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셉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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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셉시온(Concepción)은 칠레 비오비오주(Biobío)의 도시이다. 인구는 약 22만 명이며 비오비오주의 주도이자 그란 콘셉시온(Greater Concepción)의 시도(市都)이다. 2010년 칠레 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1]
개요[편집]
콘셉시온은 칠레 중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비오비오강 어귀로부터 10km 떨어진 곳에 있는 도로교통의 요지이다. 수도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져 있으며 외항(外港) 역할을 하는 탈카우아노와 큰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콘셉시온의 기원은 15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스페인 제국의 일부로 페드로 데 발디비아(Pedro de Valdivia)가 현재 시가지에서 11km 떨어진 지점에 콘셉시온 데 마리아 푸리시마 델 누에보 익스트림(Concepción de María Purísima del Nuevo Extremo)라는 이름으로 설립했으며 1565년에서 1573년 사이에 칠레 왕국의 수도였다.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파괴되어 17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나머지 식민지 기간동안 군사 자본의 비공식적인 군사 수도 지위를 유지했다. 콘셉시온은 칠레 독립을 위한 투쟁의 중요한 장소였으며 칠레의 독립 선언이 콘셉시온의 독립 광장에서 열렸다. 1851년 마누엘 몬트(Manuel Montt)가 독립 칠레의 대통령으로 선출될 때까지 콘셉시온 엘리트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현재의 시가지는 1939년의 지진 이후 재건되었으며, 기후가 쾌적하고 부근에 아름다운 산과 호수가 많아 관광객이 많다. 농축산물의 집산지이며 남쪽 교외에 로타 탄전이 있어 식품, 피혁, 섬유, 금속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 외항(外港) 탈카우아노에는 제강공장, 정유공장 등이 있다. 칠레 제3의 대도시로서 무역항, 군항인 탈카가 있으며 근처엔 로타 탄전, 연산 60만t을 생산하는 와치파트 제강소가 있어, 칠레의 중화학공업지대로서 발전하기 시작하고 있다. 콘셉시온은 칠레의 유명한 대학 도시로 콘셉시온 대학교, 비오비오 대학교, 가톨릭 대학교 등 수많은 교육 기관이 위치해 있다. 코뮌은 또한 다양한 역사적 다리, 벽화, 공원, 호수뿐만 아니라 비오비오 극장, 카사 델 아르테 극장, 지역 자연사 박물관, 콘셉시온 극장과 같은 중요한 문화 장소가 있다.[2]
역사[편집]
콘셉시온은 1550년 돈 페드로 데 발디비아(Don Pedro de Valdivia)에 의해 오늘날 펜코(Penco)로 알려진 비오비오강 북쪽에 설립되었다. 그 당시 그곳은 콘셉시온 데 마리아 푸리시마 델 누에보 익스트림(Concepción de María Purísima del Nuevo Extremo)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콘셉시온의 새로운 정착지는 스페인 영토와 1870년대까지 독립을 유지한 아메리카 인디언 종족 그룹인 마푸체(Mapuche) 땅 사이의 경계인 라 프론테라(The Frontera)에서 북쪽으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정착지는 2년 후 왕실 법령에 따라 스페인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도시로 인정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문장이 주어졌다.
스페인이 콘셉시온 지역에 도착했을 때 연대기 작가 예로니모 데 비바르(Jerónimo de Vivar)는 현지 마푸체(Mapuches)가 금과 은으로 된 팔찌와 일종의 왕관을 착용했다고 언급했다. 이것은 잉카의 선물, 패배한 잉카의 전쟁 전리품, 또는 잉카 야금술이 채택되었다.
콘셉시온은 칠레 총독의 중요한 군사 정착지였지만 1554년 마푸체 군대에 의해 점령되고 파괴되었고, 1555년에 재건된 후 다시 한번 파괴되었다. 콘셉시온은 가르시아 후르타도 데 멘도사의 통치 기간 동안 복원되었고, 1557년 알토 데 핀토(Alto de Pinto)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 마을은 1558년 1월 6일 제로니모 데 비예가스(Jerónimo de Villegas) 선장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다. 이곳은 다음 2세기 동안 라 아라우카니아(La Araucanía )에서 마푸체(Mapuche)에 맞서 싸우는 군대의 본부가 되었으며 1564년 포위 공격과 마푸체(Mapuche)의 기타 공격 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10,000명으로 늘어났다. 콘셉시온은 1565년부터 1575년까지 레알 오디엔시아(Real Audiencia)의 본거지였다.
1570년, 1657년, 1687년, 1730년, 1751년에 마을을 강타한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당국은 마을을 비오비오강을 따라 있는 발레 데 라 모카(Valle de la Mocha)의 현재 위치로 옮겼다. 오래된 부지는 1842년 3월 29일 현재의 펜코(Penco) 마을이 설립될 때까지 비어 있었다.
콘셉시온 마을의 새로운 부지는 콘셉시온과 인텐던트시의 주요 도시가 되었고, 그 관할 구역은 마울레강에서 라 프론테라(Frontera)까지 확장되었다. 콘셉시온의 첫 번째 의도자는 오소르노 후작인 아일랜드인 암브로스 오히긴스(Ambrose O'Higgins) 였으며 그는 나중에 칠레의 총독 이자 페루의 총독이 되었다.
1810년 9월 18일 산티아고에서 제1차 국가 정부 위원회가 열렸을 때, 콘셉시온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콘셉시온은 페루 부왕령이 칠레를 다시 정복하려는 시도에서 스페인 군대의 진입 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콘셉시온의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새로 독립된 국가에서 중요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
1818년 1월 1일, 암브로스 오히긴스(Ambrose O'Higgins)의 아들 베르나르도 오히긴스(Bernardo O'Higgins)는 콘셉시온의 중앙 광장에서 칠레 독립 전쟁을 선포하고 선서했다. 이 광장은 이후 독립 광장(플라자 데 라 인디펜덴시아, Plaza de la Independentcia)으로 알려졌다. 독립의 순간까지 이 도시는 옛 정착지와 새 정착지에서 다양한 활동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1835년 2월 20일 마을은 지진으로 인해 다시 크게 파괴되어 재건되어야만 했다. 1875년까지 주요 영국 공동체와 독일 식민지가 이 지역 내에 존재했다. 1895년에는 스페인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1919년에 설립된 콘셉시온 대학(Universidad de Concepción)은 칠레 최초의 세속적인 사립 대학이 되었다. 이웃 항구인 탈카후아노(Talcahuano)는 칠레에서 가장 큰 해군 기지가 있는 곳이다.
2010년 2월 27일, 규모 8.8의 지진이 콘셉시온을 강타하여 전국적으로 521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다쳤다. 지지진 이후 지질학자들은 지구 위치 확인 위성(GPS) 데이터에 의존하여 지진으로 인해 도시가 서쪽으로 약 3m 이동했다고 결론지었다.
2010년 칠레 지진 이후 , 수감자들의 탈출 시도가 실패한 후 콘셉시온의 엘 만자노 교도소에서 교도소 폭동이 시작되었다. 교도소 곳곳에 불이 붙었고 교도관들이 공중으로 총격을 가하고 군부대의 도움을 받은 후에야 폭동이 진압되었다. 2010년 3월 5일 현재 페루 야전 병원이 도시에 배치되었다.[3]
지진[편집]
칠레 영토의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콘셉시온 지역도 지진이 활발하여 1939년 격렬한 지진으로 콘셉시온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1953년 지진으로 마을 건물의 15%가 손상되었다. 1960년에 발생한 또 다른 대지진은 진원지 근처에 있었다.
2010년 2월 27일, 진도 8.8의 지진이 도시에서 115km 떨어진 35.846°S, 72.719°W에서 발생했다. 미국 지질조사국(United States Geological Survey)은 이번 지진이 토요일 오전 3시 34분(그리니치 표준시)에 지하 35km 지점에서 발생했다고 밝혔다. 지진은 4,620km 떨어진 브라질 상파울루까지 멀리서 느껴졌다.[4]
콘셉시온대학교[편집]
콘셉시온대학교(University of Concepcion)는 칠레 비오비오주 콘셉시온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UdeC로 약칭한다. 콘셉시온대학교는 1919년 칠레에서 세 번째로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이다. 칠레 중남부에서는 최초로 세워졌다. 전통과 권위를 인정받으며,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다. 칠레 대학협의회에 속한 25개의 대학 중 하나이다. 2023년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의 글로벌대학순위에서 세계 816위, 라틴아메리카 대학 중 33위, 칠레 대학 가운데 4위를 기록했다. 이 대학교가 소재한 콘셉시온은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져 있다. 젊은 인구가 많은 활기찬 문화, 상업도시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콘셉시온의 많은 학자들이 칠레 남부에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수도 밖에서도 학위를 취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대학 설립을 추진할 만한 규모의 조직이 없었다. 1919년 3월 '임상 병원과 대학교의 설립'이라는 콘셉시온 시민들의 두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첫 공식 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 이후 두 프로젝트의 진행을 담당할 위원회가 꾸려졌다. 새로 설립되는 병원은 새 대학교 의과대학의 거점이 될 것이기 때문에 두 프로젝트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후 위원회는 칠레 국민의회에 대학교 설립의 승인을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5월 엔리케 몰리나 가멘디아가 콘셉시온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총장에 부임했다.
대학교의 본부는 콘셉시온에 있으며 치얀과 로스앙헬레스에도 캠퍼스가 있다. 콘셉시온 캠퍼스는 캠퍼스 전체가 '대학도시'로 불린다. 여기에는 박물관과 공원들도 포함된다. 캠퍼스의 면적은 142만 5,000m2이다. 2010년에 콘셉시온 캠퍼스는 20세기 전반 칠레의 가장 중요한 건축 작품으로 선정되었으며 2016년에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콘셉시온의 학문과 과학, 문화, 기술의 중심지이다. 치얀 캠퍼스는 1955년에 UN과 미주기구(OAS), 미국과 유럽의 대학교 등 여러 기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다. 벽화와 시장으로도 잘 알려진 도시인 치얀은 농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곳의 교육과 연구는 주로 농업과학에 중점을 두고 있다. 로스앙헬레스 캠퍼스는 1962년에 로스앙헬레스 시민들의 요청에 의해 설립되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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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콘셉시온 (칠레)〉, 《위키백과》
- ↑ 〈콘셉시온(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칠레 콘셉시온〉, 《요다위키》
- ↑ "Concepción, Chile", Wikipedia
- ↑ 〈콘셉시온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콘셉시온 (칠레)〉, 《위키백과》
- 〈칠레 콘셉시온〉, 《요다위키》
- "Concepción, Chile", Wikipedia
- 〈콘셉시온(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콘셉시온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남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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