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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데이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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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데이비슨(Arthur Davidson)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

아서 데이비슨(Arthur Davidson)은 미국의 모터사이클 제조 회사인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의 설립자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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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아서 데이비슨은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1881년 2월 11일 윌리엄 C 데이비슨과 마가렛 아담스 맥팔레 사이에 탄생했으며 형제는 5명이었다. 1903년에 데이비슨은 윌리엄 할리와 사업을 시작하여 처음에는 부족한 자본 때문에 가족 창고에서 사업을 시작하여 오토바이를 제작했다. 데이비슨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는 위스콘신 황야에서 낚시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는 자전거 페달을 밟는 일에서 힘들다고 생각하여 훨씬 더 편리한 동력 엔진을 가진 오토바이를 만들기로 생각한 것이 지금의 할리데이비슨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이비슨의 특징으로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담꾼이었으며 세일즈맨이자 미국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애국자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데이비슨과 할리데이비슨은 미군을 지원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생산하였다. 이러한 데이비슨은 1950년 12월 30일 데이비슨의 집에서 남쪽으로 4.8km 떨어진 위스콘신주 위스콘신 59번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인하여 동승하고 있던 아내와 함께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주요 활동[편집]

1차 세계대전 당시 군에서 사용했던 오토바이

아서 데이비슨과 윌리엄 할리는 미국 위시콘신주 밀워키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이웃에 살며 학교도 같이 다닌 단짝 친구이며 미국 전역에서 열풍을 일으킨 발명품인 자전거 마니아였다. 1901년 아서가 자전거를 타고 낚시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몸이 너무 피곤해 페달 밟는 것조차 귀찮고 힘들게 느껴졌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힘들게 페달을 밟을 필요 없는 자전거를 만들자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전기 모터 회사에서 도면을 그리던 할리에게 동업을 제안하였다. 할리가 설계도를 그렸고 같은 전기 모터 회사에서 목형 일을 하던 데이비슨이 지하방에서 조립을 도왔다. 1902년 아서 데이비슨이 도움을 청하자 정비공이었던 작은형 월터 데이비슨(Walter Davidson)은 회사를 그만두고 가담하고 1907년 큰형과 아버지까지 끼어들었다. 그들이 제작한 첫 번째 오토바이는 자전거에 116cc 단기통 엔진을 얹은 단순한 구조였으며 피스톤이 크랭크축을 왕복시켜 지름 10cm의 플라이휠을 돌려 바퀴로 회전력을 전달하였다. 첫 모델은 평지에서 시속 40km 남짓한 속도밖에 내지 못하는 데다 언덕을 오를 때는 출력이 모자라 열심히 페달을 밟아야 했다. 실망이 컸던 그들은 1년 넘게 만든 첫 작품을 박살 내버렸다. 더 큰 엔진을 얹으려고 크고 튼튼한 프레임을 골라 더 강한 405cc 엔진과 지름이 25cm인 플라이휠을 장착하여 만든 두 번째 오토바이는 높이가 3m, 길이가 4.6m에 달하였지만 1904년 밀워키 주립공원에서 열린 경주 대회에서 4위를 차지했다.[2]

아서 데이비슨은 1903년 윌리엄 할리와 할리데이비슨을 설립하고 데이비슨의 차고를 공장으로 삼아 오토바이를 생산하였으며 할리는 디자인, 아서는 주형, 월터는 정비를 맡아 첫해에 3대, 이듬해에 4대를 제작해 전부 팔았으며 데이비슨의 아버지가 뒤뜰에 차고를 새로 지어주고 큰형 윌리엄 데이비슨(Willaim A. Davidson)이 가담하면서 회사는 점점 그럴듯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으며 윌터가 사장, 아서는 총무와 영업, 할리는 설계와 회계, 윌리엄은 작업반장을 도맡았다. 오토바이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1909년 실린더 두 개를 45도 각도로 기울여 V자 모양으로 연결한 V-트윈 엔진을 개발하였으며 배기량이 880cc, 최고 속도 96km인 오토바이를 제작하였으며 안장을 차체에 고정하지 않고 스프링으로 지탱하는 방식으로 제작해 운전자의 몸집이나 몸무게에 따라 안장이 편안하게 조정되고 덜컹거리는 충격이 덜하도록 만들었으며 물방울처럼 생긴 연료탱크에 빠르게 정지할 수 있는 앞 브레이크를 달아 승차감과 기동성을 보강했다. 1908년 할리데이비슨의 첫 대표이사인 월터 데이비슨은 뉴욕에서 열린 아메리카 모터사이클에 직접 레이서로 나서 우승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할리데이비슨의 성장을 폭주하게 하였으며 미국 육군은 멕시코 혁명을 일으켜 말을 타고 국경 부근에서 소동을 벌이던 판초 비야의 혁명군과 싸우기 위해 1916년 기동성이 좋은 오토바이를 요청하였으며 창업 멤버들은 사이드카를 달고 기관총을 얹은 군용 모델을 개발해 존 퍼싱 장군이 전과를 올리는데 기여했다. 멕시코 혁명군 토벌로 미군 육군의 신뢰를 얻은 할리데이비슨은 제1차 세계 대전에 2만 대, 제2차 세계 대전에 9만 대의 군용 오토바이를 납품해 연합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할리데이비슨은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 1920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모터사이클 제조회사로 되었으며 67개 나라에 2,000개의 딜러를 확보하였다.[3]

각주[편집]

  1. "Arthur Davidson(motorcycling)", "wikipedia"
  2. 허대리, 〈100년을 뛰어넘은 할리데이비슨 1903년 부터 1910년 까지 이어지는 역사이야기〉, 《다음 카페》, 2019-01-17
  3. 허두영, 〈명품 불멸의 법칙〉, 《Google 도서》, 2018-02-02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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