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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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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산업(映畵産業)

영화산업(映畵産業)은 영화를 개발 및 배급하는 경제 산업 분야이다.

영화산업화의 개념은 기존 산업의 산업화와는 상이하다. 산업화는 좁은 의미로 공업화와 같은 개념으로, 넓은 의미에서는 산업구조의 재편에 수반하는 사회·경제·문화 등의 전반적인 변화 추세를 포괄한다고 본다. 영화산업은 영화 제작사, 영화예술, 시나리오 작업, 각종 영화제, 배우, 감독, 기술 스텝 등의 영화 제작, 배급 및, 흥행 분야에서 기술혁신이나 상업적 가치 창출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한국영화산업(韓國電影産業, cinema industry of korea)은 영화의 생산과 유통이 과거 중소 영화사 중심에서 제작과 배급, 상영단계를 수직적 결합한 대기업의 주도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고, 감독, 배우 등의 브랜드와 히트를 목적으로 유행성을 추구하는 엔터테인먼트산업이다. 예술성만을 추구하는 예술과는 달리 영화는 대중성이 있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통한 수익성 추구가 가능한 산업이다.

한국영화산업은 산업화 과정을 통해 대규모 자본으로 다수의 영화를 효율적으로 제작하게 되었고,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통해 영화를 안정적으로 배급하여 일정한 흥행수익을 얻을 수 있는 생산-유통구조를 확립하였다. 이렇게 확보된 흥행수익은 다시 영화산업에 재투자되어 영화산업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산업은 대중적 오락의 범주를 넘어 경제, 사회, 문화의 방면에서 폭넓게 영향력을 미친다. 파급효과 또한 해외에서 우리 문화정체성 강화에까지 미친다는 점에서 문화산업의 핵심적인 대표 산업이다.

개요[편집]

영화산업은 크게 컨텐츠 제작 산업과 플랫폼 산업으로 나누어진다.

컨텐츠 제작 산업은 영화를 기획하고, 촬영하고, 배급하기까지 모든 영화의 제작 과정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산업이다. 흔히 하는 할리우드 5대 제작사나 국내의 쇼박스, 롯데 엔터테인먼트, CJ 스튜디오 등이 이에 해당한다.

플랫폼 산업은 영화를 상영하는 과정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으로, 예전에는 극장 산업이 이를 독점했으나 최근 OTT의 등장으로 인해 시장이 양분되어 가고 있다. 멀티플렉스 극장을 운영하는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CGV 등의 국내업체들과 AMC 시어터 등 해외업체 등이 있다. OTT 산업체로는 넷플릭스가 대표적이다.

컨텐츠 제작사들이 영화를 만들어 극장과 계약을 체결해 상영을 하면, 국가별로 다르기도 하고 영화사 별로, 또 영화사 안에서도 개별 영화별로 다르긴 하지만 보통 5:5로 수익을 배분하게 된다. 영화사는 영화 흥행 매출의 절반을 가져와 투자자들에게 배분하고, 제작비를 충당한다. 극장은 이 매출을 통해 극장 운영 비용을 충당하게 된다.

한국영화산업[편집]

역사[편집]

1943년 7월 조선영화문화연구소(朝鮮映畫文化硏究所)에서 발간한 『조선영화 30년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처음으로 영화가 상영된 기록은 1903년으로 되어 있다.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영화 광고에서 10전의 입장료를 받고 동대문의 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 하오 8시부터 단편영화를 상영한다고 알렸다.

동대문의 기계 창고는 동대문 활동사진 관람소로 명명하다가 1908년 광무대로 바뀌었고, 이어 단성사가 문을 열었다.4) 원각사의 전신인 협률사 등의 전용 극장 또는 우미관, 조선극장, 장안사 등 일본인들의 극장에서 외화를 직수입하여 상영하였다. 1910년 이후 상영된 주요 영화들은 〈쿼바디스〉, 〈엘리자베스 여왕〉, 〈지바고〉, 〈부활〉, 〈잔다르크〉 등으로 꽤나 수준이 있는 외화들로 평가된다.

한국영화 태동기(~1945년)

한국영화의 출발이 김도산의 〈국경〉(1922)인지, 윤백남의 〈월하의 맹서〉(1923)인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1919)가 상영된 10월 27일을 기념하여 '한국 영화의 날' 기념행사가 매년 진행된다. 〈의리적 구토〉는 쇠락해진 신파극을 살리기 위해 당시 유행했던 활동사진을 접목해서 극장에서 상연된 연쇄극 형식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 사업가들은 영리사업의 목적으로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조선키네마프로덕션 등의 제작사들을 설립하였다. 조선의 영화인들도 영화에 대한 인식과 민족정신 고취로 개인 독립 프로덕션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제작 활동을 하였다. 대표작으로 윤백남독립프로덕션이 만든 〈심청전〉(1925), 특히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은 민족주의 정서를 잘 표현한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5년 최초의 동시녹음 영화인 이명우의 〈춘향전〉이 나오기 전까지 약 10년간은 무성영화 중흥기였다. 40개의 프로덕션이 설립되어 80편의 영화가 제작 되었다. 이후 민족의식 고양을 위한 계몽주의 영화가 제작되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영화 증흥기(1945년~1970년)

광복은 1945~50년 사이의 한국영화에 엄청난 파장을 미쳤다. 해방의 기쁨을 누리려는 욕망으로 소위 '해방영화', '광복영화'라고 불리우는 영화들이 등장한다.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 윤봉춘의 〈윤봉길 의사〉(1947), 〈유관순〉(1948), 이구영의 〈안중근사기〉(1946) 등이다.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최인규의 〈희망의 마을〉(1948)과 윤대룡의 〈검사와 여선생〉(1948),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1949) 등 멜로 작품도 함께 소개되었다. 하지만 좌·우의 사상적 대립과 6.25라는 엄청난 재앙을 겪지만 한국영화업계는 1950년대 후반부터 당시 현대적인 스튜디오 및 촬영 장비를 현대화하였고 서라벌 예술학교를 설립하며 전문 인력 양성에도 힘썼다. 6.25전란 이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한형모의 〈자유부인〉(1956) 등이 흥행에 성공했다. 신규 극장의 증가와 국민들의 관심 증가로 1959년에는 연간 제작 편수가 100편이 넘는 등 한국영화 중흥기를 맞이했다.

특히 전란을 통해 황폐해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줄 별다른 오락 수단이 부족한 여건 하에서 영화는 문예영화와 멜로물 중심으로 관객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국 최초 동시녹음 영화인 김기영의 〈죽엄의 상자〉(1955), 35㎜ 최초의 컬러 영화인 최성관의 〈선화공주〉(1957),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컬러 영화인 신상옥의 〈춘향전〉(1961)이 제작되었다. 1960년대 초중반 강대진의 〈마부〉, 김수용의 〈안개〉, 이만희의 〈만추〉, 정진우의 〈초련〉 등이 제작되었다. 1960년대 초반 전국 1,000만 명 규모의 관객이 1969년에는 전국 1억 7,000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한국영화 침체기(1970년~1990년)

1961년의 흑백 TV 방송 개시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영상물의 접근 수단을 제공했다. 1970년대 국민소득 1,000달러가 넘으면서 흑백 TV 보급이 크게 늘어났고 이것은 곧 극장 관객 감소를 불러왔다.

1970년대 초반 흥행 주류를 이루던 〈미워도 다시 한 번〉시리즈 등 신파 멜로물의 성공 이후, 다수의 아류작 등장으로 영화산업의 활기를 잃었다. 또한 제3차 영화법 개정으로 외화 수입권 확보에 치중하게 되었고, 컬러 TV시대의 드라마는 주부 관객층을 영화관 대신 TV 앞으로 모이게 하였다. 1970~1980년대 유신체제에 이은 군부 통치 강화에 따른 검열 제도도 강화되었다. 사회적 억압 분위기 및 급속한 경제 상황 변화에 따라 호스티스영화와 김응천의 〈여고 졸업반〉(1975), 〈고교얄개〉(1976)와 같은 하이틴 장르와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1974) 같은 멜로영화가 제작되었다.

컬러 TV 방영이 1980년부터 시작되면서 관객이 연간 4,000만 명 수준으로 급감하여 영화업계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1980년 중후반부터 전통적이고 예술성 높은 임권택의 〈만다라〉(1981), 〈아다다〉(1987),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이유〉(1989) 등이 제작되어 로카르노, 베네치아, 모스크바,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배창호의 〈꼬방동네사람들〉(1982), 〈고래사냥〉(1984), 박광수의〈칠수와 만수〉(1988) 등 젊은이들의 방황과 사회 문제의식이 강한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1980년대 말 외국 메이저 영화사의 국내 배급시장 직접 진출과 더불어 대기업들의 영상사업 또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1990년대 한국영화업계의 새로운 구도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한국영화의 혼돈기(1991년~1999년)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 고취, 자유화, 민주화 물결이 일어났다. 컬러 TV 및 VTR이 전 가구의 80%이상 보급되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영상물을 볼 수 있는 쌍방향방식의 소비 형태가 자리잡게 되었다. 대기업들의 영화 타이틀의 대량공급은 영화라는 상품의 인식을 동경과 꿈의 대상에서 선택의 대상으로 변화시켰다. 여기에 1990년 U. I. P의 〈사랑과 영혼〉이 서울극장에서 국내 최초로 직배되면서 여타 직배사들의 적극적인 공세로 이어졌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1991), 박철수의 〈301.302〉(1995)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시장 점유율이 20% 수준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위기 상황은 정부와 영화업계, 대기업들이 한국영화 중흥을 위한 여러 가지 발전 방향을 모색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스크린 쿼터의 사수 운동과 영화업종의 서비스 산업화 등 사회적 제도적 변화는 대기업의 영화사업 참여를 가속화시켰다. 1995년 아시아 최초로 미국의 메이저 스튜디오(major studio)를 지향하며 삼성영상사업단이 출범하였다. 이후 여러 대기업의 자본과 금융자본이 본격적으로 영화산업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영화산업의 산업화가 앞당기게 되었다.

1996년 9월에 설립된 삼성영상사업단은 1999년 2월 한국형 블록버스터 강제규의 〈쉬리〉의 탄생, 한국 콘텐츠(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의 해외 세일즈, 왕가위 〈happy together〉(1997)의 공동 제작 참여 등의 사업을 펼치며 200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재도약 시기의 중요한 디딤돌을 만들었다. 하지만 1997년 말의 외환위기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삼성을 비롯한 대부분 기업들이 영상산업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한국영화산업의 제2의 부흥과 과제(2000년 이후)

강제규의 〈쉬리〉, 곽경택의 〈친구〉, 박찬욱의 〈공동 경비구역 JSA〉 등 연이은 한국영화의 성공은 1960~1970년대 한국영화 증흥기에 이어 제2의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된다. 1990년부터의 대기업들의 영상사업 참여로 대규모 투자 재원의 확보와 젊은 창의적 인재들의 등장했다. 새로운 소재나 장르에 대한 다양한 시도와 1990년대 말부터 등장한 멀티플렉스의 등장, IMF의 외환위기를 통해 형성된 신토불이 정신은 한국영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으로 이어졌다. 특히 국내 대기업들의 제2세대 격인 여러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영화관 확대에 주력했다. 전국 2000개가 넘는 스크린과 100억 원 이상의 대작들을 과감하게 투자하는 등 소프트와 하드웨어사업을 동시에 추진해 나갔다. 2006년에 유동성 과잉으로 한국영화 거품이 발생하였다.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 확대로 부가 판권 수익의 감소가 이어졌다. 2006년 7월 한국영화 스크린 쿼터 일수가 143일에서 73일로 대폭 감소되기도 했다.

강우석의 〈실미도〉(2003),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 이준익의 〈왕의 남자〉(2005), 봉준호의 〈괴물〉(2006), 윤제균의 〈해운대〉(2009), 최동원의 〈도둑들〉(2012), 이환경의 〈7번방의 선물〉(2013), 추창민의 〈광해〉(2013), 양우석의 〈변호인〉(2014) 등 관객 1,000만이 넘는 영화도 지속적으로 등장하여 한국영화산업 분위기를 고취하였다. 하지만 마케팅 비용도 회수하지 못한 영화도 상당수 나와 흥행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되기도 했다.

2013년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최초로 전체 영화 관객이 2.1억 명을 넘어섰고 한국영화 관객기준으로도 2011년 0.8억 명에서 2012년 1.1억명, 2013년 약 1.3억 명으로 매년 급성장, 수익률도 2012년부터 흑자를 기록하는 등 최고의 황금기를 맞고 있다.

전성기에서 위기

90년대 말 '쉬리'의 흥행 이후 영화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 문화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2003년 첫 천만 영화인 '실미도' 이후 영화 산업계는 20년간 꾸준히 성장해왔다. 코로나 직전인 2019년 국내 영화 시장은 미국과 중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2019년에는 '기생충', '극한직업', '어벤져스-엔드게임', '겨울왕국2' 등 역대 가장 많은 천만 관객 영화가 배출됨과 동시에 전체 영화 관객의 수가 역대 최고치인 2억 명을 돌파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코로나가 발생한 2020년 이후부터는 국내 영화계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20년에는 거리 두기 정책이 시행되며 전년도 2억 명 이상이었던 관객 수가 5000만명대로 대폭 감소했으며, 2021년에도 영화관을 찾은 관객은 6000만명 정도에 불과했다. 코로나가 종식 단계에 접어든 2022년에는 관객 수가 증가했지만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2019년과 비교했을 때는 여전히 절반에 불과한 수치다. 2022년 말 많은 기대를 받던 ‘아바타2’가 개봉했음에도 영화관 매출은 회복되지 않았다.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OTT 플랫폼의 성행으로 인한 구조적 변화이다. 본래 국내 영화는 상영관 중심의 독과점 특수를 누리며, 영화관이 영화 유통에 있어서 절대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영화를 요약하는 유튜브 채널과 집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OTT 플랫폼과 같은 2차 시장을 통해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이 증가했다. 영화 매출에서 영화관이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관의 경우에는 영화 상영 시간에 스케줄을 맞춰야 하고, 평균 2시간이 넘어가는 상영 시간 동안 화장실을 가는 등의 움직임이 제약된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대로 조정해가며 편리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영화관과 차별화되는 OTT의 장점이다.

영화 시장 세계 21대 국가(2019년 기준)[편집]

  • 북미 영화: 114억 달러, 세계 1위(영어권 국가)
  • 중국 영화: 93억 달러, 세계 2위
  • 일본 영화: 24억 달러, 세계 3위
  • 한국 영화: 16억 달러, 세계 4위
  • 영국 영화: 16억 달러, 세계 5위(영국 - 아일랜드 - 몰타 합산)(영어권 국가)
  • 프랑스 영화: 16억 달러, 세계 6위
  • 인도 영화: 16억 달러, 세계 7위
  • 독일 영화: 12억 달러, 세계 8위
  • 멕시코 영화: 10억 달러, 세계 9위
  • 러시아 영화: 9억 달러, 세계 10위(러시아 - 독립국가연합 국가 전체 합산)
  • 호주 영화: 9억 달러, 세계 11위(호주·뉴질랜드 영어권 국가)
  • 이탈리아 영화: 7억 달러, 세계 12위
  • 스페인 영화: 7억 달러, 세계 13위
  • 브라질 영화: 7억 달러, 세계 14위
  • 대만 영화: 4억 달러, 세계 15위
  • 네덜란드 영화: 4억 달러, 세계 16위
  • 인도네시아 영화: 4억 달러, 세계 17위
  • 폴란드 영화: 3억 달러, 세계 18위
  • 아랍에미리트 영화: 3억 달러, 세계 19위
  • 말레이시아 영화: 3억 달러, 세계 20위
  • 홍콩 영화: 3억 달러, 세계 21위

글로벌 현황[편집]

북미시장[편집]

20세기까지만 해도 전세계 영화 시장은 할리우드가 있는 북아메리카가 압도적으로 컸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중국 영화 시장의 성장으로 현재는 1위이지만 압도적이진 않다. 물론 압도적인 투톱이긴 하다. 2018년 1분기에는 중국 영화 시장이 미국 영화 시장 총 규모를 앞서기도 했으나, 당해 최종 합으로는 미국 영화 시장이 앞섰다.

사실 중국 영화 - 홍콩 영화 - 대만 영화 등으로 파편화 된 중화권과 달리 북미 시장은 미국 영화 + 캐나다 영화 외에도 영국 영화, 호주 영화, 뉴질랜드 영화 시장과의 연계성도 고려해야 하고 미국 영화와 영국 영화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것 역시 고려해야 한다.

국가 단위로 헤아려도 아직은 미국이 제일 크다. 이런 요인 중 하나로 미국은 2012년 기준 영화표 1장 가격이 7.96달러 꼴로 MLB나 NBA, NHL, NFL 등에 비해 굉장히 저렴하다. 1940년대 중반에도 미국에서는 1주일에 9천만 명이 영화를 봤다. 당시는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였다는 것은 고려해야할 것이다.

이 때는 뉴스도 기록 영화로 극장에서 상영하던 시절이었다. 1894년에 토마스 에디슨에 의해 상업 영화가 처음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 압도적인 경제 규모 역시 고려해야 한다. 캘리포니아 전체의 경제 규모가 영국, 인도, 프랑스보다 더 크다.

캐나다 영화의 경우 미국 영화, 영국 영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에 자체 시장이 작다. 퀘벡 역시 프랑스 영화의 영향력이 강하다. 대신 캐나다는 캐나다인 배우 등 관계자의 미국, 영국, 프랑스 진출을 장려한다.

중국[편집]

2019년 기준 중국의 영화 시장은 전세계 2위로 93억 달러 수준이다. 관객 1인당 1달러 수준으로 1인당 수익은 낮지만 중국의 인구가 워낙 크다보니 시장 규모는 크다. 중국 내수만 해도 수입이 크다.

사실 중국의 평균 티켓 값은 중국의 경제을 감안할 때 굉장히 비싼 편이다. 2010년에 40 위안, 달러로 환산하면 약 6.4달러에 해당한다. 중국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래도 서민층 이상인 경우가 많다. 즉, 성장 가능성은 아직도 더 남아있다.

그래서 할리우드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영화 종사자들이 눈독을 들이는 시장이긴 하나, 독재국가답게 중국 정부의 규제와 검열이 부지기수이며 정치논리에 의해 영화개봉이 금지되는 경향이 심하다.

또한 할리우드 블랙아웃 등 쿼터 제도로 인해 외국 영화는 개봉에 굉장히 제한을 많이 받아 중국과 합작으로 영화를 찍는 경우가 많이 늘어나고 있으나 그런 경우에도 검열은 기본으로, 심하면 정치 간부가 나와서 간섭을 하거나 수익을 거의 독점하는 등의 문제도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 영국의 영화시장이 캐나다 영화, 호주 영화, 뉴질랜드 영화 간 교류가 활발하다는 것에 비해 아직까지 중국 영화 시장은 중화권 내에서는 영향력이 낮다. 그나마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 영화 - 중국 영화 간 교류가 잦아들었다.

일본[편집]

일본은 2019년 기준으로 세계 3위의 영화 시장이다. 표 값이 상당히 비싸서 관객이 준 지금도 세계 3위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비싼 표값이 오히려 시장 규모를 축소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있고 실제 2015년엔 영국 영화 시장에 밀려 4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도쿄의 표값은 1인당 약 23.8달러선으로 뉴욕의 평균 표값이 12.28달러 수준이며, 도쿄와 뉴욕의 경제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미국의 평균 표값이 8달러 수준임을 고려하면 굉장히 비싸다.

일본 영화 시장의 특징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애니메이션 영화의 비중이 특출나게 높다는 것이다. 일본 연간 전체 영화 총 관람객의 40% 이상이 애니메이션 영화 관람객이다. 때때로 50%를 넘을 때도 있다.

그 외에도 흥행 영화의 절대다수가 소설, 애니메이션 실사화 영화거나 아님 애니메이션, 드라마 후속작 영화다 보니 기타 장르의 시장 규모는 한국 시장에도 미치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도 애니메이션 시장 자첸 강고해서 2015년 영국 영화 시장에 추월당했을때도 2016년 너의 이름은.의 대박으로 이 작품 하나가 일본에서 2억 달러를 추가로 벌어다주면서 세계 3위로 복귀했다.

일본 영화는 1897년에 영화를 촬영했을 정도로 그 역사가 긴 편이다. 1950~60년대 전성기를 지나 침체기를 겪다가 2000년대 후반부턴 다시 일본 영화의 점유율이 올라가고는 있으나 해외에선 상당히 부진하고 있다.

한국[편집]

2019년 기준 16억 달러 수준으로 세계 4위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중 문화답게 인구수나 경제 규모에 비해 영화 시장의 사이즈가 상당히 큰 편이고, 성장세도 비슷한 수준의 국가 중 많이 빠르다. 한국 영화와 한국 영화/역사 항목도 참고. 4~7위의 시장 규모는 거의 비슷하긴 하다.

한국 영화 시장의 장르적 특징은 주변 국가들과 비교 시 정치, 사회 비판적 영화가 제법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공산당의 검열을 받고 일본도 사회 분위기 상 암묵적으로 만들지 않거나 애초에 시장 자체가 작아서 투자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물론 이런 영화들 뿐만 아니라 코믹, 액션, 멜로 등도 제법 나온다. 다만 애니메이션, 특히 국산 애니메이션은 영 힘을 못 쓴다.

한국 영화의 전성기는 1990년대 후반부터로 볼 수 있는데, 1950년대말 전후 부흥기로 시작하여 1960년대에 반짝 전성기를 보내다가 1970년대에 문화 검열, 규제를 많이 겪으면서 침체기가 왔고 1980년대에는 방화란 이름으로 에로영화 등으로 산업계가 도피하면서 사실상 암흑기였다.

이후 1990년대 초반에도 미국 영화, 영국 영화, 홍콩 영화와 같은 외국 영화에 밀려 한국 영화는 침체기였지만, 1993년 미국의 《쥬라기 공원》의 대히트로 인해 문화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영화계로 많은 자금과 우수한 인재들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1994년을 기점으로 점유율도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이후 1990년대 말부터 쉬리 가 개봉하면서 방화와 극소수의 예술성 높은 (한마디로 관객들 눈높이에 맞춰지지 않은) 해외영화제 출품작밖에 없던 한국 시장에 , 우리도 헐리우드급 영화를 제작할 수 있구나 하는 인식이 퍼지며 마침 IMF로 얼어붙은 한국 시장에서 돈들이 충무로로 몰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듬해에 김지운, 박찬욱, 곽경택 같은 걸출한 감독이 발돋움 하였으며, 뒤이어 한류 열풍과 멀티플렉스 등의 결합으로 시장 규모도 커지고 영화를 취미생활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 2000년대 들어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괴물 등 질적 성장과 함께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천만 영화도 등장하며 급속도로 시장이 커졌다.

2000년대 초반에 연간 관객수 1억을 돌파하였고 당시 한국 영화가 절반 이상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2013년에는 한국 영화의 연간 관객수가 2억명을 돌파하였다. 그리고 경제에 비해 영화 시장이 더 빨리 성장했다. 이는 스크린 쿼터제로 일정한 날짜만큼 한국 영화를 상영하도록 규정해둔 정책 덕분도 있었다. 이후 한미 FTA 협상이 진행되며 스크린 쿼터제 축소가 논의되고 당시 영화계에서 반발도 있었으나, 결국 이전보다 축소되었고 우려와 달리 한국 영화는 이후에도 국내 점유율을 선방한다.

다만 2016년 들어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면서 한국 영화계에 적신호가 켜지기도 했다. 2017년에는 매출 자체는 양호했으나 상반기 성장, 하반기 침체, 12월 반전처럼 영화계에서도 잘되는 영화는 초대박, 안되는 영화는 쪽박식의 양극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100만 단위의 중위층 영화가 힘을 못쓰고 있다.

이는 스크린 독과점 문제나 영화 티켓 값의 상승으로 인한 관람객 편중 현상 심화 등이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또 투자비가 늘어나면서 여성이 선호하는 멜로, 가족 장르가 줄어들고, 남성이 선호하는 액션, 첩보, 스릴러물이 주로 선호되다보니 투자자들이 이런 쪽엔 투자비를 줄이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며 가히 한국 영화사상 최고라 할만한 업적을 남겼고, 이와 더불어 흥행도 국내외 모두 쌍끌이 흥행을 이끌어냈다. 다만 2020년 2분기부턴 코로나 전염병으로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영화 시장도 급격히 위축된 상태이다.

그나마 코로나 사태가 잦아든 중반기에는 다시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기 시작하며 몇백만 영화도 나오는 등 숨통을 틜만한 상태는 유지했으나, 코로나 2차 재유행이 만연함에 따라 다시 시장이 위축되었다. 물론 이는 한국만 이런게 아니라 전세계 영화나 스포츠 등등 무수한 분야에서 코로나 때문에 똑같이 시장이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지만.

영국[편집]

2019년 기준으로 16억 달러. 2009년 기준으로 관객수는 1억 7500만 명으로 한국과 비슷하다. 영국 경제 규모에 비하면 작다고 느껴질 수 있으나 영어권 네트워크를 감안하면 시장 규모에 비해 영향력은 강하다.

영국은 영어권 국가이기 때문에 미국 영화와 같이 세계 영화 시장에서 상당히 강한 영향력을 끼친다. 영문학, 다큐멘터리, 영국 역사 관련 영화에서 상당히 강점을 지니며 캐나다 영화, 호주 영화, 뉴질랜드 영화 시장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다.

사실 1945년 이후 영국 영화 시장이 축소되고 미국 영화 시장이 부흥기를 거치면서 미국 영화 시장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았고, 영화 시장이 위축되기는 했으나 1980년대를 기점으로 회복했다. 한 때는 자국 영화 점유율이 20%대였으나 최근에는 43~45%대를 유지하고 있다.

영국 영화의 특성 상 자국 영화 비중이 높기는 하지만 미국 등 영어권과의 합작 영화 비율이 높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 해리 포터 시리즈,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맘마 미아!, 맘마 미아! 2의 경우 미국 영화와 합작했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프랑스 영화와 합작했다.

그리고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서 영국 영화 및 대중 음악 시장에 진출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캐나다인, 호주인, 뉴질랜드인 배우의 출연도 많아지고 있고, 영국 영화 - 미국 영화 간 교류도 증가하고 있다.

영화의 발달과 궤를 같이한 동네이기도 하다. 찰리 채플린이 영국 출신이고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영국 배우만 해도 굉장히 많다. 가장 미국적인 장르인 히어로물인 배트맨을 맡은 크리스천 베일이 영국인(웨일스)이다.

프랑스[편집]

영화의 탄생지이다. 규모는 2019년 기준으로 16억 달러. 뤼미에르 형제는 최초의 영화 제작자다. 2011년 기준으로 관객수는 2억 1500만 수준. 1960년대에 누벨바그 등의 영화 사조 운동을 했다. 누벨바그를 영어로 옮기면 new wave. 장뤽 고다르 같은 인물이 나오기도 했다.

미국 영화의 점유율이 2010년 47% 수준으로 비교적 낮은 편이다. 시장에서 프랑스 영화의 비중은 한 40% 정도 선이다. 프랑스 정부에서 자국 영화에 지원을 많이 해주는 편. 프랑스 영화인으론 뤽 베송이나 미셸 공드리가 유명하다. 배우로는 장 르노나 마리옹 코티야르, 에바 그린 등이 유명.

인도[편집]

2019년 기준으로 16억 달러. 세계 5위의 영화 시장.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향후 성장 가능성도 괜찮은 편이다. 덕분인지 제작편수는 미국 영화보다 더 많기로 유명하다. 이미 1990년대에 미국보다 2~2.5배로 세계에서 개봉영화를 가장 많이 만드는 나라였다. 2010년대에도 여전히 1400~1600편이 개봉하여 미국의 3배를 웃돈다.

발리우드나 다른 인도 영화 특유의 정서 때문에 해외 흥행은 시원찮다..과거에 해외로 나간 인도인들을 위해서였지만 1950년대에 제법 많이 유럽에도 수출되었으며 소련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현재도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에선 나름대로 인기가 있는 편이다. 종종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도 대박을 거두는데 예를 들어 2017년 영화 당갈은 본고장 인도의 2.5배가 넘는 대박을 중국에서 거둬들였다. 중국에서만 무려 2억 달러 가까운 흥행을 기록하여 전세계에서 3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했다.

국내 영화가 저렇게 많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본고장 시장이 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반대로 말하면 할리우드 영화가 고전하는 나라로 악명높다. 인도 영화를 발리우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발리우드는 인도 영화의 한 장르이지 인도 영화가 모두 발리우드 같지는 않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영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인도가 워낙에 다언어 국가인 탓에 영화마다 언어가 다르다. 가장 많은 건 역시 힌두어. 다음으로 텔루구어, 타밀어, 칸나다어, 벵골어 정도.

독일[편집]

2019년 기준으로 12억 달러. 독일 영화는 독일이란 나라가 워낙에 급격한 변화를 겪었던 탓에 과거와는 큰 차이가 있다. 1920년대에서 30년대에는 할리우드보다 더 많은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보면 이와 관련된 얘기가 꽤 나온다.

그러나 제3제국을 거치면서 나치에 협조했던 영화인들이 퇴출되고 나치에 비협조적이었던 영화인들은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로 넘어간 탓에 독일 영화는 침체된다. 경제규모에 비하면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영화 시장이 작은 편이다.

호주[편집]

2019년 기준으로 9억 달러 수준. 영국의 자치 지역이었기에 영국 영화의 발달과 그 시초를 함께 하지만 1906년에 최초의 호주만의 영화가 제작된다. 영어권 소속이기에 영국이나 미국과 언어적인 호환이 편리해서 영화 시장이 생각보다 크다.

인구는 영국의 1/3 수준인데 시장 규모는 2/3 수준이다. 출신 배우들도 많아 니콜 키드먼, 나오미 와츠, 제프리 러시, 휴 잭맨, 멜 깁슨, 가이 피어스(영국 국적, 호주서 성장), 히스 레저, 케이트 블란쳇, 크리스 헴스워스, 올리비아 뉴튼 존 등이 호주 출신이다.

호주 자체 영화는 영 고전을 면치 못 한다. 일단 호주 영화 특성상 미국 영화와 영국 영화의 자본력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뉴질랜드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캐나다 영화 시장은 미국 영화,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러시아[편집]

2019년 기준으로 9억 달러. 러시아 제국 시절은 굉장히 영화사에서 초창기라 별다른 건 없고 소련이 되자 선전용 영화 등의 제작이 활발했다. 소련 영화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영화에 많은 지원을 했던데다가 영화시장도 엄청나게 커서 인력을 마구 뽑아낼 수 있어서 대규모 엑스트라가 동원된 군중장면 등이 가능했다.

그러다가 러시아 연방이 되면서 러시아 영화로 불리게 된다. 1990년대에 영화시장이 총체적으로 붕괴되며 자금적으로 크게 쪼들려들었지만 2000년대 이후로 소련 시절에 쌓은 기술적인 역량과 자유화로 자본이 유입, 축적됨에 따라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영화 시장이다. 중국의 포스가 너무 세서 좀 묻히는 경향이 있다. 또 러시아는 '연극' 등의 무대예술들의 파워가 센 편이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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