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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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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板屋船)

판옥선(板屋船)은 조선시대 명종 때 개발한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전투선으로 노를 젓는 노꾼은 1층 전투원은 2층에 배치하였다. 조선시대 당시는 판옥선보다는 전선(戰船)이라 불렀다.

판옥선의 체제에 관해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보이는 "李恒福曰 我國戰船 上設板屋 周以防牌 用夫一百餘名儼然 爲一少城堡"라는 기록에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2021년 10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연구 및 복원 작업이 완료됨에 따라, 판옥선의 제원은 길이 32.16m, 너비 5.56m, 선체 중량 140.3톤이며 내부에는 화장실과 부엌과 같은 시설도 구비되었음이 밝혀졌다.

개요[편집]

판옥선은 조선 시대의 군함으로, 조선 수군의 주력함이었다. 당시에는 전선(戰船), 판옥전선(板屋戰船)이라고도 불리었다. 총통과 신기전 등 화약 무기를 이용한 원거리 함포전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

1555년(명종 10년) 을묘왜변 직후 기존 전선인 맹선의 한계가 지적되었고, 이에 새로운 전선 개발의 필요성을 느껴 고려시대 주력 함선인 누전선을 개조하여 건조하였다. 최초 설계자는 당시 정극인의 5세손이자 전라남도 진도군 남도포 만호였던 정걸(丁傑, 1516-1597)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사후에는 나대용 등이 전선 연구를 계승하였다.

판옥선의 '판옥'이란 널빤지(판, 板) 위에 올린 망루(옥, 屋)나 장대를 의미한다. 즉 기존의 함선에 판(Plate)으로 한층 더 쌓고, 무관(武官)들의 지휘 및 전투용의 망루(Roof, Watchtower)를 올린 배라는 뜻이다.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군함의 지휘관이 서 있는 누각이 바로 판옥이다.

역사[편집]

임진왜란 중 크게 활약하였으며 뒤에 전선(戰船)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전투함으로 일명 판옥전선이라고도 한다. 조선 전기의 군선(軍船)은 문헌상으로 대맹선(大猛船)·중맹선·소맹선 등 세 종류로 나타나고 있으며, 각 진포에 배치되어 있던 척수는 대맹선 81척, 중맹선 195척, 소맹선 461척, 무군 소맹선(無軍小猛船) 245척 등 982척이었다.

그러나 이 맹선들은 원래 세조 때 군용과 조운(漕運)에 겸용할 수 있도록 규격을 통일한 일종의 병조선(兵漕船)이어서 몸집이 우둔하고 기동력도 부족해서 일찍부터 군용으로는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자자하였다. 중종과 명종대의 삼포왜란(三浦倭亂)·사량왜변(蛇梁倭變)·을묘왜변 때에도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하여 새로운 전투함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기운이 팽배하였다.

이런 가운데 1555년(명종 10) 아주 획기적이고 새로운 군함이 시험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판옥선이다. 중량 140.3톤, 너비 8.74미터, 높이 5.56미터, 길이 32.16미터의 규모를 갖추었다. 종래의 맹선은 선체 안에 병사들이 발을 붙이고 싸울 수 있도록 적당한 높이에 갑판을 깔고, 배를 움직이기 위하여 여러 개의 노를 달아 놓는 평선(平船)인 데 반하여, 판옥선은 여느 선체 위 전면에 걸쳐 상장(上粧)을 꾸려 2층으로 꾸민 옥선(屋船)이다. 그 구조는 하반부를 이루는 배의 하체와 그 위에 세운 상장부분으로 대별된다.

하체 부분은 10여 줄의 기다란 각재(角材)를 가지고 평탄하게 꾸민 두껍고 튼튼한 저판(底板, 또는 本板)을 밑에 놓고(그림에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本板不見이라 적혀 있음), 7줄의 외판(外板, 또는 杉板)을 양현(兩舷)에 세운다. 15줄의 참나무를 세로로 꾸며서 평면으로 만든 선수재를 선체의 전면에 세우고(그림에 飛荷眞板十五立이라고 되어 있음), 선체의 후면에도 선미재(船尾材)를 세워서 이들을 서로 고착시킨 다음, 그 위에 14개의 가목(駕木, 또는 梁)을 가로 걸치고, 그 바로 밑으로 내려가며 양현의 외판재마다 가룡목(加龍木)이라 부르는 부재로 연결하였다.

판옥전선에서 선체 위에 상장을 꾸민 모양은 가목 끝단에 연이어 앞뒤로 길게 현란(舷欄)을 놓고, 거기에 방패판을 사면에 둘러세워 그 상면에 현란과 평행하게 패란(牌欄)을 설치한 뒤, 패란을 기대로 하여 갑판을 깐다. 그리고 그 주변에 여장(女墻)이라 부르는 난간을 세우고 갑판 중앙에 따로 지휘소인 2층 누각을 설치하고 있다.

상장의 너비가 하체의 너비보다는 약간 넓어서 노는 그 사이를 통하여 밑으로 뻗어내려 있다. 판옥선은 가목 위에 깔아 놓은 배 안의 갑판과 상장 위에 깔아 놓은 상장 갑판의 두 개의 갑판을 가진 2층구조로 된 전투함이다. 그러므로 노역을 하는 격군(格軍)들은 아래 위 두 갑판 사이의 안전한 장소에서 적에게 노출되지 않은 채 안심하고 노를 젓고, 군사들은 상장갑판 위 넓고 높은 장소에 자리잡고 싸우기에 유리한 위치에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판옥선은 개발된 지 37년만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적을 여지없이 무찌르는 맹활약을 하였다. 당시 우리 수군의 전투함은 몇 척의 거북선을 제외하면 오직 판옥선뿐이었고, 나머지는 정원이 불과 몇 명뿐인 전투함의 부속선으로 시중을 든다든가 정탐을 하는 등 극히 작은 사후선(伺候船)이나 협선(挾船) 등이었다. 그러나 판옥선의 수는 임진왜란 전 기간을 통하여 매우 적었다.왜란이 발발한 직후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처음으로 출동한 옥포해전(玉浦海戰)에 동원된 것이 겨우 28척(그 중 4척은 경상우도의 것)이었고, 2차 출동인 당포해전(唐浦海戰) 때에 전라좌도 23척, 전라우도 25척, 경상우도 3척을 합한 51척, 부산해전 때에 전라 좌우도의 판옥선을 합하여 74척이었다.

1593년(선조 26) 8월 삼도의 판옥선이 겨우 100여 척에 이르고 각기 작은 배를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가장 척수가 많이 확보된 때도 180여 척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나 임진왜란의 여러 해전에서 압승을 거두고 그뒤에도 바다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판옥선이 매우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옥선의 장점은 견후장대하다는 것인데, 임진왜란 때에 이미 125명 이상의 군사를 수용한 그 크기는 종전에 기껏 80명을 정원으로 한 대맹선이나 일본 군선에 비할 바가 아니며, 그 구조도 튼튼하였다.

상장을 높게 2층으로 꾸며 놓은 판옥선의 장대한 선형은 노역을 전담하는 격군과 전투에 임하는 군사를 갈라 놓아 서로 소임을 다하는 데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중에 개발된 거북선의 모형(母型)이 되었고 조선 후기에도 주력함으로 남아 있었다. 거북선이 판옥선의 상장갑판 윗부분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둥그런 개판(蓋板)을 덮어 전사까지도 보호한 특수 군선이라는 점에서 조선 후기의 전선은 판옥선이 그대로 이름만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

설계 구조[편집]

조선 후기 각선도본에 그려진 판옥선.

맹선과 마찬가지로 판옥선도 배밑이 평평한 평저선이었다. 조선 초기 기준으로 판옥선중에서 가장 큰 상선(上船)은 크기가 19.7~21.2m, 일반적인 판옥선은 크기가 15.2~16.6m였다. 길이는 임진왜란~17세기 기준으로 대선은 본판(배밑)이 22.4m~23.17m, 상부는 26.13m~27.03m였으며, 차선은 배밑이 17.60m~20.68m, 상부는 20.53m~24.12m였다. 가장 작은 차차선은 배밑이 15.20m~20.2m, 상부는 17.73m~23m정도 되었다. 조선 후기 기준으로는 상선은 배밑이 27.7m, 상부는 32.8m였으며 일반 판옥선은 배밑 20.8m, 상부는 23.4m였다. 배수량은 불확실하나 최소 80톤~최대 280톤 내외로 추정된다.

구조를 보면 일단 네모진 통나무 15개를 이어 붙여 배밑을 만들고, 양현에 판재 7쪽 하나하나에 서양의 클링커 이음과 유사하게 턱을 따서 이를 짜맞춘 뒤 나무못을 박아 고정시켜 뱃전을 형성했다. 이물비우는 직판[3] 널빤지로 15쪽을 이어 붙이고 고물비우와 양현을 붙인 다음, 뱃전 위에 멍에를 걸고 그 위에 귀틀을 짜고 겻집을 깔아 1층 갑판을 만들었다. 노는 양쪽 뱃전에 있는 멍에 뺄목에 각각 9척씩 걸었다.

여기에 멍에 뺄목 위에 신방도리를 걸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다음, 상장 위에 이물과 양쪽 뱃전을 따라가면서 여장이 상장의 언방 위에 뱃집 멍에를 걸고 널빤지를 깔아 2층 갑판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일종의 지휘소인 장대와 이물돛대, 고물돛대가 있다. 이물돛대와 고물돛대는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게 장치가 되어 있었다. 고물꼬리에는 널판을 깔지 않고, 난간이 없이 비어 있다. 여기에 선미옥란을 설치해 대소변을 보거나 뭍에 오르내리게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갑판이 2중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요원인 격군(格軍)은 1층 갑판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고, 전투요원들은 2층 갑판에서 방해받지 않은 채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승선인원은 시대와 크기에 따라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명종실록에는 50여명이 탑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선조실록 1606년 12월 24일 기록에는 "거북선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의 숫자가 판옥선의 125명보다 많아 활을 쏘기에 불편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보통 선장 1명, 신호용 깃발로 신호를 다루는 기패관 2명, 선박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훈도 1명, 선박 창고를 관리하는 선직 2명, 항해 요원으로 추정되는 무상 2명, 키를 잡는 타공 2명, 돛줄을 조정하는 요수 2명, 닻을 다루는 정수 2명, 군졸들의 군기와 질서를 바로잡는 포도장 2명, 활을 쏘는 사부 18~22명, 화약과 탄 장전을 맡은 화포장 10~14명, 화포를 맡는 포수 24~26명, 노를 젓는 격군 100~120명이 승선했으며 조선 후기에 배가 커지면서 약 200명이 탑승한 경우도 있었다.

크기와 전투력[편집]

일단 크기는, 윗 문단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현대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물건으로 크기를 비교하자면, 지하철 전동차 2칸을 가로로 붙여 놓은 것이나 참수리급 고속정보다 길이가 조금 짧은 정도의 크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유럽의 전열함처럼 강력하고 거대한 선박들과 비교하며 혹평을 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지만 판옥선은 1500년대 초부터 활동했던 군함이고 전열함은 167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군함으로 둘 사이에는 100년이 넘는 시간 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어쨌든 1670년대까지도 조선의 주력 군함은 여전히 판옥선이었으므로 완전히 부당한 비교라고는 할 수 없다. 전열함의 전신이나 마찬가지인 3층갑판을 갖춘 대형 갤리온들도 이미 16세기 말에 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열함이 판옥선과 마주할 일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 보다 정확한 비교 대상은 일본과 중국의 함선들이다. 병기는 필요에 따라 개발되는데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이 소극적인 해상 정책을 펴는 통에 조선도 대형 함선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한반도의 해안은 생산력이 빈약한 동해안을 제외하면 서·남해안이 모두 넓은 갯벌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런 지형에서 대형 첨저선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대규모의 준설과 매립을 통한 항만시설 건설이 필요하니 평저선 운용에 비해 재원이 몇곱절로 든다. 서해안의 주요 항만들이 괜히 하나같이 강 하구에 모여있는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조선 수군의 작전반경은 연안, 아무리 멀어봐야 대마도 정도를 벗어날 이유가 없었고, 판옥선 역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한 연안 전용의 전투용 함선이 되었다. 따라서 동시기 서양의 갤리온같은 배보다 항해 성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나 일본의 함선보다 명백하게 더 컸다는 것을 보면 당대 동북아 3국의 함선 중에서는 제일 강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더 크게 만들 필요성이 없다 보니 19세기까지 큰 변화 없이 운용한게 문제라면 문제라 그렇지. 결국 본격적인 서양식 함선과 조우하자 그간 드러날 일이 없었던 약세가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다만 조선은 당시 여건상 해상무역이 활발하지 않았고 지키거나 침략할 해외영토도 없었다. 조선 수군의 목적은 오로지 방어였는데, 방어하기에 충분한 전력을 갖춘 상황에서 굳이 예산을 더 넣을 이유가 없었다. 유럽은 해군력에 투자한 만큼 해적질을 해서 충당하는 약탈경제를 굴릴 수 있었지만 조선은 해군력에 투자해 봐야 그 뿐이었던 것이다.

평저선은 대양에서는 풍랑에 취약하지만, 선회력이 매우 뛰어나다. 선회력이 좋다는 것은 배의 방향 전환에 필요한 회전 반경이 짧다는 것으로 암초가 많아서 좁고 물살이 거친 남서해안을 오다니기에 유리했다.

또한, 전통적인 한선답게 내구력에 모든 설계를 집중했다. 재현품들도 잘 보면 살벌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국가 함선과 비교했을 때, 구조적으로는 판옥선이 훨씬 튼튼한 경우가 많다. 쓰임새를 연안에서의 화포를 이용한 해전에만 한정해서 항해 목적보다는 전투를 위한 모든 기술을 때려박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항해기능 등 다른 기능을 생각한 목재선박이라면, 비슷한 체급일 때 판옥선보다 튼튼하기가 힘들다. 즉, 함포전시 교전능력과 튼튼함을 제외하면 항해성능은 매우 떨어졌고 오로지 수비 목적의 전투만을 위한 배로 만들어졌다.

또한 조선의 면포 생산력에 힘입에 치밀한 돛을 사용했는데, 이는 일본이 가지지 못한 산업 우위였다. 아직 면포가 대중화되지 못했던 일본은 빈약한 돛 탓에 대형선을 운용할 수 없었다.

단점[편집]

2층 구조이며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라, 제자리 선회력은 우수한 대신 항해 능력은 떨어진다. 노를 아무리 저어도 물의 저항을 정면에서 받기 때문에 왜선에 비해서는 속력이 현저히 느렸으며 선체 높이에 비해 흘수선이 상당히 낮고 무게중심이 높은 탓에,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는 풍랑을 만나면 쉽게 균형을 잃고 전복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초기 판옥선에는 달려 있지 않던 꼬리가 달려있는 것도 이 때문이며 때문에 임란 이후에는 2층 갑판의 방패판들을 착탈식으로 만들어, 유사시 떼어놓아 바람이 통과하도록 하여 폭풍에 저항성을 높여 보자는 논의가 있었다. 더욱이 평저선이라는 구조상 유체 저항이 커서 속도가 느리고, 운용 인원이 너무 많아서 대양에서 항해하기엔 부적합했다. 화포와 인원을 만재하면 대인원을 유지할 식량과 식수를 적재할 여력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반도 연안에서 싸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설계된 군함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실전에서 발목을 잡은 적은 드물었다. 유일하게 조선 수군이 패배한 해전인 칠천량 해전을 제외하면 함대를 이끌고 외해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더욱이 표해록에 나온 것처럼 밸러스트로 바닥에 짐을 두어 균형을 잡으면 풍랑 속에서도 좌초를 막을 수 있었기에 외해 항해가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으며, 사실 500년 전인지라 바닥이 첨저식이든 평저식이든 먼바다에 있는 풍랑을 만나면 위험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정크선 문서 주석에 나오듯, 첨저식 정크선 신주도 달랑 3m만 높이기만 해도 선원들이 '아놔 풍랑 만나면 대체 어쩌려고...' 하는 기록이 고려도경에 나온다.

건조와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목재의 양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도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건조에 들어가는 목재만 해도 숲이 사라질 정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이것은 함대를 유지할 때 목재 소비가 엄청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된다. 동아시아 선박의 건조 단계 중에는 유럽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열처리 단계가 없었다는 말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나, 거대 함선들을 마르고 닳도록 굴렸던 서양의 선박 보존 기술에 못 미쳤던 것은 사실이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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