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 (통신)
전신(電信, electrical telegraph)은 문자나 숫자를 전기 신호로 바꾸어 전파나 전류로 보내는 통신을 말한다.
개요[편집]
전신은 전기 신호를 이용하여 송신할 내용을 보내는 통신 방법 중의 하나다. 우편보다 빠르게 보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는 모스 부호를 이용하는 방법, 텔레타이프 단말을 이용한 기계 전신 등이 있다. 전보도 원래 전신 기술을 이용해 행해진 통신서비스였다. 기계 전신은 디지털 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라 여러 가지 정보를 송수신하는 데이터 통신으로 발전했지만, 이것들은 보통 전신이라고 하지 않는다. 중국의 이통사 차이나텔레콤의 약자이자 땐신(電信)의 간체 표기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최초의 전기 통신 수단인 전신, 전화의 발명은 산업 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모스 부호와 전신기를 활용했으며 그 시대엔 전신사들이 현재의 통신기기 역할을 했다. 게다가, 지금의 전화국들은 전신전화국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전신을 활용한 통신체계 중에는 전보가 있다. 그리고 통신의 혁명을 일으킨 전신은 1세기 가까이 사회에 존재하다가, 결국 후신인 전화를 비롯한 기타 통신 수단에게 넘기고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는 사실상 종료했다. 이제는 가끔 근성 있는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취미로 하는 정도에 그칠 뿐. 정기교신이 매주 토, 일요일에 아마추어 무선 밴드인 7.010Mhz 근처에서 오전 9시경에 이뤄지고 있어서 수신이 가능하다.[1][2]
유선통신(Wired communication, 有線通信)은 전송로(傳送路)에 도선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전기통신을 말한다. 반송 통신이라고도 한다. 무선통신에 대한 말로, 전기 또는 광신호로 변환한 정보를 페어 케이블, 동축 케이블, 광섬유 케이블 등의 통신 선로를 전송 매체로 하여 전송하는 방식을 말한다. 전송 매체가 폐공간을 구성하고 있으므로 공간 전파(空間傳播)에 비해 외란(外亂)에 좌우되기 어려워 안정한 통신이 가능하다. 전송 매체의 전송 손실을 등화(等化)하는 중계기를 전송 매체 도중에 배치하여 장거리의 전송을 한다.
설치하는 데 큰 비용이 드는 약점이 있으나, 무선통신에 비하여 안정된 고품질의 전송로가 보장되고, 도중에서 분기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종래 국내통신은 모두 유선전송로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시내통신은 유선, 시외통신은 무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전송로에는 나선(裸線), 시내 및 시외 케이블, 반송(搬送)케이블, 동축케이블, 해저케이블(동축케이블과 중계증폭기의 결합)·광섬유케이블 등이 있다.
유선통신은 송·수신 양자가 전선로로 연결되고, 그것에 의하여 신호가 매개되는 전기통신을 총칭한다. 대표적인 것은 전신·전화인데, 하나의 송신에 대하여 다수의 수신을 원칙으로 하는 무선통신과는 달리 송·수 1:1의 통신이 원칙인 것이 유선통신방식이다. 통신기술의 발달에 따라, 전송로의 일부에 무선을 포함하는 경우도 많고, 따라서 방송국·교환국 등과 단말수신자(端末受信者:가입자)가 유선전송로로 결합되어 있을 때에는 유선통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3][4]
전신의 분류[편집]
유선전신[편집]
유선전신(Wire Telegraphy, 有線電信)은 전선을 통하여 전신 신호를 먼 곳까지 전달하는 방식을 말한다. 즉, 유선에 의한 전신 통신 방식의 총칭이다. 직류, 음성 주파, 초가청(超可聽), 가청하(可聽下) 등의 전신 방식이 있다. 교류 전신은 일반적으로 반송 전신이라 불린다.[5]
전신의 원리는 전기의 원리와 함께 일찍부터 연구되어 왔으나, 근대적 의미의 전신 개념에 가까운 방식은 1834년 영국의 윌리엄 쿡(William Fothergill Cooke)에 의해 이루어졌다. 쿡은 5개의 자침을 나란히 배치해 전류의 강약에 따라 움직이는 침의 조합으로 신호를 보냈다.
새뮤얼 모스(Samuel Finley Breese Morse)는 이러한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한 끝에 1839년 9월 뉴욕대학교에서 500m의 전선을 깔아 전신의 실험에 성공했다. 실험에 성공한 모스는 이의 특허권을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 팔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수기 신호인 세마포르 통신(semaphore 通信)이 행해지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윌리엄 쿡과 찰스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이 개발한 전신 개통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의회는 몇 년 동안 모스 부호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3만 달러라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워싱턴-볼티모어 선을 개통하는 데 동의했다. 모스는 1844년 5월 24일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에 전선 가설을 완공하고, 최초의 전건(電鍵)을 두드려 성서의 한 구절인 "What hath God wrought!"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속도는 어떠한 말이나 자동차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모스 전신은 메시지를 단점(·)과 장점(-) 2종류의 기호 조합으로 바꾸어 보내는 통신 방식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전신의 모태가 되었으며, 이 부호를 모스 부호라 한다. 특히 철도의 안전운행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해 1852년경에는 유럽 전체의 전신망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전신이 확장되면서 그 전까지 비둘기를 이용하던 각국의 통신사들은 전신을 이용한 뉴스 속보를 시도하게 되었으며, 전신 또한 뉴스 속보를 가능하게 하면서 철도 통신으로부터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모스 부호가 해난 구조에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99년 영국 도버해협에서 좌초 위기에 처한 증기선 엘베호를 보고 한 등대선이 모스 부호로 신호를 보내면서부터다. 일반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만국 공통 구조신호 'SOS'의 모스 부호는 '···- - - ···'. SOS는 '우리 영혼을 구해달라(Save Our Souls)'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이 부호가 가장 쉬운 신호라는 것이 채택 당시 이유였다.[6]
무선전신[편집]
무선전신의 개발에 영향을 끼친 기술은 대단히 많았다. 1884년 칼제치오네스트(Calzecchi-Onesti, Temistocle)는 무선전파에 반응한 소자를 개발했다. 이는 전파를 검출하는 중요한 기술이 되었다.
1886년부터 1888년에 걸쳐 독일의 물리학자 하인리히 헤르츠(Heinlich Rudolf Hertz)는 제임스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의 전자파 이론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1890년 에두아르 브랜리(Édouard Branly)는 '전파도체'(radio-conductor)라 불리는 것을 시연했는데, 1893년에 올리버 로지(Oliver Lodge)가 이를 전파검출소자인 코히러(coherer)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1890년부터 1894년까지 브라질 사제이자 과학자인 랜델 드 무어라(Roberto Landell de Moura)는 전신과 전신의 무선송신 실험을 했다. 1893년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는 세인트루이스에서 근대적 무선시스템의 공중시연을 처음으로 실시했는데, 고압방전을 연구해 테슬라 코일 등 무선통신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연구를 실시했다. 1897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굴리엘모 마르코니(Gulielmo Marconi)는 장거리 통신을 위한 신호작동을 위한 무선시스템에 대한 일련의 공중 시연을 실시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학기술들은 무선통신의 상용화를 위한 토대를 제공했으며, 1900년대를 전후해 상용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들이 추진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앞섰던 사람이 마르코니였으며, 마르코니는 1901년 12월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실험에 성공하고, 1902년 아일랜드 크룩헤븐이라는 해안가에 마르코니 무선국(station)을 설치하고,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는 배들을 대상으로 해사무선통신서비스를 제공했다.
이후 1906년에 리 드 포레스트(Lee De Forest)가 삼극진공관을 개발함으로써 무선통신의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고, 무선통신 개발 과정에서 발견된 전파의 특성들은 향후 방송기술이 태동하는 모태가 되었다.[6]
전신의 영향[편집]
철도가 부설될 때 전신주도 함께 세워져 열차관제와 전신에 활용했다. 전신을 통해 철도 운행정보가 신속히 제공될 수 있게 됨으로써 더 많은 기차들이 운용될 수 있었고, 이는 많은 물류들의 이동을 가능케 해서 각종 사업들이 번창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또한 전신을 통한 신속한 정보전달은 주요 소비지들의 제품가격을 전달함으로써 도시 소비물가에 대한 정보이동과 함께 제품이 이동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는 소비지 간 물가를 균등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전신을 이용하는 주요 고객은 신문사였다. 인쇄 전신을 이용한 통신사들의 뉴스 배포는 신문의 빠른 정보전달을 가능케 했다. 또한 전신이 설치된 후, 불과 한 달 안에 대부분의 신문들은 모스의 전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신문사들은 전신이 연결된 곳이면 어디에서나 어제의 중요한 사건 뉴스를 취재해 당일 인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1866년 대서양을 횡단하는 해저케이블이 설치되어 무역과 정치를 위해 유럽과 미국 간 정보교환이 가능해졌다. 무선통신기술의 개발은 전송능력은 제한적이었지만 대서양횡단 케이블이 없어도 장거리통신이 가능한 시대를 열었으며, 전 세계를 보다 가까워진 공간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들었다.[6]
전신기[편집]
전신기(電信器, elegraph)는 전신을 보내는 통신장비로, 처음엔 유선이었으나 나중엔 무선으로 바뀌었다. 손잡이처럼 생긴 부분을 누름으로써 신호를 발생시킨다. 이런 신호의 통신 언어를 모스 부호라고 했고, 모스 부호를 모르는 사람은 이를 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교육과 숙련이 필요했다. 그 탓에 숙련도가 중요했고 모스 부호에 익숙한 전신기사는 1분에 몇 단어를 송수신할 수 있느냐로 판가름 났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선 빈번하게 등장한다. 무선통신이 없던 시절엔 군대도 전부 전신으로 긴급연락을 했고 공문서는 이동에 시간이 한참 걸렸다. 전자문서가 발달한 현재는 이럴 일이 없지만 이 시절의 통신대는 모두 풍선이나 전신기를 사용했다.
이렇게 보낸 메시지들은 전보로 표시되었다. 한국에선 20세기 중반까지도 전화나 우편 시스템이 미약한 경우가 많아 전보를 쓰기도 했는데 전보는 꼭 전신만 아니고 전화로 보내기도 했다.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외계인에게 지구 여러 나라의 군대가 총 반격을 할 때 외계인에게 도청되지 않게 전신기로 모스 부호를 보내 연락하는 장면이 나온다. telegraph라는 단어는 사실 전신기 이전부터 존재했었다.
모스 전신기가 개발되기 전인 1793년 프랑스의 클로드 샤프(Claude Chappe)는 불을 피워야 한다는 봉화의 단점을 개선한 세마포어 통신(semaphore telegraph) 시스템을 개발했다. 움직일 수 있는 목제 신호기가 설치된 등대를 10~15km 거리마다 세우고 신호기의 움직임에 알파벳을 배당하여 통신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으로, 나폴레옹 1세가 이를 채택한 후 전신기가 보급되는 1840년대까지 서유럽 전역에 널리 보급되어 통신망으로 활용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워털루 전투 결과를 이 시스템으로 미리 알아서 주가 조작을 했다던지,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백작이 복수를 위해 이 시스템 신호수를 매수하여 거짓 정보를 주식시장에 흘리는 묘사가 나온다. 그래서 이 시대를 다룬 소설에서 telegraph라는 단어가 나오면 모스 전신기가 아니라 이 세마포어 통신기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7]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전신〉, 《네이버 국어사전》
- 〈전신〉, 《나무위키》
- 〈전신〉, 《위키백과》
- 〈유선 전신〉, 《전기용어사전》
- 〈유선 통신〉, 《전자용어사전》
- 〈유선통신〉, 《두산백과》
- 〈전신〉, 《통신 역사》
- 〈전신기〉, 《나무위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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