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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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크레(스페인어: Sucre, 케추아어: Chuqichaka, 아이마라어: Sukri, 과라니어: Sucre, 문화어: 쑤끄레)는 볼리비아의 공식 사법 수도이자 추키사카주의 주도로 대법원(스페인어: Corte Suprema de Justicia)이 있다. 인구는 약 25만 명이다. 1991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1]
목차
개요
수크레는 볼리비아의 중남부 안데스산맥의 고산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실질적인 수도인 라파스로부터 남동쪽으로 420㎞ 정도 떨어져 있다. 볼리비아 행정부는 1898년에 라파스로 이전하였다.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부터 남아메리카의 중요한 도시였고, 볼리비아 독립 운동의 중심지였다. 콜럼버스 이전의 이름은 추키사카(Chuquisaca)였고, 스페인 제국 시절에는 라 플라타(La Plata)라고 불렸다. 스페인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추키사카는 잉카 제국에 대한 자체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잉카 포로에 대한 몸값을 지불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1538년 11월 30일, 누에바 톨레도(Ciudad de la Plata de la Nueva Toledo)라는 이름으로 페드로 앙주레스 데 캄포 레돈도 후작에 의해 설립되었다. 1559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현재 파라과이, 페루 남동부, 칠레와 아르헨티나 북부, 볼리비아의 대부분을 아우르는 지역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라플라타에 카르카스 미술관을 설립했다. 1776년까지는 페루 부왕령의 일부였으나, 1776년에 신설된 라플라타 부왕령으로 이관되었다. 1601년에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레콜레타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1609년에 대주교 관구가 프란치스코회에 세워졌다. 1624년에 세인트 프란시스 자비에르 대학이 설립되었다. 식민지 시대 스페인의 도시답게 도시 중심부의 좁은 거리는 격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시의 거대한 주택과 수많은 수도원과 교회의 건축에 구현된 안달루시아 문화를 반영한다. 수크레는 볼리비아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소재지로 남아 있으며, 전통적인 복장을 한 성직자들이 흔히 볼 수 있다. 식민지 역사에서 수크레의 온대 기후는 스페인 왕족들과 포토시 출신의 은 무역에 종사하는 부유한 가문들에 의해 선호되었다. 수크레대학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 중 하나이다. 수크레는 국가 사법 기능, 지역 문화와 역사, 유명한 건축 도시 직물, 초콜릿, 직물, 콘크리트와 같은 지역 산업에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수크레는 서반구에서 가장 잘 보존된 히스패닉 식민지와 공화주의 역사적 도시 중심지 중 하나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건축적 유산과 차르카스 지역의 천년 역사는 수크레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시는 18세기와 19세기의 건물들로 잘 보존된 도심지 때문에 매년 수천 명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인다. 추루켈라와 시카시카의 쌍둥이 언덕 기슭에 자리잡은 수크레는 식민지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수많은 작은 마을들의 관문이며,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매년 3월에 열리는 다채로운 "푸즐레이" 축제의 고향인 타라부코이다.[2][3]
지리 및 기후
수크레는 볼리비아 국토의 중남부에 위치하며, 라파스로부터 남동쪽으로 420㎞ 정도 떨어져 있다. 안데스산맥의 해발 고도 약 2,810m의 고산 분지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행정구역상 추키사카주(Departamento Chuquisaca)에 속한다.
고산 지대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고산기후(H)에 속한다. 고산 기후는 낮에는 햇빛이 강하고 밤에는 지표 복사로 열 손실이 활발하기 때문에 기온의 일교차가 크며, 비슷한 위도의 저지대에 비해 평균 기온이 낮은 편이다. 수크레의 경우, 남위 19도대의 저위도 지역이지만 최한월(7월) 평균 기온 13℃, 최난월(1월) 평균 기온 17℃로 서늘하며, 연중 고른 기온 분포를 보인다. 연 강수량은 약 660㎜이다. 무더운 기후는 아니지만 고산 지대인 까닭에 자외선이 강할 뿐 아니라 낮은 기압으로 고산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4]
역사
식민지 시대
수크레는 잉카 제국 시대에는 차르카스(Charcas)라고 불린 지역에 속하였다. 1538년 에스파냐인들이 오늘날 수크레의 위치에 시우다드데라플라타데라누에바톨레도(Ciudad de la Plata de la Nueva Toledo, ‘누에바톨레도의 은의 도시’라는 뜻)라는 도시를 세우면서 수크레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때 붙은 긴 이름 대신 라플라타(La Plata)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렸다(이하 라플라타).
1559년에는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가 라플라타 시내에 차르카스 왕실사법행정원(Audiencia de Charcas)을 설치함으로써 에스파냐의 남아메리카 식민지 통치의 거점 도시가 되었다. 1609년에 대교구가 설치되고, 1624년에는 신대륙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래된 대학인 산프란시스코사비에르(San Francisco Xavier)대학교가 개교하는 등, 수크레는 식민지 시대부터 남아메리카의 손꼽히는 대도시로 발전해 갔다. 이처럼 수크레가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근에 자리한 광산 도시 포토시(Potosi)가 있다. 에스파냐 식민지 시절 전 세계 은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산출하던 포토시 은광에서 나온 막대한 규모의 부는 수크레로도 흘러들었고, 행정 및 경제 활동의 중심지였던 수크레는 광산 도시 포토시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번영을 구가하였다.
볼리비아의 독립
19세기 초 남아메리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1797~1815)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이 본격화되었고, 볼리비아에서도 1809~1825년에 걸쳐 독립운동이 진행되었다. 1809년 5월 25일 수크레에서 추키사카(Chuquisaca) 반란이라고 불리는 봉기가 일어났으며, 이는 라파스에서 일어난 봉기와 더불어 볼리비아의 독립, 나아가 남아메리카 독립의 신호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 봉기의 시작을 알렸던 산프란시스코 성당의 종은 ‘독립의 종소리’를 울린 종으로 여겨져, 오늘날에도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하지만 이때부터 1810년대 중엽까지 이어진 반란은 에스파냐 식민지 군대에 의해 진압당하고 말았다. 이어서 아르헨티나의 마누엘 벨그라노(Manuel Belgrano, 1770~1820)가 지휘하는 군대가 수크레를 비롯한 볼리비아 전역에 진격했으나, 1811년 11월 1일 페루 부왕령(Virreinato del Perú) 소속의 에스파냐 군대에 참패하고 말았다.
이후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1783~1830)의 주도로 독립운동이 이루어졌고, 1824년 12월 9일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장군이 아야쿠초(Ayacucho)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1825년 2월 9일 볼리비아는 독립에 성공하였다. 독립 운동이 벌어질 당시 수크레시는 추키사카(Chuquisac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825년 8월 추키사카 의회는 볼리비아의 독립을 정식으로 선언하면서 볼리바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임시 수도였던 추키사카는 1839년 정식 수도가 되었으며, 1840년 수크레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도시의 명칭을 지금의 이름인 수크레로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네 개의 이름을 가진 도시(La Ciudad de los Cuatro Nombres)’가 탄생하였다.
19세기 초에 포토시에 매장된 은이 고갈되고 은 산업이 쇠퇴하면서 수크레의 경제 또한 쇠퇴하였다. 결국 1898년에 수크레에 있던 볼리비아의 입법부와 행정부가 라파스로 이전함으로써 실질적인 수도의 기능은 라파스로 옮겨졌다. 대통령궁도 라파스에 있어 수크레는 그야말로 ‘명목상의 수도’가 되었지만, 오늘날에도 볼리비아 헌법은 수크레를 수도로 명시하고 있어 법적인 수도는 여전히 수크레이다. 또한 대법원을 비롯한 사법부는 여전히 수크레에 위치하고 있어 사법 기능이라는 측면에서는 수도의 기능을 하고 있다.
1991년에는 시 전체가 수크레 역사 도시(Historic City of Sucre)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으로 등록(참조 번호 566)되었다.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에 세워진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남아메리카의 건축사 및 생활상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고 있으며, 수크레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5]
경제
수크레는 식민지 시대에는 막대한 경제적 부의 중심지였다. 인근 포토시(Potosí)의 은광은 당시 세계 최대의 은광으로 명성을 떨치며 막대한 양의 은을 산출해 냈고, 수크레에 설치된 차르카스 왕실사법행정원은 이 포토시의 은광을 감독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즉,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의 수크레는 포토시의 은광을 관리하며 막대한 경제적 이익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포토시에 매장된 은이 고갈되고 은광이 폐광되면서 수크레의 경제도 쇠퇴하였다. 오늘날에는 볼리비아 경제, 산업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은 라파스와 산타크루스로 넘어간 상태이다. 하지만 헌법상의 수도라는 지위를 가진 데다 추키사카주의 주도이기도 한 만큼, 볼리비아에서 상업 활동이 활발하며 교통이 발달한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더불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관광 산업도 발달하고 있다.[6]
교통
수크레의 주요 교통으로는 버스와 택시, 철도가 있다. 수크레 시내에는 여러 시내버스 노선이 운행되고 있고, 시외버스를 통해 다른 지역을 오갈 수 있다. 포토시와는 철도로 이어지고 있다. 국제공항으로는 볼리비아 여성 독립 투사의 이름을 딴 후아나아수르두이데파디야 국제공항(Aeropuerto Internacional Juana Asurduy de Padilla)이 있다. 하지만 수크레와 라파스 모두 해발 3,000와 4,000m나 되는 고산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항공기 운항에 불리하기 때문에 산타크루스의 비루비루 국제공항(Aeropuerto Internacional Viru Viru)이 볼리비아의 허브 공항으로 이용되고 있다. 볼리비아와 한국 간에는 항공 직항 노선이 개설되어 있지 않아서, 수크레로 가기 위해서는 경유 노선을 이용해야 한다.
수크레 역사 도시
수크레는 1991년 시 전체가 '수크레 역사 도시'(Historic City of Sucre)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시내 중심가 일대에는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인 16~17세기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수크레 대성당, 산라자로 성당, 산프란시스코 성당 등 예술적∙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유럽의 건축 양식과 남아메리카 전통 건축 기법이 잘 어우러진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 주기도 한다. 한편 식민지 시대에 세워진 건물의 상당수는 외벽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 독특한 경관을 이루어, 수크레에게 하얀 도시(La Ciudad Blanca)라는 별명을 안겨주고 있다.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5월 25일 광장
시 중심부에 위치한 중앙 광장으로, 볼리비아 독립 운동의 기폭제가 된 1809년 5월 25일을 기념하여 5월 25일 광장(Plaza 25 de Mayo)이라고 명명되었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광장이라는 위치적, 장소적 특성 때문에 수크레의 대표적인 랜드 마크가 되었다. 더욱이 수크레 시내의 유서 깊은 건물과 유적의 상당수가 이 광장을 중심으로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광장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관광이나 문화 유적 답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장소이다.
자유의 집
중앙 광장에 있는 자유의 집(Casa de la Libertad)은 1825년에 볼리바르가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한 장소여서 볼리비아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매우 높은 건물이다. 1621년에 세워졌으며, 애초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수크레 대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은 수크레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중요성이 높은 문화유산으로, 1559년에 착공하여 1712년에 완공되었다. 오랜 공사 기간을 반영하듯, 바로크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어우러진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 성당의 상당 부분은 귀금속이나 보석류로 장식되어 있다. 200년 이상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시계탑 또한 명물이다. 성당 내부에는 종교 박물관인 성당박물관(Museo Catedralicio)과 미술관이 있다.
산라자로 성당
산라자로 성당(Iglesia de San Lazaro)은 1538년 착공하여 1553년 개관한 성당으로, 볼리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중반에 착공한 성당들은 유럽식 건축 양식과 남아메리카 건축 기법을 절충한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지은 것이 많으며, 이와 같은 양식을 간직한 성당 건축물은 수크레가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산펠리페네리 성당
산펠리페네리 성당(Oratorio de San Felipe Neri)은 1795년 착공하여 1799년 완공하였으며, 이 성당의 종은 볼리비아 독립 운동의 시발점이 된 1809년의 반란을 상징하는 종으로 알려져 있다. 시내에서도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이 성당의 종탑은 수크레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명소이다.[7]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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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수크레〉, 《위키백과》
- 〈수크레(도시)〉, 《나무위키》
- 〈수크레〉, 《요다위키》
- 〈수크레(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수크레의 위치와 자연환경〉, 《네이버 지식백과》
- 〈수크레의 경제〉, 《네이버 지식백과》
- 〈수크레 역사 도시〉,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남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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