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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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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공장

섬유업(纖維業) 또는 섬유산업(纖維産業, textile industry)은 섬유를 제조하고 판매하거나 그것을 가공하여 의류 따위의 제품을 생산하는 사업을 말한다.

언제부터 직접적으로 섬유가 사용되고 연구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고고학상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섬유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10,000년 전 신석기 시대에 사용한 섬유제품으로 추정되는 마직물이다. 5,000년 전의 면직물이 인도에서, 4,000년 전의 아마직물이 이집트에서, 4,500년 전의 견직물이 중국에서 발견된 사실을 미루어 볼때 섬유를 이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10,000년 이전이라고 추정된다. 섬유를 이용하여 직물을 만드는 기술이 많은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지만 방적, 제직의 기본원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세기 중반 인간이 섬유를 합성한 일은 섬유산업 측면에서 볼때 매우 혁명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섬유산업은 섬유원료, 섬유원사, 원단, 염색·가공, 제품제조, 유통으로 이어지는 생산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재의 1/3을 해외에서 수수입, 가공해 완제품을 만들고, 완제품의 2/3를 해외로 수출하는 수출주도형 산업이다.

개요[편집]

섬유산업은 각종 섬유를 생산하거나, 섬유를 원료로 쓰는 가공품을 생산하는 관련산업이다. ··· 등의 천연섬유, 레이온·아세테이트 등의 인조섬유, 석탄·석유·물·공기 등으로 합성된 나일론·폴리에스터·아크릴 등의 합성섬유 등을 가공대상으로 한다.

섬유 가공기술은 인류 역사와 더불어 오래되었으며, 간단한 도구를 이용하는 수공업 형태로 생산되었다. 근대 섬유산업은 이들의 모든 공정을 기계체계를 이용한 생산으로 전환시켰다. 18세기 중엽부터 영국 산업혁명의 핵심이었던 섬유산업의 기계화과정은 1733년 영국인 J. 케이의 금속바디(metal reed)의 발명으로 시작되었으며, 계속해서 증대하는 실의 수요는 1764년 J. 하그리브스의 방적기(紡績機: Jenny機)의 개발을 가져왔다. 그 후 동력기관(J. 와트의 증기기관)을 이용한 S. 크럼프턴의 뮬방적기(mule 紡績機)의 출현에 따라 방적공장은 공장제공업으로 되었다. 뮬방적기에 의한 실생산의 발전으로 직포(織布) 부문의 기술개발이 촉진되어, 1785년 E. 카트라이트 역직기(力織機)가 탄생하기에 이르러 방사공정(紡絲工程)이 기계화되었다. 같은 해에는 합성염료의 개발과 더불어 롤러 날염기가 출현함에 따라 여러 공정의 기계화가 완성되어 그 후 기업체계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섬유 중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실크에 대한 동경은 실크를 인공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불러일으켰으며,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19세기에 결실을 보게 되었다. 즉, 후에 레이온으로 불리게 된 인조견사(人造絹絲)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공업화되어 필라멘트형으로 생사(生絲)와 대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1921년경부터는 이것을 짧게 절단한 레이온 섬유의 출현으로 면이나 모(毛) 섬유 분야에도 진출하여, 가격이 싼 이점을 안고 독특한 상품 분야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러나 펄프를 원료로 하여 화학약품으로 재생된 레이온 섬유는 오염되기 쉽고, 물에 적셨을 때 강도가 저하되는 등 여러 결점을 지니고 있어서 더욱 강한 인조섬유의 출현이 기대되었다. 이 결과 합성섬유가 출현하였다.

최초의 합성섬유는 38년 미국 뒤퐁사(社)가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며 실크보다 아름다운 섬유'라고 발표한 나일론이다. 그 후 세계적으로 약 10여 종류의 새로운 합성섬유가 개발되었고, 생산성에 있어서는 이미 양모나 레이온을 능가하여 면섬유의 생산량과 대등한 위치에 달하는 정도로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

이와 같이 세계의 섬유산업은 19세기 말부터 각종 화학섬유의 출현에 따라 현저한 변화를 보였다. 섬유산업은 중화학공업에 비하여 특별히 고도의 기술이나 대량의 자본이 필요하지 않은 대신 노동집약적 산업이기 때문에, 후진국과 개발도상국에서는 저임금이 경쟁의 큰 무기로 되어 왔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정치적 독립을 이룬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경제개발을 위해 섬유산업을 육성하여 선진국으로부터 수입의존에서 자급자족으로 전환할 뿐만 아니라, 저임금으로 인한 낮은 생산비용과 관세 특혜를 이용하여 오히려 선진국으로 수출하는 체제를 이룩함으로써 선진국의 섬유산업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선진국의 섬유산업은 개발도상국을 향한 수출중심에서 자급 또는 다른 선진국을 향한 수출중심으로 그 체제가 전환됨과 동시에 종래의 천연섬유 중심에서 화학섬유와 혼방·교직물 등으로 제품을 다변화시키고, 의류용뿐 아니라 산업용으로서의 용도 확장에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섬유산업은 화학섬유공업·제사(製絲)공업·방적공업·연사(撚絲)공업·제편(製編)공업·염색가공공업·부직포(不織布)공업·카펫제조공업·레이스(lace)제조공업·제망업(製網業)·섬유잡품업(끈·리본 등의 생산)·봉제(縫製)공업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한국의 섬유산업[편집]

한국의 섬유산업은 1960~1970년대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경제력의 기반을 다질 수 있게 한 주역이다. 섬유산업의 업체 수는 2016년 기준 4만 7899개로 제조업 내 11.5%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고용인원은 약 30만 2000명으로 전체 제조업의 7.5%이다. 생산액은 약 41조 원으로 전체 제조업의 2.9%이며, 부가가치액은 약 16조 원이다. 섬유 기술 수준은 미국, 일본, EU 다음으로 4위에 올라 있으며, 생산기술도 고르게 발달되어 있다. 섬유류 수출은 세계 15위이다. 이를 소재와 의류로 나누어 보면 섬유 소재 수출은 세계 7위, 의류 수출은 세계 31위이다. 특히 스판덱스, 타이어 코드, 저융점 섬유(LMF) 등의 세계수출시장 점유율은 1위이다.

무역수지 측면에서는 1987년 단일 품목 중 가장 먼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 이후 2001년까지 매년 100억 달러 이상의 흑자를 기록한 최초의 산업이기도 하다. 2011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16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는 수출 효자 산업이다.

섬유산업의 근대화[편집]

가내수공업 탈피, 면방산업 중심의 근대산업화, 조방과 경방

대한민국 섬유산업이 근대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으로 볼 수 있다. 1917년 일본 기업인 조선방직공업(약칭 조선방직, 조방)이 부산에 설립되면서 한국의 섬유산업은 물레와 베틀을 이용해 실과 베를 짜던 가내수공업 형태에서 벗어나 근대산업적인 규모의 생산설비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방직은 일본 미쯔이(三井) 계열의 중외산업(주)과 우마꼬(馬越恭平), 야마모토(山本條太郞) 등이 자본금 500만 원을 출자하여 지금의 부산 자유시장 일대 13만 2000㎡(4만여평)에 세웠다. 1919년 1월부터는 방적추 1만 5200주와 직기 610대로 생산을 시작하였다. 조선방직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방직공장으로 기록된다.

이후 1919년 김성수에 의해 경성방직(京城紡織)㈜이 설립되었다. 경성방직㈜은 설립 이듬해인 1920년 3월 서울 영등포에 공장용지 5000평을 구입하고 본사 사옥 및 생산공장을 지었고, 1922년 3월 경성직뉴 고무공장을 신설하고 12월부터 별표 고무신을 판매하였다.

경성방직은 1926년 1월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한 후 태극성과 산삼이라는 이름의 광목을 생산·판매하였다. 이어 1928년 직기 104대, 1931년 직기 224대를 증설했고, 1933년에는 직기 224대를 증설해 총 672대 규모의 공장으로 성장하였다. 1936년에는 원료인 면사의 자급자족을 위해 방적기 2만 1600추를 신규로 도입했으며, 직기도 224대를 증설하였다. 1937년에는 방적기 4000추를 증설해 총 시설 방적기 2만 5600추, 직기 860대의 생산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경성방직은 우리 자본과 기술에 의해 설립, 운영된 최초의 민족기업으로서 해방 이후 한국 면방산업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해방~1950년대 면방산업 건설기[편집]

한국전쟁 딛고 면방직 성장, 정부 섬유산업 육성정책이 견인

1945년 해방은 섬유산업에도 전환기를 가져왔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섬유산업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면방 시설을 중심으로 내수산업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방직 시설은 방적추수(紡績錘數) 33만 7000추, 직기 90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945년 11월에는 일본 자본에 의해 경영됐던 조선방직 부산공장이 '조선방직관리위원회'에 이양되어 시운전을 하게 됐고, 12월에는 동양방적 인천공장이 '동양방적공사'로 조업을 재개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부의 주도로 면방직, 방모, 견직 등의 시설을 민간인이 운용하게 지원하였다. 그 결과 대전방직 대전공장, 대한방직 영등포공장, 고려방직 춘천공장,전주방직 전주공장이 새로 가동했으며, 해방 당시 일본인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대구방직대구공장'도 재건되었다.

그러나 차츰 자리를 잡아가던 중에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구·경남지역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모든 생산시설이 파괴되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방적설비는 한국전쟁 이전 낙동강 이북에 산재해 있던 시설 30만 6572추의 약 70%인 21만 7980추에 달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파괴된 면방직 시설을 복구하고, PL480에 의해 무상원면 등을 지원받고, 국내의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섬유생산력을 높여 나갔다. 1950년대 말에는 면정방기 47만 6632추, 면직기 1만 820대를 보유하게 되었고, 면사 생산 연 4만9321M/T 및 면직물 14만 5716SM이 생산되었다. 1950년대 말 우리나라는 천연섬유(면, 모, 견 등) 제품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57년 대구에 나일론 공장을 세우면서,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화학섬유인 나일론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당시는 면방직에 비해 화학섬유 공업시설 기반은 전무할 때였다.

1950년대 면방직 공업의 성장은 1952년 섬유공업부흥계획, 1953년 면방직5개년계획,1954년 직물류세 폐지, 1957년 면제품 수입 금지 등 정부의 섬유산업 육성정책 덕분이었다.

1960~1970년대 수출전략산업화 시기[편집]

화섬산업 본격화 정부 육성산업 선정,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 강점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섬유산업 수출 효자 부상

1960년대 수출지향적인 섬유산업은 수입대체와 급격한 수출증대를 이루면서 국민의 생활수준의 향상과 경제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1960년대 섬유산업의 가장 큰 이슈는 나일론사의 국산화와 아크릴의 수출이었다. 한국 나일론산업의 역사는 1957년 4월에 설립된 한국나이롱이 1959년부터 12.6톤/월의 나일론 스트레치사를 생산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한국나이롱의 나일론 스트레치사 생산은 단순히 원사를 수입해 가공하는 데에 불과하였다. 나일론사의 국산화는 1963년에 이루어진다. 1963년 8월 한국나이롱이 미국 컴텍스와 기술제휴를 통해 대구에 2.5톤/일 규모의 공장을 설립, 마침내 우리 기술로 나일론사 생산에 성공하였다.

한편, 정부는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국가경제를 되살리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한다. 이것은 전략산업을 엄선, 국가의 지원으로 적극 육성하는 정책으로 시멘트, 화섬, 전기, 비료, 제철, 정유공장이 육성 산업으로 선정되었다. 특히강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폈다.

나일론사의 성공과 함께 중소기업협동조합 산하 메리야스공업협회가 결성되면서 섬유산업, 특히 화섬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해외시장 개척이 시도됐다. 그 결과 1963년 초 아크릴 스웨터의 홍콩시장 수출이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4개월간 홍콩으로의 수출액은 1만2000파운드였다. 나일론으로 시작된 한국의 화섬산업은 1960년대 말 폴리에스터와 아크릴이 더해지면서 더욱 성장하면서 수출전략산업이 되었다. 한국에 폴리에스터 공장이 처음 세워진 것은 1968년이다. 1968년 3월 면방업체들이 공동투자한 대한화섬이 부산에서 6톤/일 규모의 단섬유(stable fiber) 생산설비를 가동하면서 한국 최초의 폴리에스터사가 생산되었다. 이어 1968년 3월에는 삼덕무역이, 1969년 2월에는 선경합섬이, 1969년 12월에는 삼양사가 잇달아 폴리스에스터 생산에 들어갔다. 한국나이롱 역시 폴리에스터 분야에 진출, 일본의 동양레이온의 기술을 도입해 1971년 3월에 구미에 폴리에스터(장섬유) 생산에 돌입하였다.

비슷한 시기 아크릴, 비스코스 레이온 등의 다른 화섬도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1964년에 설립된 한일합섬이 1968년 아크릴 섬유 생산에 들어갔고, 1967년에는 태광산업이 동양합섬을 설립해 아크릴 생산에 뛰어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1966년에는 흥한화학(후에 원진레이온으로 사명 변경)이 비스코스 레이온 인견사 공장을 가동하였다.

1960년대 화섬산업을 이끈 기업들을 정리하면 동양나이론, 한일합섬, 코오롱, 태광산업,고려합섬, 선경합섬, 삼양사 등으로, 이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장치산업으로서의 막대한 자본 확보, 적정단위 생산규모의 확립, 기술도입, 가격 안정 등의 난제를 극복해 나갔다.

나일론, 아크릴, 폴리에스테르 등 제3대 합성섬유의 생산이 가능해짐과 동시에,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급성장을 이룬 섬유산업은 197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수출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1973년 우리 기업들이 생산한 합성섬유의 생산량이 10만 톤대에 도달하였다. 이 해 섬유산업은 내수 43.6%, 수출 56.4%로 수출체제로 돌아섰다. 1970년대 한국은 홍콩, 대만과 함께 '의류 수출의 빅3'로 불렸다.

면방직 생산에서도 한국은 1979년 세계 10위의 생산국 대열에 들어서게 됐다. 1950년대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산업의 기반을 닦은 면방산업은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수출유망업종으로 중점 육성되었다. 1960년대를 마감하는 1969년 우리나라의 면방직 산업은 면정방기 85만 6000추, 면직기 9728대의 설비를 보유, 방적사 9만 5000M/T, 면직물 2억 372만 4000SM을 생산하였고, 면사 및 면직물의 수출실적은 1987만 6000달러에 이르렀다. 면방산업은 1970년대에 들어서도 성장일로를 달려 1979년에는 면정방기 307만 4000추, 면직기 2만 4000대를 보유하고 방적사 38만M/T, 면직물 6억 2003만 4000SM을 생산하였다. 설비와 생산에서 1970년대 10년 동안 3배 이상의 성장을 이룬 것이다. 수출은 9억8300만 달러로 50배의 성장을 기록하였다.

1980년대 산업구조 고도화 시기[편집]

기술개발 위주 발전, 노동집약 부문 공장 해외이전 추진, 산업용 섬유 등장

1980년대는 국내 산업계로서는 격동의 시기이다. 국내에서는 중화학 공업 우선 정책이 유지되고, 선진국들이 한국의 개발도상국 졸업론을 거론하면서 국내 기업 전반에 걸친 보호조치를 완화할 수밖에 없었으며,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도 있었다. 통상정책 또한 보호주의에서 시장개방과 무역자유화로 전환됨에 따라 1986년 개별산업의 지원정책을 하나로 묶은 「공업발전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산업별 합리화 조치와 함께 섬유산업의 생산구조 개편이 이루어졌다. 기술이 중시되는 염색, 가공, 디자인 분야 및 신소재·신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는 한편, 노동운동의 심화되면서 노동집약적인 부문(봉제 및 저가 대량생산 품목)의 생산시설 해외이전이 추진되었다. 또한, 편직·봉제·염색가공시설 등에 대한 합리화 자금 지원이 이루어졌고, 신기술·신소재 개발, 염색공단 폐수처리시설 확충, 패션·디자인 교육기자재 구입 등에도 자금이 지원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87년에는 단일품목으로는 국내 최초로 섬유산업이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1980년대 면방산업은 1970년대 1, 2차 세계석유파동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을 이어나갔다. 설비의 증가세는 둔화되었으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시설의 합리화, 생산성 향상에 주력해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1989년 면방산업의 규모를 살펴보면 면정방기 369만 3000추, 면직기 2만 6000대의 설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방적사 54만 6000M/T, 면직물 10억 7251만 2000SM을 생산하였다. 수출은 19억1300만 달러의 실적을 이룩해 면제품 생산의 전성기임을 입증했으며 섬유 수출 증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1970년대를 거치면서 산업의 기반을 다진 화섬산업은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섬유수출 산업의 주종목으로 자리 잡으면서 기술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신제품의 출시가 줄을 이었다. 1983년 화섬 생산량은 10년 전의 5배가 넘는 68만 3285톤에 달했으며, 그로부터 5년 후인 1988년에는 100만 톤을 넘겨 한국은 세계 5위의 화섬 생산국이 되었다. 특히, 폴리에스터사는 최대 화섬 생산국인 미국, 일본보다 많은 생산량을 기록해 대만에 이어 2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신기술 개발은 의류용 섬유와 산업용 섬유 부문이 함께 이루어졌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화섬 개발이었다. 신화섬이란 기존 폴리에스터와 나일론 등의 화섬에 각종 첨단가공기술을 접목하여 천연섬유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물성을 갖는 실크보다 기능이 앞서는 섬유를 만들어낸 것을 말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개발이 본격화된 신화섬으로는 복합사, 마이크로 화이버, 이수축혼섬사, 제전사 등 차별화 원사와 이를 사용한 각종 직물 등이 있다. 화섬의 첨단기술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용 섬유 기술 개발로는 1984년 효성이 국내 최초로 도전성 섬유를 개발, 1989년에는 나일론 66 중합설비를 사용해 카펫 용도의 나일론을 생산한 BCF(Bulkey Continuous Filament) 기술 등을 개발해 생활용, 산업용 섬유기술을 확립하였다. 1988년에는 태광산업에서 탄소섬유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1987년 충남방적에서도 '적외선 위장가공직물(赤外線 僞裝加工織物)' 개발이란 기술적 쾌거를 이루었다. 적외선 위장가공직물이란 적외선 감시 카메라로도 식별되지 않는 직물로, 특수부대원들의 군복을 만드는 소재이다. 1987년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이 적외선 위장가공직물을 생산할 기술이 없었다. 세계적으로도 미국, 프랑스, 이스라엘만이 생산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터라 우리 군에서는 미국에서 직물을 수입, 위장복을 만드는 실정이었는데, 충남방적기술연구소에서 이 소재 기술의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다.

충남방적기술연구소는 한국 최초, 유일의 섬유연구소였다. 당시 페퍼포그 생산업체인 삼영화학의 상무이사의 제안을 받아 기술 개발에 돌입, 6개월 만에 원천 기술을 개발해냈다. 이 기술의 개발로 100억 원이 넘는 수입 대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90년대 구조조정 시기[편집]

임금상승 및 경쟁과열, 선진국 대비 낮은 기술력 경쟁력 약화
면방 해외이전 가속화, 화섬 설비 증설, 밀라노 프로젝트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섬유산업은 1990년대 어려움에 봉착한다. 1980년대 후반에 광범위하게 전개된 파업과 그로 인한 급격한 임금상승, 공급과잉에 따른 과당경쟁, 그리고 선진국 대비 낮은 기술 경쟁력이 섬유산업 발전의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자국의 섬유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선진국들의 반덤핑 제소, 신흥공업국들의 가파른 성장세도 걸림돌이 되었다.

1997년의 IMF구제금융 사태는 섬유산업에도 일대 전기가 되었다. 일부 기업이 도산 내지 폐업, 워크아웃되었으나 확실한 기술과 제품 신뢰성을 가지고 있던 섬유기업들은 높아진 환율 덕분에 가격경쟁력이 호전되어 기업의 채산성이 확연히 좋아지면서 큰 흑자를 냈고, 이를 통해 IMF 외환위기 극복에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 들어 면방산업은 급격한 임금상승과 아시아 인접 국가들의 면방산업 육성으로 인한 가격경쟁력 약화, 일본, 이탈리아 등 섬유 선진국에 비한 품질과 상품개발력의 상대적 열세 등으로 어려움에 부딪쳤다.

면방적 설비는 1989년 면방적 24개사(방직협회 회원사 기준)가 368만 9000추를 보유하면서 충분한 공급체제를 갖추었다. 그중 충남방적은 58만 2000추의 대형화 설비를 갖추고있었다. 1989년을 정점으로 면방적은 설비는 감소세를 보였는데, 이는 노후설비의 폐기 및 해외이전 등 때문이었다. 1990년대를 지난 2001년 20개 면방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정방기는 207만 추로 집계돼 1989년 대비 44%나 감소된 것을 알 수 있다. 면방 설비 감소세의 가장 큰 원인은 해외이전의 가속화였다. 1990년대 초반 충남방적의 호치민 이전, 갑을의 스리랑카 및 우즈베키스탄 이전 등을 시작으로 면방 설비의 해외이전은 1990년대 전체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해외로 이전된 설비 현황을 살펴보면 정방기 118만 3166추, 직기 4579대의 시설이 11개사 22개 공장으로부터 8개국 19개 지역으로 이전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신화섬 개발은 1990년대를 화섬산업의 정점기로 만든다. 화섬업체의 증설은 물론 신규 업체의 업계 진출도 늘어났다. 1987년 설립된 한국합섬이 1991년 제1공장을 준공한 데 이어 1995년 하루 생산량 500톤의 제2공장을 준공, 생산에 들어가면서 국내 최대 규모의 화섬공장이 되었다. 태광산업도 1991년 3월 나일론 공장을 준공했으며, 코오롱은 1991년 11월 김천공장을, 효성은 1992년 구미공장을 준공하는 등 활발한 증설을 계속하였다. 또한 1994년 11월 대하합섬, 1996년 10월 금강화섬, 1998년 7월 성안합섬 등이 폴리에스터 생산에 참여하였다. 1990년대에는 폴리에스터 및 나일론 외에 스판덱스 공장도 건설되었다. 1979년 2월 태광산업 이래 1990년 5월 동국합섬과 1992년 2월 효성이 스판덱스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증설이 이루어지면서 화섬의 생산능력은 1999년 하루 생산량 8302톤을 기록, 절정을 맞았다. 주요 합섬 품목별로는 아크릴이 417톤/일, 나일론이 819톤/일, 폴리에스터 6976톤/일이었다.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를 겪던 시기 국내 섬유산업과 관련, 중요한 국책사업이 시행되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진행된 밀라노 프로젝트였다. 밀라노 프로젝트는 한국 섬유산업의 집산지인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변화된 경쟁적 환경에 대응하는 능력을 키우고, 섬유산업의 구조를 대량생산 체계에서 다품종 소량생산 생산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5년간 17개 단위사업에 중앙정부 3760억 원(54%), 지방정부 515억 원(7.5%), 민자 2615억 원 등 총 6800억 원이 투자되었다. 1999~2003년 진행된 밀라노 프로젝트는 1단계 사업에 해당하는데, 기술 인프라 구축을 위한 유관 연구소 확충 및 섬유 수요 증대를 위한 패션어패럴밸리 조성이 주요 사업이었다. 밀라노 프로젝트는 2000년대로 넘어가서도 계속되었는데, 1단계 사업을 통해 구축된 인프라를 활용해 제품력과 마케팅력을 높이기 위한 중소기업 기술개발 지원을 내용으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2단계 사업이 추진되었다.

2000년대 재도약기[편집]

주력업종 면방 → 화섬, 산업용 소재 생산 본격화, 면방 해외이전 주력

1990년대 구조조정기를 겪으며 가장 많이 지적된 문제는 한국 섬유산업이 지나치게 의류용에 치중해 있다는 점이었다. 2000년대 들어 섬유 쿼터제의 폐지가 본격화되면서 거대 쿼터보유국으로의 이점이 상실되어 의류를 중심으로 수출이 급감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섬유산업에는 비의류용 또는 산업용 섬유 기술 개발이라는 과제가 던져졌다. 기업들은 이 과제의 해결과 주력 제품의 고부가가치화를 위한 기술개발 및 브랜드 파워 강화를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00년대 섬유산업의 주력 업종은 면방에서 화섬으로 넘어가고 있으며, 화섬산업은 섬유산업의 재도약을 위해 기존 합성섬유의 차별화는 물론 신섬유 중심의 고부가가치 산업구조로 변신하고 있다.

2000년대에 이루어진 기술개발 성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간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던 신산업용 섬유 소재 기술의 개발이다. 코오롱은 파라계 아라미드섬유를 공업화해 '헤라크론'이라는 상품명으로 생산을 시작해 듀폰, 일본의 데이진에 이어 세계 세 번째 아라미드 섬유 생산업체가 되었고, 효성은 고강도 폴리비닐알콜 섬유 제조기술을 확보해 타이어코드 등에 응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동양제강은 자체 연구개발을 통해 초고강도 폴리에틸렌 섬유를 상업화하였다. 또한 나노섬유 개발사업도 본격화되었다. 나노테크닉스(현 엔티피아)는 나노섬유 방사 양산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미국 듀폰에 기술을 이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효성은 1990년대 말 개발을 완료한 스판덱스 섬유 '크레오라'의 생산성 향상과 품질개선에 지속적인 투자를 새 2001년 국내 섬유업체로는 처음으로 독자 기술로 중국에 해외공장을 설립하였다. 이어 2008년에는 터키와 베트남에도 공장을 설립, 세계시장 점유율 30%를 넘어섰다.

탄소섬유 개발 및 양산화도 본격화되었다. 10년 넘게 탄소섬유 생산을 중단했던 태광산업은 2007년 아크릴계 프리커서 개발에 성공하여 2011년 상업화 설비를 구축해 2012년 3월부터는 연간 3000톤의 프리커서, 연간 1500톤의 탄소섬유를 생산해 스포츠 분야, 건축자재 용도로 판매하였다. 효성도 2008년부터 본격적인 연구개발에 착수해 2013년 연간 2000톤 규모의 탄소섬유 생산설비를 구축하였으며, 고강도 탄소섬유와 고강도 중탄성 탄소섬유를 'TANSOME'이란 브랜드로 판매하고 있다.

의류용 소재에서는 폴리트리메틸렌테레프탈레이트(PTT) 섬유가 상품화되었다. 특히 PTT를 이용한 메모리 섬유 소재는 우리나라의 휴비스가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 국내 섬유산업의 주력이었던 면방산업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이는 급격한 임금상승, 인력 부족 그리고 시설의 노후화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국내 면방업계는 이런 애로를 해결하기 위해 설비의 해외이전에 주력하였다. 이에 따라 보유설비는 2007년 117만 7000추, 2009년 114만 1000추로 10년 전에 비해 250만 추가 감소되었다. 면방적 시설의 감소세는 201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최신 자동화를 위한 설비 투자의 지속으로 품질향상과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2016년 면방적 보유시설은 11개 방직협회 회원사가 101만 9800추를 갖고 있다. 대신 설비의 해외이전이 가속화되어 경방, 동일방직, 일신방직, 국일방직 등이 해외로 진출하여 적게는 2만 8800추, 많게는 7만 추까지 새로운 공장설비를 갖추고 본격 가동에 들어가고 있다

섬유산업의 국제경쟁력[편집]

한국 섬유산업은 글로벌 경기 위축과 국제경쟁력 약화에 따른 수출 부진 속에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내 섬유 생산은 2011년 47조 원에서 2019년 38조 원으로 연평균 2.7% 감소했으며, 수출도 2014년 161억 달러에서 2019년 130억 달러로 연평균 4.2% 감소한 데 이어 2020년 기준 112억 달러로 전년 대비 13.3% 감소하였다.

특히 독일, 일본 등과의 기술격차로 인해 고부가가치·차별화 제품 시장을 개척하지 못한 채 가격경쟁력 열세로 중국 등 개도국에 의해 세계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다. 세계시장 점유율은 2014년 2.0%에서 2020년 기준 1.6%로 0.4%포인트 하락하였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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