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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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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선(奴隸船). 노예들이 포개진 상태로 있는 모습(위) 노예들을 갑판에 데리고 나와서 강제로 춤을 추게 했다. 그래야만 노예들이 목숨을 잃지 않고 대서양을 건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래오른쪽) 노예들이 떼로 봉기하여 선원들과 충돌하는 일이 일어났다.(아래왼쪽)

노예선(奴隸船)은 노예, 특히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노예를 수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수하게 개조된 대형 화물선이다. 노예선의 주요 항로는 아프리카의 북중부 해안에서 카리브 해 남부 및 미국으로 가는 항로이다. 약 2000만 명에 이르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배를 통해 수송되었다. 1807년 영국과 미국이 합동으로 통과시킨 법안에 의하여 두 나라에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불법화되었고, 미국 쪽의 법안은 1808년 1월 1일 발효되었다. 1815년 빈 회의 결과로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도 노예 무역을 중단하였다.

유럽에서 아메리카를 발견한 직후 플랜테이션 노동자를 구하기 위한 노예 무역이 시작되었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영국이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노예 무역이 정점을 이루었다.

노예를 대량으로 탑승시켜 최대한의 이익을 취하고,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라 통제하기 쉽기 때문에 탑승한 노예들은 주로 배 밑바닥에 실렸다. 비위생적인 조건, 탈수, 이질, 괴혈병 때문에 평균 15%, 최대 33%까지의 치사율을 기록하였다. 신체적으로 상당히 건강한 노예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개의 노예들은 사슬에 묶인 채로 다량으로 탑승하였고,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지 못하였다.

또한 가격을 책정하기 위한 신체검사 및 기생충 방지를 위하여 노예들은 발가벗겨진 채 노예선에 탑승되었으며, 남녀 간의 접촉을 막기 위해 따로 분리를 해서 탑승시켰다.

중간항해[편집]

4층갑판짜리 노예선의 설계도. 새까만 막대 하나하나가 흑인 노예 한 명 한 명이다.

아프리카 해안에서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까지 흑인 노예들을 강제 운송하는 단계를 ‘중간항해’(middle passage)라 한다. 이 항해는 대체로 50~80일 정도 걸리지만 길면 6개월까지 걸리는 수도 있었다. 이미 아프리카 내륙 지방에서 해안까지 먼 거리를 끌려와서 몹시 쇠약해진 이 사람들이 다시 장기간 배를 타는 것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노예무역에 사용되는 배들은 대개 100~300톤 급의 소형 선박들이었는데, 오직 상업 이익만을 고려하는 상인들은 이 작은 배 안에 가능한 한 많은 노예들을 태우려고 했다. 심한 경우에는 배 밑바닥의 짐칸에 500명의 노예들이 꾸역꾸역 채워지기도 해서, 마치 통조림 속의 정어리처럼 포개져서 바다를 건너야 했다. 대서양을 넘는 노예무역선은 그야말로 바다 위에 떠다니는 지옥이었다.

사슬, 족쇄, 촛불이 꺼질 정도의 산소부족, 식수부족, 탈수증, 전염병, 악취, 죽음의 공포, 범벅이 된 토사물과 용변, 채찍세례에 밀려 추는 춤, 저항하면 가차없이 잘리는 손발…그들은 배가 위험해지면 바다에 던져버리는 '상품'이자 '화물'이자 '말'이었다.

중간항해가 실제로 어땠는지 증언해 주는 자료는 여럿 있다. 그 가운데 알론소 데 산도발이라는 사람은 17세기 초에 노예무역선의 사정을 자세히 관찰하고 노예들과 인터뷰한 결과까지 기록해 두어서 노예무역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노예들은 배 밑바닥 선창에서 6명씩 긴 사슬로 묶이고 다시 두 사람씩 발에 족쇄를 찼다. 선창의 공기는 너무 탁해서 이곳에 촛불을 켜 들고 들어가면 산소 부족으로 불이 꺼질 정도였다. 따라서 노예들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끔씩 갑판으로 데리고 나와서 운동을 시켜야 했다. 이것은 물론 인도적인 의도가 아니라 단지 값비싼 ‘화물’을 안전하게 수송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일이었으므로, 채찍을 휘두르며 강제로 춤을 추도록 하는 가혹행위에 가까웠다.

310만명 중 40만명이 항해 중 죽어

당시 항해 중 노예 사망률은 20%나 되었다. 주로 이질 같은 수인성전염병이 원인이었다. 영국이 직접 판 노예가 310만명인데 그중 270만명만 도착했다는 통계도 있다. 결국 40만명이 항해 중에 죽었다는 말이다. 심한 경우는 노예의 반이 항해 중에 죽기도 했다. 그러나 노예상인의 손해는 없었다. 많이 죽으면 죽은 대로 살아남은 노예가 건강함을 인정받아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아주 심한 가뭄이 들어 포도 수확이 줄어든 해는 포도 당도가 높아져 포도주 값이 많이 올라 손해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악명 높았던 영국의 노예선은 배 한 척에 400~500명을 실었는데 가로×세로 130×160㎝ 공간에 한 명이 할당되었다. 돌아누울 공간도 없었다. 승객 6명을 싣던 6t의 유람선이 30명의 노예를 실어 날랐다는 기록에 견주어 보면 566t의 배는 100명의 선원과 700명의 노예를 싣고 다녔다. 267t의 배에 609명의 노예를 실어 1t당 2.3명을 실은 기록도 있다. 결국 1788년 영국에서 '돌벤법'이 제정되었다. 선박 1t당 노예 1명만 싣게 노예선의 환경을 법으로 정한 것이다. 법 개정 전에는 600여명의 노예를 싣고 다니던 배가 이 법으로 인해 454명만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출발 전 항구에서 노예 숫자를 확인했고 도착지에서도 확인했다. 그러나 관리를 매수해서 노예를 더 싣고 가도 중간에 사망하니 도착해 확인할 때는 법정 숫자에 가까워 문제가 생길 리 없었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1500년대부터 1800년까지 5만4000차 노예선이 1250만명의 노예를 실어 날랐는데 그중 무려 180만명이 항해 중에 죽었다. 1700년대 100년간 노예무역 호황기에만 600만명을 실어 날랐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노예 가격은 모든 상품 가격과 같은 원칙에 의해 결정되었다. 수요와 공급, 시장 상황에 따라 가격 변동이 있었다. 일단 젊고 건강하고 강한 노예가 최고의 가치를 누렸다. 노예 수요는 많은데 운송이 원활치 않아 공급이 달리면 가격이 올라갔다. 1860년 미국 버지니아 노예상인의 재고 목록을 보면 20살의 특급 남자(extra men) 노예는 1500~1600달러(현재 가치 5400만~5800만원), 특급 여자는 1275~1975달러(4600만~4800만원), 1급 남자 노예는 1400~1500달러(5000만~5400만원), 1급 여자 노예는 1275~1325달러(4600만~4800만원)의 가격이었다. 생각보다 고가였지만 따지고 보면 거의 30~40년을 부려먹을 수 있으니 다른 가축들보다는 훨씬 유용했다.

물론 노예 가격에도 엄격한 기준이 있었다. P는 노예 가격, k는 노예로 일한 연수, H는 20~50세까지 노예의 1년 임대료, N은 연중에 살아 있는 노예 숫자, r은 이자율 등을 엄밀하게 계산해서 가격을 매겼다. 1750년대 영국의 노예 가격은 미국에 비하면 훨씬 저렴한 편이었다. 손 하나를 덜 거친 탓이었다. 예를 들면 25세의 건장한 남성 노예는 1만6300파운드(2500만원), 요리와 세탁을 할 수 있는 45세 여성 노예는 7000파운드(1000만원) 정도였다. 한 노예상인이 가진 54명의 노예 재고 가치가 현재 화폐 가치로 50만파운드(7억5000만원), 평균으로 따지면 한 명당 1380만원이었다는 기록도 있다.[1] [2]

동영상[편집]

노예무역의 거점도시, 리버풀에는 노예선이 1700년에 16척, 한 세기 동안 132척으로 늘어났다/1781년 노예선 브룩스호의 단면도

각주[편집]

  1. 서양사 서울대 교수, 〈노예선에 쟁여진 사람들 지옥을 항해하다〉, 《한겨레》, 2008-06-13
  2.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런던 통신) 플로이드의 죽음이 불러낸 영국의 原罪… 노예선에서 무슨 일이?〉, 《주간조선》, 2020-07-02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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