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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0년대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의 [[유럽]] 무역상들이 암바스만에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에서 유럽 본토에 정착한 최초의 영구 정착지는 1858년 영국 침례교 선교사 알프레드 사커에 의해 해방된 노예들의 안식처로 세워졌다. 이 정착지는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현재의 [[Limbe]], [[카메룬]])라고 명명되었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 활동은 무역회사와 선교사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1880년대에 아프리카 쟁탈전은 유럽 강대국들이 식민지의 주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대한 외교적 또는 군사적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서두르는 가운데 본격화되었다. 우리강 삼각주(현대 [[두알라]])에 동남쪽에 실질적인 무역센터를 세운 독일인과 [[나이지리아]]에 서쪽에 폭넓은 이해관계를 가진 영국인은 둘 다 지역 통치자들과 협정을 맺기 위해 경쟁했다. 독일의 탐험가 구스타프 | + | 1470년대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의 [[유럽]] 무역상들이 암바스만에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에서 유럽 본토에 정착한 최초의 영구 정착지는 1858년 영국 침례교 선교사 알프레드 사커에 의해 해방된 노예들의 안식처로 세워졌다. 이 정착지는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현재의 [[Limbe]], [[카메룬]])라고 명명되었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 활동은 무역회사와 선교사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1880년대에 아프리카 쟁탈전은 유럽 강대국들이 식민지의 주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대한 외교적 또는 군사적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서두르는 가운데 본격화되었다. 우리강 삼각주(현대 [[두알라]])에 동남쪽에 실질적인 무역센터를 세운 독일인과 [[나이지리아]]에 서쪽에 폭넓은 이해관계를 가진 영국인은 둘 다 지역 통치자들과 협정을 맺기 위해 경쟁했다. 독일의 탐험가 [[구스타프 나흐티갈]]은 몇몇 저명한 왕들과 주요 조약에 서명했다. 1884년 [[독일]]은 지역 동맹국들의 승리를 도우며 카메룬에서의 식민지 지위를 근본적으로 굳혔고 1887년까지 영국은 이 지역에서의 주장을 포기했다. |
− | 독일은 군사 원정에 의해 뒷받침된 지역 지도자들과의 합의를 통해 연안에 대한 통제를 계속 강화했다.독일은 수년간의 전투 끝에 1891년 | + | 독일은 군사 원정에 의해 뒷받침된 지역 지도자들과의 합의를 통해 연안에 대한 통제를 계속 강화했다. 독일은 수년간의 전투 끝에 1891년 [[부에아]]를 정복하여 1892년 [[두알라]]에서 식민지 수도를 이전하였다. 1914년까지, 독일인들은 직접 또는 지역 지도자들을 통해 현재 암바조니아에 의해 주장되고 있는 영토의 배후지까지 통제권을 확립했고, Nkambe와 같은 공동체를 정복하고 1912년에 Bamenda에 수비대를 세웠다. 독일 행정부는 현금작물 재배지 구축, 운송 및 통신 인프라 개선으로 제품과 천연자원을 항구로 신속히 들여와 유럽으로 수송하는 데 주력했다. 카메룬 노선의 험준한 지형과 암바조니아에 의해 주장된 지역 내륙의 많은 부분에 항해할 수 있는 강이 부족하여 해안 지역 밖의 식민지 활동이 제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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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르사유 조약]] 이후, 카메룬은 프랑스 위임통치령과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나뉘었습니다. 프랑스 위임통치령은 Cameroun으로 알려져 있었고, 이전 독일 영토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위임통치령은 식민지 나이지리아의 국경을 따라 길게 뻗은 땅으로, 역사적인 [[암바스만]] 보호령을 포함한 북부 카메룬과 남부 카메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영국령 카메룬으로 조직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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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주민를 관리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간접 통치를 통해 영토를 관리했다. 1953년, 런던에서 열린 회의에서 남부 카메룬 대표단은 별도의 지역으로의 권리를 요구했다. 영국은 동의했고, 남부 카메룬은 수도가 여전히 부에아에 있는 자치 지역이 되었다. 1954년 선거가 치러졌고 1954년 10월 1일 E. M. L. 엔들리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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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과 국민투표 (1961년)=== | ||
+ | [[유엔]]은 1961년 2월 11일 이 지역에서 국민들에게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는 국민투표를 조직했습니다. [[나이지리아]]와의 연합 또는 [[카메룬]]과의 연합. 세 번째 옵션인 독립은 유엔 신탁통치이사회의 영국 대표인 앤드류 코헨 경에 의해 반대되었고, 결과적으로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국민투표에서 북부 카메룬 유권자의 60%가 나이지리아와의 연합에 찬성했고, 남부 카메룬 유권자의 70%가 카메룬과의 연합을 선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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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년 10월 1일 남부 카메룬은 카메룬과 "서 카메룬"이라는 이름으로 연합했으며, 10월 1일을 독립일로 정하였다. 하지만, 남카메룬의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80%의 다수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정부에 의해 공정한 대우를 받는다고 믿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 아마두 아히조는 남부 카메룬이 천연 자원을 가지고 연합에서 이탈할 것을 우려했다. 1972년 5월 20일 프랑스령 카메룬의 일방적 국민투표에 따라 카메룬에서는 [[연방 국가]]를 [[단일 국가]]로 대체하는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고 또한 대통령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카메룬 남부는 자치권을 잃고 카메룬 공화국의 북서 지역과 남서 지역이 되었습니다. 독립 찬성 단체들은 서 카메룬 출신 의원 대다수가 헌법 개정을 정당화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남부 카메룬이 사실상 카메룬에 합병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카메룬의 정치 지도부는 헌법을 다시 바꾸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폴 비야를 총리로 임명하고 아마두 아히조의 후임자로 임명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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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년 3월 20일자 각서에서, 앵글로폰 변호사이자 카메룬 변호사 협회 회장인 퐁굼 고지 딩카는 폴 비야가 이끄는 카메룬 정부가 위헌이라고 쓰고 전 남카메룬이 암바조니아 공화국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딩카는 이듬해 1월 재판 없이 투옥되었습니다. 3년 후, 그는 나이지리아로 탈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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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부 카메룬 국가평의회=== | ||
+ | 1993년, 영어권 단체 대표들은 부에아에서 첫 번째 모든 영어권 회의(AAC1)를 소집했습니다. 이 회의는 1961년 연방을 복원하기 위한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부에아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서 1994년 바멘다에서 열린 제2회 All Anglophone Conference (AAC2)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연방 국가가 합리적인 시간 내에 복구되지 않으면 남부 카메룬이 독립을 선언한다는 "바멘다 선언"을 발표했다. AAC는 남부 카메룬 국민 회의(SCPC)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남부 카메룬 국민 회의(SCNC)를 집행 기관으로 하여 남부 카메룬 국민 회의(SCAPO)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젊은 활동가들은 1995년 5월 28일 부에아에서 남부 카메룬 청년 연맹을 결성했습니다. SCNC는 존 폰차가 이끄는 대표단을 유엔에 파견했고 1995년 6월 1일에 접수되었으며 프랑스령 카메룬의 남부 카메룬 합병에 반대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 ||
== 지리 == | == 지리 == |
2023년 5월 18일 (목) 14:4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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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바조니아( 영어: Ambazonia), 정식 명칭은 암바조니아 연방 공화국이며 흔히 암바 랜드(Amba Land)라고 불린다. 암바조니아는 국제적으로 카메룬의 자치구로 간주되는 자치주이다. 카메룬의 영어 구사 지역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분리독립 지지 독립체이다. 이 영토는 과거에 남카메룬으로 구성되었으며 카메룬 행정상 북서부주와 남서부주에 해당한다. 남카메룬은 한때 영국 관할 하의 유엔 남카메룬 신탁통치령이었으며(1922~1961년) 연방제를 조건으로 인접국에 연합함으로써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1961년 투표를 거쳐 주민들이 나이지리아 대신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카메룬에 편입하기로 결정해 편입되었다. 그러나 카메룬 정부는 연방제를 폐지하고 영어권 주민을 차별하여 분쟁이 발생하였다.
2017년, SCACUF(Southern Cameroons Ambazonia Consortium United Front)는 일방적으로 암바조니아를 독립체로 선언하였으나 카메룬 정부는 이 선언은 법적인 무게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암바조니아는 대표 없는 국가 민족 기구에 속한다.
목차
개요
- 수도: 부에아
- 면적: 42,710 km²
- 인구: 3,521,898 명 (2015년 추정)
- 공용어: 영어
- 대통령: 새뮤얼 이코메 사코(Samuel Ikome Sako)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ambagov.org/
어원 및 용어
"암바조니아"라는 용어는 영어로 암바 만으로 알려진, 우리강 하구의 지역명인 암보제스(Amboses)에서 유래되었다. 이 명칭은 1984년 폰 고르지 딩카(Fon Gorji Dinka)가 지역 내 앙글로폰 기관의 자율성 회복과 보존을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들었다.[9]
암바조니아라는 용어는 대개 분리주의 또는 독립추구파와 더 관련이 있는 반면 카메룬 정부나 유엔 등 공식 소식통들은 계속해서 '북서권'과 '남서권'(또는 때로는 '북서권'이나 '북서방'과 '남서방' 지역)을 언급하고 있다.
역사
초기 식민지화
1470년대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의 유럽 무역상들이 암바스만에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에서 유럽 본토에 정착한 최초의 영구 정착지는 1858년 영국 침례교 선교사 알프레드 사커에 의해 해방된 노예들의 안식처로 세워졌다. 이 정착지는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현재의 Limbe, 카메룬)라고 명명되었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 활동은 무역회사와 선교사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1880년대에 아프리카 쟁탈전은 유럽 강대국들이 식민지의 주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대한 외교적 또는 군사적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서두르는 가운데 본격화되었다. 우리강 삼각주(현대 두알라)에 동남쪽에 실질적인 무역센터를 세운 독일인과 나이지리아에 서쪽에 폭넓은 이해관계를 가진 영국인은 둘 다 지역 통치자들과 협정을 맺기 위해 경쟁했다. 독일의 탐험가 구스타프 나흐티갈은 몇몇 저명한 왕들과 주요 조약에 서명했다. 1884년 독일은 지역 동맹국들의 승리를 도우며 카메룬에서의 식민지 지위를 근본적으로 굳혔고 1887년까지 영국은 이 지역에서의 주장을 포기했다.
독일은 군사 원정에 의해 뒷받침된 지역 지도자들과의 합의를 통해 연안에 대한 통제를 계속 강화했다. 독일은 수년간의 전투 끝에 1891년 부에아를 정복하여 1892년 두알라에서 식민지 수도를 이전하였다. 1914년까지, 독일인들은 직접 또는 지역 지도자들을 통해 현재 암바조니아에 의해 주장되고 있는 영토의 배후지까지 통제권을 확립했고, Nkambe와 같은 공동체를 정복하고 1912년에 Bamenda에 수비대를 세웠다. 독일 행정부는 현금작물 재배지 구축, 운송 및 통신 인프라 개선으로 제품과 천연자원을 항구로 신속히 들여와 유럽으로 수송하는 데 주력했다. 카메룬 노선의 험준한 지형과 암바조니아에 의해 주장된 지역 내륙의 많은 부분에 항해할 수 있는 강이 부족하여 해안 지역 밖의 식민지 활동이 제한되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 (1914–1961)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르사유 조약 이후, 카메룬은 프랑스 위임통치령과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나뉘었습니다. 프랑스 위임통치령은 Cameroun으로 알려져 있었고, 이전 독일 영토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위임통치령은 식민지 나이지리아의 국경을 따라 길게 뻗은 땅으로, 역사적인 암바스만 보호령을 포함한 북부 카메룬과 남부 카메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영국령 카메룬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영국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주민를 관리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간접 통치를 통해 영토를 관리했다. 1953년, 런던에서 열린 회의에서 남부 카메룬 대표단은 별도의 지역으로의 권리를 요구했다. 영국은 동의했고, 남부 카메룬은 수도가 여전히 부에아에 있는 자치 지역이 되었다. 1954년 선거가 치러졌고 1954년 10월 1일 E. M. L. 엔들리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독립과 국민투표 (1961년)
유엔은 1961년 2월 11일 이 지역에서 국민들에게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는 국민투표를 조직했습니다. 나이지리아와의 연합 또는 카메룬과의 연합. 세 번째 옵션인 독립은 유엔 신탁통치이사회의 영국 대표인 앤드류 코헨 경에 의해 반대되었고, 결과적으로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국민투표에서 북부 카메룬 유권자의 60%가 나이지리아와의 연합에 찬성했고, 남부 카메룬 유권자의 70%가 카메룬과의 연합을 선택했다.
1961년 10월 1일 남부 카메룬은 카메룬과 "서 카메룬"이라는 이름으로 연합했으며, 10월 1일을 독립일로 정하였다. 하지만, 남카메룬의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80%의 다수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정부에 의해 공정한 대우를 받는다고 믿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 아마두 아히조는 남부 카메룬이 천연 자원을 가지고 연합에서 이탈할 것을 우려했다. 1972년 5월 20일 프랑스령 카메룬의 일방적 국민투표에 따라 카메룬에서는 연방 국가를 단일 국가로 대체하는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고 또한 대통령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카메룬 남부는 자치권을 잃고 카메룬 공화국의 북서 지역과 남서 지역이 되었습니다. 독립 찬성 단체들은 서 카메룬 출신 의원 대다수가 헌법 개정을 정당화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남부 카메룬이 사실상 카메룬에 합병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카메룬의 정치 지도부는 헌법을 다시 바꾸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폴 비야를 총리로 임명하고 아마두 아히조의 후임자로 임명했습니다.
1985년 3월 20일자 각서에서, 앵글로폰 변호사이자 카메룬 변호사 협회 회장인 퐁굼 고지 딩카는 폴 비야가 이끄는 카메룬 정부가 위헌이라고 쓰고 전 남카메룬이 암바조니아 공화국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딩카는 이듬해 1월 재판 없이 투옥되었습니다. 3년 후, 그는 나이지리아로 탈출했다.
남부 카메룬 국가평의회
1993년, 영어권 단체 대표들은 부에아에서 첫 번째 모든 영어권 회의(AAC1)를 소집했습니다. 이 회의는 1961년 연방을 복원하기 위한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부에아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서 1994년 바멘다에서 열린 제2회 All Anglophone Conference (AAC2)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연방 국가가 합리적인 시간 내에 복구되지 않으면 남부 카메룬이 독립을 선언한다는 "바멘다 선언"을 발표했다. AAC는 남부 카메룬 국민 회의(SCPC)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남부 카메룬 국민 회의(SCNC)를 집행 기관으로 하여 남부 카메룬 국민 회의(SCAPO)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젊은 활동가들은 1995년 5월 28일 부에아에서 남부 카메룬 청년 연맹을 결성했습니다. SCNC는 존 폰차가 이끄는 대표단을 유엔에 파견했고 1995년 6월 1일에 접수되었으며 프랑스령 카메룬의 남부 카메룬 합병에 반대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지리
아프리카 대륙의 중서부에 위치하며 기니 만과 대서양인근과 접한다. 여행객들의 수기를 보면 카메룬은 "아프리카의 미니어처"라고 묘사되는데 모든 주요 기후와 식물군이 카메룬 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 세계의 모든 주요 기후를 갖춘 아르헨티나와 비슷하다. 해안, 사막, 산악, 우림, 사바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아프리카의 지리적, 기후적 특질을 카메룬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서쪽으로는 나이지리아, 북동쪽으로는 차드, 남쪽으로는 적도기니 등과 접한다.
카메룬은 5개의 주요 지방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기후와 지리적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해안 평원은 15,150 km 정도로 뻗어 있으며 적도 인근에는 열대우림이 대부분이지만 우기와 건기가 번갈아 나타나기 때문에 많이 습하지 않다.
산맥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산 지형이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는데 카메룬 산이 4,095m 정도로 솟아 있다. 서부 지역의 고원으로 가면 강수량이 높아지는데 기후는 대체적으로 따뜻한 편이다. 카메룬 내에서도 가장 토질이 비옥하다.
주민
주민은 남부와 서부는 반투계의 팡족, 바미레케족, 바가족, 북부는 수단계의 둘족, 풀라니족 등으로 나뉜다. 민족 집단은 275개 이상으로 나뉘어 있다.
1996년 1월 18일자 헌법 1조 3항에 "공용어는 영어와 프랑스어다. 두 언어는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10개 주 가운데 2개 주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여서 영어를 공용하고, 8개주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여서 프랑스어를 공용하고 있다. 즉, 법적으로 동등하다고 명문화했다는 것이 실제에서는 역설적으로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 밖에 팡어, 풀라니어 등이 사용되고 있다
카메룬은 영연방과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카메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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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카메룬〉, 《위키백과》
같이 보기