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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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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

관서지방(關西地方)이란 철령관의 서쪽 지방을 뜻하는 말로서, 평안도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1] 관서 또는 관서지역이라고도 한다.

개요

관서지방은 평안남도평안북도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관서지방의 동쪽은 함경남도에 접하고, 남쪽은 대동강(大同江)을 경계로 황해도에 접하며, 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을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서조선만을 끼고서 황해가 위치해 있다. 관서지방의 극서는 평안북도 신의주에 속해 있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극서인 마안도 서단이다. 극남은 평안남도 남포시 남단이며, 극북은 자강도 중강군에 있는 중강진 북단이다. 평안도는 전반적으로 산세가 험한 편이지만 평양 부근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는 평야 지대가 있기 때문에 밭에서 난 재료와 해물, 산채를 주된 재료로 사용한 요리가 발달했다. 겨울이 긴 이 지역의 기후적 특성상 길고 추운 겨울에 먹는 음식들이 푸짐하다. 김치는 동치미가 일반적이고 각종 요리의 재료로 사용한다. [2]

명칭 유래

관서지방은 고려 때 관내도(關內道)라고 불리던 서울·경기 지방의 서쪽지방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는 고려 시대에 설치된 철령관이라는 관문의 서쪽지방이라는 데에서 관서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철령관함경도로부터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어서 한강유역을 지키는 한편 변방에 대한 통행을 제한하던 곳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동쪽을 관동, 서쪽을 관서, 북쪽을 관북이라 하였다. 관서지방의 위치로 보면, 관내도의 서쪽이라는 의미보다 철령관의 서쪽이라는 의미가 더 타당하다.[3]

역사

고조선

평안도는 고조선(古朝鮮)의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로서, 철기문화가 발달했으며 대동강 양안에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어, 고대 한반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였는지는 불분명하나, 대체적으로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으로 추정한다.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나라가 이곳에 한사군을 설치했으나, 토착민의 반발이 심해 낙랑군을 제외한 군현은 모두 폐지되거나 요동 지역으로 물러갔다. 그 이후의 낙랑군 또한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무역 기관으로서의 역할만 담당하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대

고구려 미천왕이 312년에 낙랑군을 공격하여 영역을 점령하면서 평안도 일대는 고구려의 직속 영토가 되었다. 이후 광개토왕이 남정(南征)을 할 때 전초 기지가 되었으며, 장수왕 15년(427년)에 왕이 국도(國都)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면서, 추후 241년간 고구려의 심장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평양 일대는 668년에 나당(羅唐)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가 무너지면서 도시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통치하는 기구인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세우게 되었고, 후에 나당전쟁의 지휘 기구가 된다. 그러나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가 패배하게 되면서, 안동도호부는 요동성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이 지역은 무주(無主)의 공백 지역이 된다. 698년에 발해(渤海)가 건국되면서, 평안도 지역도 차츰 발해에 속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발해의 5경 중의 하나인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의 행정 구역에 포괄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가 쇠퇴하자 평양 일대는 다시 무주지가 되었으나, 태조가 북진정책으로 인해 평양 근교는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중세

태조는 평양과 그 일대 지역을 성역화(聖域化) 하였으며, 평양을 고려 3경 중의 하나인 서경(西京)으로 삼음으로써 황도로서의 기능이 부활하게 되었다. 성종 11년(995년)에 고려를 10도로 구획하면서 서경과 교외 지역을 관서도(關西道)로 정했다. 나중에 5도 양계 중의 하나인 북계(北界)가 되었으며, 숙종 7년(1102년)에 서북면(西北面)으로 개편되었다. 1269년(원종 10년) 서북면 병마사의 기관(記官)인 최탄(崔坦)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1270년(원종 11년) 쿠빌라이 칸은 자비령을 경계를 삼아 그 이북의 영토를 모두 원나라에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1290년 원나라는 고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여 이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를 요동(遼東)으로 옮겼다.

근세

평안도는 조선(朝鮮) 개국 21년 뒤인 태종 14년(1413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름은 평양의 '평'자와 안주의 '안'의 글자가 합쳐저서 만들어졌다. 세종 대(世宗代)에는 4군 6진 중에 4군이 설치되어 압록강을 온전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세종 23년(1440년)에는 4군을 무창군으로 통폐합하고, 세종 26년에는 우예군이 신설되어 평안도에 속하게 되었다. 세 조대에 이르러 무창군과 우예군이 폐지되었으나, 정조대에 무창진이 설치되어 변경을 다시 개척하게 되었다.

근현대

1895년에 을미개혁 중의 하나인 23부제가 시행됨에 따라서 평안도는 북동부가 강계부(江界府)에, 북서부는 의주부(義州府), 남부는 평양 부(平壤府)에 속하게 되었으나, 1896년에 있었던 강계부와 의주부는 평안북도로, 평양부는 평안남도로 확정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직후에서도 지속되었다. 광복 이후 38도 선 이북에서 조만식을 중추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평남 건국준비위원회(平南建準委)를 세우자 평안남북도(平安南北道)가 그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의 군정이 시작되면서 한반도 적색화(赤色化)의 중심 지역이 되었다.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의 이북 지역은 모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점거 아래에 있게 되었으며, 평양은 북한의 핵심 도시로 육성되었고, 북한의 최대 도시가 되었다. 한편, 평안남북 도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평안북도의 서부(西部)는 평안북도로 이름을 유지하고, 동부(東部)는 자강도(慈江道)가 되었으며 도청 소재지는 강계(江界)이다.[2]

자연환경

동쪽으로는 낭림산맥, 남쪽으로는 대동강과 언진산맥(彦眞山脈)이 경계를 이룬다. 관북 지방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낭림산맥은 800∼1,500m의 높이를 이루며, 맹부산(猛扶山)·소백산(小白山) 등 높이 2,000m 이상의 봉우리가 솟아 있다. 관서지방은 대체로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안부(鞍部)에 가릉령(可陵嶺)·아득령(牙得嶺)·검산령(劒山嶺) 등이 있어 관북지방과 관서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 역할을 한다. 낭림산맥의 서쪽에 남서 방향으로 강남산맥·적유령산맥·묘향산맥·언진산맥이 뻗어 있으며, 그 사이로 압록강·청천강·대동강이 흘러 서해안에 대규모의 충적평야를 발달시켰다. 이러한 하천들은 수심이 깊어 내륙 지방으로의 수상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기후는 대륙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고 토지가 저평(低平) 하여 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아, 겨울에는 몹시 춥고 여름에는 더운 대륙성기후이다. 특히, 쾌청일수·일조 일수·증발량이 많고 강수량이 적은 서해안의 대동강 하류에 있는 광량만에는 염전이 발달되어 있다. 또한, 관서 지방은 서쪽에는 평야, 동쪽에는 산지가 분포하여 잡곡 농업이 이루어지고, 무연탄·금·철 등의 지하자원을 비롯하여 조기와 새우 등의 수산자원, 그리고 수력자원도 풍부한 편이다. 평안북도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금광산이었던 운산 광산(雲山鑛山)이 개발되었으며, 대동강변의 송림에는 대규모 철광산지가 있었다. 평안도는 우리나라에서 무연탄의 최대 산지였다.[3]

형성 및 변천

관서 지방은 개방적 지형과 대륙이 접해 있어 외세 침입을 자주 받아 관서지방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한대(漢代)에는 낙랑과 대방이 있었다. 삼국 시대에 들어와서는 고구려의 남하와 더불어 외세는 물러갔으나 그것은 일시적이었고, 통일신라 때에는 그 세력이 패강(浿江)주 01) 이남에까지 미쳤다. 북진정책을 내건 고려 때에는 패강 이북의 땅을 수복하고 그곳에 서경(西京, 현재의 평양)을 둠으로써 고구려 시대 통치중심지의 기능을 부활시켰다. 그리하여 995년(고려, 성종 14) 국토를 10도로 편성할 때에 서경이 관할하는 서북 변경의 땅을 패서도(浿西道)라고 하였다. 그 뒤 북계(北界)라고 개칭하고 동계와 함께 양계로 삼았다가 1102년(고려, 숙종 7)에는 서북면(西北面)이라고 칭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계승되고 있다. 평안도라는 이름은 관서지방의 중심도시였던 평양과 안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조선 태종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통치중심지를 평양으로 삼았다. 1896년(건양 1)에 13도의 편성 과정에서 청천강을 경계로 평안도가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로 분할됨으로써 평양의 통치권은 평안남도에 국한되었다. 한편 1952년에는 평안북도에 속하였던 자성·강계 등을 중심으로 자강도(慈江道)가 신설되었다. 평양은 북한의 통치 중심지로서 1946년에 특별시가 되었으며, 현재는 평양직할시이다.[3]

현황

문화적 특징으로는, 중국 대륙에 대한 개방적인 지형으로 외세 침입을 받기도 하였지만, 서구 사상이 일찍 유입되는 이점도 있었다. 즉, 중국을 통하여 실학사상과 기독교가 우리나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관서지방의 선천·정주 등지가 중심이 되었다. 언어생활도 평안남북도에 걸쳐서 고유한 방언권을 형성하고 있다. 가옥 구조도 방언권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즉, 북서 및 관서형으로 통용되는 이 지방의 가옥 구조는 부엌과 결합된 온돌방을 병렬시키고, 그 앞에 난간을 배치하는 것이 특색이다. 관광지로는 관서팔경이 있는데 만포의 세검정(洗劍亭), 의주의 통군정(統軍亭), 선천의 동림폭(東林瀑), 영변의 약산동대(藥山東臺), 안주의 백상루(百祥樓), 성천의 강선루(降仙樓), 평양의 연광정(練光亭), 강동의 인풍루(仁風樓) 등이 그것이다. 주요 도시로는 신의주·평양·남포·사리원·송림(松林)·마동(馬洞) 등이 있다. 2009년 기준으로 평안남도에는 6개 시 19개군에 31개 노동자구가 있으며, 평안북도에는 3개 시 22개 군에 31개 노동자구가 설치되어 있고, 자강도에는 3개 시 15개 군에 23개의 노동자구가 설치되어 있다. 자강도는 인구규모가 양강도 다음으로 작은 도이다. 평양에는 4개 군 19개 구역에 10개의 노동자구가 있었으나, 2011년에 대동강 남쪽의 3개 군과 1개 구역을 황해북도에 이속시킴으로써 면적은 1,300여㎢에 인구는 26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3]

지도

동영상

각주

  1. 관서〉, 《네이버 국어사전》
  2. 2.0 2.1 관서〉, 《위키백과》
  3. 3.0 3.1 3.2 3.3 관서지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 관서〉, 《네이버 국어사전》
  • 관서〉, 《위키백과》
  • 관서지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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