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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립어인 니브흐어를 사용하는 수렵채집 민족으로, 북사할린과 외만주의 [[아무르강]] 하류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아이누와 직접적으로 부대끼며 영향을 주고받았던 민족이다. [[중국 동북]]과 [[러시아 극동]]의 이웃 퉁구스인들과 매우 유사한 생활상을 보이며, 주로 어업에 종사한다. 러시아와 일본의 사할린 지배 과정에서 수가 격감하였다. | : 고립어인 니브흐어를 사용하는 수렵채집 민족으로, 북사할린과 외만주의 [[아무르강]] 하류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아이누와 직접적으로 부대끼며 영향을 주고받았던 민족이다. [[중국 동북]]과 [[러시아 극동]]의 이웃 퉁구스인들과 매우 유사한 생활상을 보이며, 주로 어업에 종사한다. 러시아와 일본의 사할린 지배 과정에서 수가 격감하였다. | ||
+ | ===한족=== | ||
+ | 한족은 내만주, 즉 동북 3성과 3시 1맹 지역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해당 지역들의 인구 수를 합치면 9000만 명을 상회한다. 유교와 국가 무신론의 영향을 받아 지배적인 종교는 없으나, 그래도 불교는 여전히 교세가 꽤 되는 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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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시대]] [[연나라]]가 최초로 [[요동지역]]까지 진출하며 [[고조선]] 세력을 밀어냈고, [[한나라]]때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만주 남부와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한다. [[위진]] [[남북조]] 시기에는 북방 유목 민족 세력을 거쳐 다시 [[고구려]]로 대표되는 한민족 세력에게 돌아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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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에는 천 년 가까이 요하 동쪽의 만주에서는 직접적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일시적으로 요하 동쪽의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지배권을 획득했지만, 곧바로 [[발해]]에게 대부분의 영역을 빼앗겼다. [[요서]] 정도만이 수당시대 때 확실한 지배권으로 통치되었으며, 당 멸망 이후 등장한 [[송나라]]는 요서를 넘어 회북 일부까지 잃고 방위에도 급급해진다. 본격적으로 한족이 만주에 세력을 재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이다. 명나라는 요서와 요동 일대의 군사적 요충지를 통해 유목 제국을 견제하고 북방 국경을 안정화 시켰으나 그 이북은 여전히 전부 퉁구스 및 몽골계 민족들과 일부의 한민족 유민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청나라]] 건국 이후에도, 만주는 청 황실에서 보낸 일부 한족 이주민을 제외하면 청조 내내 봉금 지역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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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 증가와 약해지는 행정력은 점차 봉금령의 붕괴를 일으켜 틈관동이라 불리는 이주 행렬을 만들었고, 19세기 말 봉금령이 완전히 풀리며 만주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된다. 이때부터 중원(그중에서도 [[산둥성]] 일대의) 한족들이 대대적으로 이주해 현재는 만주의 주된 민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만주의 풍부한 천연자원과 이를 기반으로 한 2차 산업, 넓은 처녀지에서 행해지는 농업은 수많은 한족 이주민들을 유입시켰다. 당시 만주를 기반으로 한 [[봉천군벌]]은 동3성 병공창 등의 기반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을 정도였다. [[만주사변]]으로 만주가 [[일본]]의 지배하에 잠시 넘어가기도 했으나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영역으로 돌아왔고, 중국 공산당은 이 지역의 소수민족들과 일본의 유산들을 기반으로 세력을 재편, 원정 온 국민당군을 섬멸하고 천하를 쥐었다. 그 이후로도 내만주는 확고한 중국 세력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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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는 원주민들의 유출 및 한족으로의 동화로 인해 현재 내만주에서 한족 비율은 90%가 넘는다. 대표적으로 만주의 중심인 [[헤이룽장성]]의 한족 비율은 96%이며, 일부 지역에서 소수민족 자치지역이 있으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한족이 절대 다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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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민족=== | ||
+ | 한민족은 [[중국]]과 [[러시아]] 일대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및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사할린섬]]을 중심으로 거주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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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주 및 [[한반도]] 북부를 기원으로 하며, 만주 역사상 최초의 국가라고 추정되는 [[고조선]]을 세웠다.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이탈과 흡수가 반복된 요동 지역 정도를 제외하면 [[북부여]], [[동부여]], [[북옥저]], [[고구려]], [[두막루]], [[발해]] 등의 한민족 국가가 내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직간접적으로 천년 가까이 지배했다. 특히 고구려는 [[요동]]의 패권을 쥐고 [[중원]]과 대등하게 겨룬 첫 번째 국가라는 정치적인 상징을 가지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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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10세기경부터 유목민족들의 대대적인 발흥과 함께 [[발해]]가 멸망하며 한국계 정치집단의 지배적인 헤게모니는 무너졌고, 발해부흥운동마저 실패한 이후 한민족의 정치체는 한반도로 그 영역이 축소되었다. 고려 말 제1차 요동정벌로 일시적인 진출에 성공하였으나,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던 당대 국내외 정세의 한계로 인해 [[고려]]와 [[조선]]의 만주 진출은 결국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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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외, 발해부흥운동 시기 유민부터 시작해 고려 시대 난민 등이 후손을 이루며, 여전히 적지 않은 수가 [[만주에서 터전을 이뤘다. 그러다 조선 후기 시기에는 청나라의 등장으로 인한 만주의 성지화와 북방민족에 대한 조선의 우위가 붕괴된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이 조선 전기 때보다는 약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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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에 다가서는 19세기경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난민들이 본격적인 만주 재이주를 시작한다. 주로 농업이나 장사를 위해 중국령 만주나 러시아령 연해주로 향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이러한 이민은 1945년 일본의 패망 때까지 이어져왔다. 또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과 경술국치 이후 다수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이런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 정착촌들을 중심으로 재편하여 항일 운동을 이어나갔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지청천]]의 [[한국독립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그리고 [[이용]]과 [[김홍일]]의 [[대한의용군]] 등.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들은 이들에게 숙식과 정보, 그리고 인력을 제공했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일본을 등에 업은 [[장쭤린]]의 [[봉천군벌]]이 탄압을 벌이고, 일본이 서서히 손을 뻗으면서 내만주의 독립운동은 점차 위축되었다. 연해주도 마찬가지로, 1922년경에는 러시아 내전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소련]] 극동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다. 거기다 1930년대 [[만주사변]]이 벌어지면서 주요 항일 세력들은 중국 관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로 다시 이동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한인들은 지역마다 분화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역사에 스며들어 크고 작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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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조선족==== | ||
+ | 중국령 내만주에 있는 이들은 [[조선족]]이라 불리는데, 구한말부터 농업이민으로 넘어갔거나 항일운동을 위해 넘어간 조선인들 중 1945년 해방 이후로도 귀국하지 않고 남은 이들의 후손이다. 주로 [[평안도]] 및 [[함경도]] 출신이지만 [[헤이룽장성]] [[무단장시]]의 조선족들은 한반도 남부의 [[경상도]] 출신이 다수이다. 이들이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 국가와 분리된 한국계 '중국인'이 된 것은 1949년 [[국공내전]] 종결 이후이며, 그 이전의 만주 조선인들은 한반도 내의 본토 조선인들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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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큰 영향을 끼친 소수민족이기도 하다. 원래 [[옌안]]의 중국 공산당에는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분포해 있었다. 한편, 만주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던 만주 조선인들은 1945년 이후 한반도로 자신들을 돌려보내려 하는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역시 중국 공산당에 대거 가담하였다. 이들은 만주 전역에서 국민당군의 진격을 저지, 전황을 반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여세를 몰아 [[난징]]을 함락하고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후에도 이후 다수의 조선인 부대들은 연안파를 구성하여 북한 정부 수립에도 참여했고, 한국전쟁에서도 침략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연안파는 정통성이 부족하던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으로 일인 독재 체제를 세우자, 고려인 계통의 소련파와 마찬가지로 숙청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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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 내부에서 나름 잘 사는 민족에 속한다. [[북한]]의 쇄국으로 인해 교류가 줄어드는 반면에 [[한국]]과의 교류는 증가하는 추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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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린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 및 [[장백조선족자치현]]에 다수가 모여 살고 있으며 그 외 도시에도 많이 거주한다. 이들의 중국 조선어는 동북 방언(함경도)과 서북 방언(평안도)의 영향력이 강하다. 현대 들어서는 한국과의 교류 증가로 인해 대한민국 표준어의 영향력도 강해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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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고려인==== | ||
+ | 러시아 지역에 있는 이들은 고려인이라 불린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령 극동으로 이주했던 이들을 기원으로 한다. 러시아의 [[연해주]] 개발 당시, 이들은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대한제국]]과의 무역을 이끌면서 연해주에 생필품을 공급하여, 러시아 제국의 극동 지배를 안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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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으로는 이들 역시 한국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면서 [[레닌]]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고 백군을 [[일]]본이 지원하자, 이들 중 대다수는 소비에트 적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백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민족주의 세력은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살해당하거나 [[상하이]]로 떠나면서 와해되었다. 이후 1930년대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소련 극동이 일본의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자 [[스탈린]]은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에 따라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쫒겨났다. 이 때문에 현재 이들은 구 소련을 구성하던 여러 공화국들 전역에 분포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러시아 수도권에 특히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원 정착지였던 연해주 지역에 남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강제 이주 이후 소련에서는 중앙아시아 농업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만주 작전 이후 소련군정의 실무자로 대거 참여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도 소련파란 이름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여타 다른 파벌들처럼 8월 종파사건 당시 김일성에게 숙청당하고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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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소련 국가 무신론의 영향을 받아 이들 또한 민족적 종교는 없지만, 종교를 믿는다면 대부분 주로 러시아 정교를 믿는다. 언어는 함경도 동북 방언의 일파를 사용했지만 중심이 되는 민족 자치구역이 없었기에, 현대 들어서는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일부는 조상의 언어인 대한민국 표준어를 배우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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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할린 한인==== | ||
+ | [[사할린섬]]에 있는 한인들은 고려인과는 좀 다른 [[사할린 한인]]이라 불린다. 이들은 1940년대에 일본 제국령 사할린에 노동자로 강제 징용되어 갔다가 1945년 일본이 철수하고 사할린이 소련에 넘어간 후에도 무국적으로 남겨진 이들을 기원으로 한다. 일본이 패전했기에 이들의 일본 국적은 말소되고 소련과 북한은 이들에게 북한 국적을 주려 했으나 사할린 한인들은 이를 거부했는데, 한반도 남부에서 넘어간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절대 다수는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이었지만 [[제주도]] 출신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소련과 적대 관계였던데다 소련은 남한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할린 한인들이 남한 국적을 딸 수도 없어서 무국적으로 남겨졌던 것이다. 이들의 이주 배경은 [[민단계]] [[재일교포]]와 그 기원이 유사하기 때문에 일부 1세대 사할린 한인들은 창씨개명의 영향으로 일본식 이름을 썼던 경우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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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는 주로 러시아 정교를 믿는 편이다. 언어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쓰이는 서남 방언 및 동남 방언의 일파를 사용하지만, 소련 시절의 영향으로 인해 표기는 북한 문화어 식으로 했다. 하지만 타 지역의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들어서는 대한민국 표준어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지고 있다. 2세 이후로는 러시아어를 주로 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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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유럽어족=== | ||
+ |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일부 [[벨라루스인]]. 이들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인]] 및 발트어족 또는 [[독일인]]들 또한 이주해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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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00년대 [[러시아]]의 팽창기에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를 개척하며 진출해왔으나, 청과의 국경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후 이들은 만주에서 밀려나 [[스타노보이 산맥]] 이북 시베리아에 설립한 소규모 정착지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이들이 본격적으로 만주에 이주해오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가 [[청나라]]에게서 외만주를 점령한 이후이며 러시아는 부동항을 건설하고 극동에서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다수의 도시를 건설했다. 특히 [[니콜라이 2세]] 치세에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의 이주 장려 정책이 추진되면서 다수의 러시아인 및 우크라이나인들이 극동으로 이주해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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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 거주지는 [[프리모리예 지방]]과 [[하바롭스크 지방]] 등 러시아령 극동이지만, 한때는 만주 전역을 러시아 제국이 세력권으로 삼으면서 남만주 [[랴오둥 성]]에 러시아령 [[다롄]]이란 이름의 군사적 식민지를 세운 적도 있다. 또한 [[하얼빈]] 등 중국 내만주 지역의 개발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러시아 내전에서 패배한 백군 세력이 중화민국령 내만주로 탈출해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세운 적도 있다. 다만 현재 중국령 동북 3성 및 3시 1맹에서 이들 잔존 백군 세력의 자취를 알아보기는 힘든데,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에게 탄압당하고 만주 작전으로 쳐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대다수가 납치당하거나 해외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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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만주의 러시아인의 비율은 90%을 넘어간다. 시베리아의 [[사하 공화국]]이나 [[추코트카]] 지역이 원주민 비율이 절반 이상인 것과 비교하면 러시아 극동에서 외만주 지역은 특히 러시아인이 많이 유입된 곳임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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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인==== | ||
+ | 외만주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러시아인 및 우크라이나/벨라루스계 러시아인들이다. 내만주 지역 종족들이 한족을 중심으로 중국인 정체성에 동화되어 있다면, 외만주의 종족들은 [[러시아인]]에 동화되어 있다. [[아무르 강]] 일대에는 17세기부터 진출했으며, 그 이남으로는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러시아의 동방 창구인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와 [[하바로프스크]]가 가장 핵심적인 지역들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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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는 동슬라브어파의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민족 종교는 러시아 정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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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 ||
+ |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 당시 동원되었던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을 기원으로 한다. 본격적으로는 19세기 중반 외만주를 청나라에게서 할양받은 후 카자크 부대들이 국경 수비를 위해 정착하기 시작했고,[[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의 극동 이주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인 가구가 다수 이주하였다. 19세기 말이 되면 연해주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이는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계 분포 지역 중에서도 남부 연방관구나 카자흐스탄 접경지대를 제외하면 독보적으로 우크라이나인이 많은 곳이다. 때문에 이들은 한때 젤레나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다수가 러시아인에 동화되어 있다. 언어는 과거에는 [[우크라이나어]]를 입말로 써왔으나 현대에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민족 종교는 역시 러시아 정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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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벨라루스계 러시아인==== | ||
+ | 표트르 스톨리핀의 시베리아 이주 지원 정책 이후 다수가 이주했다. 주로 [[아무르 주]]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언어는 과거에는 벨라루스어를 입말로 쓰기도 했으나 현대에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민족 종교는 러시아 정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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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란드인/폴란드계 러시아인==== | ||
+ | 17세기 중반 볼히니아의 폴란드인 귀족이었던 니키포르 체르니고프스키가 총독을 살해하고 도주하여 아무르 강변에 세운 야크사라는 자그마한 국가를 기원으로 한다. 그가 이끄는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청나라의 맹공격을 받은 후 반쯤 버려진 정착지였던 알바진 요새를 점거하곤 주변의 퉁구스계 야인여진 부족들을 규합하여 독립 국가를 선포했다. 외교 언어는 폴란드어였다. 그러나 20년 후 청나라령으로 병합되었다. | ||
+ | 이후 폴란드인들은 19세기에 다시 한 번 대대적으로 이주한다. 당시 [[폴란드]]는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세 제국에 분할되어 있었기에 탄압이나 강제 이주, 또는 취업을 이유로 세 국가의 각지에 정착하였다. 러시아의 영향권인 만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얼빈]]과 중동로 철도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데에는 폴란드인 기술자와 노동자들의 역할이 컸다. 또 독립운동과 반러 운동을 일으킨 폴란드인들도 다수 하얼빈에 모여들어 사회를 구성했다. 한 때 1만여 명에 달했던 하얼빈의 폴란드인 공동체는 불행히도 [[관동군]]의 [[731부대]]와 소련군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등등 사건을 거치며 입지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1937년에 [[소련]]과 [[만주국]]은 오직 양국 국적을 가진 국민만이 하얼빈 철도에서 일할 수 있다는 협정에 서명하는데 이 협정으로 인해 많은 폴란드인들이 철도청에서 쫓겨났고, 3년 후(1940년부로) 하얼빈 내 폴란드어 신문은 재정난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1947년 중화인민공화국은 하얼빈에 남아있던 폴란드인들을 모조리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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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계 러시아인==== | ||
+ | [[러시아]] 내에 살던 독일인들, 그 중에서도 [[볼가 강]] 중류에 살던 볼가 독일인들이 주를 차지한다. 러시아 제국의 극동 개발과 함께 일부가 이주했다. [[하얼빈]]에도 독일계 러시아인들을 위한 [[루터교회]]가 존재했을 정도다. 하얼빈 난강 기독교 교회는 원래 독일에서 온 루터교 이민자들을 위한 예배 장소였다고 한다. 러시아계 독일인들의 본격적인 이주는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가 벌어지면서부터였다. 농업을 업으로 삼던 볼가 독일인들은 농업 집단화에 반발하며 외만주의 중-러 국경으로 이주해 탈출하곤 했다. 다수는 재세례파의 일종인 메노나이트 신도들이었는데 또 일부는 루터교 신자들이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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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는 게르만어파의 독일어를 사용했으며, 종교는 루터파 개신교를 주로 믿었지만 볼가 독일인 출신자들은 재세례파가 다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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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슈케나짐 유대인=== | ||
+ | [[동유럽]], 특히 구 폴란드-리투아니아령에 흩어져 살던 [[아슈케나짐]] 유대인들 중 러시아 제국 정부의 [[시베리아]] 개척 정책에 따라 [[극동]]으로 진출해 온 유럽인들 중에 섞여 있었던 이들을 뿌리로 한다. 하지만 보다 주된 기원은 1930년대 [[스탈린]]이 [[유대인]] 민족 자치구 설립 계획에 따라 이주해온 수만 명의 우크라이나/벨라루스/러시아 유대인들이다. 당시 [[소련]] 내의 모든 민족들은 민족적인 터전을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나라 없는 민족으로 배척받기로 유명한 유대인들의 민족 자치 지역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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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탈린은 이 문제도 해결하고 겸사겸사 극동의 개발과 인구 부족 문제도 해결할 겸 유대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유대인 자치주를 설립했다. 동유럽에 자치주를 수립하지 않은 이유는, 이들의 원 거주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영역에는 민족 구성에 기반한 경제적 계급 격차로 인해 반유대주의가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농민들의 성장을 막기 위해 유대인과 독일인들을 불러들여 상인과 마름으로 일하게 했다. 폴란드가 망한 이후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이런 상황을 방치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아슈케나짐 유대인들과 주변 농민들의 사이는 매우 험악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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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유대인의 민족국가인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1970년대 소련에서 유대인의 이민을 허락한 것을 계기로 [[외만주]]에 있는 유대인 자치주에 거주하던 다수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하기 시작했다. 현재도 유대인 자치주는 여전히 남아 있으나 유대인 인구는 거의 없으며, 이 때문에 폐지 논의가 활발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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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대인의 특성 상 폴란드계 러시아인, 독일계 러시아인과도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 언어는 독일어의 일파라고 할 수 있는 게르만어파의 이디시어를 입말 및 서면 언어로 사용했다. 유대인 자치주는 이디시어가 공용어로 지정된 세계 유일의 지역이다. 그 외 그들은 러시아어나 독일어, 폴란드어 등 출신 지역 민족들의 언어 또한 구사할 줄 알았다. 한편, 종교 제례 언어는 여타 유대 분파들과 마찬가지로 셈어파의 [[히브리어]]였으며 민족 종교는 당연하게도 유대교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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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인=== | ||
+ | [[일본]]은 19세기부터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 사할린 및 만주 지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태양신의 후예를 자처하며 단 한번도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일본인들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대포 몇 방으로 손쉽게 막부와 각 번들을 굴복시키는 모습을 보곤 역사상 처음으로 외세에 대한 안보 위협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특히 영토를 맞대고 슬금슬금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이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자 일본은 제국의 방위를 위해 만주, 적어도 한반도만큼은 일본으로 편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안보적 불안감은 일본 제국주의의 시발점이 되어, 여타 식민제국들과 달리 경제적인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만주, 시베리아를 잇달아 침략하는 정신적인 동력원으로 작용했다. 이때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 그 유명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권선-이익선 개념이었고, 그 대상은 한반도와 오키나와, 대만, 사할린, 그리고 남만주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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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주'라는 지역을 최초로 규정지은 것도 일본인들이었다. 당시 떠오르던 비교언어학적 언어연구들은 각 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중요한 방식으로 각광받았으나 이는 곧 제국주의 침략에 이용되고는 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인도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가장 발전되고 고대 아리아인의 순수성을 가장 잘 보존한 자신들이 뒤처진 친척인 인도를 계몽, 발전시켜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인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일본 동양사학자들은 이러한 영국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조선과 만주에 적용했고, 독립된 지역으로써의 의미가 부족하던 동북 지역을 일본의 영향권으로 편입하기 위해 만선사관을 도입했다. 이로 인해 새로 규정된 '만주' 지역은 중국 및 유럽과 분리된 우랄알타이어족의 고유 영역이었으며, 알타이어족의 맹주이자 중국과 유럽의 장점을 모두 흡수한 선도문명인 일본이 이끌어 계몽하고 개발해야 하는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내선일체, 오족협화, 만주국 등이 이러한 논리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이르면 서남태평양 일대에도 이러한 시각이 확장되어 남양은 서구가 아니라 새로운 선도문명 일본이 주도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영역으로 선포되었다. 물론 이러한 허울 좋은 간판을 걸어놓은 만주 지배의 실상은 여느 식민제국들이 그렇듯 한국인 및 퉁구스계 민족들의 독립된 권리를 전부 부정하고 일본 제국의 독점적인 발전에 강제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일본 제국령 만주와 조선에서 '형제' 민족들의 권리는 없었고, 큰형님 일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며 그것은 항상 옳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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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하튼, 이러한 서구 세력에 대한 안보적 불안감에서 시작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대한제국 강제 합병으로 한반도와 남만주 및 남사할린에 영향력을 구축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편 1920년대에는 러시아의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로 출병하여 백군을 후원하며 러시아령 외만주를 일시적으로 점령하였으나, 명분과 역량 부족 및 소비에트 러시아의 반격으로 인해 철수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내만주 봉천군벌의 근거지를 전부 흡수하곤 식민지인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착했다. 이 당시에는 만주 일대에 가장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구축했으며, 만주를 중원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로 삼아 대대적인 산업화를 추진했다. 이 시절 일본인들이 건설한 대규모의 산업시설은 동아시아 최대 규모였고, 훗날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에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동남 연해가 개발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산업지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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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1945년 8월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인해 만주국과 북한 지역의 일본 세력은 일주일만에 축출되어 버렸다. 그리고 곧 일본이 일본 제국이 항복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중원의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탈출해야만 했다. 이들을 히키아게샤라 한다. 한편 관동군의 군인들은 소련군에 잡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서 10년간 노역에 시달리고 나서야 본국 땅을 밟을 수 있었고, 일부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에 자의반 타의반 가담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이 남긴 군사, 산업 인프라를 장악하기 위해 공산당과 국민당의 만주를 향한 경주가 펼쳐지면서 2차 국공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 이들은 현재는 만주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극히 일부 남은 이들도 출신을 숨기고 살아가거나 동화된 상태이다. 민족 종교는 대승불교와 신토, 그 중에서도 일본 제국 시절에는 국가신토였으며 민족 언어는 일본어족의 일본어였다. | ||
== 참고자료 == | == 참고자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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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amu.wiki/w/%EB%A7%8C%EC%A3%BC 만주]〉, 《나무위키》 | * 〈[https://namu.wiki/w/%EB%A7%8C%EC%A3%BC 만주]〉, 《나무위키》 | ||
2022년 12월 9일 (금) 12:07 판
만주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동북 3성과 내몽골자치구의 3시1맹(三市一盟) 지역(구 만주국)을 일컫는 외래지명(exonym)이다. 한반도의 북쪽, 고비 사막의 동쪽, 시베리아의 남쪽, 사할린 섬의 서쪽에 위치해있다. 각각 압록강과 두만강, 다싱안링 산맥, 스타노보이 산맥, 타타르 해협을 경계선으로 한다.
목차
자연
지리적으로는 춥고 황량한 허허벌판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아무르강(헤이룽강,흑룡강),송화강(송화강)이나 랴오허(요하) 같은 큰 강이 흐르고 한카 호 같은 거대한 호수도 있으며 풍성한 삼림이 우거져 있다. 그리고 몽골고원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1,900m에 이르는 거대한 다싱안링산맥을 비롯한 여러 산맥들도 자리 잡고 있으며[33] 늪지도 많다. 남부에서 대략 한가운데 둥베이평원이 자리잡고 있다.
농업의 경우는 겨울이 길기 때문에 논 농사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지의 조선인들은 이주해서 논농사를 짓고야 만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추워 한반도의 평야보다 농사에 불리하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곡창지대가 된 것은 20세기 중후반의 일이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국가는 반농반목 국가가 많았다. 부여, 고구려 시절엔 기후도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고구려도 평안도 이남의 한반도가 생산력이 높았다. 지금 농업으로 유명한 헤이룽장성의 싼장평원도 원래는 거대한 늪지였기에 농사짓기가 어려웠으며, 해당 지역의 퉁구스계 주민들은 수렵채집으로 생활하였다. 현대의 그 광활한 농장지대는 20세기 중후반 중국 정부가 수많은 인민해방군 병사들을 동원하여 십만이 넘는 사상자가 날 정도로 강하게 개간을 밀어붙인 결과이다.
현대에는 남북 길이 약 1,000km, 동서 너비 약 400km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평야 지대이자 전 세계에서도 비옥하기로 손꼽히는 둥베이 평원이 위치하고 있어서 옥수수, 콩, 조, 밀, 사탕무, 등을 재배하는 대규모의 밭농사가 이루어진다. 대두의 원산지 중 한 곳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일본에 의해 중화학 단지로 육성될 만큼 천연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고구려, 청의 강력한 기병은 만주의 풍부한 철광석 덕택이란 이론도 있다. 심지어는 석유도 매장되어 있다. 1959년에 발견된 헤이룽장성 다칭시의 다칭유전이 개발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발해만과 라오허 일대를 중심으로 유전이 개발되어 있다.
동물은 한반도에 서식하는 생물의 90%와 비슷하며 10종에서 9종이 한반도와 같은 종류이다. 호랑이나 표범, 반달곰과 불곰등 포식 동물이 서식하며 늑대도 서식한다. 사슴이나 인삼 등 약용 생물이 살아가고 있다.
식물상 또한 한국 토착 식물의 80% 이상이 만주 지역에서도 서식하며 어류 역시 상당수 일치 한다. 나머지 20%는 한국에서 희귀하거나 멸종위기 판정을 받은 월귤 같은 고산식물들이다. 특히 내만주 최북단 모허는 중국 유일의 야생 블루베리 산지이다.
기후
만주의 위도는 북위 39~57°의 중~고위도로 서유럽과 비슷한 위도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에 시베리아 기단이 직통으로 불어오는 지역이라 강한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겨울이 길고 매우 춥다. 북만주 지역으로 가면 겨울 최저 기온이 -50℃까지 떨어지는 곳도 있다. 봄과 가을은 빠르게 지나가고 여름은 북만주 지역은 선선하나 랴오닝성 일대는 대한민국, 일본처럼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을 받으므로 경악스럽게 덥다. 특히 차오양시의 경우 여름 낮 최고 기온이 35℃를 넘기는 경우가 잦으며 최고 43.3℃를 기록한 적도 있다. 즉 -50℃와 40℃를 극과 극으로 오고가는 기후라고 보면 된다.
각 지역별로 어느 정도 기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이 겨울에 매우 추운 편이다. 만주에서 가장 따뜻한 다롄시(1월 평균 기온 -3.6℃)조차 냉대기후를 띄고 있다. 그리고 선양시(-10.4℃)만 해도 남한의 어느 지역보다도 추워진다.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시(-18.1℃)는 북한 개마고원이나 시베리아 남부와 비슷한 겨울 기온을 보이고, 북만주 끄트머리의 다싱안링지구 모허(漠河) 일대는 1월 평균 기온이 무려 -30.9℃에 달한다. 그러나 냉대동계건조기후라서 눈은 잘 오지 않으며 매우 건조하다. 북만주와 외만주 중 하바롭스크 지방, 아무르스카야는 최한월 평균 기온이 -30℃ 정도이다.
이곳도 고위도 특성상 한반도나 중국 중심부에 비해 여름에는 해가 일찍 떠서 늦게 지고 겨울에는 반대로 늦게 뜨고 일찍 진다.
주요 도시들
- 선양(심양, 瀋陽)은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로서,만주어에서는 버드나무 울타리를 둘렀다는 뜻의 묵던(Mukden, 한자로는 봉천(奉天)으로 음차.)이라고 불리웠고 서양에서도 그렇게 부른다. 지금의 선양은 혼하(渾河)의 옛 이름인 심수(瀋水)에서 딴 이름이다. 강의 북쪽 땅을 양(陽), 남쪽 땅을 음(陰)이라하는데 심수의 북쪽에 있으므로 심수지양(瀋水之陽), 줄여서 심양 곧 선양이라 부르는 것이다.
- 창춘(장춘, 長春)은 먼 옛날에는 부여의 중심지였고,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수도였던 도시로 당시에는 신징(신경, 新京, 신쿄)이라고 불렸고, 만주국 수립 후에는 일본 관동군의 중심지였다. 국공내전 당시에는 린뱌오의 인민해방군 동북 야전군이 포위하여 수십만의 시민을 아사시킨 현장이기도 하다. 만주 지구의 거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철도 교통의 요충지이며, 중국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이다.
- 하얼빈(哈爾濱)은 이름부터가 만주어 '하르빈(Harbin)'에서 유래한 도시로 북방색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 도시는 러시아 제국이 헤이룽장성을 점유하고 있을 때, 서양의 기술자들과 중국의 노동자들을 불러들여서 만든 도시이다. 당대에는 동양의 파리라고 홍보를 하기도 하는 등 상당히 화젯거리였다. 때문에 한때는 중국인, 한국인, 만주족,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독일인, 영국인, 유대인 등 수많은 민족이 살아가는 다국적 도시이기도 했으나 1945~47년 이후로는 중국인이 절대 다수다. 유명한 의거인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경이 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당지역에서 지역 주민들과 포로들을 상대로 끔찍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가 여기에 있었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겨울엔 얼음이 한번 얼면 거의 안 녹을 정도로 매우 춥다. 하지만 이런 기후를 살려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얼음 축제를 열기도 한다.
- 랴오둥 반도 끄트머리의 항구도시로, 과거 고구려의 비사성이 있던 곳이다. 청나라 북양함대의 군항으로 개발되었다가 19세기 말 러시아가 삼국간섭으로 조차하면서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군항이 되었다. 러일전쟁 당시에는 러일 양국 간에 끔찍한 공방전과 대학살이 벌어졌고, 이후에는 한동안 관동주란 일본 조차지의 수도로 기능했다.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곳도 이곳 다롄에 속하는 뤼순 형무소다. 현재는 중화학 공업으로 유명하며 여전히 발해만의 주요 항구이다. 중국 인민해방군 북해함대의 근거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의 중심이자 극동 연방관구의 중심인 항구도시이다. 도시명은 러시아어로 동방을 정복한다는 뜻이다. 러시아의 동방 무역 창구이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여타 지역으로 이어진다. 1860년대 러시아가 2차 아편 전쟁의 중재를 서 준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얻어내면서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핵심 주둔지이기도 했으나 현재는 군사도시 기능보다는 관광도시로 유명하다.
-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의 중심 도시. 극동 개척자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이름에서 따왔다. 1858년 건설된, 극동 러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 한때는 극동 연방관구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했다.
민족
유목 및 수렵채집민족
-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이끌던, 반농반목을 하던 건주 여진 일파의 직계 후손이다. 현재 천만명 가량이 남아 있으며 50% 가량이 랴오닝성에 거주한다. 하지만 한족에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분리된 생활을 유지했음에도, 현재는 대부분이 한화되어 중국인에 동화되어 있다. 본인들이 만주족이라는 사실은 자각하지만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크며, 민족 언어인 만주어는 사멸 직전인데다 주급 이상의 민족 자치 지역을 보유하지도 않고 있다. 민족 종교는 만주 신화를 기반으로 한 샤머니즘, 그리고 티베트 불교이다.
- 퉁구스어족의 시버어를 사용하는 수렵민족이다. 랴오닝성과 지린성의 및헤이룽장성의 남부에 거주한다. 또 청나라 시기에 서북 국경 방위를 위해 강제 이주된 일파가 저 서쪽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차부차얼 시보자치현에도 존재한다고. 스스로를 선비족의 후예로 여긴다. 이들의 언어인 시버어는 만주어의 한 방언이기 때문에, 현대 들어서는 사멸 위기인 만주어를 재구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민족 종교는 샤머니즘과 티베트 불교이다.
- 퉁구스어족의 나나이어를 사용하는 수렵채집 민족이다. 중국에서는 허저족으로, 러시아에서는 나나이족이라 부른다. 흑수말갈의 후예로, 청나라의 발흥 당시 북동 국경을 방위하는 임무를 받아 헤이룽장성에 남았던 야인 여진 부족의 직계 후손이다. 주로 어업과 채집을 통해 생활하는데 어업이 주된 산업이이며. 물고기 껍질로 의복을 만들어 입는다. 러시아 제국의 외만주 점령 당시 일부가 러시아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현재는 중러 양국에 분할되어 있다. 민족 종교는 애니미즘 신앙이다.
- 퉁구스어족의 어웡키어를 사용하는 민족. 주로 싱안링 산맥 및 내몽골자치구 북동부 일대에 거주한다. 지역별로 생활양식이 유목부터 수렵채집까지 다양하다. 세 갈래로 나뉘는데, 쑤어룬 어웡키족은 전체 어웡키족의 80%를 차지하며 유목에 종사한다. 퉁구스 어웡키족은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령 시베리아에서 넘어온 이들이며, 순록 유목에 종사한다. 마지막으로 야쿠트 어웡키족은 시베리아에서 넘어온 야쿠트인들의 후손으로 가장 원시적인 수렵채집 및 순록 유목에 종사한다. 샤머니즘과 티베트 불교 또는 러시아 정교를 믿는다.
- 퉁구스어족의 오로첸어를 사용하는 민족. 주로 싱안링 산맥에 거주한다. 대실위의 후손들로, 명나라 시기에는 야인 여진의 일파로 취급되었으며 청나라에서는 색륜부의 일파로 분류하며 만주 팔기에 소속시켰다. 삼림에서 수렵을 통해 생활하며, 종교는 주로 토속 샤머니즘을 믿는다.
- 퉁구스어족의 민족.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의 해안 지역과 사할린, 일본 홋카이도에 거주한다. 매우 극소수로 이미 민족어인 오로치어는 사멸했으며, 주로 러시아어를 쓴다. 일본에서는 아예 소수민족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 퉁구스어족의 민족.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과 연해주에 사는 수렵채집 민족으로, 나나이족과 생활양식이 매우 비슷하다.
- 퉁구스어족의 수렵채집민족. 러시아 사할린, 일본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극소수 거주한다. 나나이족과 매우 유사하다.
- 하바롭스크 지방에 거주하는 퉁구스어족의 수렵채집민족이다. 나나이, 윌타족과 매우 유사하다.
- 몽골인민공화국, 그리고 내몽골자치구를 기반으로 거주하는 유목 민족이다. 만주와 내몽골의 몽골인들은 몽골어족에 속하는 몽골어를 사용하지만,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몽골국의 동족과는 달리 여전히 몽골 문자를 사용해 표기한다. 만주 지역에는 서부의 3시 1맹 지역과 랴오닝성에 주로 거주한다.
- 몽골어족의 다우르어를 사용하는 민족. 주로 내몽골자치구의 북부와헤이룽장성에 넓게 퍼져 거주한다. 청나라 강희제 시기 국경 방위를 위해 이주된 일부 집단의 후손들은 저 서쪽 신장위구르자치구의 국경지대에도 거주한다. 거란족의 후예로 강력히 추정된다. 요나라의 멸망 이후 대다수는 중앙아시아와 이란으로 향해 서요를 세우거나 중국에 남아 몽골과 한족에 동화되었지만, 대하씨 부족으로 대표되는 일부는 북방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했다. 그들의 후손이 바로 다우르족이다. 근세에는 만주 팔기에 소속되었지만 북방 국경 방위를 위해 남았고, 그 때문에 독립된 민족집단으로 남을 수 있었다. 수렵과 유목을 하지만, 친척뻘인 몽골인과는 달리 농사 또한 잘 짓는다. 종교로는 주로 토속 샤머니즘 신앙을 믿는다.
- 홋카이도 북부 및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민족으로, 고립어인 아이누어를 사용한다. 고아시아 인종으로 분류되며 크게 홋카이도 아이누, 쿠릴 아이누, 사할린 아이누로 나뉜다. 일본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민족이지만 바다를 통해 외만주 지역의 수렵 민족들과도 교류하며 문화적,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지녔었다. 퉁구스계 말갈족 해양민들의 일파가 전래한 오호츠크 문화가 특히 큰 영향을 끼쳤다. 홋카이도 아이누는 농경을 일부 하였으나 대다수는 수렵채집으로 생활하였는데, 특히 어업과 해달 사냥이 주된 생활 양식이었다. 아이누 신화로 대표되는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을 믿는다.
- 고립어인 니브흐어를 사용하는 수렵채집 민족으로, 북사할린과 외만주의 아무르강 하류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아이누와 직접적으로 부대끼며 영향을 주고받았던 민족이다. 중국 동북과 러시아 극동의 이웃 퉁구스인들과 매우 유사한 생활상을 보이며, 주로 어업에 종사한다. 러시아와 일본의 사할린 지배 과정에서 수가 격감하였다.
한족
한족은 내만주, 즉 동북 3성과 3시 1맹 지역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해당 지역들의 인구 수를 합치면 9000만 명을 상회한다. 유교와 국가 무신론의 영향을 받아 지배적인 종교는 없으나, 그래도 불교는 여전히 교세가 꽤 되는 편이다.
전국시대 연나라가 최초로 요동지역까지 진출하며 고조선 세력을 밀어냈고, 한나라때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만주 남부와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한다. 위진 남북조 시기에는 북방 유목 민족 세력을 거쳐 다시 고구려로 대표되는 한민족 세력에게 돌아갔다.
이후에는 천 년 가까이 요하 동쪽의 만주에서는 직접적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일시적으로 요하 동쪽의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지배권을 획득했지만, 곧바로 발해에게 대부분의 영역을 빼앗겼다. 요서 정도만이 수당시대 때 확실한 지배권으로 통치되었으며, 당 멸망 이후 등장한 송나라는 요서를 넘어 회북 일부까지 잃고 방위에도 급급해진다. 본격적으로 한족이 만주에 세력을 재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이다. 명나라는 요서와 요동 일대의 군사적 요충지를 통해 유목 제국을 견제하고 북방 국경을 안정화 시켰으나 그 이북은 여전히 전부 퉁구스 및 몽골계 민족들과 일부의 한민족 유민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청나라 건국 이후에도, 만주는 청 황실에서 보낸 일부 한족 이주민을 제외하면 청조 내내 봉금 지역이었다.
하지만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 증가와 약해지는 행정력은 점차 봉금령의 붕괴를 일으켜 틈관동이라 불리는 이주 행렬을 만들었고, 19세기 말 봉금령이 완전히 풀리며 만주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된다. 이때부터 중원(그중에서도 산둥성 일대의) 한족들이 대대적으로 이주해 현재는 만주의 주된 민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만주의 풍부한 천연자원과 이를 기반으로 한 2차 산업, 넓은 처녀지에서 행해지는 농업은 수많은 한족 이주민들을 유입시켰다. 당시 만주를 기반으로 한 봉천군벌은 동3성 병공창 등의 기반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을 정도였다. 만주사변으로 만주가 일본의 지배하에 잠시 넘어가기도 했으나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영역으로 돌아왔고, 중국 공산당은 이 지역의 소수민족들과 일본의 유산들을 기반으로 세력을 재편, 원정 온 국민당군을 섬멸하고 천하를 쥐었다. 그 이후로도 내만주는 확고한 중국 세력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현재는 원주민들의 유출 및 한족으로의 동화로 인해 현재 내만주에서 한족 비율은 90%가 넘는다. 대표적으로 만주의 중심인 헤이룽장성의 한족 비율은 96%이며, 일부 지역에서 소수민족 자치지역이 있으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한족이 절대 다수이다.
한민족
한민족은 중국과 러시아 일대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및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사할린섬을 중심으로 거주한다.
만주 및 한반도 북부를 기원으로 하며, 만주 역사상 최초의 국가라고 추정되는 고조선을 세웠다.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이탈과 흡수가 반복된 요동 지역 정도를 제외하면 북부여, 동부여, 북옥저, 고구려, 두막루, 발해 등의 한민족 국가가 내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직간접적으로 천년 가까이 지배했다. 특히 고구려는 요동의 패권을 쥐고 중원과 대등하게 겨룬 첫 번째 국가라는 정치적인 상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0세기경부터 유목민족들의 대대적인 발흥과 함께 발해가 멸망하며 한국계 정치집단의 지배적인 헤게모니는 무너졌고, 발해부흥운동마저 실패한 이후 한민족의 정치체는 한반도로 그 영역이 축소되었다. 고려 말 제1차 요동정벌로 일시적인 진출에 성공하였으나,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던 당대 국내외 정세의 한계로 인해 고려와 조선의 만주 진출은 결국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그 외, 발해부흥운동 시기 유민부터 시작해 고려 시대 난민 등이 후손을 이루며, 여전히 적지 않은 수가 [[만주에서 터전을 이뤘다. 그러다 조선 후기 시기에는 청나라의 등장으로 인한 만주의 성지화와 북방민족에 대한 조선의 우위가 붕괴된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이 조선 전기 때보다는 약해진다.
근대에 다가서는 19세기경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난민들이 본격적인 만주 재이주를 시작한다. 주로 농업이나 장사를 위해 중국령 만주나 러시아령 연해주로 향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이러한 이민은 1945년 일본의 패망 때까지 이어져왔다. 또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과 경술국치 이후 다수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이런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 정착촌들을 중심으로 재편하여 항일 운동을 이어나갔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지청천의 한국독립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그리고 이용과 김홍일의 대한의용군 등.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들은 이들에게 숙식과 정보, 그리고 인력을 제공했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일본을 등에 업은 장쭤린의 봉천군벌이 탄압을 벌이고, 일본이 서서히 손을 뻗으면서 내만주의 독립운동은 점차 위축되었다. 연해주도 마찬가지로, 1922년경에는 러시아 내전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소련 극동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다. 거기다 1930년대 만주사변이 벌어지면서 주요 항일 세력들은 중국 관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로 다시 이동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한인들은 지역마다 분화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역사에 스며들어 크고 작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중국 조선족
중국령 내만주에 있는 이들은 조선족이라 불리는데, 구한말부터 농업이민으로 넘어갔거나 항일운동을 위해 넘어간 조선인들 중 1945년 해방 이후로도 귀국하지 않고 남은 이들의 후손이다. 주로 평안도 및 함경도 출신이지만 헤이룽장성 무단장시의 조선족들은 한반도 남부의 경상도 출신이 다수이다. 이들이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 국가와 분리된 한국계 '중국인'이 된 것은 1949년 국공내전 종결 이후이며, 그 이전의 만주 조선인들은 한반도 내의 본토 조선인들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다.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큰 영향을 끼친 소수민족이기도 하다. 원래 옌안의 중국 공산당에는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분포해 있었다. 한편, 만주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던 만주 조선인들은 1945년 이후 한반도로 자신들을 돌려보내려 하는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역시 중국 공산당에 대거 가담하였다. 이들은 만주 전역에서 국민당군의 진격을 저지, 전황을 반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여세를 몰아 난징을 함락하고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후에도 이후 다수의 조선인 부대들은 연안파를 구성하여 북한 정부 수립에도 참여했고, 한국전쟁에서도 침략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연안파는 정통성이 부족하던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으로 일인 독재 체제를 세우자, 고려인 계통의 소련파와 마찬가지로 숙청되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 내부에서 나름 잘 사는 민족에 속한다. 북한의 쇄국으로 인해 교류가 줄어드는 반면에 한국과의 교류는 증가하는 추세이다.
지린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 및 장백조선족자치현에 다수가 모여 살고 있으며 그 외 도시에도 많이 거주한다. 이들의 중국 조선어는 동북 방언(함경도)과 서북 방언(평안도)의 영향력이 강하다. 현대 들어서는 한국과의 교류 증가로 인해 대한민국 표준어의 영향력도 강해지고 있다.
러시아 고려인
러시아 지역에 있는 이들은 고려인이라 불린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령 극동으로 이주했던 이들을 기원으로 한다. 러시아의 연해주 개발 당시, 이들은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대한제국과의 무역을 이끌면서 연해주에 생필품을 공급하여, 러시아 제국의 극동 지배를 안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편으로는 이들 역시 한국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면서 레닌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고 백군을 일본이 지원하자, 이들 중 대다수는 소비에트 적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백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민족주의 세력은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살해당하거나 상하이로 떠나면서 와해되었다. 이후 1930년대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소련 극동이 일본의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자 스탈린은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에 따라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쫒겨났다. 이 때문에 현재 이들은 구 소련을 구성하던 여러 공화국들 전역에 분포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러시아 수도권에 특히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원 정착지였던 연해주 지역에 남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강제 이주 이후 소련에서는 중앙아시아 농업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만주 작전 이후 소련군정의 실무자로 대거 참여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도 소련파란 이름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여타 다른 파벌들처럼 8월 종파사건 당시 김일성에게 숙청당하고 말았다.
구소련 국가 무신론의 영향을 받아 이들 또한 민족적 종교는 없지만, 종교를 믿는다면 대부분 주로 러시아 정교를 믿는다. 언어는 함경도 동북 방언의 일파를 사용했지만 중심이 되는 민족 자치구역이 없었기에, 현대 들어서는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일부는 조상의 언어인 대한민국 표준어를 배우기도 한다.
사할린 한인
사할린섬에 있는 한인들은 고려인과는 좀 다른 사할린 한인이라 불린다. 이들은 1940년대에 일본 제국령 사할린에 노동자로 강제 징용되어 갔다가 1945년 일본이 철수하고 사할린이 소련에 넘어간 후에도 무국적으로 남겨진 이들을 기원으로 한다. 일본이 패전했기에 이들의 일본 국적은 말소되고 소련과 북한은 이들에게 북한 국적을 주려 했으나 사할린 한인들은 이를 거부했는데, 한반도 남부에서 넘어간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절대 다수는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이었지만 제주도 출신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소련과 적대 관계였던데다 소련은 남한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할린 한인들이 남한 국적을 딸 수도 없어서 무국적으로 남겨졌던 것이다. 이들의 이주 배경은 민단계 재일교포와 그 기원이 유사하기 때문에 일부 1세대 사할린 한인들은 창씨개명의 영향으로 일본식 이름을 썼던 경우도 있다.
종교는 주로 러시아 정교를 믿는 편이다. 언어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쓰이는 서남 방언 및 동남 방언의 일파를 사용하지만, 소련 시절의 영향으로 인해 표기는 북한 문화어 식으로 했다. 하지만 타 지역의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들어서는 대한민국 표준어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지고 있다. 2세 이후로는 러시아어를 주로 쓴다.
인도유럽어족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일부 벨라루스인. 이들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인 및 발트어족 또는 독일인들 또한 이주해왔다.
1600년대 러시아의 팽창기에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를 개척하며 진출해왔으나, 청과의 국경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후 이들은 만주에서 밀려나 스타노보이 산맥 이북 시베리아에 설립한 소규모 정착지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이들이 본격적으로 만주에 이주해오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가 청나라에게서 외만주를 점령한 이후이며 러시아는 부동항을 건설하고 극동에서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다수의 도시를 건설했다. 특히 니콜라이 2세 치세에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의 이주 장려 정책이 추진되면서 다수의 러시아인 및 우크라이나인들이 극동으로 이주해왔다.
주 거주지는 프리모리예 지방과 하바롭스크 지방 등 러시아령 극동이지만, 한때는 만주 전역을 러시아 제국이 세력권으로 삼으면서 남만주 랴오둥 성에 러시아령 다롄이란 이름의 군사적 식민지를 세운 적도 있다. 또한 하얼빈 등 중국 내만주 지역의 개발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러시아 내전에서 패배한 백군 세력이 중화민국령 내만주로 탈출해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세운 적도 있다. 다만 현재 중국령 동북 3성 및 3시 1맹에서 이들 잔존 백군 세력의 자취를 알아보기는 힘든데,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에게 탄압당하고 만주 작전으로 쳐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대다수가 납치당하거나 해외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외만주의 러시아인의 비율은 90%을 넘어간다. 시베리아의 사하 공화국이나 추코트카 지역이 원주민 비율이 절반 이상인 것과 비교하면 러시아 극동에서 외만주 지역은 특히 러시아인이 많이 유입된 곳임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인
외만주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러시아인 및 우크라이나/벨라루스계 러시아인들이다. 내만주 지역 종족들이 한족을 중심으로 중국인 정체성에 동화되어 있다면, 외만주의 종족들은 러시아인에 동화되어 있다. 아무르 강 일대에는 17세기부터 진출했으며, 그 이남으로는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러시아의 동방 창구인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와 하바로프스크가 가장 핵심적인 지역들이다.
언어는 동슬라브어파의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민족 종교는 러시아 정교이다.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 당시 동원되었던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을 기원으로 한다. 본격적으로는 19세기 중반 외만주를 청나라에게서 할양받은 후 카자크 부대들이 국경 수비를 위해 정착하기 시작했고,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의 극동 이주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인 가구가 다수 이주하였다. 19세기 말이 되면 연해주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이는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계 분포 지역 중에서도 남부 연방관구나 카자흐스탄 접경지대를 제외하면 독보적으로 우크라이나인이 많은 곳이다. 때문에 이들은 한때 젤레나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다수가 러시아인에 동화되어 있다. 언어는 과거에는 우크라이나어를 입말로 써왔으나 현대에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민족 종교는 역시 러시아 정교이다.
벨라루스계 러시아인
표트르 스톨리핀의 시베리아 이주 지원 정책 이후 다수가 이주했다. 주로 아무르 주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언어는 과거에는 벨라루스어를 입말로 쓰기도 했으나 현대에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민족 종교는 러시아 정교이다.
폴란드인/폴란드계 러시아인
17세기 중반 볼히니아의 폴란드인 귀족이었던 니키포르 체르니고프스키가 총독을 살해하고 도주하여 아무르 강변에 세운 야크사라는 자그마한 국가를 기원으로 한다. 그가 이끄는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청나라의 맹공격을 받은 후 반쯤 버려진 정착지였던 알바진 요새를 점거하곤 주변의 퉁구스계 야인여진 부족들을 규합하여 독립 국가를 선포했다. 외교 언어는 폴란드어였다. 그러나 20년 후 청나라령으로 병합되었다. 이후 폴란드인들은 19세기에 다시 한 번 대대적으로 이주한다. 당시 폴란드는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세 제국에 분할되어 있었기에 탄압이나 강제 이주, 또는 취업을 이유로 세 국가의 각지에 정착하였다. 러시아의 영향권인 만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얼빈과 중동로 철도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데에는 폴란드인 기술자와 노동자들의 역할이 컸다. 또 독립운동과 반러 운동을 일으킨 폴란드인들도 다수 하얼빈에 모여들어 사회를 구성했다. 한 때 1만여 명에 달했던 하얼빈의 폴란드인 공동체는 불행히도 관동군의 731부대와 소련군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등등 사건을 거치며 입지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1937년에 소련과 만주국은 오직 양국 국적을 가진 국민만이 하얼빈 철도에서 일할 수 있다는 협정에 서명하는데 이 협정으로 인해 많은 폴란드인들이 철도청에서 쫓겨났고, 3년 후(1940년부로) 하얼빈 내 폴란드어 신문은 재정난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1947년 중화인민공화국은 하얼빈에 남아있던 폴란드인들을 모조리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
독일계 러시아인
러시아 내에 살던 독일인들, 그 중에서도 볼가 강 중류에 살던 볼가 독일인들이 주를 차지한다. 러시아 제국의 극동 개발과 함께 일부가 이주했다. 하얼빈에도 독일계 러시아인들을 위한 루터교회가 존재했을 정도다. 하얼빈 난강 기독교 교회는 원래 독일에서 온 루터교 이민자들을 위한 예배 장소였다고 한다. 러시아계 독일인들의 본격적인 이주는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가 벌어지면서부터였다. 농업을 업으로 삼던 볼가 독일인들은 농업 집단화에 반발하며 외만주의 중-러 국경으로 이주해 탈출하곤 했다. 다수는 재세례파의 일종인 메노나이트 신도들이었는데 또 일부는 루터교 신자들이기도 했다.
언어는 게르만어파의 독일어를 사용했으며, 종교는 루터파 개신교를 주로 믿었지만 볼가 독일인 출신자들은 재세례파가 다수이다.
아슈케나짐 유대인
동유럽, 특히 구 폴란드-리투아니아령에 흩어져 살던 아슈케나짐 유대인들 중 러시아 제국 정부의 시베리아 개척 정책에 따라 극동으로 진출해 온 유럽인들 중에 섞여 있었던 이들을 뿌리로 한다. 하지만 보다 주된 기원은 1930년대 스탈린이 유대인 민족 자치구 설립 계획에 따라 이주해온 수만 명의 우크라이나/벨라루스/러시아 유대인들이다. 당시 소련 내의 모든 민족들은 민족적인 터전을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나라 없는 민족으로 배척받기로 유명한 유대인들의 민족 자치 지역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스탈린은 이 문제도 해결하고 겸사겸사 극동의 개발과 인구 부족 문제도 해결할 겸 유대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유대인 자치주를 설립했다. 동유럽에 자치주를 수립하지 않은 이유는, 이들의 원 거주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영역에는 민족 구성에 기반한 경제적 계급 격차로 인해 반유대주의가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농민들의 성장을 막기 위해 유대인과 독일인들을 불러들여 상인과 마름으로 일하게 했다. 폴란드가 망한 이후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이런 상황을 방치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아슈케나짐 유대인들과 주변 농민들의 사이는 매우 험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유대인의 민족국가인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1970년대 소련에서 유대인의 이민을 허락한 것을 계기로 외만주에 있는 유대인 자치주에 거주하던 다수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하기 시작했다. 현재도 유대인 자치주는 여전히 남아 있으나 유대인 인구는 거의 없으며, 이 때문에 폐지 논의가 활발하다.
유대인의 특성 상 폴란드계 러시아인, 독일계 러시아인과도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 언어는 독일어의 일파라고 할 수 있는 게르만어파의 이디시어를 입말 및 서면 언어로 사용했다. 유대인 자치주는 이디시어가 공용어로 지정된 세계 유일의 지역이다. 그 외 그들은 러시아어나 독일어, 폴란드어 등 출신 지역 민족들의 언어 또한 구사할 줄 알았다. 한편, 종교 제례 언어는 여타 유대 분파들과 마찬가지로 셈어파의 히브리어였으며 민족 종교는 당연하게도 유대교였다.
일본인
일본은 19세기부터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 사할린 및 만주 지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태양신의 후예를 자처하며 단 한번도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일본인들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대포 몇 방으로 손쉽게 막부와 각 번들을 굴복시키는 모습을 보곤 역사상 처음으로 외세에 대한 안보 위협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특히 영토를 맞대고 슬금슬금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이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자 일본은 제국의 방위를 위해 만주, 적어도 한반도만큼은 일본으로 편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안보적 불안감은 일본 제국주의의 시발점이 되어, 여타 식민제국들과 달리 경제적인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만주, 시베리아를 잇달아 침략하는 정신적인 동력원으로 작용했다. 이때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 그 유명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권선-이익선 개념이었고, 그 대상은 한반도와 오키나와, 대만, 사할린, 그리고 남만주였다.
'만주'라는 지역을 최초로 규정지은 것도 일본인들이었다. 당시 떠오르던 비교언어학적 언어연구들은 각 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중요한 방식으로 각광받았으나 이는 곧 제국주의 침략에 이용되고는 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인도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가장 발전되고 고대 아리아인의 순수성을 가장 잘 보존한 자신들이 뒤처진 친척인 인도를 계몽, 발전시켜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인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일본 동양사학자들은 이러한 영국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조선과 만주에 적용했고, 독립된 지역으로써의 의미가 부족하던 동북 지역을 일본의 영향권으로 편입하기 위해 만선사관을 도입했다. 이로 인해 새로 규정된 '만주' 지역은 중국 및 유럽과 분리된 우랄알타이어족의 고유 영역이었으며, 알타이어족의 맹주이자 중국과 유럽의 장점을 모두 흡수한 선도문명인 일본이 이끌어 계몽하고 개발해야 하는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내선일체, 오족협화, 만주국 등이 이러한 논리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이르면 서남태평양 일대에도 이러한 시각이 확장되어 남양은 서구가 아니라 새로운 선도문명 일본이 주도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영역으로 선포되었다. 물론 이러한 허울 좋은 간판을 걸어놓은 만주 지배의 실상은 여느 식민제국들이 그렇듯 한국인 및 퉁구스계 민족들의 독립된 권리를 전부 부정하고 일본 제국의 독점적인 발전에 강제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일본 제국령 만주와 조선에서 '형제' 민족들의 권리는 없었고, 큰형님 일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며 그것은 항상 옳았다.
여하튼, 이러한 서구 세력에 대한 안보적 불안감에서 시작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대한제국 강제 합병으로 한반도와 남만주 및 남사할린에 영향력을 구축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편 1920년대에는 러시아의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로 출병하여 백군을 후원하며 러시아령 외만주를 일시적으로 점령하였으나, 명분과 역량 부족 및 소비에트 러시아의 반격으로 인해 철수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내만주 봉천군벌의 근거지를 전부 흡수하곤 식민지인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착했다. 이 당시에는 만주 일대에 가장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구축했으며, 만주를 중원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로 삼아 대대적인 산업화를 추진했다. 이 시절 일본인들이 건설한 대규모의 산업시설은 동아시아 최대 규모였고, 훗날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에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동남 연해가 개발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산업지대였다.
하지만 1945년 8월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인해 만주국과 북한 지역의 일본 세력은 일주일만에 축출되어 버렸다. 그리고 곧 일본이 일본 제국이 항복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중원의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탈출해야만 했다. 이들을 히키아게샤라 한다. 한편 관동군의 군인들은 소련군에 잡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서 10년간 노역에 시달리고 나서야 본국 땅을 밟을 수 있었고, 일부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에 자의반 타의반 가담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이 남긴 군사, 산업 인프라를 장악하기 위해 공산당과 국민당의 만주를 향한 경주가 펼쳐지면서 2차 국공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현재는 만주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극히 일부 남은 이들도 출신을 숨기고 살아가거나 동화된 상태이다. 민족 종교는 대승불교와 신토, 그 중에서도 일본 제국 시절에는 국가신토였으며 민족 언어는 일본어족의 일본어였다.
참고자료
- 〈만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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