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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는 1905년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학산(鶴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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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에 일본 오사카로 건너 가 막노동으로 직장생애를 시작하였으며 우연한 기회에 삼화제작소로 부르는 철공소의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자전거 부품인 볼트와 너트 제작을 배우기 시작했다. 철공소는 10여명의 작업자를 두고 있는 자그마한 기업이었으며 김철호는 입사 4년만에 회사의 지배인으로 승진하였다. 그 당시는 일본경제의 부흥기라서 사업은 잘 나갔으며 그러다가 1929년에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지면서 영향이 일본에 미쳐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고 삼화제작소도 경영을 더 못하고 1930년에 퇴직금대신 기계를 나누어주었다.  이 때 김철호는 자그마한 창고를 빌려 퇴직금으로 받은 선반을 가지고 볼트와 너트를 가공하기 시작하였으며 삼화제작소라는 상호를 달았다. 그 뒤 만주사변(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 칭한다)과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군수용 볼트와 너트의 주문이 밀려들어 회사의 규모는 3개의 공장으로 확장되고 직원도 300명이 넘을 정도로 되었다. 부품가공 외에 김철호는 자전거의 제조와 판매에도 착수하였으며 전쟁종료 후 자전거 소요의 증대에 대비를 하였다. 1941년 10월에 삼화제작소를 삼화정공㈜로 상호를 변경하였으며 그러다가 1943년에 진입하여 일본의 패색이 짙어질 때에 전쟁실패를 예감한 김철호는 사업을 정리하고 500만엔의 사업정리 대금을 손에 넣었다. 그 시절의 500만엔은 2017년 시절의 100억원을 넘는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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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에 귀국하여 서울 남대문로 5가에 자전거부품을 생산회는 회사 경성정공㈜을 설립하였으며 일본에서 사용했던 장비들도 옮겨왔다. 한동안 중고 자전거 차체의 분해 재생 및 조립을 추진하다가 늘어나는 자전거의 소요에 대비하여 1946년 1월에 영등포 공장을 준공한 뒤 자전거 개발에 착수하였다. 대부분의 부품개발에 성공을 하였으나 바퀴에 들어가는 림(rim)개발은 성공을 못하고 1949년 10월에 림 도면을 얻은 뒤 1950년에 6.25 전쟁이 폭발하면서 영등포공장은 훼손되고 개발계획도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1951년에 잔여 생산시설과 원자재를 부산으로 옮긴 뒤 부산공장을 구축하였으며 그 해 9월에 일본기술자 와다를 기술고문으로 영입하여 림개발을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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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월에 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변경하였으며 같은 해 3월에 12대 자전거 시제품을 완성하였다. 개발된 자건거의 브랜드는 삼천리호로 달았으며 전쟁으로 모든것이 침체되어 있는 시기에 큰 뉴스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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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17일 (월) 11:15 판

김철호 기아자동차 창업주
기아자동차㈜(KIA Motors)

김철호(金喆浩)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기아자동차의 창업주이다. 자전거 부품회사 경성공업을 창립하고 자전거, 모토사이클, 자동차 제조사 기아산업을 창립하였다.

생애

김철호는 1905년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학산(鶴山)이다.

1922년에 일본 오사카로 건너 가 막노동으로 직장생애를 시작하였으며 우연한 기회에 삼화제작소로 부르는 철공소의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자전거 부품인 볼트와 너트 제작을 배우기 시작했다. 철공소는 10여명의 작업자를 두고 있는 자그마한 기업이었으며 김철호는 입사 4년만에 회사의 지배인으로 승진하였다. 그 당시는 일본경제의 부흥기라서 사업은 잘 나갔으며 그러다가 1929년에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지면서 영향이 일본에 미쳐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고 삼화제작소도 경영을 더 못하고 1930년에 퇴직금대신 기계를 나누어주었다. 이 때 김철호는 자그마한 창고를 빌려 퇴직금으로 받은 선반을 가지고 볼트와 너트를 가공하기 시작하였으며 삼화제작소라는 상호를 달았다. 그 뒤 만주사변(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 칭한다)과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군수용 볼트와 너트의 주문이 밀려들어 회사의 규모는 3개의 공장으로 확장되고 직원도 300명이 넘을 정도로 되었다. 부품가공 외에 김철호는 자전거의 제조와 판매에도 착수하였으며 전쟁종료 후 자전거 소요의 증대에 대비를 하였다. 1941년 10월에 삼화제작소를 삼화정공㈜로 상호를 변경하였으며 그러다가 1943년에 진입하여 일본의 패색이 짙어질 때에 전쟁실패를 예감한 김철호는 사업을 정리하고 500만엔의 사업정리 대금을 손에 넣었다. 그 시절의 500만엔은 2017년 시절의 100억원을 넘는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었다.

1944년에 귀국하여 서울 남대문로 5가에 자전거부품을 생산회는 회사 경성정공㈜을 설립하였으며 일본에서 사용했던 장비들도 옮겨왔다. 한동안 중고 자전거 차체의 분해 재생 및 조립을 추진하다가 늘어나는 자전거의 소요에 대비하여 1946년 1월에 영등포 공장을 준공한 뒤 자전거 개발에 착수하였다. 대부분의 부품개발에 성공을 하였으나 바퀴에 들어가는 림(rim)개발은 성공을 못하고 1949년 10월에 림 도면을 얻은 뒤 1950년에 6.25 전쟁이 폭발하면서 영등포공장은 훼손되고 개발계획도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1951년에 잔여 생산시설과 원자재를 부산으로 옮긴 뒤 부산공장을 구축하였으며 그 해 9월에 일본기술자 와다를 기술고문으로 영입하여 림개발을 성공하였다.

1952년 1월에 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변경하였으며 같은 해 3월에 12대 자전거 시제품을 완성하였다. 개발된 자건거의 브랜드는 삼천리호로 달았으며 전쟁으로 모든것이 침체되어 있는 시기에 큰 뉴스로 되었다.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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