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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사카(Lusaka)는 아프리카 남부 내륙국 잠비아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루사카라고 하는 이름은 1905년 마을의 추장이었던 루사카(Lussaka)에 유래되었고, 유럽에서 온 이주자에 의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1964년 독립한 잠비아의 수도가 되었다.[1]
개요[편집]
루사카는 잠비아 국토의 거의 중앙부, 해발은 약 1,300m의 고원(高原)에 위치한다. 루사카는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 중 하나이다. 이 지역에 정착한 최초의 증거는 서기 6세기이며, 11세기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세기 또는 18세기부터 렌제족과 솔리족이 살던 곳이었다. 현대 도시의 설립은 1905년 영국령 남아프리카 회사(BSAC)가 관할하는 북로디지아의 영국 보호령 지역에 있을 때 일어났다. 영국령 남아프리카 회사는 코퍼벨트에서 케이프타운을 잇는 철도를 건설했고 루사카는 이 노선의 급수장으로 지정됐으며 이 노선의 이름은 현지 렌제 족장 루사카의 이름을 따왔다. 1929년, 영국령 남아프리카 회사로부터 북로디지아의 지배권을 넘겨받은 지 5년 후, 영국 식민지 정부는 그들의 수도를 리빙스톤에서 더 중심적인 장소로 옮기기로 결정했고, 루사카가 선택되었다. 루사카는 1953년 솔즈베리(짐바브웨 하라레)가 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 연방(Federation of Rodesia and Nyasaland)의 수도가 됐을 때 일부 지위를 잃었지만 1964년 잠비아가 새롭게 독립한 잠비아의 수도로 지정되다. 루사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행정, 교육, 오락, 상업의 중심지이며 밀, 옥수수, 감자, 담배 등 농산물과 가축, 낙농제품의 집산지이며 시멘트 공업도 활발하다. 북부의 코퍼벨트에서 산출되는 구리의 운반을 위해서 건설된 철도와 케이프타운∼카이로의 카이로도로 및 루사카∼브란타이루의 그레이트 이스트 로드의 요지이다. 영국 국교회 잠비아본부, 국립대학, 식물원 등이 있는 외에, 근대 건축물이 있는 시가지에는 수목과 꽃이 많아 ‘화원의 도시’라고도 한다. 1970년 9월에는 제3회 비동맹국 회의가 개최되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잠비아의 지형은 주로 고원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부 언덕과 산이 있다. 루사카는 잠비아 중남부 고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도는 1,280m이다. 관광 수도 리빙스톤에서 북동쪽으로 472km, 잠비아 제2의 도시 키트웨에서 362km 떨어진 곳에 있다. 루사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잠비아의 주요 도시인 음풀룬구는 탕가니카호에 1,074km 떨어져 있다. 루사카시는 루사카구와 인접해 있으며 잠비아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인구가 많은 주인 루사카주의 주도이다. 도시는 서쪽으로 뭄바, 남쪽으로 칠랑가, 동쪽으로 청웨, 모두 루사카주와 접해 있고, 중앙주의 치삼바구와 치봄보구는 둘 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루사카는 주로 고도가 높기 때문에 쾨펜 기후 분류에 따르면 습한 아열대 기후(Cwa)를 특징으로 한다. 가장 추운 7월은 월평균 기온이 14.9°C이다. 루사카는 여름은 덥고 겨울은 선선하며 추위는 주로 6~7월에 밤에 한정된다. 가장 더운 달은 10월로, 하루 평균기온이 약 32°C이다. 11월부터 3월까지의 따뜻한 장마, 4월부터 8월까지의 건조한 겨울, 그리고 9월부터 10월까지의 더운 여름의 세 가지 주요 계절이 있다.[3]
역사[편집]
현재의 루사카 지역 주변 지역에 정착한 최초의 증거는 6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알려진 마을은 11세기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의 교외 지역인 올림피아 근처에 둥그런 오두막들이 정착했다. 17세기나 18세기에 렌제족(Lenje)과 솔리족(Soli)이 도착할 때까지 이 지역의 사람들은 상당한 변동을 겪었다. 학자들은 솔리족이 루아풀라강을 따라 루바 이동의 일부로 도착했다고 믿으며, 렌제족은 일라-통가와 관련이 있다. 현대의 루사카는 두 그룹의 영토 경계에 있으며, 도시 북쪽의 렌제족과 남쪽의 솔리족이 살고 있다. 19세기에 아프리카와 유럽의 노예 무역상들은 오늘날의 탄자니아, 모잠비크, 앙골라 해안 지역에서 도착하기 시작했고 솔리와 렌제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노예로 삼아 중동, 유럽, 남미로 선적했다. 이러한 공격을 피하고 이동 경작 농업 시스템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솔리족과 렌제족 사이에 빈번한 이주가 필요했고 따라서 대규모 영구 정착지가 없었다.
19세기 후반, 영국-남아공 광산 사업가이자 정치가인 세실 로즈(Cecil Rhodes)는 빅토리아 여왕의 허가를 받아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북부, 짐바브웨, 잠비아 지역에 토지를 식민지화하고 개발하기 위해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BSAC)를 설립했다. 로즈는 케이프-카이로 철도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믿었지만 독일 동아프리카가 BSAC 영토 북쪽으로 가는 경로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생 동안 진행할 수 없었다. 아프리카인들의 인권은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로즈는 개인적으로 솔즈베리(현재의 짐바브웨 하라레)까지 영토 정복을 이끌었고 그의 회사는 1902년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BSAC는 1899년 로도스의 이름을 딴 바로질란드 북서 로디지아의 보호령을 통해 루사카 주변의 지역을 공식적으로 장악했다. 수도는 1907년 리빙스톤으로 변경되었다. 이곳은 1911년 북동 로데지아의 영토와 합병되어 현대 잠비아의 개척자인 북로디지아를 형성했다.
영토 내에서 아프리카인들의 봉기, 경제적 쇠퇴, 북부 잠비아 코퍼벨트의 채굴권 확대에 대한 열망에 직면한 BSAC는 1896년부터 남아프리카에서 북부 로디지아까지 북행 철도 건설을 가속화하였다. 루사카는 1905년 경로의 정류장으로 설립되었으며 인근 렌제 마을의 지도자인 루사카 추장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루사카를 통과하는 노선의 구간은 마쇼날 랜드 철도 회사(Mashonaland Railway Company)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칼로모에서 브로큰 힐(현재의 카브웨)까지 452km 연장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백인 아프리카 농부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고, 루사카는 그들의 지역 중심지이자 철도의 접근 지점이 되었다. 1913년까지 여러 가게와 호텔이 문을 열었고, 그들은 BSAC를 설득하여 루사카를 인정 마을로 선포하고 지역 사무의 통제를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이 초기 마을은 농민들이 선출한 루사카 촌 관리 위원회가 관리했으며, 철도 노선을 따라 길이 5km, 폭 1.5km의 토지로 구성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이전에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일부였던 탕가니카(현재의 탄자니아)를 장악했다. 이것은 남아프리카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거의 연속적인 영국 식민지의 노선을 만들었고 케이프-카이로 철도와 유사한 도로의 프로젝트를 부활시켰다. 영국 제국 정부는 1924년 주지사와 입법위원회를 통해 북로디지아를 직접 지배했지만 BSAC는 이전 수십 년 동안 획득한 광산에 대한 권리를 유지했다. 새 정부는 아프리카인들의 권리는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자치를 수반하는 간접 통치 시스템을 선호했다. 광산 회사들과 루사카 주변의 아프리카 농부들은 남아공 모델을 선호하며 이러한 변화를 환영하지 않았다. 식민지 정부는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획된 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선호했다.
1929년 3월, 영국 식민지청은 북로디지아 정부에 통신과 건강을 이유로 이 지역의 수도를 옮길 것을 권고하는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이전을 위한 의학적 근거는 당시 명시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전 의사이자 1927년부터 보호령 주지사였던 제임스 맥스웰(James Maxwell)은 이 재배치 프로젝트를 돕기 위해 그의 전 동료 데이비드 알렉산더(David Alexander)를 나이지리아에서 데려왔다. 광산 지역 근처에서 생겨나고 있는 마을들의 비공식적인 개발을 피하고 싶은 알렉산더는 수도를 설계하기 위해 마을 계획자를 고용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나서 맥스웰과 알렉산더는 새로운 도시를 위한 가능한 장소를 조사했고, 마침내 철도와 북로디지아의 그레이트 노스 로드와 그레이트 이스트 로드의 교차로에 있는 상황의 결과로 루사카를 선택했다. 맥스웰은 런던 대학 교수 스탠리 애드헤드(Stanley Adshead)와 수도 기술자를 식민지로 파견한 식민 사무소에 도시 계획가를 요청했다. 애드헤드는 수도를 위한 몇 가지 가능한 장소를 조사했고, 결국 1930년 말에 루사카가 적합한 장소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수도를 구리 지대에 두는 것을 고려했지만, 광산 회사와 정부 사이의 상호 불신으로 인해 수도와 광산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다. 수도 기술자의 조사 결과 지하수가 충분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1931년 7월 입법회에서 루사카를 수도로 확정하는 보고서가 승인됐다.
1932년 로널드 스토어스(Ronald Storrs)가 맥스웰을 대신하여 주지사직을 맡았으나 대공황의 결과로 자금이 제한되었고 루사카의 개발은 거의 진척되지 않았다. 수천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건설업무를 찾아 도시로 이주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대규모 빈곤, 굶주림, 폭동으로 이어졌다. 스토어스의 가장 큰 관심은 정부청사 개발이었고, 그의 본부가 반란으로 불타버린 키프로스 주지사로서 그가 시작한 유사한 프로젝트를 그대로 반영했다. 키프로스 건물과 최근 완공된 뉴델리의 총독 저택을 모방하기 위해 스토어스는 여러 최고 건축가에게 이 계획을 작업하도록 의뢰했으며 이 계획은 왕립 아카데미에서 발표되었다. 이 건물의 43,000파운드의 예상 비용은 루사카 프로젝트에 배정된 총예산의 10%가 넘었고, 1933년 말 식민지 사무소는 이를 삭감할 것을 주장했다. 스토어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주지사직을 떠났다. 그 시점까지, 완성된 작업은 몇 개의 짧은 도로와 정부 관리들을 위한 주택과 아파트로 구성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금속의 필요성은 구리 산업의 붐을 일으켰고, 1941년 영국이 명령한 초과이익세를 부과하면서 정부에 세수 증가를 가져왔다. 호황은 또한 도시화의 상당한 증가로 이어졌다. 루사카의 공식 인구(아프리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제외)는 1931년 약 2,000명에서 1946년 약 19,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연간 15%의 성장률을 보였다. 1948년, 정부는 아프리카 주택 조례를 통과시켜, 결혼한 부부를 포함한 아프리카인들의 항구적인 교외 거주지를 허가했다. 도시의 고용주들은 또한 그들의 노동자들의 주거비를 내야 했다. 시 당국은 아프리카 주택 위원회를 설립하여 뉴칠렌제와 마테로의 새로운 교외를 건설하였다. 비교적 미숙했던 루사카의 아프리카 노동력은 숙련된 광산 노동력 부족으로 임금 상승으로 이어진 코퍼벨트만큼 혜택을 받지 못했다. 1952년, 루사카 개발 계획은 처음으로 법적 승인을 받았다.
1953년, 영국 정부는 로데지아와 니아살랜드 연방을 결성하면서 북로데지아를 두 이웃 국가들과 합병하는 전쟁 전 계획을 승인했다. 런던 당국은 경제적 이익과 합병된 영토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증가에 대항하기 위해 "다민족 국가"를 형성할 것이라는 믿음을 예로 들었다. 이 연방은 특히 남부 로데지아의 백인 정착민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아프리카인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루사카는 북로디지아의 수도로 남아있었지만, 많은 정부 부처와 민간 산업체들이 연방 수도로 지정된 솔즈베리로 이전했다. 그 결과 건설, 운송, 국내 서비스 분야의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루사카의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경제 하락과 1950년대 중후반 구리 가격 하락은 아프리카와 백인 루사칸의 대규모 실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농촌에서 도시의 비공식 정착지로 이동하는 인구가 늘면서 인구는 계속 증가하였다. 정부가 정기적으로 불도저를 밀어내는 남아프리카와는 대조적으로 로데지아 당국은 비록 아무런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았고 아프리카인들은 계속해서 엄격한 법적 제약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연방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자, 1950년대 후반에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새로운 집단이 나타나, 최근 가나에서 얻었던 것과 같이 북로디지아의 다수 지배와 독립을 추구했다. 1962년 케네스 쿤다의 통합민족독립당이 이끄는 시민 불복종 이후, 영국 정부는 아프리카인들이 입법부를 장악하는 새로운 헌법에 동의했다. 1963년 연방이 종료되고 1964년 북로디지아가 잠비아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루사카는 새로운 국가의 수도로 지명되었다. 정부 청사, 잠비아 대학, 신공항을 포함한 도시의 대규모 건설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발생한 고용 기회는 농촌에서 루사카로 더 많은 이주를 유도하여 도시의 주택 부족을 악화시켰다. 정부는 1960년대에 뉴 캄왈라와 칠렌제 남부를 포함한 몇 개의 새로운 주택 단지를 건설했다. 아프리카 인구를 위해 공공시설을 갖춘 양질의 주택이 건설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공무원과 구리 산업 근로자로 제한되어 있었고 대다수의 주민들은 비공식 정착촌에서 계속 생활하고 있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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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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