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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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안다(Luanda)는 앙골라의 수도이며 루안다주의 주도(州都)이다. 도시 자체 인구는 약 260만 명인데 범메트루 시가지를 포함한 루안다주의 모든 7개 관할구를 포함한 광역권은 약 10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메트로폴리스로 세계 23위, 아프리카 5위의 인구를 자랑한다.[1]
개요[편집]
루안다는 앙골라의 북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앙골라 최대의 도시이자 2번째로 번화한 항구이다. 루안다와 그 대도시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포르투갈어 사용 수도이자 브라질 이외의 루소포네 도시로 830만 명 이상의 주민(앙골라 인구의 3분의 1)이 거주하고 있다. 1575년 파울로 디아스 데 노바이스(Paulo Dias de Novais)가 브라질의 노예수출항으로 건설하였으며, 1627년부터 1975년 다시 독립하기까지 포르투갈 식민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가톨릭 대교구가 설치되어 있다. 로비토항(港)과 함께 앙골라의 중요한 무역항으로서 근대적인 부두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면화, 커피, 금강석, 철, 소금 등을 수출한다. 1955년 석유가 발견되어 루안다만 끝에 정유공장이 세워졌고 내륙으로 통하는 철도 노선이 600㎞ 이상 떨어진 말랑게까지 이어져 있다. 도시 교외로는 해안평야가 펼쳐져 있어 커피, 면화, 사탕수수, 야자유, 야자열매 등을 생산하며 목축도 이루어진다. 산업에는 가공 식품, 음료, 직물, 시멘트나 다른 건축 자재, 플라스틱 제품, 철물, 담배, 구두 생산이 포함된다. 루안다의 경제는 앙골라 국내에서 진행 중인 군사 충돌에 의해 아직까지 제자리걸음이다. 시내에서 약 4㎞ 떨어진 지점에 국제공항이 있다. 주민 대부분은 음분두족이며 독립 이후 이곳에 들어온 쿠바인도 많이 거주한다. 앙골라 대통령궁, 앙골라 의회, 국립루안다대학은 1962년에 세워졌고 앙골라 내 최고 대학인 아고스티뉴 네투 대학 등등 주요 인프라들이 결집되어 있는 곳이다.[2]
역사[편집]
1576년 1월 25일, 포르투갈인 탐험가 파울로 지아스 지 노바이스(Paulo Dias de Novais)와 100인의 이민자 가족들, 400인의 군인들과 함께 상 파울루 다 아순송 지 로안다(São Paulo da Assumpção de Loanda)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포르투갈 제국은 현재 루안다가 있는 지역 주변에 성 페드로 요새, 상 미겔 요새 등등 3개의 요새들을 세우며 지역의 통제를 공고히 하였다. 현재 상 미겔 요새는 매우 잘 보존되어 있고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루안다는 1600년대 초중반부터 포르투갈의 주요 대외 교두보였으며 1500년대 중반부터 노예무역이 폐지되는 시점인 1836년까지 브라질 본토로의 노예무역의 최대 거점이었다. 이러한 노예무역 기간동안 포르투갈은 해안에만 머물면서 원주민들을 수급하여 브라질 쪽으로 판매하는게 주요 수익이었기 때문에 굳이 내륙으로 확장을 도모하지 않았다. 한편, 얼마나 브라질로 가는 노예가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컸으면 분명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음에도 브라질 식민지 당국의 영향력이 포르투갈의 영향력과 필적할 정도로 컸다.
문제는 전세계적인 노예제 폐지 광풍이었다. 노예제가 폐지되자 수익을 올려야 했던 포르투갈은 1844년 루안다 항을 전세계에 개항하면서 무역항으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하였다. 1850년 즈음엔 루안다는 본토를 제외한 포르투갈 식민제국의 최대도시 중 하나였고 팜유부터 시작해서 왁스, 목재, 상아, 면화, 커피, 코코아 등등을 취급했으며 옥수수, 담배, 육포나 카사바를 직접 생산하였다.
1889년에는 식민지사가 수로를 개발하여 도심으로 공급되는 급수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렸으며 이는 도심의 확장을 더더욱 가속화했다.
안토니우 살라자르의 집권기간을 가리키는 용어, 이스타두 노부 기간동안 앙골라는 제국 시절과는 또 다른 대성장을 경험하였다. 1940년에는 고작해야 6만 수준의 인구를 지녔던 루안다는 식민지배가 끝나가는 1970년에는 무려 48만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특히 순수 백인 인구는 30% 채 되지 않았고 혼혈 인구만 10%가 되는 등 도시는 매우 다양한 인종들이 얽혀 살아가게 되었다.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기간 동안 앙골라 내에서의 독립전쟁에서도 해안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을 지녔던 루안다는 전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고 경제 발전은 지속되며 전쟁 후에도 앙골라의 중심지가 될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1972년에는 지속되는 압도적 경제성장으로 일부 보고서에서는 루안다를 '아프리카의 파리' 라고 불렀다.
1974년 4월 25일,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의 제2공화국 체제가 무너지고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이 철수하자 다인종으로 구성되었던 루안다에서 대부분의 백인들은 탈출하였으며 남아있던 난민으로 분류된 백인들 역시 남아프리카 연방을 통하여 탈출하면서 루안다는 흑인들이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시가 되었다. 엑소더스와 내전은 루안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한편, 무세키스(Musseques)라 불리우는 도시 주변의 슬럼가는 전난으로 발생한 경제난과 발전 지체에 따라 급속도로 그 크기를 넓혀갔으며 계획도시였던 루안다의 원래 도심 경계 바깥으로 크게 확장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사회적 불평등은 가속화되었다. 2002년까지 지속된 내전은 도시 발전에 큰 해를 입혔으며 지도부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던 인구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2002년, 30년에 달하던 내전이 종식된 직후부터 루안다는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성장하는 석유, 다이아몬드 수출로 얻은 부로 앙골라 정부는 원도심을 재건한다.
루안다 자체도 문제였다. 내전동안 커졌던 '무세키스'의 인구는 보수 없이 노후화된 수도, 전기, 도로 등의 도시 인프라가 감당할 수준을 한참 넘어서서 성장했으며 도심 외곽으로 크게 펼처진 슬레이트 판자촌은 10km가 넘어갈 정도로 길어졌다.[3]
경제[편집]
루안다는 항구가 있으며 시멘트, 알루미늄, 다이아몬드 등을 가공하고 수출한다. 석유 정제 공장이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식 건물이 드물었지만 중국의 대대적인 투자로 고층 빌딩과 신식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다. 주택 임대료가 세계에서 가장 비싸며 물가 또한 세계 1위이던 오슬로를 넘어선 지 오래이며, 현재 고층 빌딩이 건설 중이다. 하지만 1인당 명목 GDP가 3,000달러밖에 안 되는 나라가 부자라 그런 건 당연히 아니고 외국 자본, 특히 중국 자본의 시장 점령과 상상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양극화로 인한 현상이다. 산업 기술이 부족해 대다수의 상품을 해외에서 수입해와야 해 생필품에 일반 앙골라 국민의 임금 수준에서는 아득한 운송비가 추가로 붙는다. 당연히 이런 집에서 살면 기업인, 고위급 공무원 같은 부유층이나 웬만큼 사는 중산층들같이 잘 나가는 사람 인증이고, 일반 서민들은 미리 자리 잡은 토박이가 아닌 이상 중심부에서 사는 것은 꿈도 못 꾸고 근교의 단독 주택가 혹은 판자촌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런 주택들은 전기나 상하수도 같은 것들이 열악한지라 따로 돈 들여 설치해야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2017년 6월 21일에 미국의 컨설팅업체 머서는 루안다를 '외국인이 살기에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 1위로 선정했다.[4]
앙골라[편집]
앙골라(영어: The Republic of Angola) 또는 앙골라 공화국(포르투갈어: República de Angola, 영어: The Republic of Angola)은 아프리카 남서부에 있는 국가이다. 남쪽은 나미비아, 북쪽은 콩고민주공화국, 동쪽은 잠비아와 접한다. 서쪽은 대서양에 닿고 있다. 월경지인 카빈다는 콩고민주공화국과 콩고공화국에 접한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앙골라는 원유와 다이아몬드 등의 자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다. 국토의 형태는 대략 정사각형이며, 최대 너비가 약 1,300km이다. 앙골라는 콩고 민주 공화국의 국경 바로 북쪽 대서양 해안을 따라 아프리카 서부에 위치해 있다. 열대기후의 특성을 보이며, 남쪽에 칼라하리 사막, 북쪽에 열대우림의 콩고분지가 있기 때문에 남부는 저온건조하고, 북부는 고온다습하다. 중부 평원지대는 사바나기후 특성을 보인다. 1482년 포르투갈인 항해자가 콩고강(江)의 하구를 발견, 처음으로 상륙하였다. 한때는 네덜란드령(領)이었다가 17∼19세기에 포르투갈의 노예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앙골라에서는 노예무역이 폐지된 후에도 천연자원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경제발전이 더뎠다. 1974년부터 민주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포르투갈은 1975년 1월 앙골라의 독립을 인정하는 협정에 조인하였고 그 해 11월 인민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앙골라는 국토가 넓고 자원이 풍부한 나라로서 다이아몬드, 철광석 등의 부존자원과 비옥한 토지로 경제발전의 잠재력이 풍부하다. 하지만 1975년 독립 이후 잦은 내전으로 국토가 피폐해지고, 국가경제계획의 실패와 폐쇄적 사회주의 및 경험부족 등으로 경제가 극도로 악화되어 왔다. 앙골라는 2022년 기준 나이지리아를 제치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원유생산국으로 부상했다. 1996-2005년 기간 동안 연평균 8.5%의 경제 성장을 기록하였다. 또 현재 세계에서 2위로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이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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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남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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