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수평선(水平線)은 물과 하늘이 맞닿아 경계를 이루는 선이거나 중력의 방향과 직각을 이루는 선을 말한다.
개요[편집]
수평선은 말 그대로 물(水)을 봤을 때 저 멀리 평평한(平) 선(線)을 말한다. 바다(또는 드물게 매우 큰 호수)에서는 수평선이라고 하고, 땅 끝에 있는 건 지평선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수평선/지평선 가릴 것 없이 Horizon이라고 한다. 다만 바다는 항상 평평하므로 만이나 다도해가 아니면 대부분 수평선을 관측할 수 있는 반면, 땅은 산이나 언덕, 고층건물 등 장애물 때문에 평평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지평선은 좀 더 보기 어렵다. 특히 한국은 산도 많고 인구밀도도 높아 전북특별자치도 일부 지역 이외의 지방에 살던 사람이라면 높은 확률로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김제시, 예산군, 태안군, 김해시, 평택시, 철원군 정도가 전국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지평선이 지역 명물이다 보니, 김제시에서는 김제지평선축제를 개최하고 있고, 학교 중에 지평선중학교, 지평선고등학교도 있으며, 향토학사로 김제지평선장학숙이 있다.
해외에서는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 드물지 않다. 몽골, 중앙아시아, 러시아 남부 및 시베리아의 초원 지대나 중국 화북, 미국과 캐나다의 대평원,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에 걸친 라플라타강 유역의 대초원,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처럼 동유럽 평원에 자리한 국가들에서는 지평선을 보기가 비교적 쉽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일본에서도 도쿄가 있는 간토 평야와 토카치 평야 지역에선 흔하게 볼 수 있다. 또한 남극, 북극에서는 드넓은 설원, 빙원이 펼쳐져 있어 지평선을 보기가 어렵지 않다. 바다 뿐만 아니라 카스피해, 아랄해, 오대호, 바이칼호 등 거대 호수에서도 보일 수 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수평선 저 멀리 떠나가는 배는 수평선 밑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보인다. 굳이 지구 한 바퀴를 돌아보거나 우주로 나가보지 않아도 지구가 둥글다는 걸 알 수 있는 증거 중 하나로 고대 아테네부터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사람과 수평선의 거리가 4~5km정도 밖에 안되므로 시력이 보통 수준인 사람이라면 맨눈으로도 관측 가능하다. 천구의 좌표계 중 하나인 지평 좌표계에서는 북점과 남점, 동점, 서점을 지나는 원을 지평선이라고 하고, 그 원을 포함하는 면을 지평면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함들은 둥근 수평선 너머(초수평선, Over the horizon)로 사격하기 위해서 정찰기나 레이더를 사용했다. 일본의 전함들은 견시원들의 목측을 중시해 함교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고 미국의 전함들은 레이더를 발전시켜나갔다.
키 170cm의 사람이 바다를 바라볼 때 수평선이 보이는 지점은 대략 4.7km 떨어져 있다. 키가 2m라면 약 5km이다. 일반적으로 행성의 (반)지름이 크면 클수록 관측 지점으로부터 지평선까지의 거리가 멀어진다. 그래서 달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지평선이 상당히 가깝고, 반대로 토성의 대기에 진입한 카시니호가 마지막으로 보낸 사진을 보면 지평선이 매우 멀다는 걸 알 수 있다.[1]
수평선의 진실[편집]
수평선은 항상 그자리에 있을 뿐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수평선에 다가서면 점점 더 멀어져 어느새 처음만큼의 거리를 만든다. 옛날 그리스 철학자들은 수평선을 보고 지구가 둥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평선 너머에서 항구로 다가오는 배들이 꼭대기부터 보이다가 점차 선체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을 들어 지구가 둥굴다고 말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월식때 달에 비친 지구의 그림자가 둥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지구가 둥근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다. 미지의 바다 너머에 새로운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수많은 탐험가들이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배를 타고 오른 항해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망망대해와 수평선만 보이는 대양에서 가장 두려운것은 해적도 아니고 풍랑도 아니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못한다는 사실이고, 위치를 모르고서는 고향까지 얼마나 더 가야할 지 남아 있는 음식은 충분한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그들이 의지할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해와 달 그리고 별들 뿐이었다. 항해사들은 밤에는 북극성과 별자리를 보고 낮에는 태양을 보고 항해를 떠났다. 배의 위도는 태양의 고도와 북극성의 위치를 기준으로 하면 비교적 정확하게 알수 있지만 태양만으로는 배의 경도를 파악 할수가 없다. 지구는 자전하고 있으므로 멀어진 거리에 따라 해뜨는 시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기준점의 차이를 이용해서 경도를 알아야 했다. 육지에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시각을 측정할 수 있으나 출렁이는 바다에서 거친 항해를 하는동안 정확한 시각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배의 위치 확인은 선장의 중요한 임무였다. 당시 선장은 육불의를 들고 수평선에 맞추어 태양의 고도를 확인했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맨눈으로 태양을 보며 방향을 찾아야 했던 선장들은 강렬한 태양빛에 시력을 손상하기도 했으며 보물섬이나 뱃사람 이야기에 등장하는 선장들 가운데 애꾸눈이 많은 까닭도 어떻게 보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구가 완전한 구라고 가정하고 지구 반지름보다 사람 키만큼 더한 높이를 빗면으로한 직삼각을 그려보면 이제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따라 풀이해보면 대략 4.5km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대기의 굴절현상 때문이다. 이미 수평선 너머로 건너간 배가 우리 눈에는 조금 더 여운을 남기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대기의 굴절은 해가 지고 난 후에도 수평선 아래의 해를 더 볼수 있도록 해준다. 비록 3분여에 불과하지만 이 시각에는 서쪽의 바닷가에서 낙조를 감상 할 수 있는 여유를 하늘이 준 셈이다. 보름달이 뜰때면 옛사람들은 소원을 빌었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이 달만큼 크게 이루어지길 바라며 달이 떠오를 시간을 찾는다. 수평선에 걸려 있는 달은 밤하늘에 높게 뜬 달보다 더 커보이기 때문이다. 이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대기의 굴절이 수평선의 달을 크게 만든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사실은 조금 다르다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실제보다 더 크게 여기서는 심리학적인 착지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거리착시'라고 하는 이 현상은 2000년 초에 미국의 심리학자 '카우프만'이 물리학자인 아들과 함께 흥미로운 실험을 통해 밝혔다.
실험실에서 중천에 뜬 달과 지평선 가까이의 달을 보여주고는 거리를 가늠케 했더니 사람들은 지평선에 걸려 있는 달이 크다고 생각하였고 또 멀리 있다고 여겼다. 눈을 들어 하늘바깥을 보면 우주에는 또다른 수평선이 있다. 중력이 너무 강해서 물결이 심지어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블랙홀의 한계거리를 뜻하는 사건 지평선(Event Horixon)이다. 블랙홀은 1783년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의 미첼이 만든 상상의 별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존재 가능성이 이론적으로 뒷받침된 블랙홀은 몇 년 사이 미항공우주국(NASA)의 X선 망원경과 허블우주망원경을 통해 조금씩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 밖에 있는 우리는 그 안쪽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블랙홀 주변의 움직임을 점검함으로써 그곳에 블랙홀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수평선 너머에 대한 동경은 위험을 무릎 쓴 항해를 낳고 세계지도를 완성했다. 그러나 사건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2]
수평선의 미학[편집]
푸른 바다의 수평선은 우리에게 청량감을 준다. 지구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고 있는 바다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모성애를 느끼게 한다. 지구 상에서 가장 놀라운 선중의 하나는 수평선과 지평선으로, 수평선은 하계인 바다와 상계인 하늘의 경계선이다. 하지만 실제로 바다와 하늘은 만나지 않는다. 수평선은 하늘과 바다를 갈라놓는 심상 속 경계로서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현상적인 세계를 지우고 내면속에서 새 현상을 만들어준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 하나의 선 앞에 서 있으면 가시적인 세계 너머에 있는 무궁함을 직면하게 되며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질 수 있다.
은은한 파스텔톤 바다물의 색감, 수평선 위로 아롱거리는 서기, 그 위로 떠다니는 구름 앞에 서있으면 누구라도 무방비 상태가 되어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놓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바다를 찾아간 사람들은 멍하니 바다를 응시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저절로 치유되는 자신을 보게 된다. 기나 긴 일상에서 지루함, 슬픔, 괴로움, 기쁨, 즐거움 등의 감정들과 부딪히면서 꿈을 붙들고 자유를 갈망한다. 바다와 수평선은 바라보는 것은 모든 존재의 완전성을 전하고 있다. 지평선은 다른 하계인 대지가 하늘과 하나 되는 또 다른 수평선이다. 새벽 운해 속에 싸인 산맥의 선 위의 하늘로 뻗치는 서기는 신비롭다.
소유할 수 없이 바라만 볼 수 있는 곳, 바보처럼 끝을 사유할 수 없는 광대함의 위력, 그 선 위로 발산되는 붉은 서기와 함께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며 무엇이든 다 받아주는 포용의 세계가 펼쳐 진다. 그 곳에서는 심상 속 경계를 허물고 '진실된 나'와 만나 볼 수 있다. 어두운 가운데 낮게 보이는 그저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들판, 그 사이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안개에 둘러싸인 산맥, 그리고 그 위 광활한 하늘에 가득 찬 구름들은 마음에 기이한 파문을 불러 일으킨다.
어두움과 신비로움과 광활함이 하나로 뭉쳐진 이 광경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칸트에 의하면, 압도적인 힘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왜소함, 무기력함, 유한함"을 깨닫는 한편 "이성적 존재로서 자연으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숭고한 '초감각적 실체'인 '무한'을 마주하는 동시에 이를 이성의 힘으로 내면화 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마치 수평선의 바다와 섬과 구름에 싸인 하늘의 경계처럼 모호하게 느껴진다. 이 세상 존재들 간의 연결성을 다양한 모습을 통해 표현한다. 존재는 변화와 흐름 속에서 의존하고 서로를 비춘다.
현실이라는 장벽에 막혀 쉬이 허락되지 않던 마음의 평정을 수평선에 비추어 억압된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몰입된 상태는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서는 괴로움이나 결핍까지도 넘을 수 있다. 마음의 중심을 잡는 건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마음이 중심을 잡아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평정심 혹은 잠심의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다. 남들의 비난, 자신의 분노 등을 차분하게 받아 넘기며, 그 의도나 진위 등을 판단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의 상태이다. 이러한 '잠심의 미학'은 힘이 있어도 겸손하며 만물에 대해 평등하고 객관적인 '수평선의 미학'을 추구한다.
각자 마음 속에서 고요를 찾아야 하며 사람들은 상상이나 명상 속에서 고요의 상태를 느낄 수 있지만, 시각적인 이미지를 보는 것도 마음 속 고요를 찾는데 도움이 된다. 사람은 정보의 80% 정도를 시각을 통해 얻기 때문에 시각적인 이미지로 심상을 구축하는데 효과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림이나 사진 혹은 실제의 수평선을 말없이 응시하다 보면 고요의 상태를 떠올릴 수 있다.[3]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수평선〉, 《네이버 국어사전》
- 〈수평선〉, 《나무위키》
- 에너지데일리, 〈수평선의 진실〉, 《에너지데일리》, 2003-09-25
- 임창준 원장, 〈수평선의 미학〉, 《치의신보》, 2021-06-02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