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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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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해

솔로몬해(Solomon Sea)는 태평양 서남부 산호해 북부에 있는 바다뉴기니섬, 뉴브리튼섬, 솔로몬 제도로 둘러 싸여있다. 뉴브리튼섬 부근에는 수심기 9,149m에 이를 만큼 매우 깊지만 뉴기니섬 부근에는 수심이 얕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이 곳에서 일본군과 연합군 사이에 많은 해전이 벌어지기도 했다.[1]

개요[편집]

솔로몬해는 파푸아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사이를 흐른다. 산호해의 지해(支海)로 서쪽은 뉴기니, 북서쪽은 뉴브리튼섬, 동쪽은 솔로몬 제도로 둘러싸였다. 뉴브리튼섬 남쪽 해구는 매우 깊어 수심이 9,140m에 이르지만, 뉴기니의 남동부 반도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오언스탠리산맥의 연장 부분인 솔로몬해 남부는 수심이 얕다. 뉴기니의 해안 가까이에는 트로브리안드 제도, 당트르카스토 제도 등의 섬이 산재해 있다. 특히 키리위나섬은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의 연구로, 주민들의 생활이 다각도로 파악되었다.[2][3]

솔로몬해판[편집]

솔로몬해판은 남태평양의 솔로몬 제도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판이다. 파푸아뉴기니 서부의 솔로몬해 일대가 포함된다. 솔로몬해 판의 남서쪽에서는 섭입대를 경계로, 남동쪽에서는 변환단층을 경계로 우들라크판과 접한다. 판의 북쪽 섭입대에서는 남비스마르크판 밑으로 섭입한다. 북서쪽의 뉴브리튼 섭입대에서는 태평양판 밑으로 섭입하며, 파푸아뉴기니의 뉴브리튼섬은 이러한 지질활동의 결과 형성된 화산섬이다.[4]

솔로몬 제도[편집]

솔로몬 제도(영어: Solomon Islands)는 오세아니아의 멜라네시아에 위치한 국가이자 영연방 국가이다. 찰스 3세를 자국 군주로 삼고 있는 영연방 왕국의 일원이며, 수도는 과달카날 섬에 있는 호니아라(Honiara). 한국의 대략 1/8 정도의 땅에 68만 명이 살고 있다. 2011년 UN이 지정한 세계 최빈국 중에 하나이다. 국명의 어원은 솔로몬 왕에서 유래되었다. 오세아니아에서 4번째로 큰 나라다. 1568년에 스페인의 항해가인 알바로 데 멘다냐가 이 섬에 도착하였고, 이곳에 솔로몬 제도(Islas Salomón)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였다. 솔로몬 제도의 이름은 성서에 나오는 솔로몬 왕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후 1893년에 영국이 이곳을 지배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때는 과달카날 전역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78년에 영연방 입헌 군주국으로 독립을 달성하였다.[5][6]

파푸아뉴기니[편집]

파푸아뉴기니 독립국(영어: Independent State of Papua New Guinea), 약칭 파푸아뉴기니(영어: Papua New Guinea)는 오세아니아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뉴기니섬의 동반부에 위치해 인도네시아(서파푸아)와 국경을 접하며, 수도는 포트모르즈비이다. 남태평양 서쪽 끝 뉴기니섬 동반부에 걸쳐 있는 도서국가이다. 1660년 네덜란드가 뉴기니섬의 영유권을 최초로 주장하였다. 1885년 뉴기니섬 동부의 북쪽은 독일이, 남쪽은 영국이 각각 분리 점령하였고,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의 통치를 거쳐 1975년 독립하였다. 뉴기니섬 서반부는 인도네시아의 이리안자야주(州)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연맹은 옛 독일령 뉴기니에는 대표를 허락한 반면 파푸아 보호령은 외부 영토로 간주되어 대표가 허락되지 않았다. 파푸아 보호령은 공식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외부 영토로 남아 있었으며, 이는 1975년 독립 이후의 사법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옛 독일령 뉴기니와 파푸아 보호령의 차별화된 법적 상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식민 지배가 일원화된 것이 아니라 두 지역을 각각 별개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두 영토는 파푸아 보호령으로 통일되었으며, 이후에 "파푸아뉴기니"로 불리며, 1975년 9월 16일에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독립했다.[7]

뉴기니섬[편집]

뉴기니섬(영어: New Guinea, 문화어: 뉴기니아 섬)은 오스트레일리아 북쪽에 있는 섬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이다. 오세아니아에 속한다. 오스트레일리아와는 기원전 5000년 경 토레스 해협으로 나뉘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파푸아섬(인도네시아어: Pulau Papua) 또는 이리안섬(Pulau Irian)으로 불린다. 동경 141°를 기준으로 동부는 파푸아뉴기니의 영토이고, 서부는 인도네시아의 영토(서뉴기니)이다. 명목상 뉴기니섬은 파푸아뉴기니의 영토이다. 호주 본토와 대륙붕으로 연결되어있으며, 뉴기니 섬과 본토 사이에는 아라푸라 해를 두고 있다.

뉴기니섬에서는 약 4~50,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멜라네시아인 원주민들은 독자적으로 농경을 발명하고 오랜 기간 원시 부족 사회들을 이루고 살았다. 이후 인도네시아 지역의 여러 왕국이 서부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으나 대체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티도레섬의 술탄 누쿠(Nuku)는 네덜란드의 식민화에 저항하면서 스스로를 "티도레와 파푸아의 술탄"으로 칭하기도 했다. 1526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메네세스(Jorge de Meneses)가 뉴기니섬의 서단부를 발견하고 이를 말레이어에서 유래한 파푸아(ilhas dos Papuas)라고 명명하였다. 이후 1545년 스페인의 탐험가 레테즈(Yñigo Ortiz de Retez)는 섬의 북쪽 해안을 따라 항해하고 6월 20일 처음 상륙하여 뉴기니(Nueva Guinea)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19세기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성립시키며 뉴기니섬의 서부의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이후 19세기 말 영국과 독일이 동부를 분할하여 동남부는 영국령 퀸즐랜드에, 동북부는 독일령 뉴기니에 각각 편입되었다. 영국은 1905년 영국령 뉴기니섬의 관할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전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령 지역도 오스트레일리아 관할로 편입되어 1942년까지 '파푸아 뉴기니 영토'(The Territories of Papua and New Guinea)로 불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일본 제국이 뉴기니섬을 침공하여 파푸아 뉴기니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의 연합군이 맞서 승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양측 총 20만 명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뉴기니인들은 연합군에 참전, 수송 등의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2차 대전 종료 후 독립을 주장한 인도네시아와 이를 인정하지 않은 네덜란드 사이에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발생하여 4년 간 지속되었으며, 헤이그 회의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인정되는 한편 뉴기니 서부는 네덜란드 관할로 남게 되었다. 1960년대 네덜란드 정부는 서뉴기니를 완전히 독립시키기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곧 서파푸아 공화국의 독립을 위한 과정이 진행되자 1962년 인도네시아 측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군을 진공시키는 등 분쟁이 발생하였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미국은 양국을 중재하여 뉴욕 협정이 체결되었고, 1969년까지 파푸아인들이 독립 여부를 선택할 조건(자유선택행동)으로 인도네시아에 인도되었다. 1969년 인도네시아 주도로 선출된 뉴기니 원로 회의가 인도네시아 잔류를 결정하면서 서뉴기니는 인도네시아 영토로 편입되었다. 현재까지도 이에 반대하는 분리주의 측과 인도네시아 정부 측 간에 계속적인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한편 뉴기니 동부는 오스트레일리아 영토로 있다가 1975년 완전한 독립이 승인되며 파푸아뉴기니국이 성립되었다.[8][9]

솔로몬해전[편집]

제2차 세계대전 때 솔로몬군도 방면에서 벌어진 해전을 총칭하는 경우와 솔로몬 방면에서의 미국군 반격의 계기가 된 과달카날섬의 쟁탈을 둘러싼 제1∼3차 솔로몬해전을 지칭하는 경우가 있다. 제1차 솔로몬 해전은 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섬 및 투라기섬을 공격해온 미국군에 대해서 일본의 제8함대가 야습(夜襲)을 감행한 전투로, 미국 함대의 태반이 격침 또는 격파되었다. 그러나 수송선단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였으므로 그 뒤 과달카날섬의 공방전을 수행하는 데 일본군은 큰 곤란을 겪어야 했다. 제2차 솔로몬해전은 1942년 8월 24일 과달카날섬에서의 일본군 증원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작전 중인 제2, 제3함대의 항공모함과 미국 기동부대와의 전투로서, 일본군은 항공모함 류조를 잃었다. 제3차 솔로몬해전은 일본군의 증원부대 상륙을 위해 1942년 11월 12∼14일에 걸쳐 벌어진 수상야전(水上夜戰)으로 이 전투에서 양쪽은 막대한 함정 손실을 보았다. 이 전투 이후 일본은 과달카날섬에 대해 충분한 증원보급을 하지 않았고 1943년 2월 철수하여 미국이 이 섬 주변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10]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솔로몬해〉, 《위키백과》
  2. 솔로몬 해〉, 《요다위키》
  3. 솔로몬해〉, 《네이버 지식백과》
  4. 솔로몬해판〉, 《위키백과》
  5. 솔로몬 제도〉, 《위키백과》
  6. 솔로몬 제도〉, 《나무위키》
  7. 파푸아뉴기니〉, 《위키백과》
  8. 뉴기니섬〉, 《위키백과》
  9. 뉴기니〉, 《나무위키》
  10. 솔로몬해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멜라네시아 같이 보기[편집]

멜라네시아 국가와 도시 1
멜라네시아 국가와 도시 2
멜라네시아 국가와 도시 3
멜라네시아 산맥과 바다
멜라네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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