접하라고 지시하였고 이완용도 거듭 각 관찰부에 유세단원의 활동에 적극 협력하라고 지시했다. 유세단은 《대동일보》를 인수해 고희준이 사장을 맡아서 기관지를 간행했다.
이듬해 3월에도 다시 재정난이 가중되자 농상공부대신인 조중응이 내각에 제의하여 국시유세단의 경비를 2천 원가량 지원해주었다.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이 전면에 나서 단장직을 맡았다가, 곧 정우회가 출범하면서 정우회 조직에 흡수되어 활동을 멈추었다. 정식 해체일은 한일 병합 후인 1910년 9월 13일이다.[3]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