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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차'''(牛馬車)는 [[우차]]와 [[마차]]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옛날엔 서민들의 정서와 정감어린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으나 이젠 먼 추억 속에서 나마 더듬어 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우마차'''(牛馬車)는 [[우차]]와 [[마차]]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옛날엔 서민들의 정서와 정감어린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으나 이젠 먼 추억 속에서 나마 더듬어 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우마차와 [[자동차]]는 현대와 근대 이전을 나누는 기준이 될 만한 운송 수단이다. 기술이 아무리 불균형하게 발전하더라도 과학 기술은 비슷한 수준을 따라간다. IT 기술의 발전에 비해 자동차 기술의 차이가 아무리 더디더라도 에니악 시절의 자동차가 스마트폰 시대의 자동차를 이길 수는 없다. 슈퍼카 [[람보르기니]]는 사나운 [[소]]를 브랜드 상징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를 자동차의 동력으로 쓰지는 않는다. 최상급 소의 가죽과 엠블럼, 그것이 람보르기니가 소에게서 계승한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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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차와 [[자동차]]는 현대와 근대 이전을 나누는 기준이 될 만한 운송 수단이다. 기술이 아무리 불균형하게 발전하더라도 과학 기술은 비슷한 수준을 따라간다. IT 기술의 발전에 비해 자동차 기술의 차이가 아무리 더디더라도 에니악 시절의 자동차가 스마트폰 시대의 자동차를 이길 수는 없다. 슈퍼카 [[람보르기니]]는 사나운 [[소]]를 브랜드 상징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를 자동차의 동력으로 쓰지는 않는다. 최상급 소의 가죽과 엠블럼, 그것이 람보르기니가 소에게서 계승한 전부다.<ref>펜시브,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knowist&logNo=220242661310 한국 지형에 강하다, 소나타(우마차)]〉, 《네이버 블로그》, 2015-01-16</ref>
  
 
== 개요 ==
 
== 개요 ==

2021년 12월 3일 (금) 14:25 기준 최신판

1963년 4월 서울 거리의 소달구지. 연탄, 쌀 등 생필품을 싣고 트럭이 들어가지 못하는 작은 길까지 날랐다.
전근대적인 우마차와 벤츠 마크를 한 시골 승합 버스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중국관광우마차

우마차(牛馬車)는 우차마차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옛날엔 서민들의 정서와 정감어린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으나 이젠 먼 추억 속에서 나마 더듬어 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우마차와 자동차는 현대와 근대 이전을 나누는 기준이 될 만한 운송 수단이다. 기술이 아무리 불균형하게 발전하더라도 과학 기술은 비슷한 수준을 따라간다. IT 기술의 발전에 비해 자동차 기술의 차이가 아무리 더디더라도 에니악 시절의 자동차가 스마트폰 시대의 자동차를 이길 수는 없다. 슈퍼카 람보르기니는 사나운 를 브랜드 상징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를 자동차의 동력으로 쓰지는 않는다. 최상급 소의 가죽과 엠블럼, 그것이 람보르기니가 소에게서 계승한 전부다.[1]

개요[편집]

지금으로부터 약 70 여년전, 그러니까 소나 말이 끄는 우마차는 194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8.15 조국광복을 전후한 그 당시 시대적 교통수단으로 등장 했다. 해방과 더불어 일제 말엽에는 한 두대의 소형자동차와 마차가 오로지 교통수단으로 짐도 싣고 사람도 실어 날랐다는 것이다. 우마차가 한창 성행하기로는 일제시대 였는데 그 당시로써는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각광을 받아 왔었다. 그러나 짐은 주로 운반하는 수단으로 이용됐으며 사람은 주로 멀리가는 사람이나 환자만을 실어 날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소가 끄는 우마와, 말이 끄는 마차로 나 눌수 있는 우마차는 이곳 말씨로는 '소 구루마', '말 구루마' 라고 했다.

마차는 두 종류로 큰말이 끄는 마차와 조랑말이 끄는 작은 마차가 있었는데 대마가 끄는 것은 바퀴가 넷으로 앞에 것은 적고 뒤에 것은 큰 것으로 바퀴에 쇠를 박아 닳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작은말이 끄는 것은 바퀴가 둘 달린 것으로 주로 개인이 주인이였으며 전라도에서 들여와 운영했다고 한다.

이 마차들은 요즘 정기 화물처럼 대개 정류소나 역 근처에 상주하여 철도 화물을 취급하기 때문에 역에 나가면 볼 수가 있었다. 당시 운송수단으로 자동차도 차츰 늘어나기도 했지만 여러 운송 짐을 합해 마루보시라는 것으로 묶었다. 또 작은 말이 끄는 영업용도 조합에 가입해 운영토록 했다.

그런데 우차는 주로 농촌에서 곡식을 실어 나르는데 사용해 왔다는 것이다. 우차가 하는 일은 주로 진주를 중심으로 해서 함양과 산청, 사천 그리고 남해, 하동 등 지역의 곡식을 실어 나르는 일로 밤을 세워서 10여대씩 떼를 지워 운반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차의 소는 먼 길을 갈 때에는 짚신을 신게 했고 말은 징을 박아서 발바닥이 닳지 않도록 했다.

말은 주로 시내를 오갔고 소는 시외로 짐을 실어 운행을 했는데 특히 명절이 다가오는 추석이나 설 때에는 짐들이 많았다고 했다.

광복 후 1960년대 말까지도 우마차는 중요한 수송수단이었다. 1947년 5월 서울의 우마차는 3129대나 됐다.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합쳐 3840대였으니 우마차가 자동차보다 훨씬 많았다. 수백년 우마차 역사에서, 마지막 50여년은 우마차들에게 어려운 시절이 됐다. 아스팔트 위의 자동차들 틈바구니에서 더 힘들고 위험하게 길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느려터진 수레가 길을 막자 자동차들도 짜증이 났다. 우마차란 '아스팔트 위의 이단자' 같았다. 1967년엔 서울 충무로에 세워둔 우마차의 소가 자동차 클랙슨 소리에 놀라 1㎞를 날뛰며 경찰 사이드카와 추격전을 벌이는 바람에 도심 교통이 마비되는 사건도 있었다.

지금은 마차도 우차도 볼 수 없는 오래된 얘기지만 현대 수송수단에 밀려나 휘귀한 구경거리로만 돼 버렸다. 옛날엔 사람도 실고 짐도 실어 날랐으니 교통수단으로 뺄 수 없는 유일한 존재였으며 이젠 먼 추억 속에서 나마 더듬어 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2] [3]

각주[편집]

  1. 펜시브, 〈한국 지형에 강하다, 소나타(우마차)〉, 《네이버 블로그》, 2015-01-16
  2. 남해신문, 〈초창기, 운송수단의 대중을이룬 우마차(牛馬車)〉, 《남해신문》, 2007-10-09
  3.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9 '아스팔트 위의 이단자' 牛馬車… 경찰·황소, 1㎞ 추격전 벌이기도]〉, 《조선일보》, 2015-03-04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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