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덕방
복덕방(福德房)은 가옥이나 토지 같은 부동산을 매매하는 일이나 임대차를 중개하여 주는 곳을 말한다.
개요
복덕방이란 부동산중개업소(공인중개사사무소)를 부르는 세간의 말이다. 조선시대 부동산의 거래를 담당하던 자의 업무장소, 복과 덕을 주는 곳이라 하여 복덕방이라 하였다. 조선조 중엽 이후(18세기 초)에 이르러 집을 중개하는 것을 가거간이라 하고 그 중개업자를 가거간꾼이라 했다한다. 이때 중개를 생기복덕(生起福德)이라 하고, 복을 중개하여 복과 덕이 일어난다는 뜻에서 그들이 일하는 곳을 복덕방이라 하였다 한다. 이러한 복을 중개하는 사람, 즉 흥정을 붙이는 사람을 '집주름' 혹은 '가쾌'(家僧)라 하였는데, 이들은 집뿐 아니라 토지를 비롯한 가옥의 매매·임차 및 전당 등의 중개에 종사하였다 한다.
원래 복덕방영업은 서울에서 발생하여 존속하던 것으로 거간꾼이 하는 일종의 자유업이었다. 조선조 말까지는 이 거간에 대한 제한이 없었으나, 개항 이후 한성에 외국인이 증가하고 지방으로부터 인구가 유입되면서 토지와 가옥의 매매가 급증하여 복덕방영업을 하는 집주름들이 무질서하게 늘었고 이를 규제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리하여 한성부는 1890년 5월 5일 객주거간규칙(客主居間規則)을 제정하여 가쾌를 통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개업을 최초로 제도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인허가제는 한일합방직후인 1910년 9월 폐지되고, 자유영업제로 전환되었다. 광복 후 복덕방은 6·25동란까지 서울·부산·대구 등 대도시에 편재되어 있었으며, 농촌이나 소도시는 리(里)·동장이나 사법서사(법무사)가 사실상 복덕방을 대행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도 복덕방은 노인층이 주류였다고 한다.[1]
역사
복덕방은 토지나 건물 등 부동산의 매매·대차·교환을 위한 중개나 대리 사무를 해주는 곳이다. 복덕방의 기원은 고려시대 이후의 객주(客主)와 거간(居間)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객주란 원래 객상주인(客商主人)이라 하며 거래를 알선하는 일종의 위탁매매업자를 뜻한다. 객주 가운데 타인 간의 거래를 성립시키는 일을 거간으로 칭하였고, 거간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거간중매군(居間仲買群)이라 하였다. 거간은 취급하는 상품에 따라 포목거간(布木居間)·양사거간(洋絲居間)·우거간(牛居間)·금전거간(金錢居間)·가거간(家居間)·가쾌(家儈) 등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조선 중기 이후부터 본격화된 가거간과 가쾌는 복덕방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가거간은 집과 토지를 비롯한 부동산의 매매·임차 및 전당 등을 주로 중개하였고, 이에 종사하는 사람을 집주름이라 불렀다. 1900년대 초에 많이 사용된 '가쾌'는 대도시, 특히 서울과 평양 등에서 집주름을 칭할 때 쓰였던 말로, 이 가쾌들이 모여 사무실을 차린 것이 이른바 '복덕방'이었다. 복덕방은 일종의 거간업으로, 조선 말기만 하더라도 100여 개의 복덕방과 500여 명의 가쾌가 있었다. 그 뒤 서구문물이 들어오고 상업이 성행하게 되자 주거지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풍수지리와 택일의 관습 때문에 이사를 할 때에는 집주름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복덕방을 경영하는 집주름들이 난립하게 되자 1890년에는 이를 규제하기 위한 「객주거간규칙(客主居間規則)」이 제정되었다. 이 규칙은 당시 한성부(漢城府)에 한하여 거간 허가제도로 실시되다가 1910년 이후 자유화되었다. 초기 복덕방은 밑을 여러 갈래로 가른 누런 삼베를 간판으로 사용하였다. 누런 삼베는 수수해서 복(福)이 잘 붙고 감이 질겨 오래 갈 수 있다는 뜻이며, 밑을 여러 갈래로 갈라 놓은 것은 출입하기 편하다는 뜻에서 한 것이다.
초기 복덕방은 대체로 노령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모여 소일로 하였다. 손님이 찾아오면 거간노릇을 해주고 보답으로 작은 선물을 받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매도금액에 약간의 웃돈을 붙여 매매를 성립시킨 뒤 그 차액을 수수료로 얻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구전(口錢)의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중개수수료는 구문(口文)·내구(內口)·외구(外口)·원구(原口)·과구(過口)라고도 불리웠다.
8·15광복 이후 복덕방은 서울·부산·대구 등 주로 대도시에 편재되어 있었으며, 중소도시나 농촌에서는 주로 사법대서사나 이장이 복덕방 업무를 보았다. 당시는 신규주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기존주택의 매매 및 전세·월세, 점포의 임대차, 임야 매매 등의 중개를 주로 하였다. 1960년대 초부터 전국 각지에서 경제개발계획이 강력히 추진되었는데 특히 서울은 각종 도시개발계획에 의하여 다양한 용도의 택지와 주택 수요가 늘어남으로써 복덕방 역할이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1961년 제정된 「소개영업법」과 「소개영업시행령」에 의하여, 복덕방은 관할관청에 신고만 하면 영업을 할 수 있었다. 대체로 1960년대 전반에는 서울지역의 택지 및 근교의 토지가 주거래 대상이었고,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대도시와 근교의 논밭·임야, 그리고 단독주택과 공업단지 후보지가 대종을 이루었다. 비록 당시 복덕방 대부분이 영세하였지만, 부동산 유통에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 주도의 각종 건설계획에 힘입어 복덕방도 대규모화하였다. 젊은 대학 출신자들이 대거 영입되어 부동산에 관한 법률지식과 신속한 정보망을 갖추고 빠른 기동력과 막대한 자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복덕방은 주식회사형태로 발전되어갔다. 점차 법률지식이나 기동력이 부족한 노인층의 복덕방은 대형거래에서 소외된 채, 월세나 전세 또는 소규모 주택거래만을 중개하게 되었다.
점차 복덕방 간판은 '○○개발'·'○○개발공사' 등 다양하게 바뀌기 시작하였고, 중개 대상도 주택과 아파트뿐 아니라 전국의 상가·공장·빌딩·임야·레저시설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같은 복덕방의 확대·발전과 동시에 복덕방은 투기조장, 가격조작, 과다경쟁 및 불건전한 거래 유발과 선의의 피해자 발생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지속적으로 유발하였다. 특히 1970년대 후반 고도성장 여파로 유래 없는 부동산 가격 급등현상이 일어났는데, 이는 곧바로 부동산투기 붐으로 이어졌고 중개행위과정에서 각종 불순사례가 속출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른바 '복부인'과 함께 복덕방은 하나의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사회의 지탄을 받아온 복덕방 영업을 규제할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1984년 4월「부동산중개업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부동산 거래질서를 확립하여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부동산중개업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높이며, 부동산중개업자의 자질향상을 도모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기존의 신고된 복덕방의 권익도 최대한 보호하면서, 공인중개사의 자격제와 중개업의 허가제를 동시에 도입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법의 시행과 함께 「소개영업법」은 폐지되었다. 「부동산중개업법」에 의한 중개업자는 공인중개사 2인 이상이 설립하는 법인,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허가관청(시·군·구)에서 중개업 허가를 받은 공인중개사, 결격사유가 없는 복덕방이 기득권을 인정받은 중개업자 등 세 종류로 구분된다.
앞의 두 업자는 전국을 대상으로 영업할 수 있으나, 후자는 영업소가 있는 시·군·구의 관할구역 안에 있는 중개대상물에 한하여 중개행위를 할 수 있다. 중개업자는 허가증·중개수수료 요율표 등을 보기 쉬운 곳에 게시하여야 하며 부동산중개 업무처리부, 부동산의 확인·설명서 사본, 거래계약서 사본 등의 장부를 비치하여야 한다. 영업소 상호는 복덕방이라는 말 대신 '○○부동산중개회사', '공인중개사○○사무소', '○○부동산중개인영업소' 등으로 표기하도록 규정되었다. 영업소는 원칙적으로 중개업에 전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2005년 7월 29일「부동산중개업법」이 전부개정되어 부동산거래신고제가 신설 도입되면서 법의 제명도 「공인중개사의 업무 및 부동산거래신고에 관한 법률」로 변경되었다.
1985년부터 매년 공인중개사 시험이 실시되고 있는데, 2010년 말 기준 전국 공인중개사 자격증 보유자는 32만 명을 웃돈다. 국토해양부의 전국 중개업자 등록 현황에 따르면, 2011년 실제 활동하는 전국 부동산중개업자는 8만 4,083명이다. 한때 복과 덕을 나누며 부동산을 중개했던 복덕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부동산중개업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부동산 유통시장 개방에 따라 부동산업계는 법인화, 종합대형화 추세로 부동산거래정보망과 함께 전국적인 체인 형성이 나타나고, 정보기술 발전에 힘입어 최근에는 '스피드뱅크', '부동산 114', '닥터아파트' 등 온라인을 통한 중개·거래도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 복덕방은 부동산 중개를 주로 하였으나, 현재의 공인중개사무소, 부동산 컨설팅업체는 중개뿐 아니라 부동산 컨설팅, 분양, 관리, 개발, 신탁 등 전문적인 재산 상담 기능까지 하고 있다.[2]
복덕방의 해석
복(福)은 사람끼리 주고 받거나 빼앗거나 훔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신(神)만이 내려 줄 수 있는 것이다. 천신(天神)이 내려 주면 천복(天福)이고 지신(地神)이 받쳐 주면 지복(地福)이다. 어떤 사람은 타고 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한참 살다가 받기도 한다. 로또 당첨이 '쟁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우리나라 인구는 많이 줄었을 터이다. 반면 덕(德)이란 사람이 베푸는 것이다. 내 중학교 때 한문 선생님은 이 글자를 "두인변에 십사일심"으로 가르치셨다. 열 네명을 한 마음으로 묶을 수 있는 '어떤 것'이 곧 덕(德)이라는 것이다. 얼핏 요즘 유달리 강조되는 리더십이나 카리스마, 친화력 등이 이와 비슷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한 '어떤 것'이 덕(德)이다. 논어(論語)에는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라는 문구가 있다. 보통 덕이 있는 자에게는 사람이 많이 따른다는 뜻으로 의역하는데, 한걸음 더 나아가면 덕은 이웃 사이에서 쌓고, 이웃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우리 옛말에 팔백금으로 집을 사고 천금으로 이웃을 산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복덕방(福德房)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지복(地福)과 인덕(隣德)을 알선해 주는 업소이다. 그래서 복덕방 주인은 풍수쟁이를 겸해야 했고, 동네 사정도 꿰뚫어야 했다. 어느 집에 살던 누가 언제 입신양명해서 떠났는지, 혹은 어느 집에서 멀쩡히 잘 살다 급살 맞은 사람이 나왔는지, 어느 집 주인이 성질이 고약해서 늘상 이웃에게 폐를 끼치는지, 어느 집천정에서 물이 새고 어느 집에서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지 등등을 다 알아야만 비로소 온전한 복덕방 주인의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공인중개사' 보다 '복덕방 주인'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능력이 훨씬 더 많았던 셈이다. 평당 가격으로 완벽하게 환산되는 오늘날의 아파트도 집주인이 망해 나갔다면 값이 깎이기는 하겠지만, 그걸 일부러 알리는 '공인중개사'는 거의 없고, 그걸 아는 '공인중개사'도 드물다.[3]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복덕방〉, 《네이버 국어사전》
- 〈복덕방〉, 《부동산용어사전》
- 〈복덕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우용, 〈서울이야기 31 복덕방〉, 《한국역사연구회》, 2007-08-24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