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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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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선(兵船)

병선(兵船)은 전쟁에 필요한 장비를 갖춘 를 말한다. 조선시대 전선(戰船)의 한 가지로 수영에 딸린 작은 싸움배를 뜻하며 수군(水軍) 30명을 태울 수 있는 배인데, 소맹선(小猛船)이라고도 불렀다.

개요[편집]

병선은 조선후기 수군에 소속되어 전선 또는 방패선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한 무장선이다.

임진왜란 때에 사용된 대형 전투함인 판옥전선(板屋戰船)과 사후선(伺候船)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아, 임진왜란 이후 처음에는 잡용으로 쓰여지다가 점차로 전선(戰船) 또는 방패선(防牌船)의 보조적인 무장선으로 중용되기에 이른 군선이다.

조선 후기 수군에 있어서 군선 편제의 단위는 전선(또는 귀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나, 방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 또는 전선 1척, 방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 등으로서, 병선은 각 수군에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경무장선(輕武裝船)이었다. 전국에 배치되어 있는 병선은 1744년(영조 20)에 편찬된 『속대전』에 따르면 161척으로서 군선 총 척수 776척의 21%에 이르고 전선 117척과 방선 76척을 합한 척수에 맞먹는다.

병선에 대한 기록은 광해군 때부터 자주 나타나며 인조 때에는 이미 널리 보급되어 군무 외에도 미곡 운반 및 잡용에 쓰여지다가 점차로 군선으로서의 자리를 굳혀 숙종대에는 전선 또는 방선의 보조선으로의 자리를 굳혔다.

병선의 구조는 일곱 줄의 기다란 각재(角材)를 가지고 평탄하게 꾸민 저판(底板)을 밑에 놓고 그 위에 일곱 줄로 된 양현(兩舷)의 외판(外板)과 여섯 줄의 목재로 평탄하게 꾸민 선수재(船首材)와 선미재(船尾材)를 각각 세워서 서로 고착시켰다.

그리고 그 상면에 10개의 가목(駕木)을 가로 걸쳐서 고정하고, 그 밑으로 내려가며 외판조재(外板條材)마다 가룡목(加龍木)을 고착하여 선체를 꾸미고, 두 개의 돛대와 각 현 세 개씩 6개의 노(櫓)를 설치한 범노선(帆櫓船)이다. 저판(底板)을 기준으로 한 병선의 크기는 35∼45척이다.

병선의 탑승인원은 1704년(속종 30)의 『수군변통절목 水軍變通節目』에 의하면 다공(舵工) 1명, 포수(砲手) 2명, 노군(櫓軍) 14명 등 모두 17명이고, 정조 때의 『전라우수영지 全羅右水營誌』에서는 선장(船將) 1명, 사부(射夫) 10명, 포수 10명, 다공 1명, 노군 14명 등 모두 36명이라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병선의 크기와 무장은 반드시 일정한 것이 아니고, 앞의 것은 포수 2명 정도로 아주 경무장을 하고, 뒤의 것은 사부와 포수를 증원하여 방선에 가까울 정도의 무장을 한 경우이다. 조선 후기에는 각종 군선에 대한 논란이 심하였는데도 병선만큼은 시종군무 외에도 군량미와 진휼미(賑恤米)의 수송 및 기타의 잡용 등에 활발히 이용되면서 조선 말기까지 연명하였다.

용도[편집]

이 배는 곡물 즉, 진휼미(賑恤米)의 운송에도 종종 이용되었는데, 운반능력은 200석 안팎이었다.병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한 시기인 광해군 때에 비로소 등장하는데, 인조(仁祖)무렵까지도 군용보다는 곡물을 운송용으로 이용되다가 점차 군선으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임진왜란 때에 조선 수군은 경상·전라·충청 등 삼남(三南)의 함선이 통제사 밑에 한데 뭉쳐 연합함대와 같은 편성으로 남해 일대의 해역에서 작전을 전개하였으므로 배의 종류도 판옥선(板屋船)과 같은 전열함(戰列艦)만으로도 족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나고 평화체제에 들어서자 연해의 일정한 구역을 순찰하고 경비하는데 병선과 같은 소형무장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수량[편집]

전국에 배치되어 있는 병선은 영조 20년(1744)에 편찬된 <<속대전>> 에 의하면 161척으로 군선 총척수 776척의 21%에 이르고 전선 117척과 방선(防船) 76척을 합한 척수에 맞먹을 만큼 많았다.병선의 탑승인원은 숙종 30년(1704)의 <<수군변통절목(水軍變通節目)>>에서는 타공(駝工) 1명, 포수(砲手) 2명, 노군(櫓軍) 14명 등 모두 17명으로 경무장을 하였고, 정조 때의 <<전라우수영지(全羅右水營誌)>> 에서는 선장 1명, 사부(射夫)10명, 포수 10명, 타공 1명, 노군 14명 등 36명으로 방선만큼 무장한 경우도 있었다. 병선은 조선 후기까지 군선으로서 또는 곡물 운반용으로 꾸준히 오랫동안 이용되었다.

소재[편집]

조선은 2, 3차 대마도원정을 통해 왜구를 선제 제압하기도 했지만, 삼포왜란, 을묘왜변 등을 겪으며 왜구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이어갔다.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결과적으로 승리는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돌아갔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일본과의 '군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거북선 등 전함의 재료로 소나무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의 거북선과 맞섰던 왜군의 안택선은, 구조상 빠른 속력을 낼 수 있는 장점을 지녀 주력 함선으로 쓰였다. 그러나 이 배는 조선 수군의 거북선과 충돌 시 쉽게 부서졌다. 거북선이 소나무로 만들어진 반면, 안택선은 상대적으로 재질이 무른 삼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병선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 수군은, 이처럼 소나무라는 우수한 재료와 이순신이 발휘한 지략의 화학작용을 통해, 막강한 병력의 일본 수군에게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1593년(선조 26) 11월까지 자신의 관할인 전라좌도에서 60척, 전라우도에서 90척, 충청도에서 60척, 경상도에서 40척 등 총 250척의 전선을 만들고 동수의 사후선도 건조하였다.

각 도의 수영에는 전선·방선·병선 등의 배들이 소속되었는데, 수영에 따라 각기 선박을 개조해야 할 시기가 정해져 있었다. 병선 건조에 가장 알맞은 목재는 소나무였으므로 일정한 지역에 채벌금지구역을 설정하고 그것을 감시 관리하는 일들도 수군진영들에서 맡아하도록 하였다. 수영소속 고을들에서는 자기 힘으로 건조하지 못할 때 쌀·천·돈을 양인들에게서 거두어 수영소속 장공인들 또는 선박건조업자들에게 위임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배를 만들 수 있는 소나무가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승리도 없을 것이란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보면 소나무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된다.

판옥선[편집]

판옥선(板屋船)은 조선시대 명종 때 개발한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전투선으로 노를 젓는 노꾼은 1층 전투원은 2층에 배치하였다. 조선시대 당시는 판옥선보다는 전선(戰船)이라 불렀다.

판옥선의 체제에 관해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보이는 "李恒福曰 我國戰船 上設板屋 周以防牌 用夫一百餘名儼然 爲一少城堡"라는 기록에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2021년 10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연구 및 복원 작업이 완료됨에 따라, 판옥선의 제원은 길이 32.16m, 너비 5.56m, 선체 중량 140.3톤이며 내부에는 화장실과 부엌과 같은 시설도 구비되었음이 밝혀졌다.

거북선[편집]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조선 수군의 거북 모양의 군함이다. 귀선(龜船)이라고 한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기본으로 하여 판옥선의 갑판 위 외형 전체에 뚜껑을 씌운 뒤 나무판으로 덮은 배다. 주로 나무판이 아니라 철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비용적인 문제나 바닷물에 녹슬기 쉬운 것을 감안 할 경우 나무판이라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배는 매우 얇아 삼나무 목재선을 사용하여도 전투에 문제가 없었다. 또한 이 나무판에는 적병이 못 뛰어오르도록 무수한 송곳과 칼을 꽂았었다. 선수부에는 거북머리를 구조하여 그 곳에서 전면부로 화포를 쏘게 했고 선미부에는 거북이 꼬리를 세우고 역시 화포를 쏘았다. 결국 거북선은 완전 무장으로 승조원을 보호한 채 안전한 곳에서 앞뒤와 선체 측면의 포문으로 전후좌우 각각 6개씩 화포를 발사할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지휘관 이순신이 임진왜란 직전에 건조하여 임진왜란 중 사천 해전에서 첫 출전한 이래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일본 수군과의 16전에서 16승을 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일본 수군의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거북선을 한자로 귀선(龜船)으로 표기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인들에게는 샤치호코(鯱, 상상의 동물)와 닮은 보쿠카이센 혹은 깃카이센, 기카이센(亀甲船)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1597년 음력 7월 16일 새벽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모두 침몰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당시와 비교해서 모양과 크기가 조금씩 변형되었다.

1973년 9월 대한민국에서는 500원권 지폐의 앞면에 이순신과 거북선을, 뒷면에는 현충사를 도안으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1966년 이후로 발행된 5원 동전 앞면에도 거북선이 도안되었다. 옥포대첩에는 나가지 않았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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