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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릴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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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릴런드(Henry Leland)
캐딜락(Cadillac)
링컨(Lincoln)

헨리 릴런드(Henry Leland)는 미국 제너럴모터스 산하의 자동차 브랜드 캐딜락(Cadillac)의 창시자이며 포드의 고급 브랜드인 링컨(Lincoln)의 창시자이다.[1] 헨리 릴랜드라고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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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헨리 릴런드는 1843년 영국에서 이민 온 소장수의 아들로 미국 버몬트(Vermont)에서 태어났다. 12살 때부터 정밀가공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릴런드는 24세 때 자신의 정밀가공공장을 디트로이트에 세워 부와 명성을 얻었다. 젊었을 때부터 익혔던 전문 기술로 남북전쟁 중에는 총 제작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으며 그 후 1/1000인치의 정확도를 낼 수 있는 기술로 이발용 기계를 제작하였다. 24세가 되던 1867년에는 디트로이트에 기계공장을 세우고 올즈모빌(Oldsmobile) 설립자인 랜섬 올즈(Ransom Olds)에게 부품을 납품하기도 하였는데 1/1000의 오차까지 잡아내는 정밀한 기어를 공급해 능력을 인정받고 올즈모빌로부터 엔진과 변속기 주문을 받아 기반을 다져나갔다. 1901년 10.25마력의 엔진을 만드는데 성공했으나 올즈가 받아들이지 않자 정밀 기술의 대가였던 헨리 릴런드는 같은 모델인 경우 부속품을 서로 바꿔 끼워도 문제없는 부품 호환성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마침 헨리 포드가 세웠던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자금난으로 매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회사를 인수해 1902년 캐딜락회사를 설립하였다. 1909년 헨리 릴런드는 캐딜락을 제너럴모터스의 대표 브랜드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윌리엄 듀런트에게 매각한다. 그러나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비행기 엔진 개발 문제로 듀런트와 의견 충돌이 일어나 GM을 떠나고 아들 윌프레드(Wilfred)와 함께 비행기 엔진 회사를 설립하였고 1919년에는 자동차 제작으로 업종을 바꾸고 회사 이름을 링컨이라 정한다. 이듬해에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하고 첫차인 링컨 V8(Lincoln V8)을 내놓지만 차량 가격이 비싸서 시장의 호응을 못 얻고 회사는 재정난에 빠져 1922년 헨리 포드에게 이 회사를 매각하였으며 말년에는 사회보장 제도나 시민 문제에 관심이 많아 디트로이트 시민 연맹(Detroit Citizen League)를 설립하고 수년간 회장직을 맡아 활동했으며 후에 이 공로로 미시간대학(University of Michigan)과 버몬트대학(University of Vermont)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핸리 릴런드는 1932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활동[편집]

캐딜락[편집]

1903년 출시된 캐딜락 양산차

1902년 헨리 릴런드는 헨리 포드가 세웠던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자금난으로 매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회사를 인수해 캐딜락회사를 설립하였다. 캐딜락이라는 브랜드명은 디트로이트를 탄생시킨 앙트완 모스 카디야(Antoine de la Mothe Cadillac)경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캐딜락의 크레스트(Crest) 로고는 카디야 가문의 문장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헨리 릴런드는 첫 자동차를 만들었으며 이 자동차가 바로 그 유명한 캐딜락 1호차이다. 이차는 2인승 1기통 10마력 엔진으로 시속 48km를 달릴 수 있었으며 캐딜락은 부품 표준화를 향한 릴런드의 노력으로 부품 교체가 가능한 최초의 자동차였고 자동 시동기, 전기 전조등을 선구적으로 채택하였으며 1903년 뉴욕 모터쇼에서 출시하였다. 1907년 캐딜락은 세계 최초로 250개 자동차 부품을 표준화해 부품 호환이 가능하게 만들어 모델 S(Model S)를 출시하고 1908년 영국의 캐딜락 딜러인 프레드릭 바넷이 영국 황실자동차클럽에서 캐딜락 신차 3대를 분해하여 부품을 섞은 후 재조립해 800km를 쉬지 않고 달리는 데 성공하면서 캐딜락은 영국 황실이 수여하는 토마스 드와 트로피(Thomas Dewar Trophy)를 수상하고 캐딜락은 브랜드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세계의 표준(Standard of the World)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게 되었다. 설립 후 불과 6년 만에 캐딜락은 완전히 호환이 가능한 정밀 부품들을 소개하며 자동차 대량생산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 1909년 7월 29일 헨리 릴런드는 제너럴모터스에 캐딜락을 매각하였지만 1917년까지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10년 캐딜락은 모델 써티(Model Thirty)를 통해 시동을 거는 크랭크가 없는 차, 전기로 구동하는 시동 장치, 점화 장치와 전조등을 최초로 장착한 양산차를 소개했다. 이러한 혁신적인 기술들로 여성들에게 운전의 기회가 열렸을 뿐만 아니라 1913년 캐딜락은 다시 한번 드와 트로피를 수상했다. 영광스러운 상을 두 번이나 가져간 최초의 자동차 회사가 되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비행기 엔진 개발 문제로 윌리엄 듀런트와 의견 충돌이 일어나 회사를 떠났다.[2]

링컨[편집]

제너럴모터스를 떠난 헨리 릴런드는 1917년 아들 윌프레드와 비행기 엔진 제조업체인 링컨 자동차 회사(Lincoln Motor Company)를 정식 설립하였으며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이름에서 따왔다. 1919년 자동차 엔진을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링컨은 첫 모델 V8 엔진 L시리즈는 낮은 연비와 평범한 디자인으로 인해 반응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판매 부진으로 재정난에 빠져 포드에게 매각하였다. 당시 포드는 포드 T로 시장의 호평을 받고는 있었지만 고급차 시장에 내세울 만한 모델이 전혀 없었다. 이때부터 링컨은 포드의 고급차 브랜드로 이름을 알렸다. 링컨 인수후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가 최고급 세단의 제작을 맡아 아버지를 위해서 만든 차가 타운카다. 타운카는 아직까지도 유행을 타지 않는 미국의 럭셔리카로 군림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운전석이 외부에 노출이 되고 승객석은 분리가 됐다. 특히나 토머스 에디슨과 같은 저명인사들이 이 차를 탔다. 에드셀 포드가 링컨을 맡아 경영하면서 1922년 6월 헨리 릴런드는 자신이 만든 링컨에서 사임하고 회사를 나왔다.[3]

각주[편집]

  1. "Henry M. Leland", "wikipedia"
  2. 캐딜락〉, 《나무위키》
  3. 모비티, 〈미국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링컨의 역사〉, 《모비티》, 2017-04-05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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