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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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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年號, 문화어: 년호)는 해의 차례를 나타내기 위하여 붙이는 이름을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서기'(西紀)를 쓰고 있다. 다른 말로는 원호(元號/元号), 혹은 다년호(大年號)라고도 한다.

개요[편집]

연호는 한문을 사용하는 동양의 군주 국가에서 쓰던 기년법을 말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군주 국가에서 임금이 즉위하는 해에 붙는 연대적인 칭호였다. 해(年)의 차례를 나타내고자 붙이며, 원호(元號) 또는 다년호라고도 한다. 연호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국, 일본, 베트남, 몽골 등지의 한자 문화권 국가에서 쓰이는 기년법으로서, 군주제 국가에서 통상 임금의 즉위나 나라에 어떠한 사건이 있는 해에 연호를 제정하며, 연호를 제정한 해를 원년, 즉 1년으로 삼아 '(연호명) n년' 하는 식으로 연도를 매긴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연호보다는 원호라고 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공용(公用) 연호(年號)는 서력기원(西曆紀元)으로 한다.

본래는 당시에 재위하는 군주의 재위년을 연호로 사용하였는데, 무제(武帝) 때에는 재위년과 별도의 연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한 군주가 필요에 따라 연호를 바꾸어 쓸 수 있었으나, 중국에서는 명나라 때부터 한 군주가 한 연호만 사용하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되었다. 연호의 기준이 되는 해를 기원(紀元)이라고 부르며, 기원으로부터 센 햇수를 기년(紀年)이라고 부른다. 군주제와는 연관이 적으나, 불기(佛紀) 및 서기(西紀), 단기(檀紀), 도기(道紀) 등도 연호에 속한다. 이러한 연호는 동양에서는 자주국의 상징으로서 굳이 황제가 군주인 명목상의 황제국이 아니더라도 황제국과 동급임을 나타내고자 사용하였다. 이때 연호는 군주의 통치권이 물리적 공간, 즉 국토는 물론이고 시간에까지 이름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연호는 군주가 시간을 지배함을 뜻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연호를 쓰는 나라는 현재로서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일본이 유일하지만, 연호라는 단어 자체는 '나라에서 법으로 정하여 통용하는 기년법'으로 의미가 확장되어 현대의 공화정 국가에서도 사용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 9월 25일에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공용연호를 단군기원으로 한다."고 명시하였고, 1961년 12월 1일에 법을 개정하여 연호를 단군기원에서 서력기원으로 바꾸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연호에 대한 내용은 기년법 문서 참고. 또한 사실상 전제군주제로 굴러가는 북한은 김일성의 생년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년호를 쓰고 있다.[1] [2]

상세[편집]

연호는 중국에서 비롯되어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을 말한다. 원호(元號)·다년호(大年號)라고도 한다. 중국서는 본래 건국기년(建國紀年)으로 일관하여 그 왕조의 연도를 기록하지 않고 군주의 재위에 따라서 해를 세었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명칭의 연호는 없었다. 따라서 군주를 상속하면 새 군주가 즉위한 이듬해를 그 원년(元年)으로 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나 한(漢) 무제(武帝) 때인 기원전 114년 무렵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연호 제도가 정비되어 한 무제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6년을 단위로 나누어 건원(建元, 기원전 140년~기원전 135년), 원광(元光, 기원전 134년~기원전 129년), 원삭(元朔, 기원전 128년~기원전 123년), 원수(元狩, 기원전 122년~기원전 117년), 원정(元鼎, 기원전 116년~기원전 111년), 원봉(元封, 기원전 110년~기원전 105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로써 건원(建元)을 최초의 연호로 하여, 연호에 의한 기년법이 확립되었다. 따라서 건원이 최초의 연호가 된다. 또 그때까지 지방의 제후들도 각자의 재위에 따라 연도를 기록했는데 이로부터 중국은 통일된 연호를 사용하게 되어 기년(紀年)도 통일되었으며, 중국에 신속(臣屬)한 외국들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를 "정삭(正朔)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연호가 붙은 달력을 하사받아 사용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사용한 '영락(永樂)'이 문헌상 최초이다. 신라에서는 536년(법흥왕 23)에 건원(建元, 536∼550)을 최초의 연호로 사용하였고, 진덕여왕 때까지 개국(開國, 551∼567)ㆍ대창(大昌, 568∼571)ㆍ홍제(鴻濟, 572∼584)ㆍ건복(建福, 584∼633)ㆍ인평(仁平, 634∼647)ㆍ태화(太和, 647∼650)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649년(진덕여왕 3) 당나라 태종이 신라에서 연호를 따로 사용함은 부당하다고 하여, 650년부터는 당나라의 연호 영휘(永徽)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699년에 진(震)이라는 국호와 함께 천통(天統)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국호를 발해(渤海)로 고친 뒤 2대 무왕(武王) 이후에는 대대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태봉국(泰封國)을 세운 궁예(弓裔)는 처음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궁예 스스로 4차례 개원하였다.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은 등극하여 천수(天授)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4대 광종(光宗)은 광덕(光德)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이후 말기까지는 중국의 연호를 썼다.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명(明)나라의 제후국을 자인하였기 때문에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않다가 청나라가 청 ·일전쟁에 패배하여 종주국 행세를 못하게 되자 음력으로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으로 고쳐 개국 505년 1월 1일로 쓰면서 독자적으로 건양(建陽)을 연호로 사용하였다. 이듬해 8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면서 동한(東漢:後漢)을 중흥시킨 광무제(光武帝)에 연유하여 연호를 광무라 하였는데, 1910년(융희 4) 국권피탈과 함께 연호도 사라졌다.[3]

역사[편집]

본래 동아시아에서는 태세기년법에서 유래한 육십갑자를 사용하였는데,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중국의 한무제가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제정하면서 연호기년법이 시작되었다. 연호를 처음 제정하는 것은 건원(建元), 기존 연호를 고쳐 새로운 연호를 제정하는 것은 개원(改元)이라 한다. 연호는 황제만이 제정할 수 있었으므로, 연호를 처음 제정한다는 것은 곧 칭제(稱帝), 즉 스스로 황제가 된다고 선포하는 뜻이다. 기존의 왕조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창업한 황제나, 제후의 지위에 있다가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동등한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경우에는 건원이라는 말 앞에 칭제를 덧붙여서 칭제건원(稱帝建元), 혹은 건원칭제(建元稱帝)라 하였다.

이처럼 연호를 제정할 권한이 황제에게만 있음은 오로지 황제의 권위만이 물리적 공간과 백성들을 넘어 시간에까지 미침을 상징한다. 연호를 제정하는 행위 자체가 곧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는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작용한 것이다. 또한 연호는 중국을 넘어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조공국들에게까지도 사용이 강제되었다.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으면 자칫 중국 황제에게 대적하는 뜻으로 해석되어 심각한 외교 마찰이 빚어질 정도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어떤 연호를 사용하는지는 중요한 요소였다.

다만 동아시아에서 중국만이 연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조공국을 자처했던 한국이나 일본, 베트남도 내부적으로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외왕내제적 정치 체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되 국내에서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식이다. 과거 왕조에서 독자적인 연호 사용은 자주국이냐 속국이냐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따라서 고구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음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측 주장에 맞서는 강력한 반박 근거가 될 수 있다.

심지어는 중국에서도 알면서 눈감아 주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의 경우는 연호를 세웠다가 폐하기를 반복했지만, 일본은 646년 다이카 개신 이래로 쭉 연호를 사용해 왔다. 화이론을 따르는 유학자들은 중국 이외의 나라가 칭제건원하는 행위를 불경하게 여겼다. 특정한 해에 연호를 붙이고, 그 해를 원년, 즉 1년으로 삼아 이후 '(연호명) n년'으로 표기하는 방식이다.

기존에 있던 연호를 고치는 것은 즉위 초기에 연호를 바꾸면서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어 왕권강화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는데, 황제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연호를 바꾸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황제가 느끼기에 국정을 쇄신할 필요가 있을 때나, 심하면 기분 전환 삼아 바꾸었다. 따라서 황제가 변덕스러운 성향이거나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자주 바뀌었으며, 대부분 두 요인이 일치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혼란기에는 한 해도 사용하지 못하고 휙휙 바뀌거나, 심지어는 몇 시간 만에 갈아치워버린 경우도 존재한다. 이외에도 나라에 재해나 이변이 발생했을 때, 또는 오행에 따른 60간지의 순환에 따라 연호를 바꿀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에서는 갑자년(甲子年)과 신유년(辛酉年)에 개원하는 관례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당장 문서에 연월일을 기록할 때 심히 곤란하기 때문에 명나라 시대에 한 황제는 한 연호만 쓰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되었다. 그리고 곧 주변국도 이러한 관습을 따랐다. 일단 이 방식이 정착하자 이름이나 시호나 묘호와는 달리 당대의 살아있는 황제 본인에게도 사용할 수 있고 독창적이라서 구분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으므로, 이후로 이전에 쓰이던 시호나 묘호 대신 (연호명)+제(帝)라는 식으로 황제를 칭하는 용법이 널리 퍼졌고, 청나라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연호란 개념 자체는 동아시아의 고유한 성격이며 유럽 문화권에서는 이런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영국과 같은 일부 군주국에서는 즉위력(British Regnal year)이라 해서 연호와 비슷한 기년법이 있다. 연호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1월 1일이 아니라 국왕 즉위일에 연도가 바뀐다는 면이 있다. 현대에는 서양에서 들어온 서력기원을 도입하면서 한국, 중국, 베트남에서는 완전 폐지, 북한과 대만, 태국에서는 자체 기년법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옛 방식으로 연호를 사용하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연호로 과거의 시간을 표기하고자 한다면, 어떤 일이 어느 군주가 다스리던 몇 년째 해에 일어났는지 알면 연도를 쉽게 표기할 수 있다. 반대로 몇 년 뒤의 가까운 미래는 그렇다 치더라도 수십, 수백 년 후 먼 미래의 시간을 쓰고자 한다면 불편이 많다. 그때까지 해당 군주가 살아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군주의 재위에 따른 연호를 시행하는 일본에서도 미래의 연도는 대개 서기로만 표기하고, 정말 가까운 몇 년 이내의 연도에만 연호를 쓴다. 이때문에 레이와 개원 전 공문서나 각종 시설물에 헤이세이 33년, 34년, 35년 등이 미리 적혀 있기도 했다. 물론 중화민국과 북한처럼 한 연호를 영구적으로 쓰는 나라라면 미래의 연도 역시 민국기년, 주체년호로 표기할 수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

제사 때 읽는 축문에서는 원래 연호로 연도를 적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멸망하고 소중화 사상이 대두되며 조선에서 청나라의 연호를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정착하자 축문에서 아예 연호를 생략하는 게 굳어버렸다.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한문으로 쓰인 축문에서 '유세차'가 이것의 흔적으로, 원래는 '유 (연호 x년) 세차 ㅇㅇ'라고 했다. 이 때문에 현대에는 고유의 연호인 단군기원이나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 연호인 서력기원을 써야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있다.[2]

방식[편집]

일세일원제

기원전 2세기에 한무제가 연호 제도를 시작한 이래, 임의의 연도에 연호를 붙였다. 그래서 연호로 연도를 표기해도 어느 왕 시절인지 얼른 감이 오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고, 당고종이나 송이종처럼 주술적인 이유나 심심풀이로 연호를 바꾸는 군주 시절에 이런 단점이 극대화되었다. 반대로 여러 군주가 하나의 연호를 안 고치고 계속 쓰는 경우도 있기도 했다. 이 문제는 14세기 들어 명나라 때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 즉 한 황제당 한 연호 제도를 정함으로써 겨우 해소되었고 청나라도 이를 받아들였다.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뒤로는 군주를 해당 군주가 반포한 연호를 사용해서 부르기가 정착되었다. 그래서 명대 이후부터는 묘호나 시호보다 '연호+황제'나 '연호+제(帝)'라고 하기가 일반화되었다. 예를 들어 주원장이 홍무(洪武)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홍무제(洪武帝)'라고 부르는 식이다. 연호로 황제를 칭하는 방식의 장점은 해당 황제의 생전이나 사후나 동일하게 지칭할 수 있다는 것. 묘호와 시호는 사후에 붙이는 것이고, 시호는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헷갈리니 '연호+제'가 훨씬 실용적이다.

한편 일본의 천황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세일원제를 채택했지만, 연호를 사후에 그대로 중국의 시법과 무관하게 시호로 올리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는 연호+덴노 식으로 부르지 않고, 사후에 연호+덴노 식으로 부른다. 예를 들어 현재의 천황인 나루히토의 연호는 레이와이고, 사후에 레이와 덴노라고 불릴 '예정'이지만 살아 있는 지금은 레이와 덴노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천황이라고 하든지 킨조덴노(今上天皇, 금상천황)나 킨조헤이카(今上陛下, 금상폐하), 줄여서 킨조라고 부른다. 아키히토 역시 현재는 상황으로 양위했으나 생존해 있기 때문에 헤이세이 덴노라 부르지 않고 조코(上皇)나 조코헤이카(上皇陛下)라 불린다.

한편 연호를 써서 군주를 지칭하는 것을 영어로 번역 때는 '연호+칭호' 순으로 적음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면 홍무제는 Hongwu Emperor로 적는 식이다. 군주의 휘를 그대로 쓰거나, 묘호ㆍ시호 또는 존호(尊號)를 쓸 경우 '칭호+이름/묘호/시호/존호' 순으로 써서 칭호가 앞에 오지만(예를 들면 Emperor Gojong 식으로) 연호를 쓸 때는 칭호 앞에 쓴다는 것. 아마 '연호+칭호'의 경우 '그 연호가 사용되던 시기의 군주'라는 의미라서인 듯하다. 그리고 연호로 군주를 지칭할 경우, 문장에서 해당 군주의 칭호를 쓸 때 the도 앞에 붙여서 the Hongwu Emperor 식으로 써야 한다. 그러나 연호를 그대로 시호로 올리는 관습이 있는 일본의 천황들은 Emperor Shōwa 식으로 칭호를 앞세운다. 시호라는 의미가 더 강해서인 듯하다.

즉위년칭원법과 유년칭원법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전 임금이 죽은 해에 새 임금이 즉위한다. 그렇다면 이 해는 전 임금의 통치기간일까, 새 임금의 통치기간일까? 새 임금이 즉위한 해를 새 연호의 원년으로 정하는 것이 즉위년칭원법, 새 임금이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정하는 것이 유년(踰年)칭원법이다. 유(踰) 자는 '지나간다, 넘어간다'는 뜻이고 유년(踰年)은 '한 해를 넘긴다' 또는 2년째라는 뜻이다. 전통적인 유교 예법에서는 유년칭원법이 정통인 바, 중국과 한국, 베트남에서는 기본적으로 유년칭원법을 따랐다. 즉, 새 군주가 즉위하면 바로 개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해 1월 1일을 기하여 예고한 연호로 개원한다. 이는 선대 군주의 통치 시대를 존중한다는 효 사상의 반영이기도 하고, 한 해에 연호가 둘 이상이 공존하면 생길 혼란을 피하는 효과도 있다. 이듬해에 바꿀 연호를 미리 공지할 수 있으므로 개원에 따른 충격도 적어 실용적이다. 반면, 정변이나 반정 등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군주가 폐위되었다면, 선대 임금의 통치를 부정하는 뜻으로 예외적으로 즉위년칭원법을 택하기도 한다.

중국은 춘추에서 처음으로 유년칭원법을 사용한 이래 계속 유년칭원법을 사용하여, 명나라 때 일세일원제(=한 황제 한 연호)를 채택한 이후부터는 새 황제가 즉위한 다음 해 1월 1일에 연호가 바뀌었다. 심지어 토목의 변으로 잡혀간 정통제 대신 명 조정이 급히 경태제를 내세웠을 때에도 이듬해(1450년) 음 1월 1일부로 연호를 변경했다. 하지만 한 해에 세 황제가 재위한 경우라든가, 직전 황제의 정통성을 부인할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즉위년칭원법을 썼다. 대표적인 예로 정통제가 복위한 후에 사용한 연호인 천순 연호가 있는데 유년칭원법을 따른다면 정통제가 복위한 이듬해인 1458년에 천순으로 개원해야 했지만, 탈문의 변으로 경태제를 폐위하고 복위한 사정상 복위 후 곧바로 천순 연호로 개원하였다. 건륭제가 가경제에게 양위할 때에는 1796년 음력 1월 1일부로 양위하겠다고 미리 공표하여 새해에 바로 새 연호가 사용될 수 있게 했다.

한국에서는 고대에는 대체로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했지만, 일부 금석문을 보면 유년칭원법도 부분적으로 사용한 듯하다.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영락 원년이 391년으로 삼국사기에서 기록되는 고국양왕의 치세기와 맞물리는데, 최근에는 고국양왕이 생전에 광개토왕에게 양위했기 때문에 유교식 예법으로 391년까지 고국양왕의 치세기로 인정했다는 해석도 있다.

원 간섭기 이후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아 유년칭원법이 원칙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유년칭원법을 사용할 때에도 선대 군주의 정통성을 부인할 필요가 있거나 비정상적 방법으로 군주가 바뀌었다면 중국에서처럼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했다. 한국은 독자 연호를 쓰지 못한 기간이 길기 때문에 연호 대신 '세종 ○년' 하는 식으로 국왕이 즉위한 후 햇수를 세는 국왕 재위 기년(紀年) 방식으로 연도를 적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하여 국왕이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1년)으로 본다. 현대의 학자들은 즉위년칭원법의 기록 때문에 원년(1년)과 즉위한 해(0년)가 혼동되지 않도록, 즉위한 바로 그 해는 '즉위년'이라고 칭한다.

예를 들어 조선 정조의 즉위년은 1776년이지만, 정조실록의 즉위 기사에는 '영종(영조)대왕 52년에 즉위하셨다.'고 기록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의 기준으로 1776년은 영조 52년이고 1777년부터 정조 원년이다. 조선시대의 '정조 즉위년' 같은 표현은 대개 유학자들이 연보(年譜) 같은 것을 만들 때 편의상 사용한 것으로, 현대의 학자들이 이를 활용하여 1776년 중에서도 임금 즉위 이후 시점에 대해 '정조 즉위년'이라고 논문 등에서 쓰곤 한다. 다만, 순종이 즉위하면서 기존 연호인 광무를 융희로 개원할 때에는 순종 즉위년(1907)을 융희 원년으로 삼아서 국왕 기년은 유년칭원법, 연호는 즉위년칭원법을 쓰는 기묘한 상황이 발생했다.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고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하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연호는 칭제건원으로 당시의 시행법이었던 반면 국왕 기년은 고전 자료로서 기존 조선왕조실록 편찬 방식을 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따라서 1910년은 융희 4년이자 순종 3년이다.

즉위년칭원법이 일반적이었던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에는 국왕 재위 기년이 유년칭원법으로 적혔다. 그래서 고려사의 국왕 기년은 고려 당대의 금석문 같은 기록과 비교하면 1년씩 다르다. 예를 들면 고려 당대의 예종 즉위 3년이라는 표현은 고려사 기준 예종 2년, 즉 1107년을 의미한다. 연호에서의 사례는 연호/한국 참조. 일반적인 유년칭원법에서 단순히 아무 임금 또는 연호 몇 년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꼭 '즉위' 몇 년이라는 토씨가 붙어서 고려실록 같은 편찬 자료에는 유년칭원법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고려실록이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져서 확인할 수 없다. 고려 역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연도를 표기할 때 중국 왕조의 연호를 사용함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사용된 유년칭원법과 구분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고려 당대의 국왕 기년에는 기본적으로 '즉위' 몇 년이라는 토씨와 함께 대개 중국 왕조 연호나 간지가 병기되어서 고려사와 교차검증하는 과정에서 연도가 헷갈릴 일은 없다. 오늘날 대중 자료에서 고려 국왕 기년 또는 연호를 표기할 때는 대개 최종 편집본인 고려사를 따라 유년칭원법을 따르는 것이 보통이나, 금석문 원문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드물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기기 때문에 주의해서 볼 필요는 있다. 베트남도 막 왕조 이후부터는 유년칭원법을 사용해 왔지만, 응우옌 왕조가 프랑스 식민지가 된 뒤에는 프랑스에 의해 황제가 여러 번 폐립되다보니 황제가 갈아치워진 날 바로 연호도 바뀐 경우가 많았다. 현재까지 군주 즉위에 따라 연호를 사용하는 유일한 나라인 일본은 특이하게도 연호를 처음 사용한 7세기부터 현재까지 즉위년칭원법을 계속 유지한다. 그 바람에 연호가 바뀌면 달력을 사용하는 분야에서는 난감하게 여긴다.[2]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연호〉, 《위키백과》
  2. 2.0 2.1 2.2 연호〉, 《나무위키》
  3. 연호〉,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연호〉, 《네이버 국어사전》
  • 연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연호〉, 《시사상식사전》
  • 연호〉, 《위키백과》
  • 연호〉, 《나무위키》
  • 연호〉, 《두산백과》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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