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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 2세는 포드가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회사를 맡았으며 유럽의 공장들은 전쟁 중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미국 내 판매도 감소했다. 새로 취임한 헨리 포드 2세는 어린 시절의 행적으로 인해 주변의 걱정을 낳았지만 항상 업무에 진지한 자세로 임하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스스로 고치고 배우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이런 걱정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그는 어려워진 회사를 다시 일으키려고 전국의 포드 근로자들과의 만남을 가지며 주인 의식을 심어주는 한편 할아버지에 의해 시행했던 노사의 단절을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펼쳤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로 기존까지 회사의 강력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노동조합 설립을 협동적 노사관계를 바탕으로 추진하도록 하였으며 노조탄압으로 유명했던 인사부장을 해고하였다. 이런 행동을 통해 그동안 할아버지가 추구해온 독단적인 회사 운영방식과 다른 공동체적 운영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그중에는 미 공군의 유능한 시스템 분석가로 활동하던 로버트 맥너매러와 텍스 손턴이 있었으며 텍스 손턴은 포두의 구조와 관행을 척결하는데 앞장섰으며 로버트 맥너매러는 이후 포드의 사장 자리까지 오를 만큼 뛰어난 경영능력을 보여주었다.
 
헨리 포드 2세는 포드가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회사를 맡았으며 유럽의 공장들은 전쟁 중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미국 내 판매도 감소했다. 새로 취임한 헨리 포드 2세는 어린 시절의 행적으로 인해 주변의 걱정을 낳았지만 항상 업무에 진지한 자세로 임하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스스로 고치고 배우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이런 걱정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그는 어려워진 회사를 다시 일으키려고 전국의 포드 근로자들과의 만남을 가지며 주인 의식을 심어주는 한편 할아버지에 의해 시행했던 노사의 단절을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펼쳤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로 기존까지 회사의 강력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노동조합 설립을 협동적 노사관계를 바탕으로 추진하도록 하였으며 노조탄압으로 유명했던 인사부장을 해고하였다. 이런 행동을 통해 그동안 할아버지가 추구해온 독단적인 회사 운영방식과 다른 공동체적 운영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그중에는 미 공군의 유능한 시스템 분석가로 활동하던 로버트 맥너매러와 텍스 손턴이 있었으며 텍스 손턴은 포두의 구조와 관행을 척결하는데 앞장섰으며 로버트 맥너매러는 이후 포드의 사장 자리까지 오를 만큼 뛰어난 경영능력을 보여주었다.
  
헨리 포드 2세는 다양한 모델을 선보이며 재정난에 잇던 회사를 일으켰고 센더 버드와 머스탱과 같은 대 히트작을 발표해 회사의 큰 발전을 이뤄냈으며 회사 발전에 기여한 직원들에게는 보상을 잊지 않았으며 가족 경영으로 이어져 오던 회사를 자신이 물러나면서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는 등 이기심을 버린 과감한 기업'혁신을 마지막까지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헨리 포드 2세는 1980년 3월 13일 회장에서 사임하였으며 1987년 9월 29일 디트로이트에서 페렴으로 사망하였다.<ref>3snowman,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3snowman&logNo=60043216478&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민주적인 리더를 실현한 헨리 포드 2세 (Henry Ford II)]〉, 《네이버 블로그》, 2007-10-1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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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 2세는 다양한 모델을 선보이며 재정난에 잇던 회사를 일으켰고 센더 버드와 머스탱과 같은 대 히트작을 발표해 회사의 큰 발전을 이뤄냈으며 회사 발전에 기여한 직원들에게는 보상을 잊지 않았으며 가족 경영으로 이어져 오던 회사를 자신이 물러나면서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는 등 이기심을 버린 과감한 기업'혁신을 마지막까지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헨리 포드 2세는 1940년 첫 번째 부인인 앤 맥도넬(Anne McDonnell)과 결혼하여 샬롯 포드(Charlotte Ford), 앤 포드(Anne Ford), 에드셀 포드 2세(Edsel Ford II) 등 3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1964년 이혼하였다. 1965년 마리아 크리스티나 베토레(Maria Cristina Vettore)와 두 번째 결혼하고 1980년 이혼하였다. 1980년 캐슬린 듀로스(Kathleen DuRoss)와 세 번째 결혼하였다. 헨리 포드 2세는 1980년 3월 13일 회장에서 사임하였으며 1987년 9월 29일 디트로이트에서 페렴으로 사망하였다.<ref>3snowman,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3snowman&logNo=60043216478&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민주적인 리더를 실현한 헨리 포드 2세 (Henry Ford II)]〉, 《네이버 블로그》, 2007-10-15</ref>
  
 
==포드 GT 40==
 
==포드 GT 40==

2021년 4월 8일 (목) 10:05 판

헨리 포드 2세(Henry Ford II)
포드(FORD)

헨리 포드 2세(Henry Ford II)는 미국 자동차 회사인 포드(Ford)의 창업자인 헨리 포드(Henry Ford)의 손주이며 1945년부터 1979년까지 포드 사장, 1960년부터 1980년까지 포드 이사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6년 포드 회사는 헨리 포드 2세가 재임할 때 주식 상장기업이 되었다.[1]

개요

헨리 포드 2세는 1917년 9월 4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헨리 포드의 유일한 자녀인 에드셀 포드(Edsel Ford, 에셀 포드)이다. 헨리 포드 2세는 할아버지의 사업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 아버지 에드셀이 할아버지를 대신해 대표 자리에 오르게 되고 포드 2세 또한 아버지로부터 회사를 물려받고자 명문대인 예일대에 진학하였으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났던 탓인지 품행이 올바르지 못하여 시험지를 다른 학생에게 작성시킨 사실이 알려져 학교에서 퇴학 조치를 받았다. 이후 해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장교로 군복무를 이행하던 중 암으로 투병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1년 만에 병역 면제 대상으로 1943년 7월 군 생활을 마쳤다. 포드의 부사장이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영을 하려고 하였지만 할아버지인 헨리 포드가 다시 경영 일선에 참여하면서 2년이 지난 1945년 9월 21일 28세일 때 포드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헨리 포드 2세는 포드가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회사를 맡았으며 유럽의 공장들은 전쟁 중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미국 내 판매도 감소했다. 새로 취임한 헨리 포드 2세는 어린 시절의 행적으로 인해 주변의 걱정을 낳았지만 항상 업무에 진지한 자세로 임하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스스로 고치고 배우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이런 걱정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그는 어려워진 회사를 다시 일으키려고 전국의 포드 근로자들과의 만남을 가지며 주인 의식을 심어주는 한편 할아버지에 의해 시행했던 노사의 단절을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펼쳤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로 기존까지 회사의 강력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노동조합 설립을 협동적 노사관계를 바탕으로 추진하도록 하였으며 노조탄압으로 유명했던 인사부장을 해고하였다. 이런 행동을 통해 그동안 할아버지가 추구해온 독단적인 회사 운영방식과 다른 공동체적 운영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그중에는 미 공군의 유능한 시스템 분석가로 활동하던 로버트 맥너매러와 텍스 손턴이 있었으며 텍스 손턴은 포두의 구조와 관행을 척결하는데 앞장섰으며 로버트 맥너매러는 이후 포드의 사장 자리까지 오를 만큼 뛰어난 경영능력을 보여주었다.

헨리 포드 2세는 다양한 모델을 선보이며 재정난에 잇던 회사를 일으켰고 센더 버드와 머스탱과 같은 대 히트작을 발표해 회사의 큰 발전을 이뤄냈으며 회사 발전에 기여한 직원들에게는 보상을 잊지 않았으며 가족 경영으로 이어져 오던 회사를 자신이 물러나면서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는 등 이기심을 버린 과감한 기업'혁신을 마지막까지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헨리 포드 2세는 1940년 첫 번째 부인인 앤 맥도넬(Anne McDonnell)과 결혼하여 샬롯 포드(Charlotte Ford), 앤 포드(Anne Ford), 에드셀 포드 2세(Edsel Ford II) 등 3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1964년 이혼하였다. 1965년 마리아 크리스티나 베토레(Maria Cristina Vettore)와 두 번째 결혼하고 1980년 이혼하였다. 1980년 캐슬린 듀로스(Kathleen DuRoss)와 세 번째 결혼하였다. 헨리 포드 2세는 1980년 3월 13일 회장에서 사임하였으며 1987년 9월 29일 디트로이트에서 페렴으로 사망하였다.[2]

포드 GT 40

포드 GT 40 mk1

1960년대 자동차 모터스포츠 대회는 페라리포르쉐 등 유럽 메이커들의 독무대였으며 특히 페라리는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르망 24시(The 24 Hours of Le Mans) 경주대회에서 절대 강자였다. 페라리는 이 무대에서 1960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6년 연속 정상을 차지하였다. 포드는 1962년을 전후로 유럽의 르망 24시 경주대회 참여를 본격 타진하게 된다. 그러나 포드는 르망 24시 등의 내구레이스 분야를 잘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기술력에도 심각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엔 기존의 업체와 합작을 타진하게 되는데 대상이 된 메이커가 당시 르망 24시를 주름잡고 있던 페라리다.

1963년 5월 헨리 포드 2세를 위시한 포드는 내부적으로 자금 압박을 받고 있던 페라리의 엔쵸 페라리에 지분 매입을 통한 합작을 제안하였지만 엔쵸 페라리의 자동차 경주에 대한 집념은 남달랐으며 합작을 제안한 포드에 몇 가지 쉽지 않은 조건을 내세웠다. 특히 포드가 받아들일 수 없는 힘든 조건이 있었다. 레이싱에 참여한 페라리 차량에 포드 브랜드가 아닌 페라리 브랜드를 내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포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페라리의 기술을 등에 업고 르망 24시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려던 포드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포드에는 막대한 자금과 르망 24시를 제패하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포드는 페라리와의 합작 결렬 이후 곧바로 모터스포츠 기술이 가장 뛰어난 영국에 자회사인 포드 어드벤스드 비히클(Ford Advanced Vehicle)을 설립하고 연구인력과 자금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포드는 이후 영국에 기반을 둔 업체들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로터스(Lotus)와 쿠퍼(Cooper), 롤라(Lola) 등과 제휴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F1에 집중했던 로터스와 쿠퍼가 아닌 롤라사와 힘을 모으기로 한 포드는 영국 포드의 기술팀장인 영국인 로이 런(Roy Lunn)이 롤라사의 사장이자 기술자인 에릭 브레들리(Eric Broadley)와 합작하여 GT 40의 모체가 된 롤라 GT를 제작했다. GT 40은 롤라 GT를 토대로 차체가 낮고 세련된 유선형 디자인으로 변모했다. 1964년 4월 GT 40은 언론을 통해 외부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차체 중앙에 엔진을 둔 미드십 차량인 GT 40은 전체 높이가 40.5 인치(1.029m)라고 해서 40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GT(grand touring)는 장거리 여행에 적합한 고성능 스포츠카를 일컫는다. GT 40은 구겨진 포드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비장의 카드였다. 포드가 내세운 캐치프레이즈도 강력함이었다. 특히 모터스포츠의 강자이자 합작 제의를 거절한 페라리를 넘어서는 것이 존재의 목표처럼 여겨졌다. 출시 몇 주 후 GT 40(MarkⅠ)은 첫 번째 참가한 뉘르부르크링 (Nurburgring) 경주와 첫 출전한 르망 24시 경주에서 완주에 실패한다. 절치부심한 GT 40은 이듬해 7.0L 엔진으로 바꿔달며 비상에 시동을 걸었다. 1966년 6월 GT 40(MarkⅡ)은 마침내 페라리를 제치고 1, 2, 3위를 모두 차지하며 미국 레이싱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포드 GT 40은 V형 8기통 엔진을 장착했으며, 배기량은 모델에 따라 4.2L, 4.7L, 7L 등이 있다. 최대 속도는 4.7L 엔진의 Mark I형은 시속 264㎞, 7.0L 엔진을 단 Mark II형은 시속 320~330㎞에 달한다. 서스펜션은 더블 위시본 형식이며 네 바퀴에 장착된 11.5인치 디스크 브레이크 덕분에 제동력이 좋았다. 디자인은 기존 미국산 자동차와 달리 곡선과 곡면으로 이뤄져 유연하고 우아한 느낌을 전달했으며 미래 지향적 스타일을 자랑했다.[3]

2019년 12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포드 V 페라리"가 개봉되면서 1960년대 헨리 포드 2세가 엔초 페라리에게 모욕까지 당하고 르망 24에서 반드시 우승하여 페라리를 밟아 줄 것을 다짐하며 두 오너의 숙명적인 대결을 그렸다.[4]

각주

  1. "Henry Ford II", "wikipedia"
  2. 3snowman, 〈민주적인 리더를 실현한 헨리 포드 2세 (Henry Ford II)〉, 《네이버 블로그》, 2007-10-15
  3. 안광호, 〈포드 GT 40〉, 《네이버 지식백과》, 2011-10-21
  4. 나무와 달, 〈영화 '포드 v 페라리' 후기,엔초 페라리와 헨리 포드 2세의 숙명적인 대결〉, 《네이버 블로그》, 2019-12-14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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