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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르'''(튀르키예어: İzmir)는 [[이스탄불]]의 남서쪽 336km, '''[[튀르키예]]'''의 3대 도시로 역사적으로는 '''스미르나'''라고 불렸다. 이즈미르는 [[에게해]]의 [[이즈미르만]]에 위치하며 [[이즈미르주]]의 주도이다. | '''이즈미르'''(튀르키예어: İzmir)는 [[이스탄불]]의 남서쪽 336km, '''[[튀르키예]]'''의 3대 도시로 역사적으로는 '''스미르나'''라고 불렸다. 이즈미르는 [[에게해]]의 [[이즈미르만]]에 위치하며 [[이즈미르주]]의 주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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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 역사 == | ||
− | 시의 북동쪽 보르노바(Bornova) 지역에서 예실로바 회위크(Yeşilova Höyük)이라는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기원전 6500~4000년 사이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에 빠르면 트로이가 설립된 시기와 비슷한 기원전 3,000년경 이곳에서도 정착지가 형성되었으며, 기원전 1,000년경에는 | + | 시의 북동쪽 보르노바(Bornova) 지역에서 예실로바 회위크(Yeşilova Höyük)이라는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기원전 6500~4000년 사이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에 빠르면 트로이가 설립된 시기와 비슷한 기원전 3,000년경 이곳에서도 정착지가 형성되었으며, 기원전 1,000년경에는 [[그리스인]]들이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즈미르는 '스미르나'라는 지명으로, 기원전 7세기경부터 도시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지중해 무역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627년 [[리디아]]와 기원전 545년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도시가 파괴되었다. |
− |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 + |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파고스(Pagos) 산 끝자락에 새로운 도시를 세웠다. 이후 도시는 재건되어 [[헬레니즘]] 말기에 [[페르가몬 왕가]]로 넘어갔다.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 왕가가 스미르나를 로마공화국에 넘겨주면서 로마로 소유권이 넘어가 번성하였다. 기원후 2세기경에는 근처의 에페수스와 함께 로마제국이 지배한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발전하였고, 178년에는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카루스 황제]]가 도시를 재건하도록 재정을 지원했다. 395년 로마제국이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열되면서 스미르나는 동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황제가 [[콘스탄티노플]]과 같은 도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점차 잊혀졌다. |
− | 1076년 대 셀주크 | + | 1076년 대 [[셀주크 왕조]]에 정복당했지만 1097년 제4차 십자군 원정단장인 존(Knights of St. John)이 도시를 되찾아 다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후 비잔틴 제국을 계승한 [[니케아제국]]에 넘어갔으나 14세기에 도시의 일부가 다시 [[투르크]]에 정복당했다. 1344년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t VI)가 스미르나의 아래쪽을 차지하면서 한동안 도시는 이슬람과 기독교계로 양분되었다가 1425년 [[오스만 제국]]이 합병되어 이슬람화되었다. 오스만 제국에 편입된 스미르나는 제국 내에서 중요한 상업 도시가 되었다. 1492년에는 스페인이 레콩키스타를 종결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하면서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이 대대적으로 들어와 정착하기도 했다. 이 시기 이즈미르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지만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이 세금을 납부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도시였다. |
− | 16세기 이후 스미르나는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오스만 제국에서 생산되는 면화를 사기 위해 프랑스, 네덜란드, | + | 16세기 이후 스미르나는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오스만 제국에서 생산되는 면화를 사기 위해 [[프랑스]], [[네덜란드]], [[베네치아]]에서 상인들이 몰려오면서 제국은 외국인들에게만 한정된 무역 조건을 내걸었다. 17세기 초 이들 나라가 영사관을 이즈미르에 파견해 면화 수입을 위한 업무를 보도록 하면서 이즈미르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17세기 말에 인구 약 9만 명의 도시로 성장했는데, 이들 중 튀르키예인은 6만여 명 정도였고 그리스인 1만 5천명, 아르메니아인 8천명, 유대인과 프랑스 및 유럽인이 6~7천명 정도를 차지했다. 19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에서는 최초로 철도가 건설되었다. |
19세기 말 항구에 토사가 쌓여 상선의 항해가 어려워지자 오스만 제국 정부는 항구로 흐르는 게디즈강(Gediz River)의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놓는 대공사를 진행하였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국제화는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20세기 초 스미르나에는 165,000명의 튀르키예인, 150,000명의 그리스인, 25,000명의 유대인, 2,500명의 아르메니아인, 20,000명의 유럽인을 포함한 외국인이 거주했다. 그리스인의 숫자가 많아지자 정체성에 위협을 느낀 오스만의 지배계급들은 도시명을 스미르나 대신 튀르키예어 이즈미르(İzmir)로 변경하였다. | 19세기 말 항구에 토사가 쌓여 상선의 항해가 어려워지자 오스만 제국 정부는 항구로 흐르는 게디즈강(Gediz River)의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놓는 대공사를 진행하였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국제화는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20세기 초 스미르나에는 165,000명의 튀르키예인, 150,000명의 그리스인, 25,000명의 유대인, 2,500명의 아르메니아인, 20,000명의 유럽인을 포함한 외국인이 거주했다. 그리스인의 숫자가 많아지자 정체성에 위협을 느낀 오스만의 지배계급들은 도시명을 스미르나 대신 튀르키예어 이즈미르(İzmir)로 변경하였다. | ||
− | 제1차 | + |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함에 따라 그리스는 이즈미르를 그리스 영토로 복속할 계획을 세우고, 1919년 5월 15일 이즈미르에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1922년까지 진행된 튀르키예와의 전쟁이 튀르키예의 승리로 끝나면서 이즈미르는 다시 오스만 제국을 승계한 튀르키예의 영토가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 직후 그리스와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다수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후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로의 자발적인 귀환과 튀르키예와의 협정으로 모두 그리스로 돌아갔다. 1923년 [[튀르키예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이즈미르는 영구히 튀르키예의 영토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즈미르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남동유럽 지휘부가 설치되어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2020년에는 에게해에서 발생한 지진의 여파로 쓰나미가 발생하여 약 1천여 명의 이즈미르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 지리 == | == 지리 == | ||
− | 이즈미르는 아나톨리아 | + | 이즈미르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 에게해(海)와 만나는 곳에 형성된 [[이즈미르만]](灣)에서 내륙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연안에 위치한 항구를 끼고 형성되어 있다. 만을 중심으로 북서쪽으로는 게디스강(Gediz river)이 만든 삼각주를 따라 평야가 펼쳐지고, 북동쪽으로 야만라르닥 국립공원(Yamanlardag Natural Park)이 위치한다. 게디즈강은 19세기 말까지 동쪽에서 항구쪽으로 흘렀으나 항구에 토사가 쌓이자 국가 차원에서 대공사를 진행하여 물줄기를 북서쪽으로 돌려 에게해로 빠져나가도록 하였다. 이즈미르의 남동쪽과 남서쪽에는 완만한 구릉지대가 위치한다. |
기후는 지중해성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습하고 서늘하다. 연평균 강수량이 711㎜에 불과하며 비는 주로 11월부터 3월 사이에 내린다. 12월~2월 사이에 월평균 100㎜ 이상이 내리며 7월과 8월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연평균 기온은 17.9℃로 상당히 높은 편이고, 7월과 8월 일평균 기온이 27℃ 이상으로 더운 편에 속하며 간혹 40℃를 넘어가기도 한다. 겨울 평균 기온은 8~10℃ 정도로 온난하여 전형적인 지중해성기후를 보인다. | 기후는 지중해성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습하고 서늘하다. 연평균 강수량이 711㎜에 불과하며 비는 주로 11월부터 3월 사이에 내린다. 12월~2월 사이에 월평균 100㎜ 이상이 내리며 7월과 8월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연평균 기온은 17.9℃로 상당히 높은 편이고, 7월과 8월 일평균 기온이 27℃ 이상으로 더운 편에 속하며 간혹 40℃를 넘어가기도 한다. 겨울 평균 기온은 8~10℃ 정도로 온난하여 전형적인 지중해성기후를 보인다. | ||
− | + | 이즈미르 광역시는 11개의 구(district)로 나뉘어 있다. 코나크 구와 서쪽의 발코바(Balcova) 구가 구시가를 형성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점차 남서쪽, 동쪽, 항구 건너편인 북서쪽 지역으로 확대되어 신시가를 형성한다. 동쪽으로는 산업지대가 위치하고 나머지 지역은 주거지역으로 개발되었다. | |
− | 시의 중심은 항구와 해변을 따라 남서쪽에 위치한 코나크(Konak) 구역이다. 이곳에는 공공기관, 금융기관, 상업시설, 편의시설 등이 위치해 있다. 코나크 구역 안에 있는 알산칵이라 부르는 구역은 이즈미르 최대의 번화가이자 역사지구로 해변을 따라 역사유산들이 위치한다. 남서쪽의 | + | 시의 중심은 항구와 해변을 따라 남서쪽에 위치한 코나크(Konak) 구역이다. 이곳에는 공공기관, 금융기관, 상업시설, 편의시설 등이 위치해 있다. 코나크 구역 안에 있는 알산칵이라 부르는 구역은 이즈미르 최대의 번화가이자 역사지구로 해변을 따라 역사유산들이 위치한다. 남서쪽의 [[발코바]]는 최근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해 이즈미르의 중심지로 편입되고 있다. 발코바에는 주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 튀르키예에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
== 경제 == | == 경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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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다섯 가지 형태의 버스 약 1,500여 대가 322개의 노선을 운행하고 있다. 버스는 전기버스(E-elektrik), 워터버스(S su), 가스 버스(H havagazı), 일반버스(O otobüs), 트롤리 버스(T troleybüs) 등으로 구분된다. | 버스는 다섯 가지 형태의 버스 약 1,500여 대가 322개의 노선을 운행하고 있다. 버스는 전기버스(E-elektrik), 워터버스(S su), 가스 버스(H havagazı), 일반버스(O otobüs), 트롤리 버스(T troleybüs) 등으로 구분된다. | ||
− | + | 남쪽 가지에미르(Gaziemir) 지역에 있는 [[아드난 멘데레스 국제공항]](Adnan Menderes International Airport)은 주로 [[그리스]] [[아테네]]나 [[이스탄불]]을 연결한다. 코나크 지역에 있는 두 개의 철도는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이다. 알산칵 터미널역은 항구와 알산칵으로 바로 연결되고, 유대인 시장인 하브라 소칵(Havra Sokak), 스미르나 아고라(Smyrna Agora), 신의 요새라고 알려진 카디페칼레(Kadifekale)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바스마네(Basmane) 역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 |
== 교육 == | == 교육 == | ||
− | 이즈미르에는 9개의 대학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 대학교는 이오니아 대학교(Ionian University)이다. 그리스 정부의 요구로 그리스의 수학자와 독일의 앨프리드 아인슈타인 등에 의해 1920년에 설립된 이오니아 대학교는 그리스-튀르키예 | + | 이즈미르에는 9개의 대학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 대학교는 [[이오니아 대학교]](Ionian University)이다. 그리스 정부의 요구로 그리스의 수학자와 독일의 [[앨프리드 아인슈타인]] 등에 의해 1920년에 설립된 이오니아 대학교는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이 발발하면서 개교가 미루어지다가 전쟁이 끝난 후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1955년 설립된 [[에게 대학교]](Ege University)와 1982년에 설립된 [[도쿠즈 에율 대학교]](Dokuz Eylül University)를 제외한 나머지 대학들은 2000년 이후에 설립된 신생 대학이다. 이즈미르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교육기관은 1854년에 설립된 [[이즈미르 아나톨리안 상업고등학교]](İzmir Anatolian Vocational High School of Commerce)이다. |
== 관광 == | == 관광 == | ||
− |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진 이즈미르는 역사에 비해 많은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가장 주목할 만한 관광지는 스미르나 아고라(Smyrna Agora)이다. 이곳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시장으로 조성된 곳이었으나 178년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지시로 다시 광장으로 재건되었다. 로마제국 시대의 대리석 열주(列柱)가 서 있어 이곳이 당시 이즈미르의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이곳에서는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상(像) 등이 발굴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폐허가 되었다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일부 공동묘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고라 남동쪽 해발 186m의 파고스(Pagos) 언덕 위에는 기원전 3세기에 축조된 카디페칼레(Kadifekale)라는 성채가 남아있는데, 이곳에서는 이즈미르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 + |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진 이즈미르는 역사에 비해 많은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가장 주목할 만한 관광지는 [[스미르나 아고라]](Smyrna Agora)이다. 이곳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시장으로 조성된 곳이었으나 178년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지시로 다시 광장으로 재건되었다. 로마제국 시대의 대리석 열주(列柱)가 서 있어 이곳이 당시 이즈미르의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이곳에서는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상(像) 등이 발굴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폐허가 되었다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일부 공동묘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고라 남동쪽 해발 186m의 파고스(Pagos) 언덕 위에는 기원전 3세기에 축조된 [[카디페칼레]](Kadifekale)라는 성채가 남아있는데, 이곳에서는 이즈미르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
− | 이즈미르 관광의 중심은 코나크 지구의 알산칵 구역이다. 이즈미르 최대의 번화가 지역이자 역사지구인 알산칵은 해변을 따라 조성된 아타튀르크(Atatürk) 거리와 거리 뒤쪽의 번화가로 구성되어 있다. 아타튀르크 거리 남쪽으로 걷다 보면 만나는 코나크 광장에는 시계탑과 얄리 사원(Yali Camii)이 서 있다. 1748년 지어진 이 사원은 색색의 타일 조각으로 장식되어 이즈미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 중 하나로 꼽힌다. | + | 이즈미르 관광의 중심은 코나크 지구의 [[알산칵]] 구역이다. 이즈미르 최대의 번화가 지역이자 역사지구인 알산칵은 해변을 따라 조성된 [[아타튀르크]](Atatürk) 거리와 거리 뒤쪽의 번화가로 구성되어 있다. 아타튀르크 거리 남쪽으로 걷다 보면 만나는 코나크 광장에는 시계탑과 [[얄리 사원]](Yali Camii)이 서 있다. 1748년 지어진 이 사원은 색색의 타일 조각으로 장식되어 이즈미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 중 하나로 꼽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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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8일 (화) 15:39 기준 최신판
이즈미르(튀르키예어: İzmir)는 이스탄불의 남서쪽 336km, 튀르키예의 3대 도시로 역사적으로는 스미르나라고 불렸다. 이즈미르는 에게해의 이즈미르만에 위치하며 이즈미르주의 주도이다.
또한 제1의 수출무역항으로 활기를 띠고 있으며 도시에는 2개의 철도역이 있으며 북쪽과 남동쪽으로부터의 철도종점이 되고 있다. 이스탄불과는 국내항공이 통하고 있으며 아테네로 연장 서비스도 하고 있다. 고대의 아고라에서 대리석의 열주(列柱),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상(像) 등이 발굴되었고, 파구스의 언덕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장(武將)이 축조한 성새가 있다. 국립도서관·에게대학 등이 있고, 호메로스의 출생지로도 알려져 있다.
개요[편집]
- 행정 단위: 튀르키예 이즈미르주 주도
- 면적: 944km²
- 인구: 2,965,900명(2019년)
- 지역어: 튀르키예어
- 시장: Tunç Soyer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www.izmir.gov.tr/
역사[편집]
시의 북동쪽 보르노바(Bornova) 지역에서 예실로바 회위크(Yeşilova Höyük)이라는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기원전 6500~4000년 사이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에 빠르면 트로이가 설립된 시기와 비슷한 기원전 3,000년경 이곳에서도 정착지가 형성되었으며, 기원전 1,000년경에는 그리스인들이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즈미르는 '스미르나'라는 지명으로, 기원전 7세기경부터 도시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지중해 무역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627년 리디아와 기원전 545년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도시가 파괴되었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파고스(Pagos) 산 끝자락에 새로운 도시를 세웠다. 이후 도시는 재건되어 헬레니즘 말기에 페르가몬 왕가로 넘어갔다.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 왕가가 스미르나를 로마공화국에 넘겨주면서 로마로 소유권이 넘어가 번성하였다. 기원후 2세기경에는 근처의 에페수스와 함께 로마제국이 지배한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발전하였고, 178년에는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카루스 황제가 도시를 재건하도록 재정을 지원했다. 395년 로마제국이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열되면서 스미르나는 동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황제가 콘스탄티노플과 같은 도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점차 잊혀졌다.
1076년 대 셀주크 왕조에 정복당했지만 1097년 제4차 십자군 원정단장인 존(Knights of St. John)이 도시를 되찾아 다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후 비잔틴 제국을 계승한 니케아제국에 넘어갔으나 14세기에 도시의 일부가 다시 투르크에 정복당했다. 1344년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t VI)가 스미르나의 아래쪽을 차지하면서 한동안 도시는 이슬람과 기독교계로 양분되었다가 1425년 오스만 제국이 합병되어 이슬람화되었다. 오스만 제국에 편입된 스미르나는 제국 내에서 중요한 상업 도시가 되었다. 1492년에는 스페인이 레콩키스타를 종결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하면서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이 대대적으로 들어와 정착하기도 했다. 이 시기 이즈미르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지만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이 세금을 납부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도시였다.
16세기 이후 스미르나는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오스만 제국에서 생산되는 면화를 사기 위해 프랑스, 네덜란드, 베네치아에서 상인들이 몰려오면서 제국은 외국인들에게만 한정된 무역 조건을 내걸었다. 17세기 초 이들 나라가 영사관을 이즈미르에 파견해 면화 수입을 위한 업무를 보도록 하면서 이즈미르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17세기 말에 인구 약 9만 명의 도시로 성장했는데, 이들 중 튀르키예인은 6만여 명 정도였고 그리스인 1만 5천명, 아르메니아인 8천명, 유대인과 프랑스 및 유럽인이 6~7천명 정도를 차지했다. 19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에서는 최초로 철도가 건설되었다.
19세기 말 항구에 토사가 쌓여 상선의 항해가 어려워지자 오스만 제국 정부는 항구로 흐르는 게디즈강(Gediz River)의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놓는 대공사를 진행하였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국제화는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20세기 초 스미르나에는 165,000명의 튀르키예인, 150,000명의 그리스인, 25,000명의 유대인, 2,500명의 아르메니아인, 20,000명의 유럽인을 포함한 외국인이 거주했다. 그리스인의 숫자가 많아지자 정체성에 위협을 느낀 오스만의 지배계급들은 도시명을 스미르나 대신 튀르키예어 이즈미르(İzmir)로 변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함에 따라 그리스는 이즈미르를 그리스 영토로 복속할 계획을 세우고, 1919년 5월 15일 이즈미르에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1922년까지 진행된 튀르키예와의 전쟁이 튀르키예의 승리로 끝나면서 이즈미르는 다시 오스만 제국을 승계한 튀르키예의 영토가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 직후 그리스와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다수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후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로의 자발적인 귀환과 튀르키예와의 협정으로 모두 그리스로 돌아갔다. 1923년 튀르키예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이즈미르는 영구히 튀르키예의 영토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즈미르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남동유럽 지휘부가 설치되어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2020년에는 에게해에서 발생한 지진의 여파로 쓰나미가 발생하여 약 1천여 명의 이즈미르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리[편집]
이즈미르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 에게해(海)와 만나는 곳에 형성된 이즈미르만(灣)에서 내륙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연안에 위치한 항구를 끼고 형성되어 있다. 만을 중심으로 북서쪽으로는 게디스강(Gediz river)이 만든 삼각주를 따라 평야가 펼쳐지고, 북동쪽으로 야만라르닥 국립공원(Yamanlardag Natural Park)이 위치한다. 게디즈강은 19세기 말까지 동쪽에서 항구쪽으로 흘렀으나 항구에 토사가 쌓이자 국가 차원에서 대공사를 진행하여 물줄기를 북서쪽으로 돌려 에게해로 빠져나가도록 하였다. 이즈미르의 남동쪽과 남서쪽에는 완만한 구릉지대가 위치한다.
기후는 지중해성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습하고 서늘하다. 연평균 강수량이 711㎜에 불과하며 비는 주로 11월부터 3월 사이에 내린다. 12월~2월 사이에 월평균 100㎜ 이상이 내리며 7월과 8월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연평균 기온은 17.9℃로 상당히 높은 편이고, 7월과 8월 일평균 기온이 27℃ 이상으로 더운 편에 속하며 간혹 40℃를 넘어가기도 한다. 겨울 평균 기온은 8~10℃ 정도로 온난하여 전형적인 지중해성기후를 보인다.
이즈미르 광역시는 11개의 구(district)로 나뉘어 있다. 코나크 구와 서쪽의 발코바(Balcova) 구가 구시가를 형성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점차 남서쪽, 동쪽, 항구 건너편인 북서쪽 지역으로 확대되어 신시가를 형성한다. 동쪽으로는 산업지대가 위치하고 나머지 지역은 주거지역으로 개발되었다.
시의 중심은 항구와 해변을 따라 남서쪽에 위치한 코나크(Konak) 구역이다. 이곳에는 공공기관, 금융기관, 상업시설, 편의시설 등이 위치해 있다. 코나크 구역 안에 있는 알산칵이라 부르는 구역은 이즈미르 최대의 번화가이자 역사지구로 해변을 따라 역사유산들이 위치한다. 남서쪽의 발코바는 최근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해 이즈미르의 중심지로 편입되고 있다. 발코바에는 주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 튀르키예에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경제[편집]
튀르키예 제1의 수출 무역항이자 2개의 자유무역단지를 가지고 있는 이즈미르는 2008년 기준 튀르키예 전체 수출의 6%와 수입의 4%를 차지한다. 자유무역단지는 Aegean Free Zone (ESBAŞ)과 메네멘 지역의 İzmir Free Zone (İZBAŞ)이 있다. 위 두 개의 자유무역단지 이외에 이즈미르에는 13 개의 산업단지, 3 개의 과학 및 기술 단지, 4 개의 국제 컨테이너 항구가 있다.
이즈미르의 산업구성에서 공업은 약 26.9%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튀르키예 공업 전체의 6.5%를 차지하고 있다. 무역과 관련된 업종이 뒤를 이어 약 20% 정도를 차지한다. 튀르키예 정부의 전체 수입에서 이즈미르가 차지하는 비중이 10% 이상에 이를 정도로 튀르키예에서 이즈미르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이즈미르의 공업은 직물, 의복, 식품, 음료, 담배, 석유화학, 가구, 플라스틱, 건축자재, 의료장비, 포장, 항공우주, 방위산업, 재생에너지, 자동차, 신발 등이 주를 이룬다. 음료산업과 담배산업은 농업과 연계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다. 석유화학 산업은 튀르키예 총 생산량의 약 25%를 차지하는데, 이즈미르는 유럽에서 7번째로 큰 정제소인 튀르키예석유정제사(Türkiye Petrol Rafinerileri A.Ş.; Tüpraş)를 포함해 4개의 석유 정제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교통[편집]
이즈미르 시내 교통은 전철, 경전철, 버스, 트램, 페리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전철은 1개 노선으로 이즈미르 북쪽에서 남쪽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즈반(İZBAN)이라고 부르는 경전철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트램은 2010년대 후반 건설된 두 개 노선을 운영하고 있는데, 하나는 항구 건너편의 카르시야카(Karşıyaka) 지역에서 운행되고 다른 하나는 코나크 지역에서 운행된다. 이즈미르 항구에서 항구 건너편으로 연결하는 페리는 전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는 것보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 많이 이용된다.
버스는 다섯 가지 형태의 버스 약 1,500여 대가 322개의 노선을 운행하고 있다. 버스는 전기버스(E-elektrik), 워터버스(S su), 가스 버스(H havagazı), 일반버스(O otobüs), 트롤리 버스(T troleybüs) 등으로 구분된다.
남쪽 가지에미르(Gaziemir) 지역에 있는 아드난 멘데레스 국제공항(Adnan Menderes International Airport)은 주로 그리스 아테네나 이스탄불을 연결한다. 코나크 지역에 있는 두 개의 철도는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이다. 알산칵 터미널역은 항구와 알산칵으로 바로 연결되고, 유대인 시장인 하브라 소칵(Havra Sokak), 스미르나 아고라(Smyrna Agora), 신의 요새라고 알려진 카디페칼레(Kadifekale)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바스마네(Basmane) 역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교육[편집]
이즈미르에는 9개의 대학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 대학교는 이오니아 대학교(Ionian University)이다. 그리스 정부의 요구로 그리스의 수학자와 독일의 앨프리드 아인슈타인 등에 의해 1920년에 설립된 이오니아 대학교는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이 발발하면서 개교가 미루어지다가 전쟁이 끝난 후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1955년 설립된 에게 대학교(Ege University)와 1982년에 설립된 도쿠즈 에율 대학교(Dokuz Eylül University)를 제외한 나머지 대학들은 2000년 이후에 설립된 신생 대학이다. 이즈미르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교육기관은 1854년에 설립된 이즈미르 아나톨리안 상업고등학교(İzmir Anatolian Vocational High School of Commerce)이다.
관광[편집]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진 이즈미르는 역사에 비해 많은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가장 주목할 만한 관광지는 스미르나 아고라(Smyrna Agora)이다. 이곳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시장으로 조성된 곳이었으나 178년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지시로 다시 광장으로 재건되었다. 로마제국 시대의 대리석 열주(列柱)가 서 있어 이곳이 당시 이즈미르의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이곳에서는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상(像) 등이 발굴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폐허가 되었다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일부 공동묘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고라 남동쪽 해발 186m의 파고스(Pagos) 언덕 위에는 기원전 3세기에 축조된 카디페칼레(Kadifekale)라는 성채가 남아있는데, 이곳에서는 이즈미르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즈미르 관광의 중심은 코나크 지구의 알산칵 구역이다. 이즈미르 최대의 번화가 지역이자 역사지구인 알산칵은 해변을 따라 조성된 아타튀르크(Atatürk) 거리와 거리 뒤쪽의 번화가로 구성되어 있다. 아타튀르크 거리 남쪽으로 걷다 보면 만나는 코나크 광장에는 시계탑과 얄리 사원(Yali Camii)이 서 있다. 1748년 지어진 이 사원은 색색의 타일 조각으로 장식되어 이즈미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 중 하나로 꼽힌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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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아나톨리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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