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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로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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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로이스(Henry Royce)
롤스로이스(Rolls-Royce Motor Cars Limited)
비엠더블유(BMW, Bayerische Motoren Werke)

헨리 로이스(Henry Royce)는 독일의 비엠더블유(BMW) 그룹 산하의 최고급 수공 자동차 제조사 브랜드인 롤스로이스(Rolls-Royce)의 창업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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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헨리 로이스는 1863년 3월 27일 영국의 링컨셔에서 가난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는 단 1년밖에 받지 못했으며 9살 때부터 신문팔이, 전보 보내기 등 일을 하며 고학으로 전기 기술을 배웠다. 1878년 피터 버러에 있는 철도국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하고 증기기관차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1884년 20세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딴 기구 제조 업체 FH 로이스를 맨체스터에 설립하고 다른 회사 제품에 사용되는 필라멘트와 램프 홀더를 주문받아 생산하였으며 1894년 불꽃이 흩어지지 않는 안전한 발전기와 모터를 개발하는데 성공하며 당시에 널리 사용되던 증기 및 수동 크레인에 비해 훨씬 더 편리한 전기 크레인을 새로 개발하여 큰 인기와 높은 수익을 얻었다. 1902년 오랜 과로로 컨디션이 좋지 않아 요양을 권고받았으나 로이스는 요양 중 프랑스 드코비루 제의 가솔린 자동차 12HP를 구입하였으나 이차는 자주 고장을 일으켜 여러 차례 수리를 거듭해도 더 이상 성능 향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자동차의 장래성에 주목하고 스스로 자동차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1904년 완성된 10HP는 플랫헤드 직렬 2기통 1,800cc 엔진을 전방에 탑재하고 3단 변속기와 프로펠러 샤프트를 통해 후륜을 구동하는 방식이었다. 이차는 탄탄하고 운전하기 쉬우며 매우 부드럽고 안정적인 주행성능을 보여 실용 면에서도 충분한 신뢰성을 가지고 있었다. 메커니즘은 단순하고 안정적인 방법을 적용한 토렌부라 고압 코일과 배터리를 결합한 점화 시스템, 정교한 기화기 등은 당시에 가장 진보된 설계였다. 4월 1일 실시한 테스트 드라이브에서 26.5km/h의 속도로 233km를 주행하였다. 1904년 5월 맨체스터 미들랜드 호텔에서 찰스 롤스는 10HP를 타고 온 헨리 로이스를 만났고 자동차에 시승하고 그 성능에 감동하여 로이스 자동차 판매를 혼자 맞고 싶다고 이후 서로 손잡고 고성능 차량 개발에 기여하였다. 로이스는 1904년부터 2기통 10HP와 기통 수를 늘리고 연장한 3기통 15HP, 4기통 20HP, 6기통 30HP를 제작하면서 당시 영국 자동차 업계에서 성능으로 뚜렷한 존재로 주목받아 자동차 선진국인 프랑스 파리 전시회에서 높이 평가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06년 정식으로 롤스로이스 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907년 세계 최고의 차로 인정받은 실버고스트를 출시했다. 하지만 이 시기 롤스로이스는 비극을 겪게 된다. 롤스와 로이스는 라이트형제가 제작한 최초의 비행기를 구입해 도버해협 왕복 비행에 성공하는 등 비행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1910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롤스는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게 되고 1911년 헨리 로이스는 대장암으로 앓아 수술을 받고 이후 평생 인공 항문을 장착하여 예전과 같은 업무에 어렵게 되었다. 충격을 받은 로이스는 시골로 내려가 더비와 크로에 공장을 세우고 요양과 디자인에 전념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영국군은 롤스 로이스에게 항공용 엔진 개발을 제의했다. 로이스는 다임러의 엔진을 참고로 SOHC기구를 탑재한 직렬형 수랭 비행기용 70HP 엔진 호크를 개발하였다. 당시 나온 디자인이 파르테논신전을 본떠만든 롤스로이스의 그릴이다. 1925에는 팬텀이 세상으로 나왔다. 실버고스트에 오버헤드 밸브 엔진을 장착하여 뛰어난 성능을 선보인 차량이었다. 보어와 스트로크를 늘려 배기량을 증가시켰으며 알루미늄 실린더 헤드, 4륜 서보 브레이크 시스템, 유압식 쇼크업소버(충격 완화장치)를 갖췄다. 실버고스트와 팬텀에 이어 롤스로이스는 실버 던, 실버클라우드, 실버섀도우 등 다양한 모델을 내놨다.[1]

롤스로이스가 설립된 후 로이스는 공장에서 밤을 새우기 일쑤이며 식사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차 제작에 몰두하여 1911년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의사의 충고로 프랑스의 시골마을에서 요양을 하였다. 그는 일에서 손을 떼고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요양하면서 1930년 헨리 로이스는 영국 왕실로부터 준 남작 지위를 받고 1931년 경제 공황으로 파산 위기를 맞은 벤틀리를 인수하였으며 1933년 4월 22일 사망할 때까지 22년간 자동차 디자인을 계속하였다.[2]

주요 활동[편집]

롤스로이스 실버고스트(1907~1925)
1925년 출시된 팬텀

실버고스트[편집]

1906년 헨리 로이스는 기존의 30HP를 대체할 모델로 신형 6기통 차량을 개방하였으며 40/50HP 형식으로 발표된 이 모델은 롤스로이스의 세계적인 명성을 확립한 명차로 알려져 있다. 보수적인 설계를 하면서 토탈 밸런스에 대한 철저한 배려와 좋은 재료와 높은 공작 정밀도로 제작된 7,000cc급 신형 차량은 당시 자동차 중에서도 뛰어나고 정숙하고 부드러운 주행성능과 우수한 내구성을 갖고 있었다. 1907년 롤스로이스가 설립된 지 1년 만에 출시하였으며 차량의 이름은 뭔래 40/50이었지만 밤에 소리 없이 부드럽게 달리는 모습이 마치 은빛 유령 같다는 이유로 실버고스트로 불렀다. 1907년 처음 탄생한 실버고스트는 1912년 배기량 확대 등 마이너 체인지를 추가하며 1925년까지 7,870대가 생산되었다. 이차는 떠다니는 듯한 승차감을 구현해 내고 세계적인 광고 거물 오길비는 실버고스트에 대해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신형 롤스로이스에서 들리는 가장 큰 소리는 전자시계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를 남기기도 하였다.[3]

팬텀[편집]

팬텀은 실버고스트를 기반으로 1925에는 출시하였으며 세계 최고의 차라는 명성을 받았다. 실버고스트에 오버헤드 밸브 엔진을 장착하고 뛰어난 성능을 선보인 차량이었다. 팬텀은 당시 V12기통을 처음 장착하고 최대 출력 167마력 7,338cc의 배기량을 내뿜었으며 보어와 스트로크를 늘려 배기량을 증가시켰으며 알루미늄 실린더 헤드, 4륜 서보 브레이크 시스템, 유압식 쇼크업소버(충격완화장치)를 갖췄다. 1931년까지 총 3,512대가 생산되었으며 리무진 모델은 7명까지 탑승할 수 있었다.

각주[편집]

  1. kmozzart, 〈롤스로이스〉, 《다음 블로그》, 2020-10-07
  2. 클래식 카의 정체가.. 최후의 롤스로이스〉, 《남자들의 자동차》, 2020-11-27
  3.  〈(車블랙박스)귀족 '롤스'와 사환 '로이스'가 탄생시킨 명차〉, 《뉴시스통신사》, 2020-01-07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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